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버림받은 유배 (제2편) 본문
연속 2편
朝鮮王朝가 막을 내리면서 流配는 歷史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제 政治犯들은 멀리 외딴섬이 아닌 監獄이라는 밀폐된 곳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나라 最初의 근대식 소형소인 서대문 형무소, 이곳은 乙巳條約을 전후해 日帝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日帝는 서대문형무소에 정치사상범들을 監禁시키고 監視했습니다.
監獄의 代名詞로 기억된 서대문형무소, 이곳은 民族運動家와 獨立 運動家들에게 惡名 높았습니다.
한용운, 김구 등 민족 대표들이 고초를 겪었고, 유관순이 고문 끝에 숨진 곳도 이곳입니다.
日帝强占期, 이곳은 우리 歷史에 슬픈 空間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서대문 형무소는 그대로 남아 一般 犯罪者들과 함께 政治犯들을 수용하게 됩니다.
좌, 우익 투쟁, 민주화운동 같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남기게 됩니다.
특히 軍事政權은 반독재 민주투쟁가들을 監獄에 격리시키며 엄중히 다스렸습니다.
그렇게 現代에 와서도 流配는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形態로 이어져온 것입니다.
어둡고 외로운 외딴 流配地에서 좌절하지 않고 希望을 찾았던 流配者들, 現代의 流配者 중에도 苦痛의 時間을 希望의 時間으로 바꾼 이들이 있습니다.
생태마을이 조성되고 있는 영광 태청산, 생명평화결사 위원장 황대권은 이곳에서 野生草를 기르며 생태운동을 이끌고 있습니다.
미국 留學時節 엘리트 길을 걷고 있던 그의 人生이 바뀐 건 政權에 의해 造作된 한 事件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구미 留學生 간첩만 事件입니다.
政治的 目的을 위해 얼마든지 간첩을 만들었던 그 시절, 거짓 자백하게 했던 61회 고문은 그에게 공포와 굴욕을 안겨주었습니다.
“처음 5년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죠. 혼돈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라서 몸부림치는 그런 세월이었죠.”
분노하면서 5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주 작은 풀 한 포기, 어두운 독방에 아주 작은 생면부지들이 자신과 함께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무료함, 심심함을 이겨내기 위해 뭔가 관심거리를 찾는데 자세히 보면 작은 벌레, 먼지, 우리가 해충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 들, 창가에 피어난 풀 한포기, 이런 것들 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 들을 관찰하고 친구삼아서 놀고…….”
野生 최대한 애정은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상한 몸을 회복하기 위해 野生草를 가꾸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雜草로 밟히는 野生草에서 자신의 삶을 發見하게 됩니다.
그는 監獄 안에 화단을 만들어 풀들을 가꾸며 懲役生活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그에게 監獄은 더 이상 鬪爭의 場所가 아니라 존재를 實現하는 곳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細密하게 觀察을 하면서 기르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植物의 生態라든지 더 나아가서 生態的인 생각, 哲學, 이런 것 까지도 알게 된 거죠. 처음에는 健康 때문에 단순히 풀을 길러 먹었는데 나도 모르게 生命의 世界에 빠져들어서 생태주의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 거죠.”
野生草를 키우며 그는 생태공동체라는 이상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깊이 探究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監獄에서는 어떠한 기록도 남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로 바깥세상 사람들과 野生草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편지는 그에게 바깥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이자 사유의 기록이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사색한 결과물을 보존하려면 유일한 방법이 편지를 써서 밖으로 내보내는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野生草를 기르면서 그 과정들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린 것을 제 동생에게 편지형식으로 써서 꾸준하게 보낸 거죠.”
13년이라는 歲月이 흐르고 1998년 8월 15일 황대권은 오랜 收監生活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억울함과 분노에 차 있던 청년은 어느새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은 중년이 되었습니다.
좁게 닫힌 공간 감옥, 그는 그곳에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났습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지금의 삶, 그것은 좌절의 시간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지 않느냐, 손해를 봤다고 생각지 않느냐,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저는 진짜로 그런 생각을 출소할 당시에도 한 번도 가져보질 않았습니다.
제가 가진 어떤 철학이나 생각 때문에 그랬겠지만 저는 이미 그 안에서도 내가 당한 억울한 일에 대해서 다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안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평화의 상징이 된 그 이름 金大中, 그는 政治的 격랑 속에서 수차례 忍苦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그는 신군부에 의해 자택에서 체포됩니다.
신군부가 꾸민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이었습니다.
대중을 선동해 민중 봉기와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金大中은 국가보안법과 계엄법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됩니다.
재판에서 그는 사형확정 판결까지 받습니다.
이후 無期懲役으로 감형되기까지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時間을 보내야 했습니다.
“들어오셔서 하신 얘기가 당신이 아무리 초연하려고 해도 자꾸만 밥줄이 와서 목에 걸리는 게 성가시다. 그 얼마나 견디기 힘든 時間입니까. 그런 苦痛을 그 양반은 참아 내셨죠.”
無期懲役 減刑 후 청주 矯導所에 들어온 첫날, 그는 삭발을 하고 이불속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이 罪人이 된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김선생님께서 머리를 삭발하셔야만 입소절차를 마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렸더니 김대통령께서는 그렇게는 못한다. 소장을 당장 불러 달라. 소장을 100번 불러도 소장은 못 올 겁니다.”
그에게 주어진 空間은 한 평 남짓 한 獨房이었습니다.
1월말에 청주교도소에 들어온 그는 추위와 싸워야만 했습니다.
특히 고관절이 불편한 그에게는 더 불편한 苦痛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가장 힘들게 한건 다른 것이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家族과 주위 사람들이 苦痛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많은 분들이 그렇게 수감생활을 하는데 잘못이 있으면 나한테 있지 왜 가족들까지 이렇게 연좌제도 아닌데..이렇게 하게 하느냐. 그런 것을 가장 마음 아파하고.”
홀로된 방안에서 그는 同志들과 家族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그는 面會도 自由롭지 못했습니다.
監視가 철저해서 그가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건 한 달에 단 한번뿐이었습니다.
때문에 면회는 늘 뜨거운 상봉의 장이었습니다.
“
허가가 안돼서 일반 면회실에서 면회를 하는데 그때 이희호 여사님하고 그 아드님, 큰아들 김홍일씨 하고 둘째 아드님 김홍업씨 하고 셋째 아들 김홍걸씨 하고 아들 세분이 오셨는데 들어오자마자, 거기가 시멘트 바닥이거든요. 시멘트 바닥에서, 아버지는 가림판 안에 계시고 바깥에 가족이 면회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들 세분이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더라구요. 아버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세요. 그날이 生辰이었던 거에요.”
“마루위에 세 자식 큰절하며 새해와 생일 하례 보는 이 애끓는다. 아내여 서러워 마라. 이 자식들이 있잖소.”
監獄 안에서 그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는 건 家族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편지는 監獄이라는 갇힌 空間에서 外部와 소통 할 수 있는 唯一한 通路였습니다.
깨알같이 채운 그의 편지에는 家族에 대한 사랑이 절절이 묻어납니다.
또 그의 편지에는 政治와 歷史에 대한 哲學的 苦悶이 담겨있습니다.
편지를 통해 감옥 안에서 자신의 사유를 정리해 나갔던 것입니다.
내부에서 본인이 생각했던 사회를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 이런 것들을 밖에다 가족과 국민과 부인에게 내 보인 거죠. 그래서 獄中書信은 監獄에서의 성찰의 결과물이다.”
그는 監獄 안에서 宗敎와 만납니다.
왜 自身에게 이런 試鍊이 주어졌는지 宗敎를 통해 그 답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宗敎를 통한 성찰은 政敵들에 대한 분노를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킵니다.
감옥 안에서 그는 화해와 용서를 배웠던 것입니다.
“신에 대한 것과 용서에 대한 것과 화해에 대한 것을 깊이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거기서 나는 누구인가를 많이 생각을 하세요. 그래서 참된 용서란 게 무엇인지를 거기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이미 내가 나가면 나의 政敵들은 더 이상의 政治犯은 안하고 내가먼저 實踐해야 되겠다고 거기서 이미 決心을 하세요.”
그가 監獄 안에서 가장 몰두했던 것은 讀書, 金大中은 이 時節에 가장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차가운 監獄에서 폭넓고 깊은 讀書를 통해 希望을 찾아 나갑니다.
그에게 監獄은 이제 圖書館이 되고 哲學者의 산책로가 됩니다.
“청주교도소에서 生活하실 때에 24시간 중에 하루에 12시간 내지 14시간을 繼續 讀書를 하셨습니다. 정독을 하신 경우도 있고, 文學 書籍이라든가 哲學書籍 같은 경우는 하루에 한권씩 보시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제가 보니까 한 달에 平均 30권 이상은 보시지 않았나.”
그의 監獄生活은 讀書를 통해 의식의 지평을 넓혔던 時間이었습니다.
哲學과 歷史를 공부했고 나라에 經濟와 政治에 대한 비전을 세운 기간이었습니다.
그의 讀書와 사색은 統治哲學으로 나타납니다.
民主主義와 經濟成長, 人權問題와 복지정책, 그가 在任時節 달성한 價値들은 감옥 안에서 그려진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제3의 물결을 잇고 80년대 초반에 情報通信 國家를 구상한 일은 그의 회한을 보여줍니다.
