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蓬原府夫人(東萊鄭氏)
2019-05-22 13:26:10
朝鮮時代의 女流 詩人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
본명 정양정(鄭楊貞)
“어진 어머니로는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 부인을 비롯해 정몽주의 어머니,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 같은 많은 분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버이에 효도한 여성을 든다면 신라의 지은을 비롯해 선산의 송씨, 문화의 류씨, 홍원의 현씨 등 고을마다 적지 않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 능했던 여성으로는 고구려의 여옥, 신라의 설요, 光海君의 장모 봉원부부인 동래정씨(蓬原府夫人東萊鄭氏) 本名은 정양정(鄭楊貞), 난설헌 허씨, 영향당 한씨, 품일당 전씨, 정일당 강씨, 윤지당 임씨 등 수백을 헤아릴 수 있다. 글씨 잘 쓰는 부인으로는 이제현의 손녀 이씨와 강희안의 딸 강씨, 장홍효의 딸 장씨 같은 이들이, 그림 잘 그리던 화가로는 육오당 정경흠의 누이 정씨와 강희맹의 10대 손자며느리 되는 월성 김씨 같은 이들이…. 그러나 그 모든 여성들은 한두 가지에만 능해 이름을 떨쳤을 뿐이다. 오직 한 사람 그야말로 교육가이자 인격자이면서 효녀, 현부인, 학문가, 시인, 서예가, 화가 등을 한 몸에 지닌 종합적인 모범 부인이 바로 사임당 신씨인 것이다.
정양정(鄭楊貞 1541~1620)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손자이자 정복겸(鄭福謙)의 아들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1515~1588)과 원주 원씨의 딸로 중종 36년(1541년)에 태어나 명종 9년(1554)에 14살의 나이에 동갑나기인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류자신(柳自新,1541~1612)과 결혼하여 6남(류희갱, 류희담, 류희분, 류희발, 류희량, 류희안)과 4녀를 낳았다.
1608년, 세자빈으로 있던 셋째 딸이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자, 왕비의 어머니로서 외명부(外命婦) 정1품인 부부인(府夫人)에 봉작되어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이라는 작호를 얻었다. 이후 광해군 12년(1620)에 80세로 훙서하였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왕이 폐위되자 왕비였던 딸도 폐비되어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으로 강봉되자 삭탈관직되었다.
<가족관계 편집>
부 :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1515 ~ 1588)
모 : 원주 원씨(原州 元氏)
남편 : 문양부원군 류자신
장남 : 류희갱, 차남 : 류희담, 3남 : 류희분, 4남 : 류희발, 5남 : 류희량. 6남 : 류희안
장녀 : 조국필, 차녀 : 이덕일, 3녀 : 문성군부인 류씨, 4녀 : 김시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詩才가 뛰어나서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많은 작품을 썼다.
봉원부부인 동래정씨(蓬原府夫人 東萊鄭氏)의 本名 정양정(鄭楊貞 1541~1620)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서빙고강사(西氷庫江舍)에 살면서 낙엽 지는 가운데 토란과 밤, 게를 거두는 가을의 풍성한 정경과 달빛을 대하여 잠 못 이루는 서늘한 가을밤의 맑은 풍경으로 여유를 찾아본다.
이 시는 강가 별장에 나와 가을 풍경을 노래한 오언율시로 미(微)운이다. 명문귀족의 딸로 태어나 광해군의 장모가 되었으니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므로 강가 별장에서 느낀 그늘 없는 정서를 드러냈다. 수련은 전원에 나온 심정이다. 규방에만 있다가 전원에 나오고 싶어 갈매기와 약속에 따라 강가에 나왔다고 하고, 그때가 가을이어서 강 언덕에 낙엽이 날리더라고 했다. 함련은 대구로 된 풍성한 가을 정경이다. 별장 가까운 동산에는 농부들이 토란과 밤을 풍성하게 거두고 있고, 강변에는 어부들이 살진 게와 생선을 그물로 잡아 올리고 있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대갓집 부인이라 가을날의 풍성함만 보이고 백성의 고달픈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경련은 주변 경치의 감상인데 역시 대구다. 전원에 나와 푸른 산을 바라보다가 술을 마련하여 달을 감상하는 여유롭고 한가한 정취를 표현하였다. 미련은 가을밤의 흥취다. 서늘하고 맑은 밤기운에 잠이 들지 않아서 밤이슬을 옷에 적시며 서성이고 있다. 사대부 부녀의 유족하고 고아한 흥취를 짜임새 있게 표현했다고 하겠다.
