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仁穆大妃를 西宮 본문
仁穆大妃를 西宮
朝鮮王朝時代 聯關 자료해설
2019-05-27 13:08:43
仁穆大妃를 西宮
광해군 즉위 후 실세로 부상한 대북 정권은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이 살아 있으면 그를 추대하려는 역모가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고 영창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그리하여 1613년 박응서 등 명문가의 서자 일곱 명이 조령고개에서 일으킨 은상인 살인사건을 역모로 확대해 영창대군을 연루시켰던 것이다. 광해군이 친히 국문하자 박응서는 '참 용은 일어나지 않고 거짓 여우가 먼저 울도다'라고 쓴 격문을 돌린바가 있는데, 여기서 참 용은 영창대군을 일컫는 것이며 거짓 여우는 광해군을 일컫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유에 넘어간 박응서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연결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한 것이다. 또 다른 관련자는 모든 일은 김씨의 아버지 김제남이 지휘했다고 자백했다.
이로써 대비 김씨의 아버지 김제남은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아내 노씨는 막내아들 천석만은 살리기 위해 급사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장사지낸 후 몰래 숨어 살게 했을 정도로 인목왕후의 친정은 멸문의 화를 입게 된 것이다. 아버지 김제남과 형제들은 사형당했으며 어머니 노씨는 제주도 관노비로 전락된 한편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간 후 다음해 밀폐된 뜨거운 방안에서 손톱까지 까맣게 타들어간 끝에 숨이 끊어졌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인목대비에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김씨를 국모로 모시기 곤란했던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드디어 폐모론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영창대군이 죽은 지 4년 후 이를 둘러싼 찬반 양론이 격화되자 광해군은 폐모론을 끝까지 반대하던 신하들을 유배시키고 인목대비 김씨에게는 대비라는 존호를 폐한 후 서궁에 유폐시켜버렸다.
서궁은 현재 덕수궁으로 원래는 경운궁, 명례궁이라 하였다가 한때는 월산대군의 사저로도 쓰였는데, 1593년 선조가 의주에서 환도한 후 다시 건축하여 궁궐로 삼으면서부터 서궁이라 불렀다. 1611년 창덕궁 중축을 위해 대비 김씨와 영창대군과 함께 경운궁으로 옮겼던 광해군은 두 모자만 남기고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후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사사된 후부터는 김씨 홀로 지내고 있다가 1618년 마침내 폐서모가 되어 서궁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저런 역사 통합' 카테고리의 다른 글
李适의 亂 發生 (0) | 2023.04.02 |
---|---|
許筠의 중심내용 (0) | 2023.04.02 |
정청(庭請)에 대하여 (0) | 2023.04.02 |
강홍립의 침략 소문에 도성민 동요 (0) | 2023.04.02 |
권필의 궁류시 (0) | 2023.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