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버림받은 유배 (제4편) 본문
연속 4편
◎仲剛 李健命(중강 이건명/1663~1722)
조선 후기의 문신.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이수록(李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민서(李敏敍)이며, 어머니는 정승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수찬(修撰)·교리·이조정랑·응교(應敎)·사간을 역임하였다.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17년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했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痿症)주 01)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주 02)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주 03)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했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 정권 하에서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
◎柳是善(文昌府院君 柳希奮의 孫 上疎)
柳希奮의 孫子 是善의 疎
○ 숙종 정사년(1677)에 유희분의 손자 시선(是善)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의 조부 죄인 희분은 광해군의 혼란한 때를 당하여서, 왕실의 인척으로 벼슬이 높은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지 못한 죄는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폐모론을 주장한 역적 이첨의 무리와 동일하게 주벌을 받고 적몰하는 법률을 시행한 것은 실로 지극히 원통한 점이 있어, 당대의 공론도 슬프고 가련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적신(賊臣) 이첨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여 악한 무리를 사주하고 초야에 있는 무리를 유인하고 협박해서, 다투어 폐모론을 주장하게 하였으므로 간악한 도당과 반역의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 찼습니다. 신의 조부 희분은 당시에 국가의 권력과 조정의 논의에 간여하지 못하였으나. 지위가 왕비의 친척에 속하므로 폐모(廢母)하려는 간악한 꾀를 은연중에 저지하고, 흉악한 논의를 주장하는 세력을 암암리에 막았기 때문에 이첨과는 서로 맞서서 항쟁하여 원수와 같았습니다. 신의 조부 희분이 저 기자헌(奇自獻)이 백관을 모아 수의(收議)하는데 참여하지 않자, ‘수의(收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몸이 인척으로 있으면서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는 것이다.’는 죄안을 만들어 이것이 흉악한 무리들의 상소에 여러 번 나왔던 것입니다. 이첨 등이 몰래 포도대장을 사주하여 나례(儺禮)때를 틈타서 비밀리 불측한 짓을 꾀하여 화란의 기미가 장차 임박하게 되었을 때, 신의 조부는 병조(兵曹)를 맡은 몸으로서 드디어 죽음도 돌보지 않고 계책을 내어서 광해에게 고하지도 않고 사사로이 장수와 군사들에게 분부하여 서궁(西宮)을 호위하였고, 이 때문에 이첨 등의 흉악한 꾀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첨은 또 궁중의 측근을 매수하고 유혹해서 혹 대비에게 공어(供御)하는 것을 줄이기도 하고, 혹 떡에 독약을 넣는 등 간악한 꾀와 해괴한 책략이 끝이 없었으나, 신의 조부가 그 사이에서 움직이며 그 기미를 살펴서, 이첨 등의 악독한 술수를 끝내 행할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인조(仁祖)께서 천명을 받아 인륜을 바르게 하시고 공(功)과 죄를 크게 밝히셔서, 흉악한 모략을 꾀한 자는 베고 충의(忠義)로운 자는 표창하면서 신의 조부 희분의 서궁(西宮)을 보호한 공은 살펴주지 않으시고 다만 광해군의 인척이라는 연고로써, 모후(母后)를 모해한 흉측하고 반역한 도당들과 동일하게 무거운 형벌에 처하였으니, 이 어찌 지극히 원통한 일이 아니겠으며, 자손 된 자가 꼭 그 억울함을 씻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반정 후에 그 죄를 논할 때에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죄인 유희분은 사류(士類)를 해치거나 조정을 혼탁하게 한 일이 전혀 없으니, 사형까지 받을 죄가 못 된다.’ 하였고, 양사의 신하들도 모두 ‘죄인 희분의 죄는 강상(綱常)을 범하지는 않았다.’고 말하였으며, 고(故) 우찬성 이덕형(李德泂)은 당시에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소를 올려 변명하여 주기를, ‘죄인 희분의 자전(慈殿) 대비를 보호한 일은 신명(神明)이 증명할 것이니, 간악한 역적 이첨과 비유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하니, 인조께서 ‘공론을 기다려서 처리하겠다.’ 고 전교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당시의 공론도 대강 알 수가 있으며, 반정(反正)의 공신들도 역시 원통하다고 말하였으나, 광해군의 인척이라 하여 끝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온 나라 사람이 함께 슬프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더구나 신의 아비 명립(命立)은 인조 15년에 이미 석방되었고, 효종 6년에는 직첩(職牒)을 돌려받았으니, 전후의 공론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황급히 부르짖고 애걸하게 아뢰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北谷 李眞儒(북곡 이진유/1669~1730/大司成/외딴 지역에 流配 안치되었다가 중앙에 압 송되어 문초를 받던 중 獄死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진(士珍), 호는 북곡(北谷). 이경직(李景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영(李正英)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대성(李大成)이며, 어머니는 홍만용(洪萬容)의 딸이다. 이만성(李晩成)에게 입양되었다.
1707년(숙종 3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검열에 등용되었다가 그뒤 교리(敎理)·수찬을 지냈다. 1716년 소론으로서『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과 발문에서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을 비난한 필자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삭출(削黜)되었다.
1721년(경종 1) 정언에 기용되고, 이듬해에 사간으로서 세제(世弟)주 01)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건의한 노론의 4대신을 탄핵하여 이들을 제거하였으며, 이어 김일경(金一鏡) 등과 함께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숙청하였다.
경종 때에는 이조참의·부제학·좌부빈객·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24년 경종이 죽자 이조참판이 되어 고부 겸 주청사(告訃兼奏請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노론이 등용되자 중앙에서 아주 먼 외딴 지역에 안치되었다가 중앙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중 옥사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작품으로 「망일사은비(望日思恩碑)」·「명위관임제비(明委官林濟碑)」의 비문을 남겼다.
◎希菴 蔡彭胤(희암 채팽윤/1669~1731/副提學)
본관 평강(平康)저작 대화사중창비, 대흥사사적비, 희암집, 소대풍요경력부제학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은와(恩窩). 채충연(蔡忠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채진후(蔡振後)이고, 아버지는 현감 채시상(蔡時祥)이다. 어머니는 권흥익(權興益)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진사가 되고, 1689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지낸 뒤,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주 01)하였다. 그 때 숙종의 명에 따라 오칠언(五七言)·십운율시(十韻律詩)를 지어 후일 나라를 빛낼 인재라는 찬사와 함께 사온(賜醞)의 영예를 입었다.
그 뒤에도 호당(湖堂)에 선임된 자들과 은대(銀臺)주 02)에 나아가 시부를 지어 포상을 받았다. 그가 궐내에 노닐 때면 언제나 숙종이 보낸 내시가 뒤 따라다니며 그가 읊은 시를 몰래 베껴 바로 숙종에게 올리도록 할 만큼 시명(詩名)을 날렸다.
1691년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거쳐 1694년 정언(正言)에 있으면서 홍문록(弘文錄)주 03)에 올랐으나,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출향(文廟黜享)을 주장한 이현령(李玄齡)의 상소에 참여했다 하여 삭제되었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나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며 지내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로 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도승지·대사간을 거쳐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감시장시관(柑試掌試官)이 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이 전날 양현(兩賢)의 모독과 관계되었다 하여 응거(應擧)를 거부, 교체되는 파란을 겪었으며, 1730년(영조 6)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렸고,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해남의 두륜산(頭輪山)대화사중창비(大花寺重創碑)와 대흥사사적비(大興寺事蹟碑)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 『희암집』 29권이 있고, 『소대풍요(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星湖 李瀷(성호 이익/1681~1763/사간원 대사간/유배지 운산에서 사망)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팔대조 이계손(李繼孫)이 성종 때에 벼슬이 병조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이 때부터 여주 이씨로서 가통이 섰다.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좌찬성, 할아버지 이지안(李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은 사헌부대사헌에서 사간원대사간으로 환임(還任)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 때 진주목사로 좌천, 다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1681년 10월 18일에 아버지 이하진과 후부인 권씨(權氏) 사이에 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682년 6월에 전부인 이씨(李氏) 사이의 3남 2녀와 후부인 권씨 사이의 2남 1녀를 남긴 채 55세를 일기로 유배지 운산에서 사망하였다.
아버지를 여읜 뒤에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와, 어머니 권씨 슬하에서 자라나 조고다질(早孤多疾)의 생애가 시작된 셈이다.
첨성리는 행정적으로 경기도 광주부에 속해 광주 첨성리로 일컬어졌으나, 이른바 비래지(飛來地)로서 광주에서 과천·금천을 거쳐 있는 안산군내에 있어 흔히 안산의 첨성리로 불려졌다.
10세가 되어서도 글을 배울 수 없으리만큼 병약했으나, 더 자라서는 둘째 형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웠다. 25세 되던 1705년 증광시에 응했으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았던 탓으로 회시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다음해 9월에 둘째 형 이잠은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17, 18차의 형신(刑訊) 끝에 47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이익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과거에 응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첨성리에 칩거하였다. 바다에 가까운 그 고장에는 성호(星湖)라는 호수가 있어서 이익의 호도 여기에 연유되었고, 그 고장에 있던 이익의 전장(田莊)도 성호장(星湖莊)이라 일컬어졌다.
이익은 여기에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 사령(使令)과 기승(騎乘)을 이어, 재야의 선비로서 일평생 은둔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셋째 형 이서(李漵)와 사촌형 이진(李溍)과 종유(從遊)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35세 되던 1715년에 어머니 권씨마저 여의어 복상(服喪)을 마치고서는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宗家)로 돌려보냈으나, 형제자질에 대한 은애(恩愛)가 지극해 실제로는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47세 되던 해에 조정에서 이익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가세는 퇴락되었고, 이익 부자의 오랜 질역(疾疫)은 쇠운을 재촉하였다. 64, 65세 때에 이미 뒷잔등의 좌달(痤疸)이 악화되었고, 70세가 넘어서는 일찍이 괴과(魁科)로 급제해 예조정랑·만경현감을 지낸 외아들 이맹휴(李孟休)마저 오랜 병고 끝에 죽었으며, 70세 후반기에 들어서는 반신불수가 되어 기거마저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 동안에 가산도 탕진되어 만년에는 한 명의 고노(雇奴) 외에는 송곳을 세울 만한 전지도 없으리만큼 영락하였다. 83세 되던 1763년(영조 39) 조정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이익에게 첨지중추부사로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 해 12월 17일 오랜 병고 끝에 죽었다.
유해는 선영이 있는 첨성리(현재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에 안장되었다.
타고난 성품은 기신(氣神)이 정랑(精朗)하고 성모(性貌)는 준결(峻潔)하며, 눈에는 정기가 넘쳐흘러서 영채(英彩)가 사람을 쏘는 듯했다 한다. 또한 조그마한 긍지도 가진 듯싶지 않으면서도 중정간중(中正簡重)해 하나의 덕성을 갖추어, 집안에서는 법을 세워 예절을 엄히 하고 사치한 생활을 금했다 한다.
문인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인품에 대해 “강의독실(剛毅篤實) 이것은 선생의 뜻이요, 정대광명(正大光明) 이것은 선생의 덕이요, 선생의 학은 정심굉박(精深宏博)하고, 그 기상은 화풍경운(化風景雲)이요, 그 금회(襟懷)는 추월빙호(秋月氷壺)이다.”라고 술회하였다.
이익의 학문은 일문에 이어져서 준재가 많이 배출되어, 아들 이맹휴는 『예론설경(禮論說經)』·『춘관지(春官志)』·『접왜고(接倭考)』 등을 남기고, 손자 이구환(李九煥)은 조업(祖業)을 계승하였다.
그 위에 종자(從子) 이병휴(李秉休)는 예학으로, 종손(從孫) 이중환(李重煥)은 인문지리로 이름을 남기고, 이가환(李家煥)은 정조의 은총을 받아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천주교를 신앙해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 때에 옥사하였다.