“IT강국을 만들겠다고 거기서 구상하는 거거든요. 그리하고 나서 그것을 그런 생각을 계속 숙성시켰다가 실제로 大統領이 된 후에는 그 外換危機에도 그것을 실행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를 IT최강국으로 만들고 電子政府를 完成시키는 그런 겁니다. 그 母胎가 監獄에서 싹 텄다고 볼 수가 있죠.”
한 나라를 이끌어갈 統治哲學을 이끌어가고 平和를 배웠던 金大中의 監獄, 작지만 큰 대학, 金大中은 후에 自身의 監獄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첩첩 쌓인 어둠의 공간 流配, 그 시련을 어떤 이들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삶에서 얻은 傷處를 무늬로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流配라는 것은 復活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러나 流配의 時間을 준다는 건, 時間을 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지금 생각해도 流配의 肯定的인 측면이 있다. 개인의 苦痛이야 말할 수 없지만 그 기간을 잘 活用해서 난해한 저술을 할 수가 있고 심도 깊은 學問을 硏究할 수 있다. 아마 流配라는 말은 영원히 우리에게 긍정적인 것, 否定的인 것, 두 가지를 겸해서 우리에게 認識시켜 줄 것 아니냐.”
높은 지위에서 하루아침에 罪人이 된 流配者들, 그들은 自身을 낮추고 世上을 만납니다.
그들은 流配地에서 切磋琢磨(절차탁마)의 時間을 보냈습니다.
열정과 추죄로 유배지를 創造的 공간으로 바꿨던 것입니다.
그들은 또 當代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歷史 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고자했던 流配者들, 그들은 世俗的인 慾望을 초월해 人間的 勝利를 이뤄냈던 것입니다.
“자기를 상앗대에 가둘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인가를 해낼 수 있다. 그런데 해내는 일 그것이 자기를 풀어놓는 일이다. 자유자재의 영혼으로 자기를 승화시키는 일, 그것이 크게 자기를 성시하는 일이다.”
좁은 配所를 뚫고 나와 우주를 만났던 流配者들, 그들은 몸은 가둘 수 있었지만 靈魂까지 가둘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丁若鏞이 바닷가로 歸鄕을 오자 어린 時節에 學問에 뜻을 두었던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20년 동안 世上의 험한 길에 빠져 지내느라 많은 공부를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야 그런 겨를을 얻었다 생각하고 스스로 기뻐했다.”
登場 人物과 聯關 있는 人物情報와 行蹟은 朝鮮王朝實錄.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百科事典 등에서 拔萃
流配地生活, 賜死, 絞刑, 流配地 自然死, 放浪居士
※人物 順序는 年代로 整理
柳璥(1211~1289).柳陞(1248~1298).鄭道傳(1342~1398).柳曼殊(?~1398).
柳寬(1346~1433).柳思訥(1375~1440).柳轂(1415~1482).柳廷秀(1451~1502).
柳灌(1484~1545).柳希潛(?~? ).金淨(1486 ~?).柳光纘(?~?).
梁彭孫(1488~1545).梁山甫(1503~1557).金麟厚(1510~1560).
柳希春(1513~1577).盧守愼(1515~1590).鄭琢(1526~1605).柳希潛(?~?) .李大期(1551~1628).柳公亮(1560~1624).鄭蘊(1569~1641).李廷龜(1564~1635).柳希奮(1564~1623).柳希發(1568~1623).光海君(1575~1641).
柳希亮(1575~1628).文城郡夫人柳氏(光海君妃/ 1576~1623).
柳孝立(1579~1628).柳忠立(1582~1620).柳鼎立(1583~1630).
尹善道(1587~1671).柳仁培(1597~1675).柳益立(1596~).柳正立(1598~?).
柳命立(1600~1647).柳斗立(1601~1628).柳時立(?~?).柳英立(?~?).
柳厚立(?~?).柳中立(?~?).柳顯立(?~?).柳益善(?~?).宋時烈(1607~1689).
柳廣善(1616~1684).柳是善(1623~1685).柳重起(1629~1720).柳徽(1636~?).
柳尙運(1636~1707).金萬重(1637~1692).李沃(1641~1698).柳重茂(1652~1728).
閔昌道(1654~1725).柳鳳輝(1659~1727).李健命(1663~1722).
蔡彭胤(1669~1731).李眞儒(1669~1730).李瀷(1681~1763).趙觀彬(1691~1757).
李世福(1695~1786).李匡師(1705~1777).柳爾胄(1726~1797).柳抗(1621~1703).
昭顯世子의 두아들.柳匡國(1777~?) .李家煥(1742~1801).
趙貞喆(1751~1831).愛人홍윤애(?∼1781).李承薰(1756~1801).
金正喜(1756~1886).丁若銓(1758~1816).慧藏禪師(?~?).丁若鏞(1762~1836).
丁蘭珠 마리아(黃嗣永 처 1773~1838).黃嗣永(1775~1801).黃景漢(丁蘭珠
마리아의 子/1800~?).오상선 黃景漢의 養父(추자도에서 정난주의 2살박이 아들을 보살폈다.).草衣禪師(1785~ ?).趙熙龍(1789~1866).安肇煥(?~?).
李尙迪(1804~1865).申櫶(1810~1884).李世輔(1832~1895).崔益鉉(1833~1906).申箕善(1851~1909).池錫永(1855~1935).李在守(1877~1901).
이외 많은 流配者들의 각가지 流配生活 기록를 올리지는 못했으나 별의 별 사연에 대하여 과연 어떠했을까? 心亂할 뿐이다.
<編輯者 註>
聯關 人物 行蹟 要約整理(姓氏“柳”氏의 본관은 대부분 文化柳氏)
◎號字 性 名(호자 성 명/生沒年度 /官職/流配地)
流配에서 解配된 경우도 많았음.
◎文正 柳 璥(문정 류 경/1211~1289/大司成/흑산도 流配, 강화 移配. 哀島 解配)
본관은 문화(文化). 字는 천년(天年) 또는 장지(藏之). 祖父는 정당문학(政堂文學) 류공권(柳公權)이고, 아버지는 좌복야(左僕射) 류택(柳澤)이다.
과거에 급제해 고종 때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유천우(兪千遇)와 함께 오랫동안 정방(政房)에 있으면서 특히 최항(崔沆)의 신임을 받았다.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崔竩)가 뒤를 이어 국정을 左之右之하며 행패를 부려 民心을 잃게 되자, 1258년(고종 45) 별장 김준(金俊) 등과 모의해 최의를 죽이고 王室의 權威를 回復하였다.
최씨 무신정권을 타도한 공으로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이 되어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겸임하고 추성위사공신(推誠衛社功臣)에 봉해졌다. 柳璥의 고을 유주(儒州)는 감무현(監務縣)에서 영현(令縣)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부터 정방을 편전(便殿)에 두고 전주(銓注)를 장악해 국가의 기무(機務)를 결재하였다. 그 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고, 1259년 고종이 柳璥의 집에서 病死하였다.
1262년(원종 3) 수사도 지문하성사 태자소부(守司徒知門下省事太子少傅)가 되었고, 이듬해 수태부 참지정사 태자태보(守太傅參知政事太子太保)를 거쳐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1269년 대사성 김구(金坵) 등에게 임연(林衍)이 김준을 죽이고 공신이 된 사실을 비난했다가 이를 엿들은 환관 김경(金鏡)의 고발로 흑산도에 流配되었는데, 얼마 뒤 강화로 移配되었다.
1270년 삼별초(三別抄)가 봉기했을 때 강화도에서 탈출해 돌아와, 삼별초와 내통할 것을 두려워하던 왕이 크게 기뻐하며 후대하고 평장사 판병부사(平章事判兵部事)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파직되어 哀島에 流配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276년(충렬왕 2)첨의시랑찬성사감수국사판판도사사(僉議侍郎贊成事監修國史判版圖司事)가 되었는데, 이 때 두 번이나 무고를 당했던 김방경(金方慶)을 구하였다. 1278년 찬성사 판전리사사(贊成事判典理司事)에 올라 은퇴할 것을 청해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말과 웃음이 흡족하고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뛰어나 원부(元傅)·허공(許珙) 등이 모두 柳璥(류경)의 추천을 받은 인물이다. 다만 재물을 많이 모아 한때 삼한(三韓)의 거부로 불리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문장에 뛰어나 신종·희종·강종·고종 등 4대의 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도합 4회에 걸쳐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이존비(李尊庇)·안향(安珦)·안전(安戩)·이혼(李混) 등이 모두 문생(門生)이다.
◎貞愼 柳 陞(정신 류 승/1248~1298/都僉議參理/흑산도 海島 流配)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자는 희원(希元)이다. 아버지는 첨의중찬(僉議中贊) 류경(柳璥)이며, 어머니는 평양군부인(平壤郡夫人) 단양장씨(丹陽張氏)로 낭장(郎將) 장세의(張世儀)의 딸이다. 부인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홍진(洪縉)의 딸이다.
