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삼존리(三尊里)의 유례柳希奮(21世)柳自新의 3子 본문
삼존리(三尊里)의 유례
柳希奮(21世)柳自新의 3子
2019-05-21 15:31:30
삼존리(三尊里)의 유례
광해군 시대 京畿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開城府 留守 巡察使 류희량(希亮 1575生)의 12世孫 柳志世 답사 수집 자료 )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삼존리(三尊里)라는 지명과 광해군 시대, 兵曹判書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류희분(柳希奮 1564生), 副提學 류희발(希發 1569生), 禮曹參判, 京畿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開城府留守 巡察使 류희량(希亮 1575生) 三兄弟에 관하여 어떠한 연관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답답하고 조바심 때문에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도 사실 이였다.
다음날 좀 더 기초적인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화성시청 문화 관광과, 화성시 문화원 등으로 전화 통화를 하여 담당자를 찾아 일부 듣고, 잘 모르는 분에게는 화성시에서 발간한 민속자료 등을 부탁하였다.
또한 이에 관련된 인터넷 포털싸이트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항행하게 되었다.
결과 아래와 같은 이런 저런 자료와 심지어는 CD가지 받아 보게 되었다.
더 자세한 것을 얻고, 듣고, 확인하고자 종원 명부, 족보 등에서 그 지역에서 2代 이상 살아오신 연로하신 宗親(柳志冕)을 찾아, 어른께 전화로 본인의 뜻을 전하고 자료 수집을 부탁하고 몇 일후 (2008.9.5) 미팅하기로 약속하고 현지에 가서 宗親(柳志冕,柳濟殷)과 그 지역에서 지내온 택시기사(柳濟殷 지인)와 함께 매봉산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매봉산 전경, 이른바 유분 텃골(구전으로 인하여 유희분의 희자를 생략하는 발음에서 유례)이였다는 곳을 답사 북동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곡식을 쓸어 담는 삼태기 모양의 깊숙하고 아늑한 곳 속에 매봉 약수터를 찾아 들어가니 약수 물이 콸콸 넘쳐 흘렀다.
바로 이곳에 병조판서,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류희분(柳希奮 1564生)선조의 집터가 있었다는 제보를 얻게 되었다.
반대로 매봉산 정상 쪽에서 탁 트인 앞쪽을 바라보면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정상 반대 넘어 아래는 송산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부 남아 있다는 토성을 확인하여 촬영하려 하였으나 숲의 녹음이 너무 울창하여 구별 확인이 어려워 포기하고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철에 다시 찾기로 하고 일행과 다음을 기약하고 술 한 잔을 들고 난후 귀경하였다.
☞ 삼존리(三尊里)〔삼존골, 삼존, 삼전동, 문산, 문산동〕
본래 남양군 수산면의 지역으로 이 곳 출신으로 조선 광해군 때의 세도 대신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류희분(柳希奮)이 그 아우 희발(希發), 희량(希亮)과 함께 벼슬이 높고 행검이 출중하여 가문이 크게 존경을 받았으므로 삼존골, 삼존, 삼존동 또는 문산, 문산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개목골(개밋골) 개묵골, 고잔, 물미를 병합하여 삼존리라 해서 수원군 송산면에 편입되었다.
☞ 삼족리(三足里)의 지명유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리(里)이다. 매봉산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예부터 서당이 많았고 문창부원군 류희분이 그 아우 희발, 희량과 함께 벼슬이 높고 행검이 출중하여 크게 존경을 받았으므로 삼존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사강리는 삼족리라고 했다. 광해군 때 세도를 떨치던 광해군 처남 유희분(柳希奮)을 당시에 삼족(三足)이라 칭했다. 병조판서를 할 때 권세가 하도 대단하여 개인 군사들을 거느리고 삼족리에 살다시피 했는데 사성(私城)을 쌓을 정도였다. 지금도 토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유희분에게는 말이 한 마리 있었는데 아침 조회 시간이 되면 울음으로 그 시간을 알려줄 정도로 총마였다. 인조반정 때는 그 말이 울지 않아서 조정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반정을 막기 위해 한성으로 가던 길에 길이 막혀 더 이상 가지 못하게 되자 유희분은 문산동(汶山洞) 자기 집으로 되돌아와 집 앞에서 칼로 말을 찔러 죽였다. 그 말 무덤이 아직도 논 가운데 남아 있다. 유희분은 문산동에 피신했다가 아우 유희발과 함께 잡혀서 사형 당했다.(김찬모 제보, 『대계』)
☞ 삼존리성(三尊里城)
송산면 삼존 1리, 사강으로부터 북동 1.2㎞ 지점에 위치한다. 응봉산(應峰山: 해발 108.5m)을 정상으로 하여 동쪽 기슭에 위치한 용포리(龍浦里) 방향의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성지이다.
성벽은 토석 혼축이며 바깥 경사도가 약한 서벽이 약 506m 남아 있다. 장대지로 짐작되는 응봉산 정상은 현재 지름 23m 정도로 원형의 평지를 이루고 있다. 응봉산 정상으로부터 동쪽으로 능선이 뻗어 나가 해발 58m의 소봉을 이루는데 이 소봉도 망대지로 사용되어진 듯하다. 조선 초기 초축되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이 성지는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의 집터라는 전설이 남아 있다. 유희분이 병조판서로 임명되어 세도가 대단하였을 때 군사들이 와서 주둔하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성내에서는 조선 시대 와편이 주로 발견된다. 축성 목적은 용포리 해안을 통하여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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