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류잠 묘에 얽힌 전설 본문
류잠 묘에 얽힌 전설
柳潛(工曹判書)19世 渾
2016-05-21 23:00:24
류잠 묘에 얽힌 전설메추리12| 2008.08.17 14:14 |조회 601|신고
류차달(柳車達)의 19대 손에 류잠(柳潛, 1509-1576)이란 분이 있었다. 31세 때인 중종 35년(1540)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師)의 관직을 거쳐 예조(禮曺)와 공조(工曺) 판서를 지낸 후 선조조(1576)에 아깝게도 명을 다하지 못하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에 선조가 애석히 여겨 문녕부원군(文寧府院君)에 봉하고 국사(國師) 지관으로 하여금 묘터를 잡도록 하였다. 지관은 어명을 받들어 여러 고장의 산천을 답사한 끝에 지금의 시흥시 능곡동 능골 뒷산에 자리를 정하였다.
류잠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으니 맏아들의 이름은 류자신(柳自新, 1533-1612)이요, 둘째아들은 류덕신(柳德新)이었다. 큰아들 자신은 선조조에 광주 목사, 성천 부사, 한성 판윤 등을 역임하여 권세가 장안에 등등하였고, 자손 또한 만당(滿堂)하여 아들 6형제에 어여쁜 딸까지 두었다. 어여쁜 딸은 재덕(才德)과 부덕(婦德)이 겸비하여 나라에 간택되어 마침내 광해군 왕비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자신은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의 작후를 받아 권세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동생인 덕신은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정삼품(正三品)의 당상관에 올랐다.
류씨 집에는 여러 노복들이 많았다. 그 중에 한 여종이 크게 일을 잘못 저질러 놓은 일이 있었다. 류대감은 관속 하인으로 하여금 치죄(治罪)를 하게 하니 여종은 끝내 자기 잘못을 은폐하려 드는 것이다. 류대감은 괘씸하게 여기던 끝에 끝내 부인하려 드는 여종을 보니 화가 머리 상투까지 치밀어 호통을 치매, 마침내 물고를 내라고 엄명을 내렸던 것이다. 곤장을 든 관속들이 사정없이 내리치니 나약한 계집종은 마침내 명(命)을 거두고 말았다. 계집종이 죽은 후 10년이란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류대감은 따뜻한 어느 봄날 성묘차 시골 선영 묘에 왔다가 며칠 쉬느라고 툇마루에 앉아 시골 선비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동구 밖을 내다보니 중 하나가 점잖은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중은 시주받으러 다니는 것 같지 않고, 이집 저집 다 제쳐놓고 류대감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온다. 류대감에게 다다른 중은 공손히 합장 배례하고 인사한다.
"소승 문안드리옵니다."
류대감이 바라보니 젊은 중이었다. 뜻하지 않은 중을 맞은 류대감은 은밀히 물어보았다.
"대사는 어느 산 어느 절에서 이 시골까지 내려왔는고?"
"네, 소승은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에 있사온데, 시주차 다니다 보니 대감댁 문전에까지 이르게 되었나이다."
류대감이 중의 모양을 관찰해 보니 눈에는 정기가 초롱초롱하여 기골이 장대한 데다 음성 또한 노고성으로 예사 중과는 다른 품이 나타남을 직감하였다.
"대사, 다리도 아플 테니 잠깐 쉬어감이 어떠한가?."
"감히 소승이 어찌 대감 곁에 자리를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중은 거듭 겸손해 한다. 대감이 다시 권하는 바람에 중은 바랑을 풀어 놓고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주고받다가 두 사람은 저녁해가 서산에 넘어가고서야 일몰임을 깨달았다. 이들은 다시 사랑방에 자리를 같이하여 저녁상을 물리고 술상을 차려놓고 밤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급기야 중에 대한 내력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중은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어려서 충청도 천안 땅에 살았는데, 한 해 겨울에 염병이 들어 동네에 사람이 부지기수로 죽어갔다. 그 가운데 자기의 양친을 다 여의고 고아가 된 그는 강원도에서 왔다는 중을 따라 나이 7세에 입산수도의 길에 들었던 것이다. 착실히 수도에 정성을 기울여 불도(佛道)를 닦으니 주지스님은 상좌로 입적을 시키고 있는 힘을 다하여 글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문리를 터득한 중은 뜻한 바 있어 주지스님께 하직을 고하고 도승을 찾아 나섰다.