통례문(通禮門)에 오래 있으면서 당시 없어진 예문을 모아 조회(朝會)의 의례에 자세한 해설을 붙인 『신의(新儀)』를 편찬하였다. 1269년(원종 10) 임연(林衍)이 정치적 실권을 잡자 아버지가 흑산도로 流配되고 柳陞도 연좌되어 해도(海島)로 流配되었다. 그 이후 해배되었으며 1287년(충렬왕 13)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1291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판삼사사(判三司事) 한희유(韓希愈)와 함께 강화의 진(鎭)에 머무르면서 병란으로 피해를 입은 고을의 조세를 감면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듬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고, 1294년 직사관(直史館) 권한공(權漢功)과 함께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벼슬이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 성실함이 있었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있다. 諡號는 貞愼이다.
◎三峰 鄭道傳(삼봉 정도전/1342~1398/開國功臣/나주 백동마을 流配)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학자.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해 동료 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해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정몽주·설장수(偰長壽)
성석린(成石璘)·조준·박위(朴葳) 등과 모의해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우사(三司右使)·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兼成均大司成)이 되었다.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流配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든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해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流配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朝鮮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 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같은 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문덕곡(文德曲)」·「몽금척(蒙金尺)」·「수보록(受寶籙)」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전라·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 병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올리고 이 해 『심기리(心氣理)』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 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리고, 『감사요약(監司要約)』을 저술해 전라도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해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 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 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이방석(李芳碩)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漢高祖)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開國의 主役은 自身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노비(老弱奴婢)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공윤(公胤)의 외예 얼속(外裔孽屬)이었다.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노가(奴家)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河崙)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 얼손(孽孫)으로서, 조선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그는『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심문천답(心問天答)』(1375)·『심기리편』(1394)·『불씨잡변』(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해서 주자학의 전 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라든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社倉制)·향약(鄕約)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漢唐)의 공리적 사상(功利的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서얼의 인심 수람, 무인세력의 지위 안정, 무전농민(無田農民)의 구제 등 새 왕조 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도교·참설(讖說)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이다.
그의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 조선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주례(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또,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빌려왔다.
『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고,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한편,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 경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經濟議論)』·『감사요약(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金宗瑞)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 병법에 관한 것으로 『팔진36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진법(陣法)』 등이 있다. 의서(醫書)로는 『진맥도결(胗脈圖訣)』, 역산서(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와 『상명태을제산법(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그는 또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 納氏曲」·「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得休 柳曼殊(득휴 류만수 ?~1398/문하시랑찬성사/합포의 수졸 流配 後 解配)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중앙관 좌의정(左議政) 본관은 문화. 자는 득휴(得休). 아버지는 우부대언(右副代言) 총(總)이다. 공민왕 때 보마배행수(寶馬陪行首:왕의 행차에 수종인원을 지휘하는 관원)를 거쳐 장군이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전법판서가 되었다.
1377년(우왕 3)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이성계·임견미·변안렬 등과 함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임명되어 출전했다. 1379년 양백연(楊伯淵)의 옥송(獄訟)에 연루되어 합포의 수졸(戍卒)로 귀양 갔다. 1388년 위화도회군 때 이성계를 따른 공으로 지문하부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탈점(奪占)을 자행하고 효도를 하지 않는 등 재상의 자격이 없다고 허응(許應)에게 탄핵을 당해 파직되었다. 1389년(창왕 1) 왜구 20척이 해주에 침입해오자 절제사가 되어 이방원과 함께 출정했다. 1390년 김저(金佇)옥사사건이 일어난 뒤 우왕을 강릉으로 압송했다.
공양왕이 즉위한 뒤 공신으로 책봉되고 문하평리상의로 임명되었으며,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토지와 녹권을 받고 뒤이어 응양군상호군을 겸임했다.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으로 판개성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회군공신 1등으로 추록되고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었다. 1398년(태조 7)에 일어난 왕자의 난 때 방석(芳碩)의 편에 섰다고 해서 이방원 일파에게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夏亭 柳 寬(하정 류 관/1346~1433/右議政/文 化 流配 後 解配)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초 명은 류관(柳觀), 자는 몽사(夢思)·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 고려 명종 때 정당문학(政堂文 學) 류공권(柳公權)의 6대손이며, 삼사판관 류안 택(柳安澤)의 아들이다.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해 전리정랑(典理 正郎)·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고려 말기에 봉산군수·성균사예(成均司藝)·사헌중승(司憲中 丞)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이어 내사사인(內史舍人) 으로 왕명에 의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였다.
1397년(태조 6)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대사성을 거쳐 다음 해 형조전서를 지냈다. 1401년(태종 1) 대사헌으로서 상소해 불교를 적극 배척했고, 이어 간관을 탄핵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곧 다시 서용되어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무고를 받아서 文化에 流配되었다.
그 뒤 풀려나와 1405년 전라도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거쳐 형조판서로 병서습독제조(兵書習讀提調)를 겸했고, 1409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했으며, 이듬해『태조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그 뒤 참찬·찬성 등을 역임하고 1418년(세종 즉위년) 다시 대제학으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고, 이어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등을 거쳐 1421년 다시 대제학으로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23년 지춘추관사로 『고려사』 개수의 명을 받고,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하여 『고려사』를 수교(讎校)해 올렸다. 1425년 벼슬을 사직했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81세가 된 이듬해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다.
특히, 성품이 매우 청렴하고 청빈하였다. 한번은 장마로 집에 비가 줄줄 새자, 우산을 받쳐 들고서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문화의 정계서원(程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하정집』이 있다. 諡號는 문간(文簡)이다.
◎文肅 柳思訥(문숙 류사눌/1375~1440/漢城府尹/안악 流配 後 解配)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이행(而行). 류식(柳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류안택(柳安澤)이다. 아버지는 전농정(典農正) 류임(柳臨)이며, 어머니는 권숙(權肅)의 딸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류관(柳寬) 밑에서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고 경전에 밝았으며, 그릇이 크고 결단력이 있었다. 1393년(태조 2)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합격하여 좌정언, 이조·병조의 정랑을 지냈다.
140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이 되었다.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1409년 집의로서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불충(不忠)한 죄와 평양군 조대림(趙大臨)의 석병사(釋兵事)를 탄핵하다가 안악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1411년에 좌사간을 지내고, 이어 좌부대언이 되었다. 1416년에 지신사(知申事)로서 소합유(蘇合油)를 진상하는 데 잘못을 저질러 다시 안악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왔다.
이듬해 홍주목사·경상도도관찰사·함길도도순문사로서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그 뒤 1422년(세종 4) 강원도관찰사로 전임되고, 이듬해 경기도도관찰사로서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역임하였다.
1428년 한성부윤이 되고, 이어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0년 악학제조(樂學提調)로서 신주조회악기(新鑄朝會樂器) 및 가자(架子)를 올렸고, 박연(朴堧)과 함께 「아악보(雅樂譜)」를 완성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어 좌군총제가 되어 이듬해「용흥가(龍興歌)」를 지어올리고, 1432년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4년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서 「진작가사(嗔雀歌辭)」를 지어 올리고, 1435년 예문관대제학으로서 구악(舊樂)을 정리하였다. 맹사성(孟思誠)·박연 등과 함께 조선 초기의 악학 정비에 공로가 컸다. 諡號는 문숙(文肅)이다.
◎獨樂亭 柳轂(동락정 류 곡/1415~?/牧使/春川 관노로 전락)
1415년(태종 15)~미상.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치원(致遠)이고, 호는 독락정(獨樂亭)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거주지는 충청남도 부여이다.
증조부는 류유(柳濡)이고, 조부는 류위(柳衛)이다. 부친 류중지(柳中之)와 모친 곽종(郭悰)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은 류식(柳軾)이다. 부인은 조겸지(趙謙之)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시에서 정과 7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좌랑(佐郞) 등을 역임하였고, 세조의 정권 탈취에 가담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록되었다.
1461년(세조 7)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재직 중에, 정종(鄭悰)이라는 사람이 자신은 해탈한 성불(成佛)이라고 주장하며 고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등의 망발을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함우치(咸禹治)는 이러한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고, 아울러 류곡(柳轂)이 목사의 직분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자들을 방치하였다고 아뢰어 국문(鞠問)에 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결과 의금부(義禁府)에 투옥되었다.
이후 심문을 거쳐 형벌이 논의되었는데, 처음에는 교수형이 건의되었다가, 이후 잘못을 뉘우친 점이 감안되어 사형에서는 감면되었다. 그러나 검거를 태만히 하였다는 죄목으로, 그와 가족들은 모두 춘천(春川)의 관노로 전락하였다.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충화면(忠化面) 만지리(晩智里)에 있다.
◎國俊 柳廷秀(국준 류정수/1451~1502/司憲府 掌令/理山郡 流配 다음해 解配 卒)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국준(國俊). 류좌(柳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류상영(柳尙榮)이다. 아버지는 현감 류주(柳霔)이며, 어머니는 신계조(辛繼祖)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진사에 오르고, 148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교서부정자가 되었다. 다음해 교서관(校書館)으로 옮겨와 박사로 승진되었다. 1490년 정언·형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영안도도사(永安道都事)에 제수되어 연변읍성을 쌓는 데 진력하였다.
