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錄勳都監宣賜御膳宴會圖- 본문
錄勳都監宣賜御膳宴會圖----유희분(柳希奮)·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지은 칠언시 “제녹훈도감연회도”
光海王(光海君)
2013-10-28 22:33:54

녹훈도감선사어선연회도(錄勳都監宣賜御膳宴會圖)
광해군이 공신들을 위로하기 위해 베푼 잔치 그림
1613년(광해군5) 견본채색,83.0X69.0m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50호
1613년(광해5) 3월12일 백악아래서 위성(衛聖).익사(翼社).정운(定運).형난공신(亨難功臣) 가운데 공훈이 현저한 공신 170명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연회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마지막 하단에는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지은 칠언시 “제녹훈도감연회도”가 쓰여 있다. 시 말미의 “만력 계축(萬曆 癸丑)”이라 써있어 그림의 제작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연회의 참석자 명단을 적은 좌목은 없지만 “광해군일기”1613년(계축년)3월12일조에서 그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진감은가하능연(珍甘恩賜下凌煙) 맛좋은 음식과 은사품을 능연각에 내리고,
법부생가음중선(法府笙賜會衆仙) 법부의 생황가락 속에 뭇 시선들이 모이었네.
수식한정소상국(誰識漢庭蕭相國) 누가 알리오. 한나라 조정의 상국 소하(蕭何)가
괴장문묵오거선(愧將文墨誤居先) 부끄러이 문묵만 가지고 맨 앞에 잘목 선 것을
광해 64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3월 12일(경오) 3번째기사
공신의 호칭과 공신에 녹훈된 자들에 대한 사관의 설명
공신은 무릇 네 가지 호칭이다. 첫번째는 ‘갈충 진성 동덕 찬모 좌운 위성 공신(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衛聖功臣)’이다.【2등은 ‘좌운’ 2자를 줄이고, 3등은 ‘동덕 찬모 좌운’ 6자를 줄였다. 】 1등이 10인, 2등이 17인, 3등이 53인이다. 최흥원(崔興源)·정탁(鄭琢)·윤두수(尹斗壽)·이항복(李恒福)·윤자신(尹自新)·심충겸(沈忠謙)·유자신(柳自新) 【왕비의 아버지이다. 】 등이 으뜸을 차지하였다. 환관·액정관(掖庭官)·서리 등이 모두 끼어 녹훈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미 작고한 사람들이라 적자손이 작위를 대신 받았다.
두 번째는 ‘효충 분의 병기 결책 익사 공신(效忠奮義炳幾決策翼社功臣)’이다.【2등은 ‘결책’ 2자를 줄이고 3등은 ‘병기 결책’ 4자를 줄였다. 】 1등이 5인, 2등이 15인, 3등이 28인이다. 허성(許筬)·김이원(金履元) 【즉 신원(信元)의 개명이다. 】, 유희분(柳希奮)·최유원(崔有源)·윤효전(尹孝全) 등이 으뜸을 차지하였다. 환관·위사(衛士)가 모두 끼어 녹훈되었다.
세 번째는 ‘수성 결의 분충 효절 정운 공신(輸誠結義奮忠效節定運功臣)’이다.【2등은 ‘효절’ 2자를 줄이고, 3등은 ‘분충 효절’ 4자를 줄였다. 】 1등이 2인, 2등이 5인, 3등이 4인이다. 이산해(李山海)·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이성(李惺) 등이 으뜸을 차지하였다.
네 번째는 ‘분충 병의 결기 협모 형난 공신(奮忠秉義決幾協謀亨難功臣)’이다.【2등은 ‘협모’ 2자를 줄이고 3등은 ‘결기 협모’ 4자를 줄였다. 】 1등이 2인, 2등이 12인, 3등이 10인이다. 신율(申慄)이 으뜸을 차지하였다. 합하여 1백 70인이다.
이른바 ‘위성 공신(衛聖功臣)’이란 임진 왜란 때 왕을 따라 이천(伊川)·전주(全州)에 갔던 자들을 녹훈한 것이다. 모두가 의주(義州)에 호종(扈從)한 신하 가운데 무군사(撫軍司)로 파견된 자들이었는데, 길거리에서 빌붙은 자가 또한 많았다. 이미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낀 자가 20인이었는데, 애초 왕이 분조(分朝)했을 때 토벌한 공도 없고 선조(宣祖)의 명으로 왕을 따라 간 자는 더욱 기록할 만한 노고가 없었다. 왕이 이러한 일로 존호(尊號)를 받고서는 사사로운 은혜를 널리 심고자 하였기에 녹훈한 대상이 호성 공신보다 많았다.