《출왕서빙고강사(出往西氷庫江舍)》
來訪沙鷗約 江皐木葉飛 園收芋栗富 網擧蟹鮮肥
내방사구약 강고목엽비 원수우율부 망거해선비
갈매기와 약속하고 찾아와 보니/강 언덕엔 나뭇잎 날리네
동산에서는 토란과 밤을 가득 거두고/그물을 건지니 살찐 게가 신선하네
褰箔看山翠 開樽對月輝 夜凉淸不寐 松露滴羅衣
건박간산취 개준대월휘 야량청불매 송로적라의
발을 걷고 푸른 산 바라보며/술동이 열고 달빛을 대하니
밤은 서늘하고 맑아 잠 못 이루는데/소나무 이슬이 비단옷 적시네
갈매기와 약속에 따라 강가에 나왔는데 강 언덕에는 낙엽이 날리네.
동산에는 토란과 밤을 풍성히 거두고 그물 들면 게와 생선이 살지네.
발을 걷어 푸른 산을 바라보고 술통을 열어 밝은 달을 마주하였네.
밤이 맑고 차가워 잠이 오지 않아 솔잎 이슬에 비단옷을 적시네.
蓬原府夫人 東萊鄭氏(75歲)를 위한 三尊의 通明殿 잔치
위 작품 외 효종의 사위 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의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 서총대(瑞葱臺)와 통명전(通明殿)에서 삼존(三尊=王.王妃.世子)의 贈詩에 次韻하였던 시 4首가 전해지고 있다.
폐비(廢妃 광해의 비) 류(柳)씨의 어머니는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 정(鄭)씨인데 좌의정 유길(惟吉)의 딸이다. 광해군 을묘년에 정씨를 위하여 서총대(瑞蔥臺)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폐동궁(廢東宮 광해군의 아들)이 시(詩)를 지어 주기를,
차운(次韻) 한시에서,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 또는 그 방법.
遐齡八袠慶綿綿 / 팔순(八旬)높은 수(壽)에 경사가 연이으니
玉樹芝蘭滿眼前 / 옥수지란(玉樹芝蘭)이 눈앞에 가득하다
宸眷深嘉垂百歲 / 사위인 임금께서는 백 년 가까이 산 것을 가상히 여기고
孝思常願奉千年 / 외손인 나의 효성된 마음은, 천년토록 모시기를 축원 하오
樽開紅醞天香襲 / 병뚜껑을 열자 붉은 술의 향기가 하늘에 떠오르고
珍賜瑤臺雨露偏 / 요대(瑤臺)에 잔치 내리시니, 은혜가 망극하네
上苑新秋晴日永 / 궁중의 첫 가을은 맑은 날씨가 길었는데
渚連沙鳥五雲邊 / 못 속에 연꽃과 모래에 나는 새는 오색 구름 가이로다
하였다.
鄭氏가 次韻하기를,
繼繼承承寶曆綿 / 대대로 계승하여 보력(寶歷 나라의 연대수를 말함)을 이 었으니
文慈武孝兩無前 / 문왕의 자애(慈愛)와 무왕(武王)의 효성이 모두가 전에 없는 일일세
光騰門戶逢千載 / 문호(門戶)에 빛남이 천년 만에 한 번 때를 만났고
德配乾坤祝萬年 / 천지 같은 높은 성덕(聖德) 만년(萬年) 수(壽)를 축원 하 오
未死重遊蓬島上 / 죽기 전에 봉도(蓬島 신선이 사는 곳)위에 다시 놀아
餘生深荷聖恩偏 / 남은 평생에 임금 은혜 깊이 입었네
陽春一曲誰能和 / 양춘의 한 곡조를 뉘 능히 화답 할고
少海奎章暎日邊 / 소해(少海 동궁)의 문장이 해[日]가에 빛나도다
하였다.