문인으로 두드러진 자로는 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안정복·권철신(權哲身) 등이 있어, 당대의 학해(學海)를 이루어 그 흐름을 정약용(丁若鏞)에게까지 미쳤다.
증조부 이상의는 일찍이 이수광(李睟光)과 더불어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온 일이 있고, 이익의 딸이 이수광의 후손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이익·이수광의 양가는 세교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익이 첨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이하진이 1678년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에 청제(淸帝)의 궤사은(饋賜銀)으로 사 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 때문이었다.
이익은 선현의 언행을 샅샅이 기억하고 일찍부터 시나 문을 잘 외었다.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 등을 읽고, 다시 『심경(心經)』·『역경』·『서경』·『시경』을 거쳐 정주(程朱)와 이황(李滉)의 학문을 탐독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익의 학문은 이렇듯 철저한 유교적 기반 위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여러 경서(經書)에 대한 질서(疾書)를 지어내고, 주자(朱子)의 『근사록』 처럼 이황의 언행록인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저(撰著)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허목(許穆)·윤휴(尹鑴) 등의 뒤를 이어 주자에게로만 치우치는 폐풍에서 벗어나 수사학적(洙泗學的)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의 부흥을 기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부흥이 아니라 부흥이 바로 혁신을 의미하였다.
이익은 이이(李珥)와 유형원(柳馨遠)의 학풍을 존숭해, 당시의 사회실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무(世務)에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재구(材具)의 준비가 있어야만 실학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사장(詞章)·예론(禮論)에 치우치거나 주자의 집전(集傳)·장구(章句)에만 구애되는 풍조, 그리고 종래의 주자학적으로 경화된 신분관·직업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한편,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의 사회변동과 당시의 세계관·역사의식의 확대 및 심화에 따른 자기 나라에 대한 재인식·자각에서 일어난 조선 후기 실학의 기본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이익은 불씨(佛氏)의 이단(異端), 술가(術家)의 소기(小技)와 패관잡설(稗官雜說) 등 세가지 서(書)를 혐오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학(西學)에는 학문적인 관심을 기울여, 천문(天文)·역산(曆算)·지리학과 천주교서 등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널리 열람하고 만국전도(萬國全圖)·시원경(視遠鏡)·서양화(西洋畵) 등 서양문물에 직접 접하면서 세계관·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이익으로 하여금 종래 중국 중심의 화이관(華夷觀)·성인관(聖人觀)에서 탈피해 보다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시야를 지닐 수 있게끔 하였다. 정통적인 유학자이면서도 노불(老佛)의 학이나 새로 전래된 천주교와 같은 이른바 이단에 대해서도 윤리면에서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설이나 천주교의 천당지옥설·야소부활설(耶蘇復活說)과 같은 것은 황탄한 설로 간주하였다. 종래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도 사물의 존재원리로서의 이(理)는 인정하지만 존재 자체는 기(氣)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해, 현실적으로는 존재 원리보다도 기로서의 인간존재를 보다 더 중시하였다.
문학론(文學論)도 경세실용적(經世實用的)인 면에서 교화와 풍간(諷諫)에 보다 더 많은 의의를 부여하고, 화론(畵論)과 같이 형(形)·신(神)의 일치로써 ‘사진(寫眞)’, 즉 전신사영(傳神寫影)의 원칙을 중시하였다.
시에 있어서도 마치 두보(杜甫)나 이태백(李太白) 같이 색태(色態)를 돋보이게 하여 사실적이면서도 회화적인 묘사를 귀히 여기는 한편, 황새·소리개·지렁이·개미와 같은 동물의 생태를 빌린 우의적·풍자적인 시작과 현실적인 좌절·갈등에서 오는 은일적(隱逸的)인 시작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단잡설과 훈고(訓詁)·사부(詞賦)는 물론, 이기(理氣)의 논의도 당시 사회의 현실문제에 비추어서는 아무런 실익을 주지 못한다고 보고, 그러한 의미에서 예학이나 이기설 같은 것이 당시에는 긴요하고 절실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익의 학문·사상은 내외적으로 당시 조선이 처한 사회현실로 보아 경세실용이라는 면에 중점이 두어졌다.
역사인식도 종래의 주관적이고 의리·시비위주의 인식태도를 벗어나 객관적이며 비판적·실증적인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믿었다. 문헌에 대한 충분한 고증과 비판이 없이 주관적인 억측이나 요량으로 역사를 서술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시조난생설(始祖卵生說)이나 신인하강설(神人下降說)과 같은 설화를 그대로 사실시(史實視)하지 않았다. 또 역사서술에 있어서 권선·징악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 같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통찰, 서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가(史家)가 무엇보다도 먼저 파악할 것은 ‘시세(時勢)’, 즉 역사적 추세이며, 시비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익은 이른바 붕당은 쟁투(爭鬪)에서 일어나고 쟁투는 이해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이해가 절실하면 그 당이 뿌리 깊고, 이해가 오래 계속되면 그 당이 견고하게 되는 것은 세(勢)가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이(利)가 하나이고 사람이 둘이면 두 당이 생기고 이가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네 당이 생기게 마련이나, 이(利)는 고정되어 변함이 없는데 사람만 더욱 늘어나면 십붕팔당(十朋八黨)으로 분열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양반사회와 관료제도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즉, 양반들은 실제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관작을 얻는 일만을 목표로 삼으니, 그것은 관작을 얻어 관리가 되면 부(富)가 따르기 때문이라 하였다. 따라서, 양반이라면 누구나 먼저 관리되기에만 열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정된 정치기구 밑에서 관리등용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반면에 양반의 신분은 세습되므로 그들의 수는 늘어나서 관리후보자의 수도 늘어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례적인 과거시험에 합격되는 사람의 수만을 따져도 한정된 관리자리에 그들 모두 수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령 한 사람이 관직을 차지하는 평균연한을 30년으로 본다면, 그 30년 동안에 정기적인 과거합격자의 수만도 2, 330명이나 되며, 그 밖의 여러 가지 명목의 특별시험의 합격자까지 합치면 그 수가 훨씬 많아진다.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관직수는 500을 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관직수는 하나인데 이를 뚫고 들어가려는 사람이 8, 9명에 이르므로 분붕분당(分朋分黨)이 될 수밖에 없는 형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질화된 붕당의 폐풍을 고치고 나라와 사회를 안정시키려면, 한편으로 인재등용의 방법을 고쳐서 문벌이나 당색 중심의 정치를 타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기구를 개편하는 동시에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사치한 소비생활을 하는 양반들의 생리를 고쳐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익은 인간은 타고나면서부터 관작이나 부귀를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은 아니며, 천자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애초에 빈천하기는 매양 일반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양반들도 무위도식하지 말고 농토로 돌아가 생산에 직접 종사하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을 주장하였다. 양반이라도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상업에 종사해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실제로 생업에 종사하는 선비 중에서 효제(孝悌)의 정신을 갖춘 인재를 뽑아서 관리로 등용하자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문장이나 시가에만 힘쓰지 말고 사회를 바로잡아 나갈 수 있는 실효성 있는 학문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인재 등용도 종래의 과거제도 외에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 채용하는 공거제(貢擧制)를 아울러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과거의 정기시험도 5년에 한번씩 시행하고, 해마다 시험과목을 한 가지씩 나누어 실시해 응시자가 과목마다 착실한 준비를 갖출 수 있게 하고, 조선의 역사도 과목으로 부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신분제적인 사회구조를 고쳐서 점진적으로나마 노비의 신분을 해방시켜 사농의 합일과 같이 양천(良賤)의 합일도 아울러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이익의 사상은 근대적인 직업관·신분관에 접근했음을 나타내 준다.
이익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덕치(德治)로써 인정(仁政)을 베풀어야 한다는 본원적인 유교정치를 지표로 삼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17세기 이래 조선의 사회변동에 따른 개혁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이익 역시 인정에는 형정(刑政)을 병행해야 한다 하였다. 이익의 전통적인 죄형법정주의사상에도 일반예방주의적인 사상이 들어 있어, 기강이 해이해진 당시의 세태에서는 오히려 형정을 준엄하게 하여 법의 위엄이 이(利)보다 무거워야 한다고 보았다.
이익은 엄정한 법의 실시는 강자·다수자 또는 지교(智巧)와 횡포에 대해 약자·소수자·겁자(怯者)·우자(愚者)를 보호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하였다.
이익은 정치기강을 바로잡는 동시에 통치기구의 개편도 구상하였다. 즉, 중앙에서는 먼저 허구화된 의정부의 기능을 복구시켜 최고통섭자(最高統攝者)로서의 의정기능을 활성화해야 하고, 간직(諫職)을 확대시켜 언로를 넓혀야 한다고 믿었다.
인사행정도 그것을 총관하는 총장사(總章司)를 새로 설치해 문벌존중의 폐습을 버리고, 조상의 신분·경력에 관계없이 개인능력본위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수급계획에 의한 인사조처와 시보제(試補制)의 채용, 문무병용(文武竝用), 관리고과에서의 비례평가제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지방제에 있어서는 충역(忠逆)에 따른 주현승강제(州縣陞降制)와 이에 따른 도명개변제(道名改變制)를 폐기하고, 군현을 합리적으로 개편하고 감사(監司)의 직권을 강화, 견제하도록 하였다.
병제도 병역의무 대상자의 철저한 파악, 군포남징(軍布濫徵)의 폐단시정, 납포대립(納布代立)·고역제(雇役制)의 폐지, 병농일치·양천합일(良賤合一)의 향병제(鄕兵制)의 확립 등 이를테면, 근대적인 징병제에 한 걸음 접근된 구상을 하였다. 군비상(軍備上)으로도 성지수축(城池修築), 군량확보, 군기(軍器)의 제조 및 공급의 원활, 도로확장, 병거(兵車)의 개발, 군마(軍馬)의 사양(飼養) 등 군정(軍政) 전반에 걸친 쇄신을 강조하였다.
이익은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인적(隣敵)에 대한 경계·무비(武備)의 긴요성과 시의(時宜)에 적절한 외교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군비강화의 목적은 문자 그대로 국가방위에 있으며 외국침공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대교린의 외교책을 적절히 쓰는 것은 목적이 환맹(歡盟)에 있지 심복(心服)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또한 남왜북로(南倭北虜)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며, 당시에 이미 청나라의 쇠망과 일본의 조선침구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예상하기도 하였다.
이익은 재부(財富)의 원천을 토지에 두었으므로 전지(田地)에서 힘써 일하는 데에서 재부가 창출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정치에 있어서도 전제(田制)에 관한 올바른 시책을 가장 중요한 분야로 생각하였다. 토지는 원천적으로 공전(公田), 즉 국유이며, 토지 사점(私占)의 확대는 사회악의 원천으로 여겼다.
관료에게 작위와 전지·녹봉을 주는 것은 그들 자신의 관작을 귀히 여겨서 생계를 부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실제로 관작에는 부가 겸해 따르므로 관작에 대한 욕구가 더욱 치열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권세가에 의한 대토지점유와 재부의 독점은 인간의 덕성마저 해치게 하여 사회악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익의 경제사상의 근저에는 무농(務農)·절검(節儉)·모리작간(謀利作奸)의 방지라는 세 가지 조건이 깔려 있었다.