1494년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조정랑을 지내고, 1497년(연산군 3) 봉상시첨정을 거쳐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이 사옥(史獄)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자 여러 동료들과 분연히 항론(抗論)하였다. 왕의 분노를 사서 이산군(理山郡)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다음해 방면되어 돌아와 죽었다. 1533년(중종 28) 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忘軒 李 胄(망헌 이 주/1468~1504/司諫院 正言/진도 1504년 갑자사화 때 김굉필 등과 함께 死刑)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주지(胄之), 호는 망헌(忘軒). 좌의정 이원(李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이증(李增)이고, 아버지는 현감 이평(李泙)이며, 어머니는 허추(許樞)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8년(성종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갔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전에 궐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성품이 어질며 글을 잘하였고, 시에는 성당의 품격이 있었으며,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직언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주로 삼사(三司)에서 활약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諡號는 충원(忠元)이다.
◎燕山君(연산군/1476~1506/朝鮮 10대왕/喬桐에 流配)
조선의 제10대 왕. 재위 1494∼1506.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융(李㦕). 성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관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혹은 尹起畝)의 딸로, 폐비윤씨(廢妃尹氏)이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연산군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1494년 12월 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12년 동안 무도한 짓을 많이 하여 폐위되었다. 이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다. 따라서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재위 기간의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사평(史評)도 연산군의 일기에서는 “……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炮烙)·착흉(斮胸)·촌참(寸斬)·쇄골표풍(碎骨瓢風)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라고 되어 있을 만큼 연산군은 朝鮮朝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같은 폐주라 하더라도 光海君에 대해서는 사고(史庫)의 정비라든가 성지(城池)·병고(兵庫)의 수리, 중국에 대한 현명한 外交政策 등을 들어 肯定的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러한 肯定的 요소가 조금도 없었다.
왜인과 야인의 침입을 의식해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했다든가, 변경지방으로 사민(徙民)의 독려, 『국조보감(國朝寶鑑)』·『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던 폐정(弊政)에 비긴다면 보잘 것 없는 일인 것이다.
즉위 초에는 아직 전조(前朝)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성한 가운데 어느 정도 질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4년째부터는 드디어 패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5∼6년 동안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이 두 사화는 당대 정계의 난맥상 속에서 생겨났지만, 여기에는 연산군 개인의 성품이 많이 작용하였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된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입은 사건이다. 이 때 그렇게 많은 사류를 희생시킨 데는, 본래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해 그들의 정쟁에 이용한 점도 있었다.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다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연산군은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려고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 했다.
훈구 재상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했고, 이에 또 한 번 사화가 벌어진 것이다. 이 사화의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으로 소급되겠지만, 이 역시 연산군의 포학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사화의 결과는 참혹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 당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도 구타당해 죽었다. 그 밖에 윤필상(尹弼商)·김굉필(金宏弼)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韓明澮)·정여창(鄭汝昌)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했다.
연산군이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한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은 사실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실록 『연산군일기』에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 능력도 없는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정계와 연산군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겨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을 하는 언관도 혁파하거나 감원했다. 그 밖에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된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으로 생각되던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구간으로 바꾸었다.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류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니, 곧 중종반정이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에 있다. 이 곳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석물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靜菴 趙光祖(정암 조광조/1482~1519/大司憲/화순 능주 流配 賜藥을 받음.)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 한성 출생.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5대 손이며, 조육(趙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충손(趙衷孫)이고, 아버지는 감찰 조원강(趙元綱)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의(閔誼)의 딸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했으며, 이 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 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거나 혹은 ‘화태(禍胎)’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
이 해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제1계비)가 죽자 조정에서는 계비 책봉문제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등은 중종의 정비(正妃, 폐위된 愼氏)를 복위시킬 것과 신씨의 폐위를 주장했던 박원종(朴元宗)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는데, 이 때문에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 주장,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하여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받았다. 이것을 계기로 원로파(元老派), 즉 반정공신과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립으로 발전, 이후 己卯士禍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
그 뒤 수찬을 역임하고 곧이어 정랑이 되었다.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詞章)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있어서도 이것에만 치중했고 도학(道學)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 뒤에 이황(李滉)·이이(李珥)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놓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즉, 조선시대에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家禮)』를 지키게 되어 상례(喪禮)를 다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되지 않게 되었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사문(斯文)의 흥기를 자신의 임무로 자부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주(人主)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혁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그 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되어 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 그는 한편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안처겸(安處謙)·박훈(朴薰) 등 28인이 뽑혔으며, 이어 김정(金淨)·박상(朴尙)·이자(李耔)·김구(金絿)·기준(奇遵)·한충(韓忠) 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안배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현량과를 통해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는 실마리로 삼았다. 이들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들은 1519년(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들은 우선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희안(成希顔) 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류자광(柳子光)은 그의 척족들의 권귀(權貴)를 위해 반정했는데, 이러한 유의 반정정신은 소인들이나 꾀하는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 데 이(利)를 먼저 하고 있으므로 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함을 극력 주창하였다. 이의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李繼孟) 등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중종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2·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이 삭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훈구파 중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은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金詮),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李長坤),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고는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조광조는 김정·김구·김식·윤자임(尹自任)·박세희(朴世熹)·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처음 김정·김식·김구와 함께 그도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流配되었다.
그 뒤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李惟淸)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하여 그 해 12월 바로 사사되었다. 이 때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 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했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했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 선조 초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 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竹樹書院),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祠)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또한, 이이는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책(策)·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 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諡號는 문정(文正)이다.
◎新齋 崔山斗(신재 최산두/1483~15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양(光陽).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농중자(籠中子)·나복산인(蘿葍山人). 아버지는 한성판윤 최한영(崔漢榮)이며, 어머니는 교리 한경회(韓敬澮)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을 사숙하였다.
6세 때 글을 배우러 다니다가 하루는 비를 맞고 밤길에서 도깨비를 만나 문답을 나누었는데, 도깨비가 그를 ‘사인(舍人)’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15세 때 『통감강목(通鑑綱目)』 80권을 가지고 석굴(石窟)에 들어가서 2년간 수천 번을 읽고 나오니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글자로 보였다 한다.
18세에 상경하여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유하니 당시 사람들이‘낙중군자(洛中君子)’라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생원이 되어 25세에서 30세까지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여 도덕·문장으로 이름이 나자, 김인후(金麟厚)·류희춘(柳希春) 등이 찾아와서 글을 배웠다.
1513년(중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14년 홍문관저작, 1516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홍문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 다시 수찬이 되고 보은현감이 되었다. 승정원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할 사람 26인을 선발하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갔다.
1519년 이조정랑·장령·사인으로 승진되었으나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 풀려나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류성춘(柳成春)·윤구(尹衢)와 함께 ‘호남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재집(新齋集)』이 있다.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에 제향 되었다.
◎松菴 柳 灌(송암 류 관/1484~1545/左議政/서천으로 流配도중 온양에서 賜死)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庵). 류상영(柳尙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류주(柳霔)이다. 아버지는 장령(掌令) 류정수(柳廷秀)이며, 어머니는 박윤손(朴潤孫)의 딸이다. 1519년 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자신이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을 때 강한 반발을 보였던 사림파를 비난하고 현량과의 혁파 등을 주장했다. 그 뒤 강원도관찰사·대사간·이조참의·전라도관찰사·병조참판·우참찬·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1539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이기(李芑)가 병조판서에 임명되는 것을 반대한 일로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 이어 우찬성·좌찬성·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인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선조(1570년) 때 이준경(李浚慶) 등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忠肅(충숙)이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년 뒤에 정언(正言)이 되었고, 1513년에 지평(持平)으로 일시 경기도도사에 임명되어 진상(進上)의 전결분정(田結分定)에 따른 폐단의 개선을 건의하였다.
그 뒤 장령을 거쳐 1519년 7월에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 대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1월에 기묘사화가 발생했을 때, 사헌부 집의로서 조광조 일파가 득세할 때 심히 교만하고 방종했다고 비난하고, 현량과(賢良科)의 폐지와 그 급제자의 파방(罷榜)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광조 일파를 공격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참찬관·강원도관찰사·대사간·이조참의 등을 거쳐 1525년 12월에는 특별히 통정대부에 승진하면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 이어서 우부승지·병조참판 및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고, 예조판서·우참찬·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재직 시에는 간신인 병조판서 이기(李芑)의 비행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후일 이기의 모함을 받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우찬성·좌찬성에 올랐고 1541년 11월에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중원(中原)에서 오랑캐[㺚子]의 침입과 같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자, 중신을 파견해 축성(築城)·입거(入居) 문제의 처리와 사신 왕래에 따른 폐단 제거 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왕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 뒤 인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이기 등의 모함으로 일어난 乙巳士禍에서 윤임(尹任)·유인숙(柳仁淑) 등과 함께 삼흉(三兇)으로 몰려, 종사(宗社)를 모위(謀危)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았다.
