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르포 본문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르포
朝鮮王朝時代 聯關 자료해설
2013-11-21 14:49:38
이름 : 김용삼(dragon03@chosun.com)
月刊朝鮮 기획위원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르포
친명사대(親明事大)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감행하여 집권한 인조는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현실주의적 외교노선을 붕괴시켰다. 또 쿠데타 논공행상 과정에서의 잘못으로 이괄의 난을 초래하여 여진족(後金)의 군사행동에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서북 방어군이 와해됨으로써 인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참혹한 전란을 자초했다. 조선의 군사력으로 여진족의 만주팔기 기병대와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인조는 오랫동안 오랑캐라고 괄시하던 여진족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치욕스런 항복을 하고 군신(君臣)관계를 맺어야 했다. 이 와중에 수십만의 백성들이 포로로, 성의 노예로 만주로 끌려갔으니…
쿠데타 전야(前夜)
필자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시기는 임진왜란에서부터 병자호란까지의 50여 년이라고 생각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전란을 제외하고는 조선은 안팎으로 큰 전쟁이나 정치적 격변 없이 조용한 가운데 평화를 구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에는 국왕이 여진족에게 세 번 머리를 찧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을 했는가 하면, 국토 전체가 전란에 휩싸여 백성들이 침략군에 잡혀 죽고 가족이 포로로 끌려가는 참극을 경험해야 했다. 또 왕권을 뒤엎는 쿠데타가 발생해 임금이 쫓겨났고, 새로 집권한 임금은 1년도 안 돼 쿠데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신하가 반란을 일으켜 창졸간에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떠나는 일도 있었다.
그 질풍노도와 같은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광해군이다.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피폐해졌을 때 그 戰後(전후) 복구를 책임진 사람이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현실적인 외교정책으로 중국 대륙의 명(明)-청(淸) 교체기에 전란의 불꽃이 한반도로 비화되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는 신하들의 군사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났으니…. 그 긴박했던 쿠데타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한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이날 밤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 능양군(후에 인조)을 비롯하여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이상을 거의 4대장이라 한다), 그리고 이괄, 최명길, 김자점 등 서인(西人) 세력들이 군사를 동원해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는 군사 쿠데타를 감행했다. 원래 거사 일시는 3월 13일로 잡혔으나 정보가 사전 누설되어 계획보다 몇 시간 앞당겨 출병(出兵)한 것이다.
쿠데타군의 수는 불과 1000여 명. 원래 계획에 의하면 병력 지휘는 김류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전에 쿠데타 정보가 누설되는 바람에 망설이다 지휘관이 뒤늦게 현장에 나타나는 등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실록을 보면 이이반(이유흥의 아들)이 길에서 친구 이후원을 만났는데, 이후원이 “오늘 반정(反正)이 일어날 것이다”라며 이이반에게 함께 갈 것을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소식을 접한 이이반이 대궐에 신고하는 바람에 쿠데타 계획이 탄로났다. 그러나 쿠데타 소식을 접한 광해군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같은 날 실록은 당시 정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대신, 금부당상, 포도대장을 부르고 도승지 이덕형, 병조판서 권진을 입직하게 했다. 이이반이 역모가 있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이 여러 여인들과 어수당에서 연회를 하며 술에 취해 오랜 뒤에야 그 상소를 보았는데,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유희분과 박승종이 두세 번 속히 조사하자는 의견을 아뢰자 그러한 명을 내렸다. 대신 이하 관원들이 대궐에 나갔으나 대궐문이 벌써 닫혀 비변사에 모였는데, 비변사 당상들도 들어왔다.