이른바 ‘익사 공신(翼社功臣)’이란 임해군(臨海君)의 역모를 무고하고 옥사를 국문하였던 여러 신하들을 녹훈한 것이다. 선조(宣祖)의 빈소를 차리자마자 사군(嗣君)이 맨 먼저 큰 옥사를 일으키어 지친(至親)과 종실(宗室)과 명장(名將)을 해치니, 대부분이 무고하게 잡혀 죽은 사람들이다. 인망을 잃고 국맥을 손상시킨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으니, 목벨 만한 점은 있으나 상줄 만한 점은 없다. 왕이 공을 녹훈하도록 특별히 명하였으며, 삼사(三司)에 끼어 논한 관원은 주창자와 따라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녹훈하였다.
수문장 김위(金渭)가 스스로 말하기를
“임해군 궁노(宮奴)가 철퇴와 대검을 싸가지고 궁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혼자 보았다.”
하였다. 당시에 모두 생각하기를
“김위가 문을 지키면서 그를 보고도 붙잡지 않고 멋대로 들어가도록 버려 두었다가, 옥사가 일어나자 말하였으니 간악한 점이 있을까 의심스럽다.”
고 하였다. 대신들이 그를 국문하려고 하자 왕이 화를 내며 허락하지 않아 마침내 김위의 말을 가지고 옥사를 만들었다.
이 때에 이르러 2등에 녹훈되고 송산군(松山君)에 봉해졌다. 김위는 본래 김제(金堤) 사람으로, 향리에서 침을 뱉으며 욕을 하였다. 심희수가 처음에는 최유원의 말을 믿어 삼사의 계문에 참여하였고 또 국문에 참여한 공로로 여러 대신과【이원익·이덕형·이항복·이산해·윤승훈·기자헌. 】 함께 2등에 녹훈되었다. 희수가 그것을 부끄러워하여 사양하였으나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계사나 차자가 아니면 공신 호칭을 쓰지 않았다.
이른바 ‘정운 공신(定運功臣)’이란 정인홍이 상소하여 유영경(柳永慶)을 논한 것 때문에 녹훈한 것이다. 왕이 동궁 시절에 실덕(失德)이 많아 선조가 다른 아들에게로 마음을 바꾸지나 않을까 의심하고는 외척의 신하인 유(柳)·정(鄭) 집안과 자못 결탁하여 몰래 의지하였다. 드디어 유영경이 동궁을 모해한다는 설이 있자 인홍이 그의 뜻을 엿보아 동궁 보호를 자임하고 상소하여 영경을 논하며 상의 뜻을 시험하였다. 선조가 과연 크게 노하고는 인홍의 당파를 모조리 목베려 하였는데, 대개 동궁이 당파를 심어 자기를 넘어뜨리는가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이 예측 불허의 지경이었는데 마침 상이 세상을 떠나 풀려났다. 인홍이 왕의 부자에 대하여 충성스럽지 못했고 공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왕은 자기를 편든 점을 좋아하여 대훈(大勳)이라 칭하였다. 이산해·이이첨 등은 은밀하게 결의하였다고 하여 모두 녹훈될 수 있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른바 ‘형난 공신(亨難功臣)’이란 신율(申慄)이 무고한 공이다. 무고한 왕손을 죽이고 그 결과로 황해도 전체에 독이 미쳤다. 사람들이 모두 율의 살을 씹어 먹고 싶어하였으나 왕은 더욱 그를 총애하였다. 국문에 참여하였던 여러 신하는 기일의 길고 짧음을 막론하고 모두 녹훈되었다.
네 종류의 공신이 한꺼번에 특진하여 하급 관리에서 재상이 된 자가 태반이고 부원군에 봉해진 자가 27인이나 되었으므로 고관 대작이 반열에 넘쳤다.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된 자가 몇 만을 헤아렸고, 작위가 높아진 자손 및 정훈(正勳)에 미치지 못하여 자급을 높여준 자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이첨은 세 종류의 공신에 녹훈되었다. 임해군의 옥사를 고변하던 처음에 이첨이 유배지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그 모의에 참가하지 못하였으므로 큰 한으로 여겼다. 이어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정언으로 있을 때에 중국 장수가 임해군을 보고자 할 때 그것을 중지하도록 창론(倡論)하여 계청하였다. 이것은 역적의 싹을 미리 막은 공이 된다.”
하였고, 또 그 당시 사간원 우두머리 정경세(鄭經世)를 증거로 끌어댄 다음 먼저 경세에게 자급 한 단계를 올려주고 스스로는 익사 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첨이 창론하였던 것도 아니고 또 옥사에 간여하였던 것도 아니다. 그 오류와 범람이 모두 이와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2책 157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변란-정변(政變)
'光海主&文城郡夫人柳氏(21世)'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해초상록(光海初喪錄)光海王(光海君) (2) | 2023.03.09 |
---|---|
선조 말, 광해군 즉위光海王(光海君) (1) | 2023.03.09 |
학산초담(鶴山樵談) (0) | 2023.03.09 |
광해주 제주도 이배 시 시와 세자 시절 시문 (0) | 2023.02.28 |
光海主 및 文城郡夫人(文化柳氏) (0) | 2023.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