년대별 관직은 다음과 같다(조선왕조실록에서)
1484년 성종 15년⇒출생 관지(灌之), 송암(松庵), 충숙(忠肅)⇒1507년 중종 2년 생원시(24歲) 합격, 같은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24歲)⇒1508년 중종 3년 기사관(記事官), 京畿道 道事(종5품)⇒1509년 중종 4년 정언(正言)⇒1511년 중종 6년 이조 좌랑, 조광조 일파 공격⇒1513년 중종 8년 지평⇒1513년 중종 8년 시독관, 교리⇒1515년 중종 10년 집의⇒1519년 중종 14년 동부승지⇒1519년 중종 14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1520년 중종 15년 참찬관(參贊官)⇒1521년 중종 16년 강원도 관찰사(38歲)⇒1522년 중종 17년 사간원 대사간⇒1523년 중종 18년 황해도 관찰사(40歲)⇒1525년 중종 20년 수 전라도 관찰사(守全羅道觀察使)⇒1526년 중종 21년⇒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43歲)⇒1528년 중종 23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觀察使(45歲)⇒1528년 중종 23년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 45歲)⇒1528년 중종 23년 ⇒ 우윤(右尹)⇒1529년 중종 24년 병조참판(兵曹參判 46歲)⇒ 1530년 중종 25년 특진관(特進官),첨지중추부사,(司憲府 大司憲 47歲)⇒1532년 중종 27년 겸 동지성균관사, (京畿 觀察使=49歲)⇒1533년 중종 28년 (禮曹判書 50歲)⇒1535년 중종 30년 호조 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1536년 중종 31년 형조 판서⇒1538년 중종 33년 (工曹 判書 53歲)⇒1539년 중종 34년 사헌부 대사헌, (右參贊 54歲)⇒1540년 중종 35년 (議政府 우찬성55歲)⇒1541년 중종 36년 의정부 좌찬성, 평안도 관찰사, (知事 58歲) ⇒1545년 인종 1년 (좌의정 62歲)⇒1545년 명종 즉위년 서천에 부처, 온양에서 (賜死=62歲)
◎宗伯 柳光纘(종백 류광찬/1516~1545=30歲/학생 효자/賜死 四旌門)
학계에서는 생졸년 미상으로 되어있다. 조선 중기 학생‧효자. 자는 종백(宗伯)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부친은 류관(柳灌)이고, 생부는 사도정(司䆃正) 류엄(柳渰)이다. 부인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을 때 부친 柳灌이 윤임(尹任)‧유인숙(柳仁淑) 등과 함께 종사를 모욕한 삼흉으로 몰려 귀양을 가던 중 사사되었다. 부친이 처음에 귀양을 갈 때, 양자로 입적한 아들 柳光纘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을 알고서 양자입적 문서를 파기시키게 하고, 노비는 문서에서 이름을 빼주었다. 그러자 목숨 부지를 위해서 부자지간을 파기할 수는 없다며 부자지간의 인연 끊는 일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생모한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고, 자신의 만시(輓詩)를 남겼다. 그 후 연좌에 걸려 사사를 당했는데, 사사를 당할 때 나졸이 욕설과 구타를 가하며 난폭하게 굴었지만 얼굴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자 부인 신씨 아들 류연일(柳然一)이 아버지를 몸으로 지키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노비문서에서 이름을 빼준 류관의 여종 갑(甲)이 주인 부자의 시신을 수습해서 선영의 무덤 아래 장사지내고, 초하루‧보름이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거르지 않고 성묘를 다녔으며, 두 주인의 신주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영조 때 서울 서초구(瑞草區) 방배동(方背洞)에 세워졌던 류관과 양아들 류광찬, 부인 신씨, 여종 을 기리는 문화류씨 4정문(四旌門)은 도시개발에 밀려, 1973년 경기도 안산시(安山市) 단원구(檀園區) 와동(瓦洞)에 있는 선영 아래로 옮겨졌다.
◎學圃 梁彭孫(학포 양팽손/1488~1545/縣令)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능성(綾城) 출신. 직장 양사위(梁思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양담(梁湛)이고, 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다. 어머니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증 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다.
1510년(중종 5)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또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주 01)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들이었다. 특히, 능주로 유배되어 온 조광조와는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해에 58세로 죽었다.
13세 때 송흠(宋欽)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항상 『소학』·『근사록』 등으로 처신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1630년(인조 8)김장생(金長生) 등의 청으로 능주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순천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瀟灑翁 梁山甫(소쇄옹 양산보/1503년~1557)
1503년(연산군 9)∼1557년(명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옹(瀟灑翁).
조부는 부사직(副司直) 양윤신(梁允信)이고, 부친은 창암(蒼巖) 양사원(梁泗源)이다. 모친은 신평송씨(新平宋氏)이다. 정랑(正郞) 김후(金珝)의 딸인광산김씨(光山金氏)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어려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후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1519년(중종 14) 중종이 친히 주관한 시험에서 17세의 나이로 합격하였으나,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취소되고 이를 애석히 여긴 중종이 물품을 내려 위로하였다. 그 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전라남도 담양(潭陽)으로 내려와 소쇄원(瀟灑園)을 짓고, 자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였다.
평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과 교유하였다. 조광조 사후 하서와 함께 사림(士林)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병환이 있어 1557년(명종 12) 3월 20일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河西 金麟厚(하서 김인후/1510~1560/成均館 直講/)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1544년 이황(李滉 1501年生=44歲에)·김인후(金麟厚 1510년생=35세에)·鄭惟吉 1515=32歲에)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아버지는 참봉 김령(金齡)이며, 어머니는 옥천 조씨(玉川趙氏)이다.
1519년(중종 14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531년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이황(李滉)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1544년(중종 39)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인종 1)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였다. 또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그는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1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諡號는 문정(文正)이다.
※編輯者가 기록상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退溪 李滉은 44歲, 河西 金麟厚는 35歲, 林塘 鄭惟吉은 32歲로 무려 12歲 차이로 賜暇讀書를 같이 하였었다고 추론이 되며 學問을 硏究하는데는 예나 지금이나 年齡 차이는 있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文獻에는 退溪 李滉은 科擧에는 운이 없어 여러 번 떨어졌었다고 전해진다.
◎眉巖 柳希春(미암 류희춘/1513~1577/이조참판/제주도,함경도,충청도 이배)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해남 출신. 류양수(柳陽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류공준(柳公濬)이다. 아버지는 류계린(柳桂鄰)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보(崔溥)의 딸이다. 처부(妻父)는 송준(宋駿)이며,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간이다. 김안국(金安國)·최두산(崔斗山)의 문인이다.
153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 때 김광준(金光準)·임백령(林百齡)이 윤임(尹任) 일파 제거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호응하지 않았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 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 때 국경 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한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직강·응교·교리 등을 거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했으며, 이어 장령·집의·사인·전한·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5년(선조 8) 예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해 낙향하였다.
경전에 널리 통했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시강원설서 재임 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학문을 도왔고, 선조 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류희춘에게 배웠던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였다 한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해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한 채 죽었다.
성격이 소탈해 집안 살림을 할 줄 몰랐으나,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나 학문, 정치하는 도리에 대한 투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은 남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최보(崔溥)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미암일기』·『속몽구(續蒙求)』·『역대요록(歷代要錄)』·『속휘변(續諱辨)』·『천해록(川海錄)』·『헌근록(獻芹錄)』·『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詩書釋義)』·『완심도(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이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蘇齋 盧守愼(소재 노수신/1515~1590/領議政/珍島 流配)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노숭(盧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노홍(盧鴻)이다.
1531년(중종 26)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문인이 되었다. 27세 때인 1541년(중종 36) 당대 명유(名儒)였던 이언적(李彦迪)에게 배우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543년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한 이후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1547년(명종 2)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流配기간 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書信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교하고 명확하여 사림 사이에 전해지고 암송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573년(선조 6)우의정, 1578년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으로 인해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왕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하여 마침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그는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大祥)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죄송하다고 생각하여 국상(國喪) 때와 같이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녔다. 그 뒤 직제학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신점(申點)이 주청하여 담제(禫祭)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는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다. 한편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자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경연에서 『서경』을 강론할 때에는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의 설명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보고 난 후에는 이전의 학설을 변경하여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이 있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冲菴 金淨(충암 김정)
조선전기 중앙관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자 원충(元冲)호 충암(冲菴)시호 문간(文簡)생년 미상(未詳) 졸년 미상(未詳) 중종(中宗) 본관 해주(海州)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문과] 중종(中宗) 19년(1524) 갑신(甲申) 별시(別試) 병과(丙科) 3위(7/30)[진사]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7위(37/100) [지방관] 조선후기 지방관 강원도(江原道) 강릉부사(江陵府使) 1725[을사(乙巳)] 4월 1517 [정축(丁丑)] 『은대선생안(銀臺先生案)』(규장각한국학연구원 김정(金淨) 기묘사화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된 충암(沖菴)은 기묘년(1519)에 금산(錦山)으로 流配되었다가 진도로 移配되고, 경진년(1920)에 국문을 받고 濟州에 안치되었는데, 신사년(1521)에 濟州에서 賜藥을 받고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죽었다.
