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학산초담(鶴山樵談) 본문
학산초당---선조 작품과 광해군 작품.폐세자 작품
光海王(光海君)
2013-11-21 14:19:55
『학산초담(鶴山樵談)』의 내용은 어떠한가요.
이 책은 허균이 25세 때인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을 피하여 강릉에 머무를 때 쓴 책으로 시화ㆍ시평 99칙(則), 기타 9칙(則) 등 108칙으로 구성되었다. 1969년 조윤제가 소장한 편자 미상의 《패림(稗林)》을 탐구당에서 영인하면서 6집에 실려 있는 이 글이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성균관대학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된 《허균전집》에도 수록되었다.
이 책은 문(文)은 도(道)를 실어 전하는 도구(載道論)로 보는 당말ㆍ송대의 시풍을 심미론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이백ㆍ두보로 대표되는 성당(盛唐) 시대의 시풍을 회복할 것을 골간으로 하고 있다.
학당파(學唐派) 시인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3당시인(三唐詩人)인 최경창ㆍ백광훈ㆍ이달 18칙, 허봉 25칙, 허난설헌 6칙, 노수신ㆍ정사룡ㆍ황정욱 5칙, 이주(李冑)ㆍ김정ㆍ백대붕에 이르는 당시풍(唐詩風) 시인들과 기녀ㆍ서얼 등의 시도 평하고 있다. 조선시학의 흐름도 송(宋)시풍에서 당 시풍으로의 전환에 주목하고, 당시를 확산, 보급시킨 노수신ㆍ정사룡ㆍ황정욱을 높이 평가하였다. 제왕문장(帝王文章)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환골탈태에 대하여 말하기를, “문장이 전인(前人)들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시정신이 없으면 바른 환골탈태라 할 수 없다.”고 하여 수사적 표현기교와 함께 시 정신을 중시하였다.
제왕의 문장은 반드시 범인(凡人)을 초월하게 마련이다. 우리 역대 임금의 작품들이 대개는 《대동시림(大東詩林)》에 보이는데 그 밖에는 전하는 것이 없다. 현재 임금은 하늘이 낸 어진 임금으로 무릇 교유(敎諭)하는 말을 손수 지었는데, 질박하고 엄숙하여 기백(氣魄)이 있었다. 그러나 시는 있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러던 차에 신묘년(선조 24, 1590) 가을에 외간(外間)에 임금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절구(絶句)가 있었으니 다음과 같다.
☞ 조선 14대 선조 작
한밤에 칼 어루만지니 호기가 무지개를 토해라/撫劍中宵氣吐虹
웅장한 마음은 우리 동방을 안정시키고자 했더니/壯心曾欲奠吾東
이제껏 그 사업은 한단의 걸음 주D-001/如今事業邯鄲步
가을 바람에 고개 돌리니 한스럽기 그지없네/回首西風恨不窮
시격(詩格)이 노련하고 건장하여 시인에 못지않았는데, 어찌 그 이듬해 변고 주D-002가 있을 줄을 알았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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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東宮)이 또한 임금 되기 전에 시[詞藻]에 뜻을 두어 고서(古書)를 많이 모았다. 언젠가 삼청동시(三淸洞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사(進士) 유희발(柳希發)의 궤 속에 있다기에 그에게 삼가 청하여 읽어보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 조선 15대 광해군 작
푸른 이내 속에 붉은 골짜기는 그늘졌는데/丹壑陰陰翠靄間
맑은 시냇가 기이한 풀들이 천단을 에웠도다/碧溪瑤草繞天壇
노을 어린 옥솥에 단약은 익어가나/煙霞玉鼎靈砂老
다래넝쿨에 달 비치고 솔바람 일어도 학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蘿月松風鶴未還
시화(詩話)가 맑고 서늘하며 자법(字法)도 또한 기이하다. 임금의 제작은 저절로 세속 시인들의 구기(口氣)와는 다르다. 아, 존경할 만하다.
희발(希發)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광해군의 처남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계해년(1623)에 사형되었다.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위주로 하여 비록 경렴(景濂) 같은 대유(大儒)로도 역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 날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찌꺼기를 빨아 비위를 썩게 하는 촌스러운 말을 만들 따름이니, 읽으면 염증이 날 정도이다. 성당(盛唐)의 소리는 다 없어져 들을 수가 없다. 매월당(梅月堂)의 시는 맑고 호매(豪邁)하고 세속을 초탈하였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 스스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러는 마음을 쓰지 않고 갑자기 지은 것이 많기 때문에 간혹 가다가 박잡한 것도 섞여 결국 정시(正始)의 시체주D-003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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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反正 後 光海君의 폐세자(廢世子)의 詩
1.세자를 폐하니 이때 나이 26세였다. 그는 나룻배에서 시 읊기를,
麈寰翻覆似波瀾 / 번복되는 세상일 파도 같으니
何必憂愁心自閑 / 하필 근심하리 마음 절로 한가 하다네
二十六年眞一夢 / 26년 참으로 한 꿈이로다
好須歸去白雲間 / 구름 사이로 돌아가게 되어 좋다네
하였다.
2. 光海君의 폐세자(廢世子)가 귀양살이에 있으면서 詩를 읊기를,
本是同根何太薄 / 본시 형제간인데 이다지도 박할 쏜가
理宜相愛亦相哀 / 서로들 사랑하고 슬퍼해야 하지 않소
綠何脫此樊籠去 / 어떻게 하면 이 유배지를 벗어나
綠水靑山任去來 / 녹수청산 자유롭게 오고 갈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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