훈련도감 대장 이흥립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호위하고(그는 박승종의 사돈으로서 박승종의 추천으로 직임을 제수받았는데 이때 은밀히 쿠데타군과 합세했다) 이확을 보내 창의문 밖을 수색하도록 했다(이이반이 문 밖에 반정군이 주둔해 있다고 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확은 명령을 받고 즉시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때 이미 자정이 지나 있었다).>
한편 쿠데타군은 지휘관 김류가 나타나지 않자 이괄을 총지휘관으로 추대했는데, 뒤늦게 김류가 나타나는 바람에 다시 김류로 바뀌었다(이 사건이 얼마 후 이괄의 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쿠데타군은 머리에‘의’(義)자를 쓴 띠를 두르고 창의문으로 진격했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 인조 1년(1623) 3월 13일 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귀, 김자점, 한교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오지 않은데다 고변서(쿠데타의 전모를 폭로하는 편지)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중이 술렁거렸다. 이에 이귀가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후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임금(인조)이 친병을 거느리고 연서역에 이르러 이서의 군사를 맞았는데, 장단의 군사가 700여 명이며, 김류(뒤늦게 합류),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송영망, 신경유 등이 거느린 군사가 600~700명이었다. 밤 3경(새벽 3~5시)에 창의문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참수하고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창덕궁에 이르렀다.
이흥립은 궐문 입구에 포진하고 군사를 단속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훈련대장 이흥립은 궁궐 수비를 맡은 오늘날의 경호실장이었으나 이미 반정군과 합세하기로 했기 때문에 쉽게 성공한 것이다). 초관(哨官;위관급 장교) 이항이 돈화문을 열어 의병(쿠데타가 성공하면 의병이 되고, 실패하면 반란군이 되는 법이다)이 궐내에 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는 후원을 통해 달아났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침전으로 들어가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횃불이 주렴(발)에 옮겨 붙어 여러 궁전이 연소됐다.>
사다리 타고 월장해 상복 입고 숨은 광해군
쿠데타군은 1000여 명 정도로 보잘것없었지만 궁궐 수비를 담당했던 이흥립이 쿠데타군에 가담하는 바람에 싱겁게 성공했다. 쿠데타 과정을 추적해 보면 1961년 박정희(朴正熙) 소장의 5・16 쿠데타와 상황이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도 거사 당일 밀고자가 생기는 바람에 지휘부인 6관구 사령부가 포위되고, 예정됐던 사단의 병력 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쿠데타를 막아야 할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군에 합류함으로써 거사를 기정사실화해 버린 것이다.
창졸간에 쿠데타군의 기습을 받고 야반도주하는 광해군의 모습은 5.16 당시 허겁지겁 반도호텔을 빠져나가 수녀원으로 피신한 장면(張勉) 총리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다. 후원을 통해 달아난 광해군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로 시간표를 맞추니 다음과 같은 장면과 마주치게 되었다.
<임금(광해군)이 북쪽 후원의 소나무 숲으로 나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다(평상시에 궁인들이 후원에 긴 사다리를 설치하여 밤에 출입하던 것인데 임금이 이 사다리를 사용하여 궁성을 넘어간 것이다). 젊은 내시가 업고 궁인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여 사복시(말과 목장 등을 돌보던 관청) 개천가의 의관(醫官)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임금은 안국신의 부인 정담수에게 밖으로 나가 변란에 대해 탐지하게 했는데, 담수가 돌아와 들은 것이 없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하고 물었다. 임금이 이때 임취정 등을 신임하여 이이첨의 권세를 억제하려 했는데 유희분은 은밀히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이첨의 세력이 너무 높으니 그가 변란을 일으킬 계략을 가질 듯합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임금이 의심했던 것이다. 세자 이지는 임금을 뒤좇다 찾지 못하고 장의동 민가에 숨었다.>
마침 안국신은 상(喪)을 당해 상복을 입고 있었다. 부인을 시켜 외부 상황 정탐을 시키자 꾀 많은 여인 정담수는 쿠데타가 성공했음을 눈치채고 쿠데타군에게 광해군이 자신의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밀고하고는 집에 돌아와 광해군에게 “들은 것이 없다”고 시치미를 뗀 것이다. 3월 13일 실록은 광해군이 안국신의 집에 숨어 있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정담수가 임금(광해군)이 숨어 있는 곳을 아뢰자 임금(인조)이 이중로 등을 보내 대궐로 데려오게 했다. 광해군은 상제가 된 의관 안국신의 집에 도망쳐 안국신이 쓰던 흰 의관을 쓰고 있는 것을 안국신이 와서 고하므로 장사를 보내 떠메어 왔고, 폐세자(이지)는 도망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임금이 상복 차림을 하여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다가 이중로가 앞에 나가 배알했다. 임금(광해군)이 “너는 누구냐” 하자 “신은 이천부사 이중로입니다” 하고 임금을 끌어안아 말에 태우고 돌아왔다. 임금(인조)이 송영망 등에게 (광해군을) 간호하게 했다.