◎貞簡 鄭琢(정간 정탁/1526~1605/左議政)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예천출신. 현감 정원로(鄭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정교(鄭僑)이고, 아버지는 정이충(鄭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柳希潛(류희잠/?~?/ 예빈시 부정/中宗朝 陰仕/大丞公 20世/忠景公派) 우리 文化柳氏 賢宗 모두가 他 姓氏에 대하여 족보에 대하여 대화할 경우 자부심을 가지고 대응하게 되는 嘉靖譜 발간의 최초 협조자이며, 사헌부장령 정수(司憲府掌令 廷秀)의 손이요, 감찰 환(監察 渙)의 아들로 일찍이 문음으로 출사하여 남부주부(南部主簿)·의흥(의흥)·구성현감(龜城縣監)을 거쳐 사복시첨정(司僕시僉正)으로 재임 중 명종(明宗) 즉위 乙巳(1545)에 사화(士禍)가 일어나 숙부(叔父) 좌의정 송암 관(左議政 松庵 灌)께서 피화(被禍)됨에 이에 연좌되어 의성(義城)으로 유배(流配) 되었다.
적소(謫所)에서 쓸쓸하고 일이 없으므로 날마다 보도(譜圖)를 대하여 오로지 증정(證正)에 열중하는데 궁벽한 시골이라 상의할 사람이 없고 때때로 오고 가는 손님과 전임(轉任)하는 수령(守令)이 간혹 지나가면 공께서 반드시 족보(族譜)에 언급(言及)하여 그 모(某)의 후손됨을 알면 계파(系派)를 바르게 정리화된 하나를 들어 둘을 증명하고, 다섯을 들치어 열을 알아 빠진 것을 보충하기 십여년의 오랜 세월을 지내었다.
당시 中門祗侯使公派 승지 류혼(承旨 柳渾=大丞公19世)·참의 류잠(參議 柳潛=大丞公19世) 兄弟가 公이 族譜를 편찬한다는 소문을 듣고 협조하던 차, 마침 류지선(柳智善)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하여 경상관찰사 정언각(慶尙觀察使 鄭彦慤)과 상의하여 발간하려고 하였으나 그러나 명종(明宗) 9년 甲寅(1554)에 흉년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공께서 이본(二本)을 손수 써서 일본(一本)은 참의 류잠(參義 柳潛)에게 보내어 후일 인쇄(印刷)하게 하고, 일본은 공이 소장하여 자손들에게 전하였다. 그 후 항재 정종영(恒齋 鄭宗榮)이 경상관찰사(慶常觀察使)로 왔는데 역시 류씨(柳氏)의 외손(外孫)으로서 이 수초본(手抄本)을 보고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 전라도관찰사 남궁 침(全羅道觀察使 南宮 沈)과 충청도관찰사 류 잠(忠淸道觀察使 柳 潛)에게 서신을 보내어 간행할 것을 통고하고, 대승공(大丞公)의 내외후손(內外後孫)으로 삼도(三道)에 재임 중인 수령(守令) 및 도사(都事)·판관(判官)·찰방(察訪)·병사(兵使)·수사(水使)에 이르기까지 계파(系派)의 친소(親疎)외 내외척(內外戚)의 원근(遠近)을 막론하고 각기 형편대로 희사(喜捨)를 받았다. 이에 호응한 수가 무려 191인이었다.
그리고 경상도(慶尙道) 40여 고을에서 48명의 각수(刻手)를 동원하여 착수한지 수 개월만에 완간(完刊)을 보게 되니 때는 을축(乙丑) 4월로서 족보를 편찬하기 24년만에 완성된 바 이것이 『嘉靖譜』 10권이다.
특히 이 사업에 공의 2子 융(瀜)이 음식 공봉(供奉)에서부터 갖가지 주선을 다하고 발문(跋文)을 지어 부쳤다.
배위 나주 주씨(羅州朱氏)는 판관 맹운(判官 孟雲)의 따님으로서 3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충(沖)·융(瀜)·풍(灃)이며, 사위는 군수 이충량(郡守 李忠樑)·참봉 변 순(參奉 邊 循)·김원경(金元慶)이다.
공의 묘소는 원래 고양 원당(高揚 元塘)에 계셨으나 실전(失傳)하고, 자손은 충청북도(忠淸北道)에 대부분 살고 있다. ※ 嘉靖譜序跋
◎雪壑 李大期(설학 이대기/1551~1628/함양군수)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임중(任重), 호는 설학(雪壑). 경상남도 초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출신. 조식(曺植)을 사사하였다.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장(倡義將) 정인홍(鄭仁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다.
1599년(선조 32) 형조정랑, 이듬해 영덕현령, 1608년 청풍군수·함양군수 등을 지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초계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령지(白翎志)』·『설학수문(雪壑謏聞)』이 있다.
◎彦明 柳公亮(언명 류공량/1560~1624/지충주부사/중도 부처 참수)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언명(彦明), 호는 하담(荷潭). 류희정(柳希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류용심(柳用諶)이다. 아버지는 류익(柳益)이며, 어머니는 이아령(利阿令) 이영손(李永孫)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6년 병조정랑을 시작으로 정언·지평·철산군수·평양서윤·호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쳤다.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을 때에는 무능하다고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호군으로 동지사(同知事)가 되어 참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좌부승지·형조참판·경상감사를 거쳐 황해병사로 있을 때, 봉산군수 신율(申慄)이 도둑을 잡아오자 이를 조정에 보내어 문초하였다. 그 결과 문관 김직재(金直哉)가 황혁(黃赫)과 모의해 진릉군(晉陵君)을 추대하려 했다고 자백함에 따라, 적정(賊情)을 잘 살펴 포획했다고 공신에 책봉되고 초자(超資)되어 지중추부사를 겸직하게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강변칠우(江邊七友: 박응서·서양갑·심우영·이경준·박치인·박치의·허홍인 등 7명의 서자들이 소양강가에 無倫堂을 지어놓고, 시를 짓거나 술을 마시던 모임 이름)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내통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임금으로 세우려 했다는 죄목으로, 친국(親鞫)받을 때 지의금부사로 추관(推官)이 되었다.
1619년 일소회시시관(一所會試試官)으로 시관 유대건(兪大建)·이정원(李挺元)·강수(姜燧)에게 사정(私情)을 못하도록 하자, 도리어 이들로부터 참소되어 사정을 행했다고 탄핵받기도 하였다. 또한 서궁을 폐출하도록 상소하기도 하고 폐출할 때에 참석도 하였다. 인조가 즉위한 뒤 역모자의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중도 부처되었다가, 이괄(李适)의 난이 발생하자 연루자로 지목되어 참수되었다.
1627년(인조 5)이괄의 난 때 피죄인(被罪人) 중 억울하게 죽은 자가 분명한 사람을 신원하라는 교지에 따라 관작이 복위되었다.
◎桐溪 鄭蘊(동계 정 온/1569~1641/吏曹參判/)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별제 정옥견(鄭玉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정숙(鄭淑)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유명(鄭惟明)이다.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1601년(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 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 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德辨錄)』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반성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하였다. 또 폐세자(廢世子)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 공(仁城君珙)의 옥사에 대해 전은설을 주장, 공신들을 견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려서부터 당시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인홍(鄭仁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전수받았다.
1607년(선조 40) 정인홍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의혹을 일으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를 탄핵하다가 처벌을 받자 정인홍을 위해 변호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 때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두고 비록 의견이 달랐지만 정인홍에 대한 의리는 변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격화된 당쟁 속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은 남인으로 처신했고, 정인홍이 역적으로 심하게 몰리면서 정구(鄭逑)를 사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현실대응 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것은 영창대군 옥사 때의 상소나 대청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 후기 숭명배청사상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金尙憲)보다 크게 추앙받지 못한 것은 색목(色目)이 노론이 아니었는데 연유한다. 허목(許穆)·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滉)-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諡號는 문간(文簡)이다.
◎朝鮮 14대 宣祖 作
撫劍中宵氣吐虹/한밤에 칼 어루만지니 호기가 무지개를 토해라
壯心曾欲奠吾東/웅장한 마음은 우리 동방을 안정시키고자 했더니
如今事業邯鄲步/이제껏 그 사업은 한단의 걸음
回首西風恨不窮/가을 바람에 고개 돌리니 한스럽기 그지없네
시격(詩格)이 노련하고 건장하여 시인에 못지않았는데, 어찌 그 이듬해 변고 있을 줄을 알았으리오.
동궁(東宮)이 또한 임금 되기 전에 시[詞藻]에 뜻을 두어 고서(古書)를 많이 모았다. 언젠가 삼청동시(三淸洞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사(進士) 유희발(柳希發)의 궤 속에 있다기에 그에게 삼가 청하여 읽어보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華南 柳希奮(화남 류희분 1564~1623)
예조좌랑, 정언, 응교, 직제학, 대사간, 형조참판, 병조판서관련사건임진왜란,
할아버지는 공조판서 류잠(柳潛)이다. 아버지는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류자신(柳自新)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남행(南行)으로 진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익찬으로 세자를 호종하였다.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조좌랑이 되고, 1599년 수찬 재임 때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했다가 민몽룡(閔夢龍)의 논척으로 파직되었다.