陽春=초(楚) 나라의 노래에《양춘백설곡(陽春白雪曲)》이라는 좋은 곡조가 있었 다
폐비(廢妃) 류씨가 또 정씨를 위하여 통명전(通明殿)에서 수연(壽宴)을 베풀고, 광 해군이 시를 주었는데,
種德名門壽福全 / 덕을 쌓은 빛난 가문 수복(壽福)도 많은지고
宜家令範更無前 / 가정을 복되게 하는 어진 행실은 전고(前古)에도 없었네
森森簪笏華軒溢 / 빛난 집엔 수많은 잠홀(簪笏)들이 넘쳐 있고
濟濟芝蘭錦幌連 / 번창한 자손들은 비단 장막에 연이어 있네
慶建少陽鞏國祚 / 동궁을 세웠으니 나라 복조(福祚) 튼튼하고
光昭壼理迪民賢 / 중궁(中宮)은 덕을 밝혀 백성들을 교화하도다
坤宮奉酌通明殿 / 통명전에 잔치 열어 중궁이 잔 드리니
盛事人間萬口傳 / 인간의 거룩한 일을 만 사람이 전하도다
하였고,
鄭氏가 次韻하기를,
未死殘骸幸瓦全 / 죽지 않고 남은 미망인 목숨 다행히 온전하여
御風重近紫宸前 / 바람에 몸을 날려 대궐에 다시 오니
日邊佳氣衣邊襲 / 태양가의 상서로운 기운이 옷자락에 덮쳐오고
天上恩光席上連 / 하늘 위의 은혜 빛은 자리 위에 연이어 있도다
霞醞宣來欣醉飽 / 궁주(宮酒)를 내리시니 흔연히 취하였고
少陽昇座賀仁賢 / 동궁이 자리에 나오시니 어진 덕을 축하 하오
賡歌寶什翔鸞字 / 화답하신 높은 글과 손수 쓰신 그 글자를
歸與兒孫萬世傳 / 돌아가서 자손만세토록 전하리라
하였다.
柳氏가 詩 짓기를,
叨侍宮闈卄九年 / 궁중에서 임금 모시옵기 스물아홉 해가 되나
翟褕徽典愧前賢 / 왕비의 덕으로는 옛 사람에게 부끄럽소
欣逢宣廟中興日 / 다행히 선묘(선조)의 중흥한 날을 만났고
更見吾王至德全 / 다시 우리 임금의 높고 온전한 덕을 보았도다
世亂幾參龍御運 / 난세에 몇 번이나 용(龍)의 행차 따랐더니
時平長享鳳帷邊 / 태평시대에 길이 길이 봉황 장막[鳯帷]에 모시네
慈顔鶴髮通明殿 / 학 같은 흰 머리 자친의 그 얼굴, 통명전에 나오시니
稱壽還驚寵渥偏 / 수배(壽盃)를 올리매 넓은 성은(聖恩) 놀라워라
鄭氏가 次韻하기를,
俗累塵緣惱暮年 / 귀찮은 세속 일로 노경이 괴롭더니
一心聊慰壼儀賢 / 일심으로 궁중의 어짐 위로되어
承恩再躡三淸界 / 은혜를 받자와 두 번이나 삼청(三淸 선경(仙境))세계에 올랐고
贊化重歡二聖全 / 천지의 조화를 이룩하는 이성(二聖 임금과 왕비)의 복되 심이 더욱 기쁘도다
錫宴渙開金殿裏 / 금전(金殿) 속에서 잔치를 베풀었고 /
需雲繚繞老身邊 / 풍성한 음식은 늙은 몸을 둘러 있도다 /
關雎樛木非專美 / 관저와 규목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
更祝乾坤德不偏 / 다시 건곤(乾坤)의 덕이 기울지 않기를 송축 하오
하였다.
關雎와樛木=《시경》에 있는 후비(后妃)의 덕을 찬미한 시편(詩篇)의 이름이다.