전화(錢貨)는 기본적으로 재화의 유통 및 매개를 위해 필요하지만, 당시 실정에 비추어 화폐의 유통이 농촌경제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사리(射利)와 사치의 풍조를 조장하고 악화(惡貨)의 유통, 고리대 행위의 폐단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전제를 개혁하는 한편, 승려·창우(倡優)·궁비(宮婢)·액속(掖屬) 등 유식자(遊食者)와 용관(冗官)을 없애 재정을 긴축시켜서 남징(濫徵)을 없애며, 관개·수리사업을 일으키고 경지개발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토지제도는 전지측량을 철저히 하여 호세가(豪勢家)에 의한 전지광점(田地廣占)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전지점유를 제한하는 이른바 한전법(限田法)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즉 나라에서 일가(一家)의 기본수요전적을 1결(結)로 작정해 이것을 한 가호(家戶)의 영업전(永業田)으로 삼고, 그 이상의 전지를 차지한 자에게는 자유매매를 허용하되, 그 이하의 점유지에 대해서는 매매를 엄금하며, 일체의 전지매매는 관청에 보고해 관에서 전안(田案)을 비치하고 문권을 발급해 법적 보증이 되게끔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한다면 현재의 점유전지에 대한 감탈(減奪)이나 가수(加授)를 하지 않더라도 전지점유는 균등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전지를 많이 차지한 자는 그들의 자손에 의해 분점(分占)되거나 혹은 불초한 자의 파락(破落)으로 말미암아 여러 세대가 지나면서 전지가 줄어 평민과 균등하게 된다.
반면 빈농의 전지매각을 금하면 호세가의 토지겸병이 불가능하고, 빈민은 지력(智力)을 다해 절검(節儉)·증식(增殖)에 노력한다면 조금씩이라도 전지를 사서 제한량까지는 늘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일세법(什一稅法)의 원칙을 엄수해 족징(族徵)·인징(隣徵)·백골징포(白骨徵布)·수포방번(收布放番) 등 종래에 자행되어 온 봉건적인 과징(過徵)·남징의 폐단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또 사치의 풍조를 없애기 위해서는 억말(抑末), 즉 상행위의 억제책을 주장하였다.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사치품수입은 국내 산출의 은화(銀貨)뿐만 아니라 미포(米布)로 바꾸어 유입되는 일본의 은정(銀錠)까지도 중국으로 유출되며, 그것은 또 국경에서 상역배(商譯輩)에 의한 밀무역을 유발한다고도 하였다.
특히, 빈민구제라는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공사간의 고리대행위로 변질된 조적(糶糴)은 전제·세제의 개편과 아울러 원래의 진휼책(賑恤策)으로 환원, 실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익의 학문사상은 먼저 언급한 바와 같이 단적으로 말한다면 탈주자학적인 수사학적 수기치인의 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학에로의 복귀 내지 부흥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사회현실에 입각한 사회개편을 주장한 개혁사상을 의미한다.
이익의 학문의 체(體)는 어디까지나 경학에 두어졌음에도 사회현실에 비추어 보다 더 긴요하고 절실한 것은 경세치용의 학으로 간주하였다.
이익은 당시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학의 수용으로 세계관·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켜갔고, 보다 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방식을 체득할 수가 있었다. 이익의 여러 ‘이단(異端)’에 대한 자세를 볼 때 윤리면에는 너그러웠지만, 신앙 자체는 거부적인 견해를 취하였다.
그 점에서는 새로 전래, 유포되던 천주교에 대해서도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익은 정통적인 유학자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이익은 이교배척, 폐전론(廢錢論)·억말책(抑末策)의 제의, 남녀관 등에서 정통유학자로서의 한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사민평등의 인간관·신분관·직업관에서 근대적인 사회에로 한 걸음 다가섰음을 엿볼 수 있다.
저서로는 『성호사설』·『곽우록(藿憂錄)』·『성호선생문집』·『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과 『사서삼경』·『근사록』·『심경』 등의 질서, 『이자수어』 등이 있다.
◎晦軒 趙觀彬(회헌 조관빈/1691~175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悔軒). 조계원(趙啓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희석(趙禧錫)이고, 아버지는 노론4대신인 조태채(趙泰采)이다. 어머니는 심익(沈益)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검열이 되었다. 1716년 도당록(都堂錄)에 선입되고 수찬(修撰)·정언(正言)·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헌납(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1719년 승지로 특채되고, 1720년(경종 즉위년) 대사간·대사성·승지를 거쳐 이듬해 이조참의에 올랐다.
1723년 신임사화에 화를 당한 아버지에 연좌되어 흥양현(興陽縣)에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나왔다. 이 후 호조참의·이조참의·강화유수·대사성·동지의금부사·호조참판·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으로 신임사화를 논핵하였다.
1727년 동지돈녕부사로 임명되자 노론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 등이 죄적(罪籍)에 있으므로 의리상 취임할 수 없다고 그 삭제를 상소하였다. 그 해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 1731년 대사헌에 있으면서 다시 신임사화의 전말을 상소하여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하였다가, 당론을 일삼고 사감으로 대신을 논척했다는 죄로 대정현(大靜縣)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났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있다가 1736년 도승지에 임명되고, 1740년 호조참판·예조판서를 거쳐 1742년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뒤, 1744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의 불화로 면직되었다. 그 해 우참찬·홍문관제학에 다시 기용되고,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공조판서·형조판서·강화유수 등을 거쳐 다시 수어사(守禦使)가 되어 남한산성에 군량을 저장할 것을 청해 시행하게 하였다. 1753년 대제학으로 죽책문(竹冊文)의 제진(製進)을 거부하여 성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어 삼수부(三水府)에 유배되었다가 곧 단천(端川)으로 이배되었다.
그 해 풀려나와 이후 좌빈객(左賓客)·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철저한 노론계열로 아버지의 신원과 포상의 추진에 일생을 보냈으나, 문형(文衡)으로 많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저서로 『회헌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李世福(이세복/1695~1786)
1695년(숙종 21)~1786년(정조 10). 조선 후기 모반사건 관련 인물. 본관은 전주(全州). 증조부는 응천군(凝川君) 이돈(李潡)이고, 조부는 이석한(李錫漢)이며, 부친은 이홍수(李弘遂)이다. 외조부는 함안조씨 군수(郡守) 조봉원(趙逢源)이고, 처부는 청송심씨와 신평이씨 이태형(李泰亨)이다.
1722년(경종 2)에 발생한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된 이홍술(李弘述)과 연루된 이명좌(李明佐)‧조송(趙松) 등이 투옥되어 국문(鞠問)을 받았다. 조송의 조카였던 이세복(李世福)은 돈을 출자하는 등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의금부(義禁府)에 투옥이 되었으며, 몇 차례의 심문 끝에 유배를 당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이후,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된 자들의 무고함이 밝혀져 1725년(영조 1)에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圓嶠 李匡師(원교 이광사/1705~1777/서화가/富寧 流配되었다가 薪智島로 移配 自然死)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예조판서를 지낸 진검(眞儉)의 아들이다.
소론이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실각함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으며, 50세 되던 해인 1755년(영조 31) 소론 일파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가 신지도(薪智島)로 이배(移配)되어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윤순(尹淳)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글씨에서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이룩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畫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畫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대표작으로 「행서4언시(行書四言詩)」(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1746년(영조 22)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임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畫圖)」(간송미술관 소장),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으며,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圓嶠書訣)』을 비롯하여 『원교집선(圓嶠集選)』 등의 저서를 남겼다.
◎歸晩 柳爾胄(귀만 류이주/1726~1797/資憲大夫 豊川府使/流配되었다 이듬해 풀림) 1726년(영조 2)∼1797년(정조 21). 조선 후기 무신‧건축가. 호는 귀만(歸晩) 또는 귀만와(歸睌窩)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경상북도 대구(大邱) 해안면(解顔面) 입석동(立石洞)에서 태어났다. 문화류씨(文化柳氏) 곤산군파(崑山君派) 30대 류영삼(柳榮三)과 영천최씨(永川崔氏)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사냥을 즐기는 등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효심이 극진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기개를 갖고 있었다.
17세에 서울로 올라가서, 1753년(영조 29)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755년(영조 31) 총융사(摠戎使) 홍봉한(洪鳳漢)이 영남의 무인(武人) 류이주(柳爾胄)가 조령(鳥嶺)에서 채찍으로 호랑이를 쫓아 보낸 일을 상세히 말하자 영조는 그를 불러 당시 상황을 말하게 하고, 그에게 병서(兵書)를 읽게 시킨 후 등용하였다. 1767년(영조 43)에 그는 수어청파총(守禦廳把摠) 성기별장(城機別將)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동원되었다.
1773년(영조 49)에는 낙안(樂安)의 세선(稅船)이 부서져 조세가 제때에 올라오지 못하자 영조는 당시 낙안군수(樂安郡守)였던 그를 세미(稅米) 외에 다른 물품들을 함께 실어 배를 파손시킨 죄로 유배시켰다.
이듬해 풀려난 그는 가족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구례군(求禮郡) 문척면(文尺面) 월평으로 왔다가 다시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로 이주하였다. 그가 이주한 땅은 본래 지역의 토호(土豪)인 재령이씨(載寧李氏) 일가 소유였으며, 돌이 많고 척박하였으나 풍수지리로 볼 때 미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의 명당으로 전해내려 왔다. 유이주는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훗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양반 주택으로 평가 받는 운조루(雲鳥樓)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등극하면서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오위장(五衛將)으로 관직에 복귀하고 함흥성(咸興城)을 쌓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상주영장(尙州營將)을 거쳐 1982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풍천부사(豊川府使)로 전직되었다. 그는 관직 생활 중 대규모 국가 건축공사를 맡아 진행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운조루를 설계하였으며, 공사는 그의 조카인 류덕호(柳德浩)가 맡았다. 운조루는 1776년(정조 즉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졌고 6년만인 1782년(정조 6) 류이주가 용천부사(龍川府使)로 있을 때 완성했다. 7년간의 공사 끝에 99칸의 주택이 완성되자 그는 저택에 일가친척들을 모아 함께 살도록 하였다. 1790년(정조 14)에 류이주는 1775년(영조 51) 재령이씨와 혼인한 조카 류덕호를 양자로 들여 재령이씨(載寧李氏)와 인척관계를 맺게 되면서, 운조루의 집터 또한 완전하게 그들로부터 양여 받게 되었다.
◎直哉 柳 抗(직재 류 항/미상~미상/濟州道 流配 보낸 지 8년 만에 풀려남)
생졸년 미상.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직재(直哉). 일찍이 공명에 뜻이 없어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성현의 글을 읽으니 이웃 마을에서조차 그의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실천이행에 돈독하고 학문이 정미하여 온 마을에서 존경하였다. 본관과 이웃 마을의 수령이 문후하기를 예에 맞게 하거늘 문득 농부 옷과 호미를 멘 그대로 날이 저물도록 담론하면서도 수줍어하는 빛이 없었다.
1701년(숙종 27년 신사)에 왕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언변이 지극하고 친절하였다. 사간원에서 논핵하여 제주도에 귀향 보낸 지 8년 만에 풀려났는데 포의(布衣)로서 대의를 항변한 사람은 이잠(李潜)과 류항 둘뿐이었다.
◎소현세자의 두 아들
◎正而 柳匡國(정이 류광국/1777~?/사헌부 지평 /穩城府 流配 갔다가 석방)
1722년(경종 2)~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정이(正而)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증조부는 류축(柳軸)이고, 조부는 류성소(柳星昭)이며, 부친은 류영복(柳榮復)이다. 외조부는 이덕여(李德輿)이다.
1750년(영조 26) 식년시에 을과 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헌납(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1762년(영조 38) 사헌부지평으로 있으면서 상소에 불경한 구절을 쓴 죄로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된 김시찬(金時粲) 등을 석방해주기를 청한 것으로 인하여 온성부(穩城府)에 귀양 갔다가 석방되었다. 1774년(영조 50) 비루하고 패악한 행동을 일삼아서 아전과 액례(掖隷: 액정서에 속한 이원(吏員)과 하례(下隷))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다가 복직되었다.