임금(광해군)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송영망에게 묻기를 “오늘 거사는 누가 한 것이며, 어떤 사람을 추대했는가” 하자 송영망이 “추대한 분은 바로 왕실의 지친이시고 자전(인목대비)의 명을 받들어 거사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광해군이 말하기를 “혼매한 임금을 폐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어찌하여 나인, 내시, 급사들을 보내주지 않아 나를 대우하는 데 있어 이처럼 박하게 하는가” 했다. 이에 임금(인조)이 궁인 한 사람을 보내고 또 소용 임씨(광해군의 후궁)를 보내 곁에서 모시게 하자 광해군이 편안하게 여겼다.>
한 나라의 국왕이 오죽 급했으면 상을 당한 의관의 집에 도망쳐 상주(喪主)의 상복을 빼앗아 입고 숨어 있었을까.
창졸간에 줄행랑을 놓는 과정에서 광해군은 담을 넘기 직전 어보(옥새)를 떨어뜨렸는데, 3월 13일 새벽에 후원을 정찰하던 군인이 어보를 습득하여 바쳤다는 이야기가 실록에 적혀 있다.
“광해군의 목을 잘라 제사하고 싶다”
광해군이 쿠데타군에게 압송되어 오는 장면을 3월 13일의 실록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도성의 남녀들은 임금(광해군)이 가는 것을 보고 모두 담장과 지붕에 올라가 바라보았고, 어떤 사람은 욕하기를 “돈 애비야, 돈 애비야, 거두어들인 금은(金銀)은 어느 곳에 두고 이 길을 가는가” 하니 임금이 머리를 숙이고 눈물만 흘렸다. 궁에 이르러 내약방에 머물게 했다. 이지가 숨어 있는 곳을 군인이 아뢰자 장수를 보내 데려오게 했고, 왕비와 세자빈 및 여러 궁인들을 병조에 집합시키고 군사들이 주위에서 지키게 했다.>
이 기록에 나오는 금은(金銀)과 관련된 사연은 이렇다. 광해군 시절에는 지방 수령을 매관매직하는 사례가 잦았던 모양이다. 인조 1년 3월 16일 실록에는 광해군 시절의 매관매직 사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사신(史臣;사관을 말함)은 논한다. 민생의 희비애락(喜悲愛樂)은 수령에게 매인 것인데, 폐조(광해군) 때는 아래에서 주의(注擬;관원을 임명할 때 문관은 이조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후보자 세 사람을 임금에게 추천하는 것)하는 것과 위에서 제수하는 것이 모두 은화(銀貨)의 다소에 의해 결정됐다. 병수사나 수령 자리가 비었을 경우 외부에서 말하기를 “아무개는 은화 몇 냥을 아무개의 집에 바쳤으니 의당 아무 벼슬에 주의될 것이다. 은화 몇 냥을 아무 전(殿)에 바쳤으니 의당 아무 직임을 얻을 것이다” 했는데, 모두 들어맞았다.