1601년 세자시강원문학에 등용되었고, 이듬 해 응교 겸 교서관교리로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역대 실록의 재간행에 참여하였다. 정언·이조좌랑·사서·직강 등을 거쳐 1603년 사옹원정(司饔院正), 다음 해 응교·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전한, 1607년 사성, 이듬 해 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왕의 처남으로 일문이 요직에 나갔다. 예조참판 때 이이첨(李爾瞻) 등과 함께 소북의 유영경(柳永慶) 일파를 탄핵해 숙청하였다. 그 뒤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대북에 가담해 정권을 좌우하며, 대사간·도승지 및 이조·병조·형조의 참판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시인 권필(權韠)을 무고해 流配시켰고, 앞서 임해군(臨海君)·영창대군(永昌大君)·능창대군(綾昌大君) 등을 무고해 죽이는 데 가담한 공으로 익사공신(翼社功臣) 1등에 책봉되어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병조판서로서 이이첨·박승종(朴承宗) 등과 삼자동맹을 맺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위해 대북에 속한 언관·유생들을 동원, 폐모론을 일으켰다. 이 해 11월 다시 반대파를 물리치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주 01)에 유폐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관료·유생들을 투옥, 유배당하게 하는 등 횡포를 자행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을 당하였다.
이이첨·정인홍 등과 대북을 영도할 때는 외척 세력을 대표해 정권을 농단했고, 한 때는 이이첨·한찬남(韓纘男) 등과 권력을 다투면서 서로 반목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이이첨·정인홍보다는 한 등급 낮추어 죄가 다스려졌다.
◎삼창시(三昌詩) <성호사설에서>
광해조에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유희분(柳希奮)은 중궁(中宮)의 오빠였고,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 박승종(朴承宗)은 폐세자빈(廢世子嬪)의 조부였는데, 광창군(廣昌君) 이이첨(李爾瞻)과는 수화(水火)보다도 심한 구적(仇敵) 사이였으니, 당시에 삼창(三昌)이라 일컬었다.
하루는 세 사람이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서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기로 굳은 맹세를 하려고 하는데,
이이첨은 시에서,
봄을 찾는 즐거운 일 바빠서가 아니라 / 不是尋春樂事忙
다만 서로 모여 심장을 의탁하려는 것이오 / 只要相會託心腸
매화 역시 우리들 의사를 알아채고 / 梅花亦解吾人意
좋은 날을 먼저 가려 암향을 보내주네 / 先占天和送暗香
라고 하였고,
박승종은 시에서,
열흘을 서로 찾아 아흐레가 바빴어라 / 十日相尋九日忙
지난날의 쌓인 심사 얼마나 애태웠나 / 向來懷抱幾回腸
찬 매화 여윈 대는 청표는 한가지라 / 梅寒竹瘦同淸標
향기로운 궁중 술에 모두 함께 취해 보세 / 盡醉芳樽內醞香
라고 하였고,
유희분은 시에서,
한ㆍ망이 다르다고 행여나 말을 마소 / 憑君休道異閒忙
철석 같은 심장을 더욱더 굳히자구나 / 但願彌堅鐵石腸
복사꽃 붉고 오얏꽃 흰 건 도무지 상관 않고 / 李白桃紅都不管
향기로운 성명을 늦도록 보전하세 / 歲寒期保姓名香
하였다. 그러나 세력과 지위가 서로 기울자, 마침내 그 화합을 보전하지 못하고 패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도 승종만은 죄도 가벼웠을 뿐더러 죽으면서도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가상하다 할 만하며, 그 시 역시 유희분ㆍ이이첨에 비하면 낫다고 보겠다.
◎月沙 李廷龜(월사 이정구 1564~1635)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성징, 본관은 연안. 조선전기 학자이자 바둑의 대가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5대 손으로 태어났다. 모친이 해산할 때 범이 문밖에 와 엎드려 있다가 선생이 태어난 뒤에야 돌아갔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하면서 군자(君子)가 태어나 문명(文明)을 밝힐 상징이라고 여겼다. 선조 23년(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몽진을 떠나기 전날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위해 숙직을 하던 장인 예조판서 권극지가 급서하여 몽진길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급히 장인의 장례를 치르고 가묘를 쓴 뒤 처자와 자신의 부친, 장모, 처제를 데리고 왕을 쫓아 따라갔다.
명나라 송응창의 요청으로 경서(經書)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 후에도 자주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며 말벗이 되었다. 그가 명에 갔을 때, 그곳 문인들의 요청으로 100여 장의 기행문을 모아 《조선 기행록》이란 책을 만들었다.
1598년 명나라 찬화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한다'는 무고를 올려 파란이 일었다. 당시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조정에서는 정승인 유성룡 등 동인들을 사신으로 보내려 했으나 사태수습에 자신이 없던 유성룡은 이를 고사했다. 이에 서인인 백사 이항복이 정사, 젊은 이정구는 부사, 서기관으로 한호(한석봉)이 뽑혀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월사의 문장력은 이때 빛을 발하는데 정응태의 모함에 맞서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정응태를 파직시켰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모시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로 모시었고, 화의하자는 의견에 반대하였다. 신흠, 장유, 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음에도 삶은 검소하고 질박했다고 전해진다.
이정귀는 제술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宣祖實錄』 권105, 31년 10월 12일 (甲子), 내(이항복) 생각으로는 현재 작문을 잘하는 사람으로 이정구보다 나은 자가 없다. 그의 글을 보건데 마음 속에 있는 뜻을 남김없이 표현하는데 곡진하고 간절하며 함축성이 있고 우아 장중하니, 이는 참으로 글을 잘 짓는 선비이다.
그에 대한 몇 가지 사례로 선조 26년 11월 2일(1593)에 명으로 보내는 글이 중요하여, 제술 문관중 하나로 이정귀가 초계되었다. 『宣祖實錄』 권44, 26년 11월 2일 (壬子), 글 잘하는 사람들이 함께 의논해서 초계, 술작을 전담케 함으로써 사명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초계한 제술 문관은 신광필, 이노, 정경세, 신흠, 황신, 이정귀, 이준, 안대진, 이춘영, 유몽인이다.
또한 선조 32년 10월 2일에는 이정귀의 관직이 어전통사로 나오는데, 『宣祖實錄』 권121, 33년 1월 5일 (庚戌),
중국어 실력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정귀의 이력은 대명외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로 부각되었으며, 명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나, 각종 주본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재능이 빛을 발하던 것이 선조 31년(1598년)에 있었던 정응태 문제였다.
정응태가 조선의 실정을 모르고 멋대로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훗날 조선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지적하는 말을 하였다. 그 이유는 본인이 요동을 조자해보니 기름진 땅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조선이 왜노를 불러 군사를 일으켜 함께 천조를 침략함으로써 요하 동쪽을 탈취하여 고구려의 옛 지역을 회복하려 하였다고 임진왜란의 발생경위를 설명하였다. 조선이 이전부터 취해오던 일본과의 교린정책을 알지 못해 왜와 무역하고 쌀과 콩을 주고받으며, 웅천, 동래, 울산에 왜인들이 항상 거주하여, 사이가 좋아서 왜적을 동원해 옛 땅을 회복하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宣祖實錄』 권102, 31년 7월 4일 (丁酉), ; 『宣祖實錄』 권104, 31년 9월 21일 (庚戌),
이에 이정귀가 정응태의 주본에 관한 주문을 만드는데, 정응태의 말이 잘못된 사리임을 판단하고, 신숙주 때부터 이어진 조선과 일본의 외교방식을 설명하고, 참으로 조선이 일본과 명을 치려한다면 7년간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으로 논박하는 글을 만들었다. 『宣祖實錄』 권105, 31년 10월 21일(癸酉),
그리고 이항복과 같이 진주사로 파견되어, 중국 내부에서 조성된 조선에 대한 불신여론을 다시 바꾸고 오는데 성공한다. 『宣祖實錄』 권112, 32년 (윤)4월 13일(辛卯),
정응태 사건 이후 어전통사가 되어 대명외교에 있어 적임자가 되어 선조 32년 (윤)9월 26일에 광해군 세자책봉 주청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에도 외교정책에 참여했으나, 광해 5년 김제남 옥사에 연루되고, 『光海君日記[중초본]』 권66, 5년 5월 17일(甲戌),
광해 9년 11월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를 논의할 때 예매한 입장을 보이는 것, 『光海君日記[중초본]』 권121, 9년 11월 25일 (甲戌),
정청하여 폐모론을 주창할 때 끝까지 정청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光海君日記[중초본]』 권123, 10년 1월 4일(甲子),
대북세력들의 주요 목적이 되었다.