◎李家煥(이가환/1742~1801)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 이익(李瀷)의 종손으로, 증조는 이명진(李明鎭)이다. 할아버지는 이침(李沉), 아버지는 이용휴(李用休)이며, 어머니는 유헌장(柳憲章)의 딸이다. 천주교인 이승훈(李承薰)의 외숙이다. 학문적 교우로는 정약용(丁若鏞)·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 등 초기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1771년(영조 47) 진사가 되고, 1777년(정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1780년 비인현감이 되었다.
1784년 생질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오고 동료 학자들이 서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천주교에 대한 학문상의 관심과 우려로 이벽과 논쟁을 벌이다가 도리어 설득되어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벽으로부터 서학 입문서와 『성년광익(聖年廣益)』 등을 빌려 탐독하고, 제자들에게도 전교하는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교리 연구를 중단하고,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서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그 뒤 대사성·개성유수·형조판서를 지냈고,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도 천주교인을 탄압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천주교를 연구해 1801년 이승훈·권철신 등과 함께 옥사로 순교하였다.
정조로부터 ‘정학사(貞學士)’라 호칭될 만큼 대학자였다.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해, 스스로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라고 할 만큼 수학의 대가였다. 저서로는 『금대유고』가 있다.
◎成卿 趙貞喆(성경 조정철/1751~1831)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 이익(李瀷)의 종손으로, 증조는 이명진(李明鎭)이다. 할아버지는 이침(李沉), 아버지는 이용휴(李用休)이며, 어머니는 유헌장(柳憲章)의 딸이다. 천주교인 이승훈(李承薰)의 외숙이다. 학문적 교우로는 정약용(丁若鏞)·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 등 초기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1771년(영조 47) 진사가 되고, 1777년(정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1780년 비인현감이 되었다.
1784년 생질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오고 동료 학자들이 서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천주교에 대한 학문상의 관심과 우려로 이벽과 논쟁을 벌이다가 도리어 설득되어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벽으로부터 서학 입문서와 『성년광익(聖年廣益)』 등을 빌려 탐독하고, 제자들에게도 전교하는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교리 연구를 중단하고,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서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그 뒤 대사성·개성유수·형조판서를 지냈고, 1795년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도 천주교인을 탄압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천주교를 연구해 1801년 이승훈·권철신 등과 함께 옥사로 순교하였다.
정조로부터 ‘정학사(貞學士)’라 호칭될 만큼 대학자였다.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해, 스스로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라고 할 만큼 수학의 대가였다. 저서로는 『금대유고』가 있다.
◎趙貞喆 유배지 愛人(홍윤애)
미상∼1781년(정조 5). 조선 후기의 의녀(醫女)로, 본관은 남양(南陽[唐])이고 홍랑(洪娘)으로도 불린다.
노론(老論) 벽파(辟派) 정헌(靜軒) 조정철(趙貞喆)의 측실이다.
1777년(정조 1) 제주에 유배된 조정철의 심부름을 하던 의녀였다. 1781년(정조 5) 2월 조정철의 딸을 낳았다. 1781년 3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한 김시구(金蓍耉)가 조정철의 비행을 말하라며 곤장을 쳤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해 5월 그녀가 장형으로 인해 죽으니 제주도 천지가 폭풍으로 캄캄하였다. 1811년(순조 11) 27년간의 유배에서 풀려난 조정철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하여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濟州牧使兼全羅道防禦使) 조정철의 이름으로 그녀의 묘비 ‘홍의녀지묘’를 세웠다.
1997년 양주조씨(楊州趙氏)의 결의로 경상북도 함창군(咸昌郡)에 있는 사당 함녕재(咸寧齋)에 조정철과 그녀를 함께 배향하였다.
◎蔓川 李承薰(만천 이승훈/1756~1801)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 세례명 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아버지는 참판 동욱(東郁)이며, 어머니는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이다.
서울 남대문 밖 반석동(盤石洞)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마재[馬峴]의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丁若銓)·약현(若鉉)·약종(若鍾)·약용(若鏞)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 때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이 남인 소장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서학에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서학 모임의 중심 인물인 이벽(李檗)과도 자연 친교를 맺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약 40일간 그 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默珠)·상본(像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이가환·정약종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상의하여 명례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던 중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한때 배교하였지만, 곧 교회로 돌아가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성사(堅振聖事)를 집전하는 등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였다.
1787년에는 정약용과 반촌(伴村)에서 천주교 교리를 강술하는 등 교회활동을 영도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에 어긋난 행위임을 알고는 이 조직을 해산하고 성직자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1789년에 평택현감으로 등용되었다. 때마침 1790년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명을 전하자,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이해에서 출발한 그의 신앙은 유교적 예속과 천주교회법의 상치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하던 끝에 다시금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1791년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폐제분주(廢祭焚主)로 인한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체포되어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의 반회사건(伴會事件)이 문제되어 투옥되었지만, 관직만을 삭탈당하고 곧 방면되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이 일어나 성직자영입운동에 관계했던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정약종·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 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 蔓川遺稿≫를 남겼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즉, 1868년(고종 5)에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蓮龜)·균구(筠龜)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 이승훈은 1856년(철종 7)에 아들 신규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되었다.
◎秋史 金正喜(추사 김정희/1756~1886/大司成/濟州道 流配. 북청 流配되었다가 풀려남)
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종래 경학(經學)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天算學)·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申緯)·조인영(趙寅永)·권돈인·신관호(申觀浩)·조면호(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화엄사(華嚴寺)라는 가족의 원찰(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영정(影幀)의 제사(題辭)와 발문(跋文)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趙孟頫)·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畫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心意)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蘭)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비파서도(碑派書道)가 낳은 등석여(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고인(古印)의 인보(印譜)를 얻어서 직접 진(秦)·한(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落款)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自刻風)인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 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 의식(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주 12)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이 있다. 그리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년)은 종현손 김익환(金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였다. 즉,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玆山 丁若銓(자산 정약전/1758~1816/병조좌랑 玆山魚譜/黑山島 流配 自然死)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매심(每心).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출신. 정항진(丁恒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지해(丁志諧)이고, 아버지는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이다.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윤덕열(尹德烈)의 딸이다. 정약용(丁若鏞)의 형이다.
어릴 때부터 매우 재주가 있고 총명했으며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거리낌이 없었다. 소년시절부터 서울에서 이윤하(李潤夏)·이승훈(李承薰)·김원성(金源星) 등과 깊이 사귀면서 이익(李瀷)의 학문에 접하여 심취하였다. 이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더 깊이 있게 배웠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자,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여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또, 서양 학문과 사상에 접한 바 있는 이벽(李檗)·이승훈 등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이들을 통해 서양의 역수학(曆數學)을 접하고 나아가 천주교에 마음이 끌려 신봉하기까지 하였다.
1801년(순조 1)에 신유사옥이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박해를 입게 되자, 아우 약용과 함께 화를 입어 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에 유배되고, 그는 신지도(薪智島)를 거쳐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다.
여기서 복성재(復性齋)를 지어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저술로 울적한 심정을 달래다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16년 만에 죽었다. 저서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비롯, 『논어난(論語難)』·『동역(東易)』·『송정사의(松政私議)』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산어보』만이 전해오고 있다.
『자산어보』는 그가 유배되었던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여, 이를 어류(魚類)·패류(貝類)·조류(藻類) 및 해금(海禽)·충수류(蟲獸類) 등으로 분류,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에 관한 것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이라 할 수 있는 명저이다.
◎慧藏禪師(혜장선사)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1762~1836/刑曹參議/康津 流配 16년 후 풀려남)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주 01)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의 생애는 대략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어린 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의 일표이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여졌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 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를 정리하기도 했으며,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편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유학을 비롯한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다시 서학에 접근했다는 기록도 이와 같은 부단한 탐구정신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그는 학문 연구와 당시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이었다.
정약용은 당시 조선왕조가 직면한 위기를 해소하고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적 사회로 재편되기를 희구하면서 각종 개혁사상을 개진하였다.
당시는 오늘날과는 달리 사회와 학문의 분야가 미분화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의 개혁사상은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문화·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여유당전서』의 분석을 통해 규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정치사상을 검토해 보면, 그는 일표이서를 통해 군주권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내용으로 하는 왕권 강화론을 제시하였다. 벌열(閥閱)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전횡하던 상황에서 국가 공권력의 회복을 위해 왕권의 절대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왕권은 공권력을 대표하는 권위의 상징일 뿐, 절대 왕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영조와 정조대 탕평정책에서 추진되었던 왕권강화책과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정약용은 국왕이나 관료가 공적인 관료기구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파악하였다. 또한 그의 정치사상은 왕도정치의 이념을 구현하는 데 집중되었고, 주로 집권층의 정치관을 수정시키려는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즉, 그는 집권층에 대해 위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 질서의 강화에 협조하고, 아래로는 애민(愛民)·교민(敎民)·양민(養民)·휼민(恤民)하는 목민지도(牧民之道)를 확립, 선진시대 이래 유학의 기본적 가르침이었던 민본(民本)의 의식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한때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천자(天子)도 인장(隣長)이나 이정(里正)과 같은 인민의 대표자들이 선출하여 추대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맹자에 의해 주장되었던 폭군 방벌론(暴君放伐論)의 입장에서 민은 폭군을 거부할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의 정치 개혁안들의 주류는 왕조체제를 근간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봉건적 통치구조의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은 폐단을 제반 제도의 개편을 통해 최대한으로 막아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정치 분야에서의 개혁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정치운영의 형태가 소수의 벌열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바뀌면서 국가기강의 문란과 관료체제의 부패,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정약용은 관료기구의 개혁안 마련에 주력하였다. 우선, 육조에 소속된 아문들을 재배치하고, 승정원 및 왕실 관련 아문들을 모두 이조에 예속시켰다. 군영아문(軍營衙門)의 경우도 병조에 소속시켜 명령전달체계를 일원화시켰다.
또한, 그는 권력이 집중된 관료기구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방안으로서 비변사를 혁파하고 중추부를 실직화(實職化)시켜 변무(邊務)만을 담당하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동시에 이전까지 비변사가 장악하던 군국기무 처리 기능을 의정부에 회복시키고 고위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부여함으로써, 의정부가 명실공히 관료기구의 중심이 되는 행정체계를 구상하였다.
그리고 그는 왕과 관료집단 간에 사적인 연결을 방지하고 관료기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을 비롯한 청요직(淸要職)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즉, 왕을 정점으로 하고 의정부를 통해 권력이 일원적으로 행사되도록 하여 행정의 본체인 육조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체제를 강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왕과 관료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도록 하여 사회개혁을 위한 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될 수 있는 독자적인 관료체제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한편, 정약용은 나름대로의 새로운 관료제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이에 걸맞는 새로운 관료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 개혁론을 피력하였다. 그는 이익의 견해에 찬동하여 식년시 외에 부정기시를 모두 혁파하고, 급제자의 수도 줄임으로써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과거제 본래의 기능을 일단 회복시키자는 목적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과거제의 실시 절차를 정비·보강해 제시하였다. 공거제(貢擧制)를 과거시험의 1단계에서 도입하고, 소과(小科)와 대과(大科)를 통합했으며, 마지막으로 삼관(三館)의 관료들이 급제자와 경륜을 논하는 조고(朝考)를 첨설하였다.
고시과목도 대폭 증설, 경학과 관련된 과목들이 시험 때마다 바뀌도록 했고, 중국사는 물론 우리 역사, 관료의 실무 행정과 관련되는 잡학(雜學), 체력의 단련을 요하는 시사(試射) 등을 새로이 추가하였다.