이 고장 저 고장 천산만산을 두루 살펴 찾아간 곳이 금강산 유점사였다. 여기에서 도승을 만난 상좌중은 10여 년 동안 천문(天文), 지리(地理)를 연구하고 닦았다. 지리에 통달한 중은 금강산을 떠나 팔도강산의 명승 고적과 명당자리를 구경하며 뜻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일러주어 구제안민(救濟安民)의 도를 닦으러 나섰다는 사연이다.
중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류대감은 젊은 중이 도승으로 여겨져 마음이 더욱더 흐뭇해짐을 깨달았다. 이튿날 아침 류대감은 도승을 선영 묘소로 안내하였다. 도승은 류대감의 선영 산소를 훑어보고는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대감님, 「인혈각국 천혈하(人穴却局 天穴下)면 부귀출혜 가기(富貴出兮 可期)라는 산서(山書)와 같이 참으로 천하대지입니다. 굽이굽이 감돌아 연결한 본룡(本龍)의 세(勢)는 용사(龍蛇) 비등하는 듯하여 좌우로 산회수회(山回水回)하여 용호(龍虎)가 상종하니 어찌 국세(局勢)가 길하지 않으며, 유빈 유주(有賓有主)하여 주객(主客)이 분명하오니 어찌 세세풍영(歲歲豊營)하지 않으오니까? 또한 용효(龍 ) 수회(水回)하여 산천이 수려하니 어찌 자손들이 부봉(富封)만호후(萬戶侯)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감님, 형국으로 논할진대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상입니다. 저 청룡머리와 백호머리를 보십시오. 마치 닭이 날개를 움츠리는 듯한 형상이 아닙니까? 그렇게 이렇게 보이는 것은 보통 속사(俗師)들이 보는 눈입니다. 자세히 이 산세를 관찰해 보십시오. 이 산 내용(來龍)에 인수(人首) 후면(後面)의 용신(龍身)을 보면 아리따운 미녀가 가슴을 헤치고 넌지시 기대어 양다리를 벌리어 금세라도 덮치는 듯한 기상이요, 가운데 쭉 뻗어내려온 긴 산등은 바로 역두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온데 아깝게도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태(胎)가 수혈(水血)로 비롯되는 것이온데, 여기에 저 선관과 이 옥녀(玉女)는 음양(陰陽)교차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고 탄식하며 류대감을 바라본다. 대감은 한 무릎을 다가앉으며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 방법이 있느냐고 성화이다. 중은 다시 말을 이었다.
"대감님, 이 묘 앞에 신도비(神道碑)가 있지 않습니까? 저 비의 거북머리가 안산에서 뻗은 긴 등을 마주하여 있기 때문에 선관과 옥녀의 뜻을 이루지 못하오니 거북머리를 이쪽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또 한편 이 묘 밑에 맑은 연못이 있으니 그 연못 물을 한번 퍼내어 말린 연후에야 지덕(地德)을 누리게 됩니다."고 말을 맺었다. 이 말을 들은 류대감은 "쾌재라, 쾌재라"를 연발하면서, "도승이여, 어찌 고승의 말을 안 좇겠는가."
고 좋아했다. 이튿날 류대감은 역군(役軍)들을 모아 한쪽으로는 안산 군자봉(君子峯, 당시는 君子山으로 불림)을 깎아내리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신도비 거북모리를 돌려놓는 일에 감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한쪽에서는 용두레(물 퍼내는 두레박) 열두 틀을 대어놓고 맑은 연못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열두 두레박이 한나절을 퍼내어도 물은 한 방울도 줄어들지 않았고 물빛은 여전히 파랗기만 하다. 류대감이 괴이하게 여겨 도승에게 까닭을 물었다.
"한나절을 퍼내어도 물빛이 아직 퍼렇기만 하니 어찌하면 이 물을 다 퍼낼 수 있을까?."
도승은 물을 속히 퍼내는 방법을 말했다.
"이 연못물을 다 말리려면 버드나무 장작을 연못 네 귀퉁이에 쌓고 불을 붙이면 물이 모두 마릅니다."
류대감이 곧 명령하여 그대로 하고 보니 과연 그때부터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삼식경에 물을 다 퍼내고 말았다. 바닥이 드러날 지경에 이르러 더욱 괴이한 일이 생겼다. 한 마리 용이 하늘을 바라보고 불끈 솟아 오르다가는 명수폭에 걸려 떨어지기를 몇 번씩이나 하더니 끝내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죽고 마는 것이 아닌가. 류대감이 실망하면서 도승을 찾아보았으나, 도승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자손들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하여 크게 해를 입었다.
(명당자리에 손을 잘못 대면 파명당(破明堂)이 될 수 있다는 지리설의 한 예이다.)
* 류잠의 묘는 시흥시 능곡동 산32에 있음.
시흥시 문화관광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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