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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약속 이수익 피는 꽃이 질 때를 약속하듯이 지는 꽃이 다시 필 때를 약속하듯이 오늘 우리 이렇게 만남도 그리하여 다시 헤어짐도 넓고 너른 이 우주공간에선 필연의 일이다. 님아,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동안 우리에게 다시 무슨 약속의 말이 필요하랴.
겨울산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여름 숲 권옥희 작 언제나 축축히 젖은 여름 숲은 싱싱한 자궁이다 오늘도 그 숲에 새 한 마리 놀다 간다 오르가슴으로 흔들리는 나무가지마다 뚝뚝 떨어지는 푸른 물!
사랑론 허형만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땐 한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 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녘 창가에 앉아 새 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 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독작獨酌 박시교 상처 없는 영혼이 세상 어디 있으랴 사람이 그리운 날 아, 미치게 그리운 날 네 생각 더 짙어지라고 혼자서 술 마신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모닥불 이재무 살진 이슬이 내리는 늦은 밤 변두리 공터에는 세상 구르다 천덕꾸러기 된 갖은 슬픔이 모여 웅성웅성 타고 있다 서로의 몸 으스러지게 껴안고 완전한 소멸 꿈꾸는 몸짓, 하늘로 높게 불꽃 피워 올리고 있다 슬픔이 크게 출렁일 때마다 한 뭉텅이씩 잘려나가는 어둠 노동 끝낸 거친 손들이 상처에 상처 포개며 쓸쓸히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