이러한 과거제 개혁론은 관료를 선발하는 기준을 덕행, 재주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하고, 학교제와 과거제의 연결을 통해 관료 양성과 선발을 구조화하고자 한 것으로, 관료로서의 기본적인 자질과 실무능력을 고양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정약용은 원초 유학에 입각한 왕도정치론의 차원에서 사회개혁론을 제기했다. 원초 유학의 왕도정치론에서는 그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민에게 항산(恒産)을 보장해 주고, 정전제의 실시를 통해 부세와 요역을 고르게 하여, 상공(商工)을 보호할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전반적 차원에서 ‘보민(保民)’을 주장했고, 특히 궁민(窮民)의 구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원초 유학의 왕도정치론을 중세 해체기의 조선사회에 적용함으로써 조선에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정전제의 정신을 살려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인정(仁政)의 회복을 주장하는 새로운 왕도정치론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실학자들이 제시했던 정전제 등에 관한 주장은 단순한 경제개혁론이라기보다는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통합적 이론 가운데 중요한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도 왕도정치를 조선사회에 알맞게 재해석하여 시행하려는 현실적 목표를 가지고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당시 농업에 있어서 주된 생산관계는 지주-전호제가 보편적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토지개혁론은 이러한 지주제를 인정하는 위로부터의 개혁과,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립적 소농이나 중소 상공인의 입장을 지지하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대두되어 있었다.
실학파의 토지개혁론은 후자의 길과 관련되며, 정약용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자신의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개혁론을 설명하기에 앞서 기존의 정전제·균전제·한전제를 차례로 비판하였다. 우선, 중국 고대의 정전제는 한전(旱田)과 평전(平田)에서만 시행되었던 것이므로, 수전(水田)과 산전(山田)이 많은 우리나라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균전제는 토지와 인구를 계산하여 이를 표준으로 삼는 방법인데, 당시 조선은 호구의 증감이 수시로 변동되고 토지의 비옥도가 일정치 않기 때문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전제는 전지의 매입과 매각에 일정한 제한을 두고자 하는 제도이지만, 타인의 명의를 빌어 한도 이상으로 늘이거나 줄이는 것을 일일이 적발해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들의 기본적 결함이 치전(治田)에 반하여 농사를 짓지 않는 자에게 토지를 주고 균산에 주안을 둔 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균산에 목적을 두지 않고 오직 농업생산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치전에 목적을 둔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정약용의 토지 개혁론은 「전론(田論)」에 나타난 여전제(閭田制)와 『경세유표』에 보이는 정전제의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정전제는 고대 정전제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한 정전론과 전제개혁안을 적용한 정전의(井田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토지개혁안 가운데 여전제적 개혁안을 담고 있는 「전론」은 1798년에 작성되었고, 정전제적 개혁을 추구하던 『경세유표』는 1817년에 쓰여졌다.
먼저, 그는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토지개혁안인 여전제를 논하였다. 「전론」에서 주장하는 여전제의 목적은 토지의 균분으로 토지와 재부가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사를 짓는 자만이 농지를 얻고, 농사를 짓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는 정전제(정전론, 정전의)에서도 견지되는 입장이다.
여전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전제는 30가구를 1여로 하여 여민(閭民)은 공동노동을 통해서 생산과 수확을 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에서 여민이 선출한 여장(閭長)은 생산작업을 분담시키며, 일역부(日役簿)를 만들어 노동량을 기록한다.
이와 같이 여전제에서는 공동생산을 추진하지만, 소비는 가족 단위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생산물의 분배는 생산에 투하된 가족의 노동량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여전제는 토지의 봉건적 소유를 부정하면서 공동소유·공동경작을 창안함으로써 그 경제적 내용에 있어서 토지를 사회적 소유로 규정하고 있다. 여전제에서는 인구의 자유로운 이동을 8∼9년간 허용하면, 이익을 추구하고 해를 피하려는 농민의 합리적 행동에 의해 각 여의 노동생산성과 빈부는 균등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10년째부터는 인구와 노동력의 이동을 노동생산성을 균등화하는 방향에서만 국가에서 계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여전제의 토지제도를 군사조직의 근간으로 삼아 여-리-방-읍(閭里坊邑)에 따른 병농일치제적 군제개혁안을 구상하였다.
정약용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공·상의 토지 소유를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상인과 수공업자는 독립적으로 여전제와 사회적 분업관계를 이루도록 하였다. 사족의 경우 직업을 바꾸어 농사에 종사하거나 그 밖의 생산활동, 즉 상업·수공업·교육 등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사(士)들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한 기술 연구에 종사하는 것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경세유표』에 보이는 「정전의」에서는 국가에서 재정을 마련하고 그 돈으로 사유 농지를 유상 매입하여 전체 농지의 9분의 1을 공전(公田)으로 만들기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 공전을 민의 노동력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을 전세에 충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한 과제로서 공전을 마련하기 위한 재원 마련, 기구 편성, 공전 편성작업, 공전 경작을 위한 노동력 할당, 토지대장 작업, 공전의 조세량 등을 검토하였다.
그가 제시한 이 정전의의 개혁론은 조세개혁적 성격이 크며, 토지개혁이나 경작권 조정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그는 정전의에서 농업전문화를 통한 상업적 농업을 추구하면서 그 경영 규모는 100무 단위의 부농에 의한 자본주의적 개별 경영을 지향하였다.
한편, 『경세유표』의 정전론은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하여 정전을 편성한 뒤, 그 중 9분의 1은 공전을 만들어 조세에 충당하고 나머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공전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의 공동노동으로 경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정전론에서는 국가에 토지 처분권을 귀속시켜 지주전호제의 재등장을 막아 보고자 하였다.
전반적으로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상업적 이윤과 ‘자본주의적’ 경영을 전제로 한 것으로, 농민에게 토지를 갖게 하되 양반 및 상공 계층은 제외하고 농업을 통한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실학자들과는 차이가 있다.
한편, 정약용이 제시한 여전제와 정전론은 유사점이 많다. 즉, 그는 자신의 개혁안에서 모두 토지의 사적 소유를 부정했고,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민에게만 토지를 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통해 병농일치제를 관철하고 지방제도와 병제의 일체화를 시도한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 두 개혁안 사이에는 차이도 있었다. 즉, 정약용은 여전론을 통해서 여의 설치와 여민의 공동생산을 분명하게 논했다. 그러나 정전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전의 경우는 그 운영에 있어서 여전과 차이가 있었고, 농업의 전문화와 부농에 의한 개별 경영을 제안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전론과 여전론이 근본적으로 다른 개혁안은 아니다. 아마도 그는 지향할 궁극적 목표 내지는 방향으로 여전제적 개혁안을 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현실적 개혁안으로서 정전제를 말했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는 상이점보다는 유사점이 더 많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상업 및 수공업 분야에 관해서도 개혁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존중하던 원초 유학의 왕도정치론에서는 인정의 지표 가운데 하나로 상인과 장인(匠人)을 보호하는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선진시대와는 달리 상공업이 상대적으로 발전해 가던 단계였다.
이처럼 그는 선진 유학에서 제시했던 공고(工賈)에 대한 보호논리와 조선 후기의 상공업계의 발전 등에 영향을 받아서, 화폐의 유통정책에 적극적이었으며, 광업의 개발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왕도정치의 구현을 시도하던 정약용이 상공업 진흥론을 개진한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우선 그는 상업을 천시하는 말업관과 상인의 관직 진출을 막는 금고법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는 유식(遊食) 양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었다. 또한, 그는 상업발전론을 제시하는 한편으로 특권상업 및 매점상업에 대해서는 반대론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이미 18세기 이후 발달한 특권 및 매점 상업에 의한 폐단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선왕의 법’을 들어서 상업 이윤을 확보하고 있던 상인들에 대해 상업세의 증수를 꾀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세과사(稅課司)나 독세사(督稅司)와 같은 세무관서의 설치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상업세의 증수를 위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상업뿐만 아니라 수공업 분야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방직(紡織) 분야 등에서 드러난 낙후된 국내 기술을 발전시키고 생산력의 향상을 통한 국부를 증대시킬 목적으로 선진기술을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이용감(利用監)과 같은 관청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선박과 수레 제조기술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전함사(典艦司)나 전궤사(典軌司)와 같은 관청을 중앙정부에 설치해서 정부 주도로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한편, 정약용은 당시 전국적으로 화폐가 유통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농본적인 절약론의 입장에서 화폐 유통의 구조 개선을 주장하였다. 그는 화폐가 상품 유통의 매개체로서 국가 경제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당시 화폐정책 및 화폐제도의 개혁과 전황(錢荒)을 극복하려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전환서(典圜署)를 설치하여 화폐주조 관리체계를 일원화하고 화폐의 품질과 체제를 개선한다는 것이다. 또한 화폐제도의 개혁안으로 동전을 가장 이상적인 화폐로 생각했으나, 고액전의 통용 및 금·은화의 주조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는 광업분야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즉, 18세기 말에는 공장제 수공업 단계의 덕대제(德大制) 광업경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농민층 분화와 관련하여 광산노동자가 증가되었고, 이로 인해 농업노동력의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광업의 발달은 전답과 봉건질서를 함께 파괴시켜 갔다. 그리고 광세(鑛稅)의 징수, 금은의 국외 유출에 따른 손실 등 여러 문제가 수반되었다.
이에 정약용도 사회개혁론의 일환으로 광업개혁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광업론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국영 광업정책의 단서가 마련되는 「지리책(地理策)」·「응지논농정소(應旨論農政疏)」가 저술된 시기이다. 이 때 정약용은 설점수세제를 기본으로 한 정부의 광업정책을 용인하면서 동점(銅店)과 철점(鐵店)에 대한 억제정책을 완화시키기를 요구했고, 광업의 민영화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광업 민영화보다는 관영화 또는 국영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을 견지했다.
광업개혁론에 있어서 두번째 단계는 『경세유표』·『목민심서』의 단계이다. 여기서 그는 광업정책 및 광업경영론을 논했고, 광업제도의 운영을 개선하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즉, 중앙정부 차원의 근본적 개혁 방안으로 국영광업정책 및 국영광업론을 제시하면서 중앙에는 사광서(司礦署)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감무관(監務官)을 파견하여 광산을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이용감의 설치를 제안했고, 금광군의 생산·노동 조직과 광산의 경영형태 및 생산기술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전망하였다. 나아가 그는 아전의 중간 수탈과 소란의 근원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방관 차원의 광업제도 운영방안으로서 광업 행정지침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광업개혁론은 당시 발달한 덕대제 광업 경영의 기술수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정약용은 왕도정치의 이념에 따라 상공인을 보호하고, 당시 사회의 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던 상공업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상공업 개혁론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통공발매정책을 지지하면서 상업세의 증수를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광업을 국부의 원천으로 파악하여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해서는 광산국영이 요청된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그의 상공업 개혁론은 현실적으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고 유식자(遊食者)를 정리하여 개직(皆職)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회개혁적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정약용은 경제사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추구하고 있던 왕도정치의 이념과 조선사회가 직면해 있던 현실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하여 일련의 사회개혁론을 전개하였다.
일찍이 왕도정치의 이념을 제시한 『맹자』는 「등문공(滕文公)」상(上)에서 “백공의 일은 본래 농사를 지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百工之事 固不可耕且爲也).”라고 하면서 노심자(勞心者)와 노력자(勞力者)를 구별해 사회적 분업 개념의 원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봉건사회 해체기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사회구조에서는 사회적 분업이라는 측면보다는 신분제도가 적용되는 사회적 불평등이 엄존하고 있었다.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이와 같은 사회 신분제도의 모순성을 지적하고, 고착적 신분제에 의해서 사회를 설명하기보다는 사회적 분업에 가까운 개념으로 조선사회를 재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의 사회신분제의 개혁 논의에는 미진한 점이 많다.