또 인사가 있는 날은 대궐 뜰이 저자와 같이 난잡했고 염치없는 무리들은 스스로 벼슬 값을 정해 앞다퉈 돈을 바쳤다. 그리하여 병수사와 넉넉한 고을의 수령 값은 무려 2000~3000냥에 이르렀다. 경기 고을 중 피폐한 곳이라도 빈손으로 얻는 자가 없었다. 부임 후에는 쓴 돈을 충당하는 데 전력하여 백성들에게 자신이 뇌물로 썼던 은의 배를 수탈함으로써 민생은 황폐화되고 팔도는 황량해졌다. 당시 패망을 초래한 짓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인심을 많이 잃은 것은 필시 여기서 말미암은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능양군은 3월 13일 순찰 군사가 주워 온 어보를 가지고 서궁(경운궁)으로 가서 광해군이 구금시킨 인목대비(선조의 두 번째 부인)에게 옥새를 올린다. 신하들이 대비에게 왕위를 결정할 것을 청하자 대비는 “먼저 이혼(광해군의 이름)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인목대비:“(광해군은)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다. 참아온 지 오랜 터라 내가 그들의 목을 잘라 제사하고 싶다. 10여 년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신하들:“예로부터 폐출된 임금은 감히 형륙(형벌에 의해 죽임)으로 의논하지 못했습니다. 무도한 임금으로는 걸주(하나라의 걸과 은나라의 주. 포악한 임금의 대표자)만한 이가 없었으나 이들도 죽이지 않고 추방했을 뿐입니다.”
이덕형:“폐군(廢君)에 대해서는 천륜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아들이 비록 효도하지 않더라도(인목대비는 광해군의 계모다) 어머니로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하교는 차마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인목대비:“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한 나라에 같이 살 수 없다. 역괴(광해군)가 스스로 모자(母子)의 도리를 끊었으니 나에게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고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이덕형:“옛날에 중종께서 반정하시고 폐왕(연산군)을 우대하여 천수를 마치게 했으니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인목대비:“경의 말이 실로 옳다. 그러나 역괴는 부왕(선조)을 시해하고 형(임해군)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다. 그 적모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구비했다. 어찌 연산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능양군:“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시해했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했습니다.”
인목대비:“사람을 죽이는데 몽둥이로 하든 칼로 하든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왕(선조)께서 병들어 크게 위독했는데, 고의로 충격을 주어 돌아가시게 했으니 이것이 시해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
쿠데타 모의와 진행 과정
이제 차분한 마음으로 쿠데타의 배경과 능양군의 즉위 과정을 인조 1년 3월 13일의 실록을 근거로 추적해 보기로 한다.
능양군은 의병을 일으켜 인목대비를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에서 즉위하여 ‘인조’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선조의 승하 후 인목대비의 교지에 의해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과 비슷하다. 왕위에 오른 후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광해군 시절의 실력자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 소생인 정원군 이부의 맏아들)다.
광해군이 세자로 있을 때 선조가 세자를 바꾸려는 의사를 가졌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 후 광해군은 선조가 늘그막에 얻은 인목대비(광해군에게는 계모가 된다)의 아들 영창대군을 시기하고 인목대비를 원수처럼 대했다. 이에 이이첨과 정인흥 등이 부추겨 임해군(광해군의 형)과 영창대군을 섬에 유배시켰다가 죽이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연흥 부원군) 집안을 멸족했다. 인조의 막내동생 능창군 이전도 역모사건에 연루됐다 하여 죽이자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이 화병으로 죽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을 뿐 아니라 계모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삭제하여 평민으로 강등시킨 후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 과정에서 왕실과 외척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화가 미치자 인조와 인목대비의 집안 사람들이 광해군을 타도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사정이 이쯤 되었으니 화가 단단히 난 인목대비가 실각한 광해군의 살점을 씹으려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실록은 광해군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왕조의 신하들로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모두 추방했고 어진 선비들은 죄에 걸리지 않으려 초야에 숨어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 했다. 또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다(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재건과 왕권 강화를 위해 임진왜란 당시 불탔던 궁궐 수축에 많은 백성을 동원함으로써 원성을 샀다).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 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혀 크고 작은 벼슬아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됐다. 이에 임금(인조)이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 가는 것을 보고 반정할 뜻을 두었다.>
이런 기록들은 광해군을 무력으로 실각시킨 후 정권을 잡은 세력이 실록(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실록이란 이름 대신 ‘광해군일기’라 불린다)을 편찬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깎아내리고 쿠데타를 합리화하려는 데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가장 먼저 광해군 타도의 쿠데타를 모의한 인물은 무인(武人) 이서와 신경진, 구굉과 구인후였다. 이들은 모두 인조의 가까운 외척들로서 당파로 말하자면 서인(西人) 세력들이었다. 이들이 은밀히 모의한 다음 문인(文人) 중에서 위엄과 인망이 있는 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처음 동지로 포섭한 것이 김류이고 이들이 광해군 타도라는 목적에 의기투합한 것이 경신년(1620)이었다.