이정귀를 비롯한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을 치죄해야 한다는 상소가 계속 되었으나, 광해 10년 (윤)4월 15일 중국의 도사(都司)가 왜 사은사는 오지 않느냐며, 정응태 사건처럼 왜적과 소식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다시 의심하였다. 『光海君日記[중초본]』 권127, 10년 (윤)4월 15일(癸酉),
그리고 광해 10년 (윤) 4월 23일에 강홍립을 도원수로 출병한 군대가 심하에서 패배하고 강홍립이 포로가 되었다. 『光海君日記[중초본]』 권138, 11년 3월 12일 (乙未),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의심과 명분에 입각한 징병 논리가 더욱 강해졌다. 광해 10년 11월 10일 천추사 이흥주 등이 서광계와 장지발이 올린 주본의 내용을 보면 조선이 노추에게 고분고분하게 회답하고, 폐백이 서로 왕래하며 노추가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다는 표현을 하였으며, 이러한 사정 때문에 노추가 마음 놓고 요동을 공격하고, 본국의 내지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은 왜국에게 망한 나라를 살린 것이니, 조선의 힘을 쓰지 않으면 큰 실책이며, 문치로써 나약한 조선을 본인이 직접 찾아가, 감호하여 중국과 관계를 공고히하고, 노추와 생겨나는 관계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군사적인 부분에서는 조선을 강하게 하여 군사계책을 논의하고 차츰 전투와 수비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지발은 지금 조선에서 1만을 징발해 직접 훈련시켜 사용해야 하는데, 노추가 조선을 위협하여 우호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어 조선의 군신들이 두려움에 떨며 자신을 보전하기에 바쁘니 태연히 몰래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그렇게 된다면 남쪽 바다까지 적들의 배가 들어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光海君日記[중초본]』 권145, 11년 10월 3일 (壬子),
이러한 인식은 서광계나, 장지발의 경우가 특수한 것이 아니라 구경(九卿)이 회의하여 황상에게 올린 글도 이와 같다고 비변사가 회계하였다. 『光海君日記[중초본]』 권145, 11년 10월 3일 (壬子),
이들의 주장은 조선에 입장에서 처음에 보낸 원병의 수가 1만 이상이었는데, 『光海君日記[중초본]』 권130, 10년 7월 4일 (庚寅), 평안도 포수가 1천 명, 전라도 포수가 1천 명, 충청도 포수가 1천 명, 황해도 포수가 5백 명입니다. 사수(射手)는 3천 5백 명인데, 평안도 사수가 1천 5백 명, 전라도 사수가 5백 명, 충청도 사수가 5백 명, 황해도 사수가 1천 명입니다. 살수(殺手)는 3천 명인데, 평안도 살수가 1천 명, 전라도 살수가 1천 명, 충청도 살수가 5백 명, 황해도 살수가 5백 명입니다. 이상을 통틀어 1만 명입니다.
그것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명으로부터 파견되는 감호는 이전에 조선과 명의 관계에 있었던 균형을 깨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때 이정귀는 폐모에 대한 처벌을 도성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복귀되어 사신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光海君日記[중초본]』 권145, 11년 10월 3일 (壬子),
진주사로 복귀한 이정귀가 비밀로 올린 차자에는 지금이 상황이 안타깝고 분하지만 현재 중국에 만연하게 퍼진 조선에 대한 의심이 중국에 명신이라 불리는 서광계에 의해 조성되어 많은 대신들이 그 뜻을 같이하고 있어 장지발이나 서광계의 의견에 직접 부딪히는 것보다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핵심을 잡았고, 군사작전에서도 직접 참여보다 국경에 군사를 배치해 명과 함께 양면에서 대치하는 것이 노추로 하여금 섯부른 공격이 불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에 따른 군량에 대한 계책도 세세하게 준비하였는데, 호남, 호서에서 군량미를 가지고 오는 것보다 요동 광영이 풍년이 잦은 지역이라는 것을 이용해 호남, 호서의 군량미를 팔고, 하사받은 은 1만 냥을 의주로 보내 중강에서 쌀을 사면 3~4배의 이익을 취할 수 있으며 운송걱정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역을 허락 받기위해 위 계획을 말하면 중국 쪽에서도 노추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로 인지해 당연히 무역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光海君日記[중초본]』 권145, 11년 10월 13일 (壬戌),
이러한 대처가 있었기에 중국에 방문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황제의 졸기와 칙서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로써 서광계를 비롯한 그 일파의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바둑을 좋아했는데 바둑을 두며 시를 쓴 좋은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월사가 친구와 바둑을 두고 있는데 어떤 중이 시를 받으러 왔다가 대국이 계속되자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기다렸다. 월사는 밤늦게야 바둑을 마치고 그 중에게 아래의 시를 써줬다.
사방이 탁 트인 바람 부는 처마 밑에 한낮이 더디 가네 귤 속의 진짜 즐거움은 바둑 한판뿐이라네 신선이 바둑 한판 두는 동안 인간세상에서는 도끼자루 썩는다는데 뜰아래 구경하는 스님아 그대는 누구인가?
坦腹風簷午景遲 橘中眞樂一枰棋 人間歲月柯應爛 庭下山僧爾是誰 坦腹
배를 드러냈다는 뜻으로 중국 명필 왕희지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 여기서는 툭 트였다는 의미이다.
귤중락: 신선들이 귤 속에서 바둑을 뒀다는‘유괴록’의 고사에 유래한 말.
부인 안동 권씨 역시 평생을 베옷만 입고 산 현숙한 여인이었다. 어느 날 정명공주(선조임금의 딸)의 집에서 신부를 맞아들이는데, 나라에서 공주의 집을 빛나게 하기위해 모든 재상 부인들을 잔치에 참석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재상집 부녀자들은 부귀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복장에 값비싼 패물들을 차고 휘황찬란하게 잔치에 참석했다. 한데 이날 가장 뒤늦게 한 늙은 부인이 허술한 가마에서 내리는데 무명 베저고리에 무명치마를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농촌여인의 모습이었다.
여러 부녀자들은 그 노부인을 보고 “저런 촌 늙은이가 어찌하여 이런 자리에 나오나.”하고 의아해하며 업신여겼다.
그 늙은 부인이 뜰에 올라오자 정명공주는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 부축하여 극진히 맞아들여 제일 상석에 앉히고 공손하게 대접하는 것이었다.
잔칫상이 들어온 후 그 늙은 부인이 맨 먼저 일어나 작별을 고하니 공주는 “해가 아직 멀었으니 더 노시다 가시지요.”하고 만류했다.
이에 부인이 대답했다. “저희 집 대감은 ‘약원도제조’로 새벽에 입궐하셨고, 큰 아들은 이조판서로 정원에 나가있고, 둘째아들은 승지로 임직하여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것인즉, 늙은 제가 돌아가서 저녁식사를 차려 보내야 하므로 부득이 일찍 돌아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재상집 부녀자들이 비로소 그 늙은 부인이 월사의 부인임을 알고 자신들의 차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큰아들 이명한, 큰손자 이일상과 더불어 조선 최초의 3대 대제학이라는 문형의 길을 텃다. 이정구의 후손들은 조선 말기까지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무수히 배출한 명문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버지 : 이계(李啓)
어머니 : 현감(縣監) 광주(光州) 김표(金彪)의 딸 부인 : 안동 권씨, 예조판서 권극지의 딸 장남 : 이명한
며느리 : 정부인 반남 박씨 - 박동량의 딸 장손 : 이일상
자부 : 전주 이씨 - 이성구의 딸
손자 : 이가상(李嘉相)
자부 : 안정 나씨 - 나만갑의 딸
손자 : 이만상(李萬相)
손자 : 이단상(李端相)
손녀 : 서문상(徐文尙)의 처
차남 : 이소한(李昭漢)
장녀 : 홍영의 처 외손자 : 홍주원
외손자부 : 정명공주 -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
차녀 : 사인(士人) 정현원(鄭玄源)의 처
◎軔草 柳希發 (인초 류희발 1568∼1623) 본관 문화(文化)재령군수, 안산군수, 지평,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이조참의 아버지는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류자신(柳自新)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일찍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해 1605년(선조 38) 세자익위사사어로 세자를 보필하고, 이듬 해 재령군수로 부임하였다. 군수로 재직 중이던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광해군의 처남인데다 당시 조카 류효립(柳孝立: 柳希鏗의 아들)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해 논란이 일었다.
1610년(광해군 2) 안산군수로 옮겼다가 정언·문학·지평 등을 역임한 뒤, 이듬 해 홍문관부교리·사헌부헌납·예조정랑·사헌부지평을 거쳐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조정랑 의망(擬望: 3인의 후보자를 왕에게 추천함)시 4품의 위치였기에 낭천(郎薦: 전랑의 추천)이 막혔으나 외척세력에 영합한 정량 이후(李厚)의 적극 천거로 제수되었고, 류씨 자제들이 차례로 전당에 의망되어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1612년(광해 4) 직강 때 권필(權韠)의 詩 내용을 문제 삼은 무고로 流配케 하였다. 1615년(광해 7)에는 光海君 생모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追崇)하기 위해 설치한 존숭도감(尊崇都監)의 낭청으로 일하였다.
그 뒤 전한·응교·직제학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이조참의 때 이이첨(李爾瞻) 등이 적극 발의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가담하였다.
그 뒤 동지의금부사 때 이이첨 등과 함께 허균(許筠)의 심복들이 남대문에 격문을 붙여 역모를 도모했다는 이유로 정적 허균(許筠)을 능지처참케하였다. 그 뒤 사포서제조, 겸동지경연을 역임하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형 류희분(柳希奮)과 함께 주살(誅殺)되었으며, 자손들은 圍籬安置되었다.
柳希發과 兄 柳希奮 모두 光海君 폐비 류씨의 형제로서, 형은 소북인데 반해 류희발은 대북이어서 서로 사이가 나빴다. 그러나 임해군(臨海君)·영창군(永昌君)·진릉군(晉陵君)·능창군(綾昌君)의 화가 모두 이들의 모의 때문이었다 한다.
형이 눈먼 아들의 혼사를 구했으나 모두 허락지 않았는데, 한사덕(韓師德)이 권세가인 형과의 결탁을 위해 형의 집안에 딸을 보냈다가 인조반정 후 탄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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