그는 모든 신민을 사·농·공·상·포·목·우·빈·주(士農工商圃牧虞嬪走)의 9직(九職)으로 나누어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직역에 대한 종래의 신분적 파악에서 사회 분업에 따른 직능적 파악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또한 사의 농·공·상에의 참여와 농·공의 과학기술적 기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예 경영을 통해 우수한 농·공인을 행정직에 발탁하는 일종의 직업별 과거제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9직은 공동체적 필요에 의해 국가에서 배정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사민구직을 수평적·직능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신분제의 철저한 혁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약용은 또한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관해서는 인정을 했지만 신분간의 위계질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의지하는 것은 사족인데 그들이 권리도 세력도 없어지면 위급할 때 소민의 난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라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는 양반 사족의 지도나 통솔이 없이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신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교육관에도 드러나 양반 자제와 서민은 교육기관이나 교육내용을 엄격히 구분하여 양반은 지도자로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전인교육을, 일반 백성은 효제의 윤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양반은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배우고 평민은 피지배자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지배계급의 선천적인 우월과 피지배계급의 선천적인 열등을 합리화시키는 운명론을 부정하고 인명을 중시하는 민본주의 사상에서 계층간 격차를 좁혀 보려 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담당자는 양반임을 내세우는 고정된 신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완전한 신분제의 타파로 나아가지도 못하였다.
정약용 역시 기술개발의 최종 통로를 관직의 수여에 귀착시키거나, 성공적인 독농가나 향촌지도자의 경우에도 그 최종 귀착점을 관직에 두고 있었다. 이는 당시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유식양반들에게 개직을 보장하며, 그들을 지방행정의 하급 담당자로 삼아 행정의 운용 효율을 높이고, 사회 풍속의 개선도 기대할 수 있다는 인식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정약용은 여타 실학자들과처럼 사회 신분제에 대해 인습적 관념에 매달리지 않았고 직능적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사회적 분업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사회구조를 논했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적 견지에서 제시되던 선천적 불평등성에 입각한 인간불평등성론에는 분명한 반대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만민평등의 원리를 개관적으로 이론화하거나, 신분제를 철폐하여 사회적 평등을 이루어야 함을 분명하게 주장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은 왕도정치의 이념에 따라 자신들이 속해 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불평등성에 대해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었다.
한편, 그들은 향촌제도의 개편과 연결하여 향직(鄕職)을 정식 관직화하기를 제안했고, 향리(鄕吏)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그들의 개혁안은 유식 양반들에게 개직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정약용은 그의 개혁 사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은 그의 철학적 사유 내지는 역사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새로운 천관(天觀)을 제시하며 천명(天命)과 인간본성이 이중구조적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리학의 입장과는 다른 인간관과 윤리관을 가질 수 있었고, 제반 사회개혁론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역사관에 있어서도 특출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 즉, 민의 일상적 생산활동을 통해 과학기술이 진보, 발전된다는 인식을 확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비로소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민에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약용의 사상은 당시 사회가 직면해 있던 봉건적 질곡을 극복할 수 있는 탁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그를 실학사상의 집대성자이자 조선 후기 사회가 배출한 대표적 개혁사상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시 사회가 직면해 있던 각종 해체 현상을 직시하고, 사회개혁을 위한 여러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그 문제점들을 찾아 나갔다.
나아가 그는 문제점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원인에 대해 규명하고자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혁안을 마련해 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개혁안은 정조와 같은 성군(聖君)이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서 실천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왕도정치의 실현에는 창의적이고 강직한 신하의 보필이 필요하며, 아마도 자신이 이와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정약용은 정조의 치세기였던 자신의 젊은 시절에는 한때 관직에 있으면서 직접 개혁 정사를 실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애의 대부분은 개혁의 현장과 유리된 상태에서 보내게 되었고, 오랜 귀양살이를 통해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이상적이며 참신한 개혁안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그는 개혁안을 자신이 직접 추진할 수 없었고, 관직에 대한 경험 부족은 그의 개혁안에 현장성의 결여라는 문제점을 안겨주었다. 즉, 개혁의 목표와 개혁된 사회상에 대해서는 뚜렷이 제시하고 있지만, 개혁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여기서 그의 개혁안이 가지고 있는 이상적 특성과 함께 실천에 있어서의 제한성이 드러나게 된다.
한편, 그의 개혁안은 민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민본주의에서는 민을 객체화하여 통치나 보호의 대상으로만 파악할 뿐, 민 자신을 통치의 주체로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약성은 그 개혁안의 실현가능성에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정약용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 사회에서 강력히 제시되고 있던 개혁의 의지를 집대성했고, 개혁의 당위성을 명백히 해주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에게는 개혁을 향한 열정과 함께,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민에 대한 애정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시대의 문제점을 밝혀내는 데 과감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상적인 왕도정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그 방대한 개혁사상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개혁안이 묵살되거나 좌절되어가는 과정에서 조선왕조의 몰락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丁蘭珠 마리아(정난주=黃嗣永의 처/1773~1838/濟州道 대정 流配)
◎黃嗣永(알렉시오 황사영/1775~1801)
초기 천주교회의 신자·순교자. 세례명은 알렉산데르, 자는 덕소(德紹). 한림학사 석범(錫範)의 유복자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정약종(丁若鍾)을 사사하였다.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정약종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였다.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진지한 토론 끝에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입교 직후에 발생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단하고 관직진출을 단념하였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신부를 만난 뒤 그의 측근인물로 활동하였으며, 1798년 경기도 고양에서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하여 서울 지역의 지도적인 활동가로 활약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 책을 북경주교에게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백서』이다.
이 편지를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에게 시켜 1801년 10월에 떠나는 북경 동지사(冬至使) 일행 편에 끼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3일 후인 음력 9월 29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대역 부도죄로 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어머니·작은아버지·아내·아들은 모두 귀양 가게 되었다.
◎黃景漢(황경환/알렉시오 황사영.丁蘭珠 마리아의 子/1800~/추자도 流配)
◎오상선 黃景漢의 養父(추자도에서 정난주의 2살박이 아들을 보살폈다)
◎草衣禪師(초의선사/1785~?)
◎又峰 趙熙龍(우봉 조희룡/1789~1866/五衛將/임자도 流配)
1789년(정조 13)∼1866년(고종 3).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우봉(又峰)·석감(石憨)·철적(鐵笛)·호산(壺山)·단로(丹老) 또는 매수(梅叟). 서울 출생.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1813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1851년 왕실전례(王室典禮)에 개입되어 전라도 임자도(荏子島)에 유배되었다가 1853년에 귀향하였다.
19세기 대표적 여항시사인 벽오사(碧梧社)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58세에는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리기도 했다. 유배 중에도 자신의 거처에 예서체(隷書體)로 쓴 ‘화구암(畵鷗盦)’이라는 편액을 걸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여 기량이 더욱 완숙해졌다.
그는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글씨는 추사체(秋史體)를 본받았고,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다. 난초 역시 김정희의 묵란화(墨蘭畫)의 정신을 본받아 그렸다.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이라는 자서전적인 저술과 그 당시의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 중 학문·문장·서화·의술·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일종의 열전적인 저술인 『호산외사(壺山外史)』를 남겼다. 특히 여기에 수록된 일곱 명의 화가(김홍도·최북·임희지 등)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 상호간의 교우 관계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유작 중 가장 많은 수가 매화 그림인데 이와 같은 자신의 매화벽(梅花癖)을 『석우망년록』에 상세히 적었다.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 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시백영(梅花詩百詠)을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 그리고 자기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매수(梅叟)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이와 같은 그의 생활 주변의 모습을 표현한 듯한 재미있는 그림이다.
매화그림 중 그의 새로운 구도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은 길고 좁은 축화(軸畫) 형식의 그림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홍매대련(紅梅對聯)」을 들 수 있다. 굵은 노수간(老樹幹)이 힘찬 용의 꿈틀거림과 같이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면서 화폭의 높이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중 몇 군데로부터 꽃을 가득히 피운 가느다란 가지들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 주간(主幹)과 서로 대조와 조화를 이룬다.
비백법(飛白法: 서예에서 굵은 필획을 그을 때 운필(運筆)의 속도와 먹의 분량에 따라서 그 획의 일부가 먹으로 채워지지 않은 채 불규칙한 형태의 흰 부분을 드러나게 하는 필법)을 사용한 수간에는 역시 대조되는 윤묵(潤墨)의 짙은 점을 찍어 요소요소를 강조하였으며 매화꽃은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렸다.
그의 백매화(白梅花)는 율동적인 경쾌한 붓놀림으로 꽃잎 하나하나의 윤곽선을 그리고 예리한 선으로 꽃술을 장식하였다. 이들 그림에는 항상 추사체 글씨의 화제(畫題)를 곁들여 문인화다운 운치를 더욱 북돋았다.
그의 묵매화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이래의 조선 중기 묵매도의 구도에서 탈피하여 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김정희는 조희룡의 난초 그림이 서법에 의한 문인화답지 않게 아직도 화법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면하지 못하였다고 낮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의 묵란화들을 보면 절제 있고 힘찬 필선으로 된 우수한 작품들이 많다.
◎萬言詞 安肇煥(만언사 안조환)
조선 정조 때 대전별감으로 일했던 작가가 자신의 잘못으로 추자도로 유배되어 신세를 한탄하고 과거사를 회상하는 작품. 유배 가사. 제시된 부분은 유배지인 추자도에 이르는 과정과 힘겨움을 토로하는 부분.
산악 같은 높은 물결(추자도로 향하는 배에 커다란 물결이 치는 장면 - 직유법, 과장법) 뱃머리를 둘러치네.
크나큰 배 조리 젓듯이(쌀을 일거나 물기를 뺄 때 쓰는 조리를 젓듯이, 큰 파도가 배를 이리저리 마음껏 흔들어대는 모양 - 직유법)
천은 입어 남은 목숨(임금의 은혜를 입어 살아남은 목숨) 마자(그마저, 그나마) 진케(다하게, 끝나게) 되겠구나.
초한건곤(초나라의 항우와 하나라의 유방이 건곤일척의 큰 승부를 가름) 한 영중(한나라 군영 안)에 장군 기신(한나라 유방이 초나라 항우에게 포위되었을 때 유방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장수) 되려니와
서풍낙일 멱라수에 굴삼으려는 불원이라(가을바람에 해가 질 때 멱라수에서 물에 빠져 죽은 초나라 시인 굴원이 되고 싶지 않음)
차역천명(이 일 역시 하늘의 뜻 - 추자도로 유배를 오게 된 일이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 할 일 없다(어쩔 도리가 없음). 일생일사 어찌하리(죽고 사는 일을 어찌 하겠는가 - 설의법 : 운명론적 태도)
출몰사생(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고비를 만남) 삼주야(3일 밤낮)에 노 지우고 닻을 지니(노와 닻을 내리니 - 추자도에 도착함)
수로 천리(물길(뱃길) 천 리 - 약 400km, 먼 거리 강조)
도중(성 안)으로 들어가니 적막하기 태심(아주 심함)이라.
사면(사방)으로 돌아보니 날 알 이 뉘 있으리(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임. 설의법. 四顧無親, 孤立無援)
보이나니 바다이요 들리나니 물소리라(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화자)의 모습. 대구법. 시각적, 청각적 심상)
벽해상전(碧海桑田 :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는 것처럼 엄청난 변화) 갈린 후에 모래 모여 섬이 되니(오랜 세월에 걸쳐 섬을 이룸)
추자섬 생길 제는 천작지옥(하늘이 만든 지옥. 추자도를 지옥으로 비옥. 은유법)이로다. 해수(海水 : 바닷물)로 성을 싸고 운산(雲山 : 구름 낀 높은 산)으로 문을 지어(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화자. 대구법)
세상이 끈쳐시니(끊어졌으니) 인간(인간 세상)은 아니로다(孤立無援)
풍도(도교에서 말하는 지옥)성이 어디메뇨 지옥이 여기로다(유배지가 지옥으로 느껴짐. 깊은 절망감. 문답법, 대구법)
어디로 가잔 말고 뉘집으로 가잔말고(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처지 탄식)
눈물이 가리우니 걸음마다 엎더진다(엎어진다) - 슬픔과 절망의 모습
이 집에 가 의지하자(의지하고자 하니) 가난하다 핑계(핑계)하고
저 집에 가 의지하고 연고(사유. 일의 까닭) 있다 칭탈(무엇 때문이라고 핑계를 댐) - 유배된 화자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받아주지 않는 상황. 각박한 인심. 대구법. 이집 저집 아모 덴들(어느 곳인들) 적객주인(謫客主人 : 유배 온 죄수를 관리하는 일을 맡은 사람. 귀양객을 받아들인 집의 주인) 뉘 좋다고
관력(官力 : 관청이나 관리의 권력)으로 핍박(바싹 죄어서 몹시 괴롭게 굶) 세부득이(勢不得已 :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맡았으니
관채다려(관리에게, 관청에게) 못한 말을 만만할손(만만한 사람인) 내가 듣네 - 귀양 온 사람을 억지로 떠맡는 주인이 화자에게 화를 내는 말을 함.