쿠데타군은 3월 12일 밤 홍제원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이귀, 김자점, 한교 등이 홍제원으로 나가보니 모인 군사는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고,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도착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변서가 궁궐에 들어갔다는 말이 돌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귀가 북병사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어 호령하자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마침 이 시점에 김류가 홍제원에 나타나면서 일이 복잡하게 꼬였다. 지휘권이 다시 김류에게 넘어가자 이괄이 크게 노하여 빼들었던 칼을 거두고 돌아가려 하자 이귀가 나서서 간신히 화해시켰다.
쿠데타에 성공한 능양군, 왕위에 오르다
능양군(후에 인조)이 친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연서역에서 이서의 군사를 맞았다. 이쯤에서 군사는 장단의 군사 700여 명, 김류와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송영망, 신경유 등이 거느린 군사가 600~700 명으로 불어났다. 밤 3경에 쿠데타군은 창덕궁에 이르러 능양군이 인정전에 나아갔다. 궁중에서 숙직하던 자들이 모두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 왔는데 이덕형(도승지)과 윤지경(보덕) 두 사람은 능양군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로 보아 쿠데타가 성공했음을 눈치챈 후에야 절을 올렸다.
능양군은 김자점과 이시방을 서궁(경운궁)으로 보내 인목대비에게 쿠데타 성공 소식을 전했다. 대비는 두 사람을 맞고는 “10년 동안의 유폐 중에 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중에 승지와 사관도 없이 직접 찾아왔는가”하고 의아해 했다. 이에 두 사람이 쿠데타가 성공했음을 알렸다.
곧이어 능양군이 도승지 이덕형과 이귀, 동부승지 민성징 등에게 의장을 갖추고 인목대비를 모셔오도록 했다. 이귀 등이 경운궁에 나가 누차 모셔갈 것을 청했으나 대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능양군이 경운궁으로 나갔다. 이때 주위에서 능양군에게 연(輦)에 오를 것을 청했으나 능양군은 거절하고 말을 탔다. 광해군을 떠메어 뒤에 따르도록 했는데, 도성 백성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오늘날 이런 모습을 볼 줄은 생각지 못했다” 하며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능양군이 경운궁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서청문 밖에 들어가 절을 하고 통곡하자 시위하던 장사와 신하들이 모두 통곡했다. 능양군이 엎드려 죄를 빌자 인목대비가 말하기를 “능양군은 종가의 맏아들이니 대통을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한다.
패배한 자에게는 죽음이, 성공한 자에게는 부귀영화가 보장되는 것이 쿠데타의 일반적인 순리다. 쿠데타에 성공한 후 그동안 서인 세력에 해를 주거나 서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던 신하들은 도륙을 당했다. 3월 13일 병조참판 박정길, 상궁 김씨와 승지 박홍도가 참수를 당했다.
<박정길을 베었다. 반정이 성공하자 병조참판 박정길이 제일 먼저 대궐에 와서 임금(인조)께 배알했는데 병조판서 권진이 들어와 아뢰기를 “박정길은 원흉(광해군)의 심복으로서 위태롭고 어수선한 이때 병부에 그대로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신도 이 역적과 함께 일할 수 없으니 속히 박정길을 베어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으소서”하고 두세 번 간청했다. 임금이 여러 장수를 돌아보며 묻자 여러 장수들도 “박정길은 끝내 죽음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니 권진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그를 끌어내 베었다.>
이 밖에도 평안감사 박엽, 의주부윤 정준의 목을 베어 내걸었는데 이들은 고을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었던지 말로가 참혹했다. 다음은 광해군 15년 3월 13일 기록이다.
