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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정인홍 회퇴변척 본문

柳希亮(21世) 監司公

정인홍 회퇴변척

감사공 2023. 3. 30. 09:54

정인홍 회퇴변척

柳希亮(21)柳自新5

 

2019-05-24 09:54:50

 

정인홍 회퇴변척

 

 

 

 

 

161061, 사림들의 40년 노력으로 5현의 문묘종사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910일에는 사림의 축하 속에 의식도 치러졌다. 이제 5현이 갖는 도학상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5현의 문묘종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학자가 있었다. 바로 남명 조식의 엣 제자 정인홍이었다. 그의 불만은 퇴계 이황에 비해 자기 스승인 조식에 대한 예우는 형편없다는 데 있었다. 정인홍은 조식을 수식과 치장이 없는 참된 유학자의 표본이며, 의리가 분명하고 명분을 철저히 지킨 실천 유학의 선구자로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식은 문묘종사는 커녕 5현 대열에 거론되지도 않았다. 평소 조식이 선비로 여기지도 않았던 이언적이황은 문묘에 종사되었다. 더욱이 사림 5현의 이름으로 종사됨으로써 정인홍의 불만은 더욱 컸다. 1611(광해군 3)4월의 '회퇴변척소"는 그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정인홍은 이 상소에서 이언적이황을 냉혹하게 비판했다. 정인홍은 그들을 이록을 탐내고 진퇴가 분명하지 않은 몰염치한 사람으로 여겼다. 이들에게는 선비의 칭호를 주기도 아까운데 도학을 인정해 문묘에 종사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는 것이 상소의 골자였다. 이는 이언적이황의 종사에 대한 반발이며, 조식의 종사를 위한 시설이었다. 비난의 화살은 이언적보다는 경쟁자로 여겼던 이황에게 집중되었다.

 

정인홍은 조식이황 사이의 불화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식 이상으로 이황을 싫어했다. 음부의 집을 불태운 사람도 정인홍이었다. 그리고 1604(선조 37)에는 남명집을 간행하면서, 이정을 비난하고 이언적이황을 비하하는 내용을 실었다.

 

선조조에 조정 신료들 중에는 이황의 문인이 가장 많았다. 반면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은 조식 문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때 이들은 동인으로서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 하기도 했다. 그러나 1589(선조 22) 기축옥사로 인해 남북인으로 갈렸고,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인홍은 유성룡과 정적이 되었다.

 

양측은 이황과 조식의 학문출처언행에 대해 논란을 벌이며, 자기 스승은 높이고 상대방의 스승을 비하하는 경쟁을 지속했다. 1600(선조 33) 유성룡에 의해 퇴계집이 발간되고, 1622(광해군 14) 정인홍에 의해 남명집이 간행된 것도 경쟁의 일환이었다. 그런 가운데 1610년 사림 5현의 문묘종사는 이황의 우위를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의 회퇴변척소는 이에 대한 반발이며,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정면 충돌의 시작이었다.

 

그의 상소는 조정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쪽은 유생들이었다. 이목 등 500여 명의 성균관 유생들은 즉시 상소를 올려 이언적이황을 옹호하고 정인홍의 이름을 유적에서 삭제해 버렸다. 유적 삭제는 유림 사회에서의 매장을 의미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정인홍을 두둔하여 주동한 유생들을 금고형으로 다스렸고, 이에 유생들은 단식 투쟁을 벌이며 팽팽하게 맞섰다. 언관들조차 입장이 분분했다. 사간원에서는 정인홍을 지지한 반면, 홍문관에서는 성균관 유생을 두둔했다. 그러나 조신들 대부분은 정인홍의 눈치를 살피는 형편이었다.

 

정인홍 역시 동요하거나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유적에서 삭제된 후에도 조식을 위해 서원을 건립하고 문묘종사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그리고 향촌에서의 영향력은 물론 중앙 정계에서의 비중도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정인홍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독선적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유적 삭제를 계기로 이황의 문인들과 전국의 유림들이 정인홍에게서 등을 돌렸다. 심지어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정구도 정인홍과 의절했다. 이는 남명학파의 점진적인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정인홍의 권력도 끝이 나게 되었다. 회퇴변척 시에는 광해군의 비호를 받아 무사할 수 있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그는 폐모살제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처단되었다. 여기에는 회퇴변척으로 야기된 반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