세간(집안 살림에 쓰는 온갖 물건) 그릇 흩던지며(흩어서 던지며, 화를 내는 행동) 역정(몹시 언짢거나 못마땅하며 내는 성) 내어 하는 말이
저 나그네(화자) 헤어보소(헤아려보시오. 생각해보시오) 주인(화자가 머물게 될 집의 주인) 아니 불상한가(불쌍하다 - 설의법)
이 집 저 집 잘 사는 집 한두 집이 아니어든(아닌데)
관인(官人)네는 인정받고 손님(귀양 온 사람)네는 혹언(가혹한 말) 들어
구타여(구태여. 굳이) 내(주인) 집으로 연분 있어 와 계신가.(무슨 인연이 있어서 왔는가. 아무 인연도 없지 않는가. 설의법)
내 살이(살림살이) 담박한(깨끗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줄 보시다양 아니 알가.(보시듯이 알지 않겠는가 - 설의법)
앞뒤에 전답(논밭) 없고 물속으로 생애(생계)하여(물속에서 물고기 잡는 것으로 생활을 하여)
앞 언덕에(언덕에서) 고기 낚아 웃녘(윗동네)에 장사 가니(대구법)
삼망(그물의 일종) 얻어 보리 섬(그물로 얻은 보리 몇 섬)이 믿을 것도 아니로세.(믿고 의지할 만한 양이 아님)
신경처자[자기 자신과 처와 자식(주인과 그 가족)] 세 식구의 호구하기 어렵거든(세 식구도 입에 풀칠하기. 먹고 살기 어려운데)
양식 없는 없는(유배 온 화자) 나그네는 무엇 먹고 살려는고[주인의 탄식(직접 인용) - 어려운 형편에 유배 온 죄인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대한 불만]
집이라고 서 불손가(집이라고 해도 서서 활동할 수나 있나. 집이 아주 작고 낮음) 기어들고 기어나며(기어서 드나듦)
방 한 간에 주인 들고 나그네는 잘 데 없네.(집이 작아 방이 하나라 주인이 들어가니. 나그네는 잘 곳이 없음)
뛰자리 한 잎(갈대로 엮은 자리 한 장) 주어 담하(처마 밑)에 거처하니
냉지(기후나 토질이 찬 땅)에 누습하고(축축한 기운이 스며있고) 즘생(짐승)도 하도할사.(많기도 많구나)
발 남은 구렁배암(한 발이 넘는 구렁이) 뼘 남은 청진의라(한 뼘이 넘는 푸른 지네)[대구법]
좌우로 둘렀으니(좌우로 둘러 지나가니) 무섭고도 증그럽다(징그럽다)
서산에 일락하고(서쪽 산에 해가 지고) 그믐밤 어두운데
남북촌 두세 집에 솔불이 희미하다.(소나무의 송진이 엉긴 가지를 이용해 붙인 불 - 시각적 심상)
어디서 슬픈 소리(화자의 근심을 심화시키는 소리. 노 젓는 소리 - 청각적 심상)
별포(별의 표식)에 배 떠나니 노 젓는 소리로다.
눈물로 밤을 새와(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임. 輾轉反側) 아침에 조반(아침밥)드니
덜 쓰른(덜 익은. 거친) 보리밥에 무장떵이(뜬 메주에 물을 붓고 2,3일 후에 물이 우러나면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3,4일간 익힌 것)
한 술 떠서 보고 큰 덩이 내어놓고
그도 저도 아조 없어(아주 없어) 굶을 적이 간간이라(간혹 있다)
여름날 긴긴 날에 배고파 어려웨라(견디기 어려워라)
의복을 돌아보니(옷을 갈아입지 못하는 자신의 차림새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남방염천(南方炎天 : 남쪽의 뜨거운 여름 날씨) 찌는 날에 빨지 못한 누비바지(두 겹의 천 사이에 솜을 넣고 줄이 죽죽 지게 박은 겨울 바지)
땀이 배고 때가 올라 굴둑 막은 덕석(시커먼 굴뚝을 막는 멍석 - 빨지 못하는 더러운 자신의 옷 - 비유)인가
덥고 검기 다 바리고(그만두고 견딜 수 있으나) 내암새(냄새는 어찌하겠는가. 견딜 수 없음 - 설의법)
* 기신 : 한나라 유방이 초나라 항우에게 포위되었을 때 유방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장수.
* 굴삼려 : 억울함으로 인해 멱라수에 스스로 몸을 던졌던, 초나라의 충신 굴원.
* 차역 천명 : 이 일 역시 하늘의 명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작가가 추자도로 유배를 오게 된 일을 말함.
* 출몰 사생 :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고비를 만남.
* 풍도 : 도교에서 말하는 지옥.
* 적객 주인 : 유배 온 죄수를 관리하는 일을 맡은 사람.
* 세부득이 : 사정이 어쩔 수 없어.
* 청진의 : 지네의 일종. 푸른빛을 띠고 있음.
* 남방 염천 : 남쪽의 몹시 더운 날씨.
{해제}
이 작품은 조선 정조 때 궁중에서 별감으로 일했던 작가가 자신의 잘못으로 추자도에 유배되어 유배지에서의 어려움과 자신의 삶에 대한 회상을 기록한 장편 가사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뉘우침을 솔직히 드러내고, 유배지에서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제}
유배 생활의 고통과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
{구성}
•도입: 귀양 가는 신세에 대한 한탄
•과거 회상: 어린 시절부터 벼슬살이까지의 회상, 유배의 이유
•유배의 여정: 추자도까지의 유배 여정
•유배 생활: 추자도에서의 궁핍한 생활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
•결사: 유배에서 풀려나기를 기원함.
{특징}
-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 대구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운율감을 형성함
- ‘추자섬’을 ‘지옥’으로 표현해 절망적 인식을 드러냄
- 화자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자신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한탄함
- 비유법을 활용해 비참하고 어려운 유배 생활을 효과적으로 표현함.
◎惠吉 李尙迪(혜길 이상적/1804~1865/溫陽 군수/秋史 金正喜의 歲寒圖)
1804년(순조 4)∼1865년(고종 2).조선 후기의 역관·문인.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 한어역관(漢語譯官)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연직(李延稷)이다.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이상적은 1828년(순조 28) 춘당대(春塘臺)에서 개강할 때에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1845년(헌종 11)에는 임금으로부터 전답과 노비를 받았으며 1847년(헌종 13)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이나 품계가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848년(헌종 14)에는 비서성(祕書省)에서 정조·순조·헌종의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모아 편찬한 역사책)을 간행하는 데 참여했다.
그리고 계속해 『통문관지(通文館志)』·『동문휘고(同文彙考)』·『동문고략(同文考略)』 등을 간행하는 데에 참여했다. 1862년(철종 13) 1월에는 임금의 특명으로 영구히 지중추부사직을 받았으며, 다음 해 7월충청남도 온양(溫陽)의 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역관의 신분으로 12번이나 중국을 여행했다. 당대의 저명한 중국문인과 친구관계를 맺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게 되어 1847년(헌종 13)에는 중국에서 시문집을 간행했다. 그가 교유한 중국학자들의 면모에 대해서는 그들로부터 받은 편지글을 모아 귀국 후에 펴낸 『해린척소(海隣尺素)』에 잘 나타나 있다. 또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북경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의 문사 16명의 제찬(題贊)을 받아온 일은 유명하다.
이상적은 시 이외에도 골동품이나 서화·금석(金石)에도 조예가 깊었다. 중국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조선의 금석문을 모아 편찬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부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상적의 저서로는 『은송당집』 24권이 있으며, 이 밖의 작품들은 청나라의 학자들로부터 받은 편지글을 모아 엮은 『해린척소』에 부분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학 작품은 다양한 반면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의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역관으로서 언어에 대한 탁월한 재능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 쓰인 시어가 섬세하고 화려하며 때로는 맑고 우아하다는 평을 얻었다. 「거중기몽(車中記夢)」이라는 작품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명성을 얻었으며 헌종이 그의 시를 읊어 ‘은송(恩誦)’이란 별호로 불리기도 했다.
◎國賓 申 櫶(국빈 신헌/1810~1884)
조선 후기의 무신·외교가.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신관호(申觀浩).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금당(琴堂)·동양(東陽)·우석(于石). 할아버지는 훈련대장 신홍주(申鴻周)이며, 아버지는 부사 신의직(申義直)이다.
전형적인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당대의 석학이며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다양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이면서도 독특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 유장(儒將)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또 개화파 인물들인 강위(姜瑋)·박규수(朴珪壽) 등과 폭넓게 교유하여 현실에 밝은 식견을 가질 수가 있었다.
정약용의 민간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 발전시켜 『민보집설(民堡輯說)』·『융서촬요(戎書撮要)』 등과 같은 병서를 저술, 자신의 국방론을 집대성시켰다. 김정희로부터 금석학(金石學)·시도(詩道)·서예 등을 배워 현재에는 전하지는 않지만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이라는 금석학 관계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예서(隷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제작에 조력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유산필기(酉山筆記)』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1843년(헌종 9) 전라도우수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두었다. 이 밖에 농법에도 관심을 가져 『농축회통(農蓄會通)』이라는 농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827년(순조 27) 할아버지 신홍주의 후광을 업고 별군직(別軍職)에 차출되고, 이듬해 무과에 급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순조·헌종·철종·고종조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헌종 때에는 왕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전라우도수군절도사·봉산군수·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헌종이 급서하고 철종이 등극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유리되었다.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에 전라도녹도(鹿島)에 유배되었다. 1853년 감형되어 무주로 이배되었다가 철종의 배려로 1857년에 풀려났다.
철종대에는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이어 형조판서·한성부판윤·공조 판서·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병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로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다음 좌참찬 겸 훈련대장에 임명되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그 뒤 어영대장·지행삼군부사(知行三軍府事)·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74년 진무사(鎭撫使)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 연해의 요해지인 광성(廣城)·덕진(德津)·초지(草芝) 3진(鎭)에 포대를 구축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운양호(雲揚號)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는 판중추부사로 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의 협상 전말을 『심행일기(沁行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1878년에는 병으로 총융사를 사직하고 한동안 노량진에 있는 은휴정(恩休亭)에서 요양하기도 하였다. 1882년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역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Shufeldt, R. W.)와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左甫 李世輔(좌보 이세보/1832~1895)
조선후기 중앙관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개명 이인응(李寅應) 자 좌보(左輔) 문무구분 문관 생년 임진(壬辰) 1832 졸년 미상(未詳) 시대 조선후기 왕대 고종(高宗) 본관 미상(未詳) 항목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음관] 음안(蔭案) 제수년월 1865 [을축(乙丑) 윤5월 초6일] 이종정경(以宗正卿) 래(來: 부임되어 옴)『은대선생안(銀臺先生案)』(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9727])
◎勉菴 崔益鉉(면암 최익현/1833~190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경기도 포천 출신. 최대(崔岱)의 아들이다. 6세 때 입학해 9세 때 김기현(金琦鉉)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다. 14세 때 경기도 양근(楊根) 벽계(蘗溪)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격몽요결(擊蒙要訣)』·『대학장구(大學章句)』·『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이후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관직강·사헌부장령·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70년(고종 7)에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수봉관·지방관·언관으로 재직 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특히 1868년에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 상소는 최익현의 강직성과 우국애민정신의 발로이며 막혔던 언로를 연 계기가 되었다.