폐세자(廢世子)가 鄭氏에게 준 詩가 두 수인데 그 한 수에,
通明殿裏敞雲屛 / 통명전 대궐속에 구름 병풍 높게 치고
金燭輝煌暎紫庭 / 금촛대 밝은 촛불 뜰에 비쳤도다
千載難逢今日會 / 오늘같은 모임은 천 년에도 만나기 어려우리니
奉歡稱壽供深情 / 받들어 축수하고 깊은 정을 바칩니다
하였고,
또 한수에,
縹緲祥雲迷紫闕 / 나부끼는 상운(祥雲)이 대궐에 가득하고
蔥籠佳氣繞楓宸 / 맑은 기운 서리어서 궁중을 둘렀도다
奉歡蘭殿情何盡 / 난전(蘭殿)에서 즐거움을 받드니 정은 다함이 없고
薦壽華筵感轉新 / 꽃다운 자리에 수배(壽盃)를 올리니 감회가 더욱 깊도다
하였다. (大東詩選 卷12)
蓬原府夫人과 金長生 구원
조선 중기 문신·서예가.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光山). 대사 계휘(繼輝)의 아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올랐으며, 창릉참봉(昌陵參奉)·정산현감(定山縣監)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戶 曹正郎)으로 공을 세웠으며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1602년(선조 35) 청백 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이후 익산(益山)군수·회양(淮陽)·철원(鐵原)부사를 지냈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에 연루되어 심문받았으나 누명을 벗은 뒤에 관직을 사퇴, 연산(連山)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장령(掌令)에 보직되었고 사업(司業)·상의원정(尙衣院正)·집의(執義) 등을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그후 다시 사퇴, 낙향하였으나 1625년 특명에 의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행호군(行護軍)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군량미 조달에 힘쓰며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1628년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으나 사퇴하고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송익필(宋翼弼)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예학(禮學)과 성리학(性理學)을 배웠고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예학의 태두로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등의 유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서인(西人) 중심의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루었다. 1688년(숙종 14)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連山)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서체는 왕법(王法)을 기초로 조맹부·문징명(文徵明)법을 가미하였으며 저서로 《경서변의(經書辨疑)《의례문해(疑禮問解)》《서소잡록(書疏雜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
5월에 서제(庶弟)들이 국옥(鞫獄)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므로 서울로 들어가 왕명을 기다렸는데, 마침내 해직되어서 계상(溪上)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를 모살(謀殺)하고자 사형수(死刑囚)인 박응서(朴應犀)를 꾀어 상변(上變)하게 하였다. 이에 옥사가 크게 일어났는데, 선생의 서제인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 역시 얽혀 들어갔다.
이는 대개 선생 및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을 연루시키고자 해서였다. -선생의 서매(庶妹)가 바로 김상용의 첩이었다.- 김경손 등이 모두 고문을 받다가 죽었는데도 오히려 육시(戮屍)하였으며, 역률(逆律)로 논하여 온 집안이 연좌(連坐)되게 되었으므로 친지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어떤 자가 화를 늦추기를 도모하려고 하자, 선생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다. 어찌 그 사이에 인력을 용납하겠는가.” 하였다. 그때 마침 유사(有司)가 법에 있어서 연좌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으며, 또 대신의 의논으로 인하여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그 뒤로는 시골집에 숨어 살면서 문을 닫아걸고 외인(外人)을 사절하면서 오직 경서(經書)만을 곁에 쌓아 두고 읽으면서 유유자적하였다.김경손 등이 고발당하였을 때 광해군이 박응서에게 묻기를, “김장생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하자, 박응서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현자(賢者)이기 때문에 저희들이 모의를 하면서는 오히려 그가 듣고서 알게 될까 걱정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정협(鄭浹)이 거짓으로 자복하면서 광해군의 물음에 답할 적에도 그와 같이 대답하였다. 國舅인 柳自新의 아내 정씨(鄭氏)가 들어가서 문안할 때 光海君이 묻기를, “내가 김장생을 잡아다가 추문하고자 한다.” 하니, 정씨(鄭氏)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당대의 대유(大儒)로서 많은 선비들이 떠받들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잡아다가 추문한다면 크게 인심을 잃을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광해군의 뜻이 드디어 풀어졌다고 한다. 선생은 동생들과 자매들에 대한 우애가 나이 들수록 더욱더 도타웠는데, 김경손 등이 비명(非命)에 죽게 되어서는 참혹하고 애통스러운 정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깊어졌다. 이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투나 얼굴빛 및 잠자고 깨어 있는 사이에 그런 기색이 저절로 드러났으므로 곁에 있던 사람들이 감동하였다.
<沙溪遺稿에서>
폐모 논의 시작 정인홍 문하의 정온까지 영창대군 살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 고 정인홍의 문하에서 이탈할 정도로 사림의 반발을 삼.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이이첨 등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우두머리이며 당시의 영의정인 유영경을 사사하는 등 소북파를 모조리 몰아내었다.
대북파에서는 계속하여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을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조령에서 은상인을 죽인 이른바 박응서의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서양갑·심우영 등은 모두 조정 고관의 서얼들로서 출세의 길이 막힌 데 불평을 품고 온갖 악행을 자행하다가 그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대북파는 이들을 문초할 때 김제남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허위자백하게 하여 김제남을 죽였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하였는데, 후에 강화부사 정항으로 하여금 그를 소사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계축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화옥이라고 한다. <沙溪遺稿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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