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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문흥군 공우록 해제(부윤공파) 본문

文化柳氏14個派(11~14世 后)

문흥군 공우록 해제(부윤공파)

감사공 2023. 3. 12. 10:20

문흥군 공우록 해제

나의 이야기(行跡)

 

2014-01-26 20:58:50

 

문흥군 공우록 해제

 

조선 중기의 문신 유사원(柳思援; 1541,중종 361608, 광해군 즉위)1596(선조 29)에 명군 지원요청을 위한 주문사(奏聞使) 정기원(鄭期遠)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온 기록이다. 수록기간은 1596126일에서 1597(선조 30) 313일까지이며 명에서 돌아온 후 정리하여 계문(啓聞)한 것을 1860(철종 11)에 후손 유회풍(柳會豊)이 다시 필사한 것이다.

 

유사원의 자는 운보(雲甫)본관은 문화(文化). 병조좌랑을 거쳐 함경도 경성에서 군무를 맡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성천에 가서 세자를 시종하였으며 1593년부터는 선조를 호종하였다. 1596년 주문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으며 일본군의 재침으로 조선의 형세가 위급해져 명주문사의 요청대로 명나라 군대가 출병하자 1597년에는 이들을 영남지방에 인도하였다. 1604년 청병(請兵)의 공로를 인정받아 선무공신 3등으로 문흥군(文興君)에 봉해졌으며‚ 1606년에 진주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본서의 내용을 보면 첫머리에 유사원 자신이 주문사 정기원의 서장관으로 명에 왕래하면서 문견한 바를 매일 기록하고 명의 관원들의 글 중에서 왜군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는 일에 관계된 것은 함께 수록하여 사행보고서(使行報告書)를 만들었다는 저자의 설명이 있다. 이어서 일정별로 제반 사건과 접한 인물들의 일을 서술하였다.

 

일정별로 보면 크게 의주에서 북경에 이르는 길, 북경에서의 청병 외교 활동, 북경을 출발하여 의주에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으로 나누어진다. 말미에는 <별록(別錄)>을 두어 왕래시 보고들은 사실을 따로 기록하였다.

 

처음 일정은 1596126일에서 이듬해 114일까지는 의주를 출발하여 요동(遼東) 회원관(懷遠館)과 중원의 관문인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의 옥하관(玉河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적은 것이다. 회원관에서는 외교 사절의 출입을 관장하는 장인도사(掌印都司)가 인삼 등 뇌물을 요구하면서 일행을 닷새간이나 머물게 하였으므로 결국 요구한 물품을 다 지급한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북경에서 주문사 일행이 벌인 외교활동과 명 조정에서의 파병 여부 논의에 대한 내용은 1597115일부터 214일까지의 기록에 실려 있다. 114일에 북경에 도착한 일행은 이튿날부터 정문을 올려 명나라에 온 외교사절에게 의례적으로 베푸는 연회를 면제해줄 것과 일본군의 재공격에 대비하여 군사는 물론 군량을 함께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의 청병 요청에 대해 명 병부(兵部)에서 처음 보낸 회답[복본(覆本)]은 조선이 전쟁기간 내내 전혀 자구(自救)노력을 하지 않고 병력이나 식량 등 모든 것을 명에게만 의지하려 하니 더 이상의 지원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명 내부에서는 병부(兵部) 서과사(署科事) 형부(刑部) 좌급사중(左給事中) 서성초(徐成楚)와 이부(吏部) 급사중(給事中) 유도형(劉道亨)이 상서하여 조선의 형세가 급하므로 구원병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주문사 일행도 육과(六科)에 정문을 올려 군사 및 군량 지원을 다시 요청하였다.

 

논의가 진행되던 중 25일에 일본군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선박 200여척에 군사를 싣고 일본 장기(長崎)에 도착하였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명 조정의 입장이 달라져 병력을 지원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당시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사신 일행을 직접 불러 조선의 군사 및 군량 실태를 확인하였으며 군사 동원을 약속하였다. 이후 212일까지의 기사에는 병부상서 석성을 비판하면서 신속한 파병을 주장하였던 명나라 조정 여러 신하들의 글을 수록하여 임진왜란 초기 명의 대일본 정책과 그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주문사 일행은 214일까지 옥하관에 머물러 있으면서 발병자문(發兵咨文)을 계속 요구하였다. 마침내 명에서는 발병자문을 발표하여 병력 동원과 비용 조달 방안을 상세히 설명하였고 일행은 북경을 떠날 수 있었다. 당시 명은 압록강 부근에 주둔한 3천여 군사를 먼저 동원하고 이어서 浙江省 병사와 은화 138‚400냥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1597215일에서 313일까지의 기록은 북경을 출발하여 의주까지의 귀로에 대한 것이다. 39일에 회원관에 이른 일행은 총병(總兵) 양원(楊元)을 만나 평양성 전투 당시 그의 공적을 치하하였으며 13일에 의주를 거쳐 귀환하였다.

 

말미의 <별록>에는 왕래하면서 직접 본 명의 방어 시설과 병력 운영 방식에 대해 서술하였다. 벽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벽봉화대 등 명의 군사시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요동과 산해관에 연대(煙臺)가 나열되어 있어 외적이 쉽게 침입할 수 없도록 방비 시설을 갖추었음을 특히 집중적으로 서술하였다. 아울러 병장기와 전마(戰馬)를 국가에서 지급하고 정예병을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하는 방식 및 군사훈련법에 대해 약술하였다.

 

문흥군이 서장관으로 참여한 주문사 일행의 임무는 명의 추가 원병과 군량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앞서 1592(선조 25)에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한양을 거쳐 평양까지 이르렀다가 일단 경상남도 해안으로 후퇴하였으나 다시 병력을 증강하여 대규모로 공격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으며 실제 주문사 일행이 명에 머무는 동안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임무는 막중하였고 요청대로 명군이 출병하였으므로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본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입장 뿐 아니라 임진왜란 명나라 내부의 사정, 조선과 명의 외교 관계 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강석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