1873년에 올린 「계유상소(癸酉上疏)」는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서원의 철폐를 대거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상소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제수되어 누적된 시폐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권신들이 반발해 도리어 대원군 하야를 부자이간의 행위로 규탄하였다. 이에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민씨 일족의 옹폐를 비난했으나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濟州道로 流配되었다.
1873년부터 3년간의 流配生活을 계기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였다. 첫 시도로서 1876년「병자지부복궐소(丙子持斧伏闕疏)」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였다. 이 상소로 흑산도로 流配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는 꺾이지 않았다.
流配에서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개국 이래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운동·청일전쟁 등 연 이어 일어나 국내외 정세가 복잡했던 때이다. 특히 1881년에 신사척사운동이 일어나면서 위정척사사상이 고조되고 있을 때 최익현이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최익현의 위정척사사상은 항일투쟁의 지도이념으로 성숙하였다. 이것은 최익현의 위정척사사상이 고루하거나 보수적이지 않은 것은 보여준다. 또, 항일정치투쟁방법도 이제까지의 상소라는 언론 수단에 의한 개인적·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집단적·무력적인 방법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위정척사사상도 배외적인 국수주의로부터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각된 민족주의로 심화되었다. 이러한 최익현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오랫만에 침묵을 깨고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 때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각부군선유대원(各府郡宣諭大員)·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당시 올린 상소는 1896년에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1898년「사의정부찬정소(辭議政府贊政疏)」와 재소, 「사궁내부특진관소(辭宮內府特進官疏)」와 재소, 1904년「사궁내부특진관소」의 삼소·사소, 「수옥헌주차(漱玉軒奏箚)」, 「궐외대명소(闕外待命疏)」와 재소·삼소·사소 등이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하였다.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팔도사민」을 돌리고 일본 정부에 대한 문죄서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를 발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의 우국애민의 정신과 위정척사사상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위정척사운동에 비해 최익현의 학문은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성리학에 기본을 둔 이항로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나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형이상학보다는 애국의 실천 도덕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는 명분론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익현의 이기론은 이항로의 심전설(心專說)을 계승했을 뿐이다.
그러나 최익현의 사상과 이념은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실천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구국애국 사상으로, 민족주의 사상으로 승화, 발전할 수 있었다. 여기에 위정척사사상의 역사적 역할과 의의가 있는 것이다.
최익현의 사우관계는 김기현·이항로를 스승으로 성리학을 배웠으나 후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학우관계는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인 이준(李埈)·이박(李墣)·임규직(任圭直)·김평묵(金平默)·박경수(朴慶壽)·유중교(柳重敎) 등으로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다. 저서는 『면암집』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의 대의비인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제향은 모덕사(慕德祠)와 포천·해주·고창·곡성·순화·무안·함평·광산·구례 등에서 봉향되고 있다.
◎陽園 申箕善(양원 신기선/1851~1909)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언여(言汝), 호는 양원(陽園)·노봉(蘆峰). 신희조(申羲朝)의 아들이다. 1877년 대과별시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해 1878년 사간원정언, 1879년 홍문관부교리, 1881년 시강원문학 등을 지냈다. 1882년 통리기무아문주사를 거쳐, 다시 시강원문학이 되어 기무처(機務處)에 나가 수시로 영의정과 국정을 의논하였다. 관제개혁 때 통리내무아문참의가 되었다. 개화당 인물들과 밀접하게 교류했기 때문에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 내각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1886년 전라도 여도(呂島)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풀려나 호조참판을 거쳐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의 공무대신이 되었다. 1895년 군부대신에 임명되면서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었고, 중추원부의장을 거쳤다.
1896년 항일의병항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 선유활동을 하였다. 학부대신이 된 뒤에 단발, 양복 착용, 국문과 태양력 사용, 청나라에 대한 조공폐지 등을 반대하다 독립협회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얼마 뒤 사직하였다.
1897년 다시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1898년 법부대신이 되었을 때 나륙법(拏戮法)과 대역참형(大逆斬刑)을 복구하려다 다시 독립협회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고발, 탄핵되어 면직되었다. 이듬 해 1899년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의정부참정, 1900년에 궁내부특진관·중추원의장, 1901년에 비서원경(秘書院卿)·법부대신·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1902년에 군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903년에 철도원총재가 되었으며, 1904년 보안회 회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의정부참정을 거쳐 1905년 함경도관찰사, 1906년 홍문관학사, 1907년 장례원경(掌禮院卿)·수학원장(修學院長) 등을 지냈다. 같은 해에 민병석(閔丙奭)·이용직(李容稙) 등과 함께 유도(儒道)로써 체(體)를 삼고 신학문으로 용(用)을 삼아 신구사상(新舊思想)의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학회(大東學會)를 창립, 회장이 되었다. 저서로는 『양원집(陽園集)』·『유학경위(儒學經緯)』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松村 池錫永(송촌 지석영/1855~1935/동래부사/薪智島 流配 1892년 流配에서 풀려남)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서울 낙원동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醫學敎育을 받은 일은 없었으나 일찍부터 서학(西學)을 동경하여 中國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하였는데, 특히 관심을 둔 것은 英國人 제너(Jenner,E.)의 종두법(種痘法)에 관한 것이었다.
1876년(고종 13) 丙子修護條約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그 해 수신사로 池錫永의 스승인 박영선(朴永善)이 가게 되어 그에게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종두법의 실황을 조사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래서 박영선은 오다키[大瀧富川]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얻어다 전해주었다.
그 뒤 1879년 日本海軍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妻家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公開的인 종두법 實施의 始初이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종두를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묘의 공급이 잘 안 되었으므로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日本 도쿄에 건너가서 그곳 衛生局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 기쿠치[菊池康庵]에게 종두기술을 익히고 두묘의 제조, 저장법과 독우(犢牛)의 사양법(飼養法)·채장법(採漿法)을 배운 뒤 두묘 50병(柄)을 얻어가지고 歸國하였다.
서울에서 두묘를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면서 군의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렸다. 그는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종두장은 난민들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정국이 바뀌면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재건하였다.
그는 전라도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고, 이듬해에는 충청도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었다.
『한성순보(漢城旬報)』에 外國의 종두에 관한 기사가 실려 종두법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종두법의 보급에 진력하면서도 1883년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1885년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지어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우두법에 관한 저서로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너의 우두법 발견을 비롯하여 우두의 실시, 천연두의 치료, 두묘의 제조, 독우의 사양법·채장법이 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같은 해 우두교수관으로서 전라도지방을 순회, 시종(施種)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1887년 전라남도 강진의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어서도 여전히 우두를 실시하였다.
1892年 流配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시종하였다. 1894년 甲午改革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하게 되어 떳떳하게 우두를 보급할 수 있었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승지를 거쳐 동래부사를 지냈는데 임지에서도 우두를 실시하기를 잊지 않았다. 학부대신에게 의학교의 설립을 제의하였고,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인 교사들을 초빙하고 일본 의학책을 번역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1902년 그의 제창으로 훈동(勳洞)에 의학교의 부속병원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의학교는 첫 졸업생 19명을 배출했다.
그는 『황성신보(皇城新報)』에 「양매창론(楊梅瘡論)」을 발표하여 매독의 해독을 대중에게 알렸고, 온역(瘟疫)·전염병·양매창(楊梅瘡)의 예방법을 만들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됨과 함께 학감에 취임하였다. 1910년에 사직하였으니 11년 동안 의학교육에 헌신한 셈이다. 그의 업적은 근대의학의 도입에만 그치지 않았다. 1882년에 올린 상소에서 급속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위하여 일종의 훈련원을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그곳에 당시의 세계정세를 알 수 있는 책과 외국의 과학기술에 관한 책들을 모으고, 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물을 수집하여 전국에서 뽑아온 젊은이들에게 보이고 가르치자는 야심적인 계획이었다.
이처럼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그는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갖가지 토론회에 참가하여 의견을 발표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시야를 넓혀갔다.
다른 회원들이 대부분 서양문물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쏠려 있던 때 좀 다른 생각을 가졌던 듯하다. 예컨대, 그는 음력을 주로 쓰되 그 옆에 양력을 아울러 표시하자는 의견이었다.
또한,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주시경(周時經)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지어냈다.
그의 주장은 인정을 받아 많이 받아들여졌고,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太極章)·팔괘장(八卦章) 등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합병을 당하자 모든 공직을 버렸다. 일본의 간곡한 협조요청이 있었으나 초야에 묻혀 살다가 80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濟秀 李在守(제수 이재수/1877~1901/民軍의 主將/평리원에서 絞首刑)
조선 말기 민란의 주동자. 일명 제수(濟秀). 본관은 고부(古阜). 제주도 대정 출신. 이시준(李時俊)과 송씨 부인 사이의 둘째아들이다. 관노(官奴) 또는 마부 신분으로 나타난다. 어려서부터 싸움과 장난을 잘하였고, 칼과 활 등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당시는 계속되는 凶年과 경래관(京來官)의 탐학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정부에서 파견된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의 남세(濫稅)와 이와 결탁한 천주교도의 작폐가 심각하였다. 1901년 대정군 인성리에서 일어난 군민과 天主敎徒의 충돌사건이 민란의 발단이 되었다. 군민들은 봉세관의 토색과 天主敎徒의 잔인성을 성토하고 이의 광정(匡正)을 목사에게 호소하려 하였다. 이 때 자진 참가하여 민군(民軍)의 주장(主將)이 되어 天主敎徒의 응징을 적극 촉진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대정군민의 궐기에서 3개 읍민의 궐기대회로 확산되어 濟州城을 둘러싼 민군과 주(州) 성내의 天主敎徒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주 성내에서는 주민과 天主敎徒 사이에 반목이 생기고 婦女子들의 天主敎徒 군에 대한 반대궐기가 일어났는가 하면, 주 성 밖에서는 隱身해 있던 天主敎徒들이 민군 측에 의하여 殺害되는 사태가 나타났으며 입성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政府에서는 진압군을 파견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프랑스함대와 일본군함까지 出動하는 사태로 發展하였다. 결국, 政府鎭壓軍에 의하여 李在守 등은 서울로 押送되고, 주민들은 事後對策을 보장받음으로써 난은 鎭壓되었다. 한편, 평리원에서 絞首刑이 確定되었다.
編輯 後記
※ 登場人物 中 文化柳氏는 한글 姓氏“유”를“류”(모든 機關에서의 文獻 번역은 아직까지‘유’로 되어있음을 알립니다.)로 변경 하였습니다.
※ YouTube 동영상 음성파일 3부작을 文化柳氏安山宗中 살림만으로도 바쁜 業務에도 불구하고 本文 50여 페이지 量을 正確하게 텍스트化 校正(특히 중국, 러시아 지명, 인명의 정확도)하는데 큰 도움을 준 宋明淑 課長의 協助에 깊이 感謝드립니다.
登場人物들의 歷史的 事實. 行蹟 등을 追加 文化柳氏의 歷史的 人物 再構成 編輯하여 後孫들에 남겨주고자 하였다.
編輯人 또한 2年間의 現代式 流配를 받아 解配된 事實이 있었다.
文化柳氏 中門祗侯使公派(11世)⇒中郞將宗中(14世)⇒安山宗中(19世)
安山宗中會長 朗惠 柳 志 世(大丞公 33世)
2018年 7月 10日 伏中炎天 編輯 作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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