<사신을 보내 박엽과 정준을 베게 했다. 박엽은 6년 간 관서지방 방백으로 있으면서 탐학한 짓으로 재물을 수탈하고 사치와 욕심을 부려 마을이 폐허가 됐다. 정준은 제일 먼저 폐모론을 주장했고(인목대비를 내쫓아야 한다는 주장. 이 사실로 미루어 이들의 처형이 부정부패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임을 알 수 있다) 탐학한 짓을 한 것이 박엽의 다음갔는데 임금이 도원수 한준겸에게 비밀히 지시하여 벤 것이다. 박엽이 죽은 뒤 평양 백성들이 관을 꺼내 시체를 가루로 만들고, 그가 타고 다니던 말까지 죽였다.>
패배한 자에게는 죽음, 성공한 자에게는 부귀영화
이 밖에도 폐모론을 상소한 관리를 모두 참형에 처했으니 실록에 기록된 참수자가 40여 명, 숙청당한 자가 200명에 이른다. 광해군 시절 조정을 뒤흔들었던 박승종은 그의 아들 박자흥과 자결했고, 이이첨은 붙잡혀 참형을 당했다. 인조 1년 3월 14일 실록은 그들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박승종과 아들 박자흥이 광주에서 자살했다. 박승종은 체찰사였고 박자흥은 경기 감사였는데 반정이 일어난 날 두 사람이 집안 아이들 몇 사람을 데리고 수구문으로 나가 양주에서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 박자흥은 군사를 징집하는 격문을 경기도내에 띄웠다.
이때 박승종의 집안 어른인 안례가 양주 군수로 있었는데 임금이 사신을 보내 잡아오게 했다. 길에서 박승종과 서로 만났는데 임금이 거의(擧義;의로운 일에 일어섬)하여 조정이 안정됐다는 말을 듣고 박승종은 편지를 써서 안례에게 주어 조정에 전하게 했다. 그 편지에는 “내가 임금에게 바른 말로 간언하지 못해 오늘의 사태가 발생했다. 다급한 상황에 성을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려 할 경우 여러 군사들에게 살해되어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죽음이 될까 염려되므로 못에 빠져 죽어 신명과 사람들에게 사죄하려 한다” 했다.
그리고 광주 선산에 가서 배알하고 절에 들어가 아들 박자흥과 함께 술에 독약을 타서 마시고 죽었다. 박승종은 재주와 기량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 장사들의 인심을 샀다. 만년에 광해가 패망할 것을 알고 늘 주머니 속에 독약을 넣고 다니면서 변을 당했을 때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부자 모두 사치스런 생활을 하며 재산을 모으고 저택을 치장하여 조정의 권신들 중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 그런데도 재물욕은 끝이 없었고 세력을 믿고 권력을 쟁취하려 하여 물러날 줄을 몰랐다. 세상 사람들이 박승종을 삼창(밀창부원군 박승종, 광창부원군 이이첨, 문창부원군 유희분)의 한 사람으로 지목했다. 아무리 명분을 끌어대어 자결했다 해도 옛 사람의 장렬한 죽음에 비교하면 부족한 점이 있다.>
박승종이 명분 있는 죽음을 택했다면 이이첨의 죽음은 초라한 구석이 있다. 다음은 인조 1년 3월 14일에 발견된 이이첨의 죽음 현장이다.
<이이첨이 참형을 받았다. 반정이 일어나던 날 이이첨은 가솔을 모두 데리고 남쪽 성을 넘어 도망가서 이천의 시골집에 갔는데, 군인이 뒤따라가서 잡아왔다. 이이첨이 처음에 신경유 등이 거의했다는 말을 듣고, 신경유의 누이는 이대엽의 아내였으므로 먼저 대엽의 아내를 빨리 성에 들어보내 신경유를 만나 보고 석방시켜 주기를 도모했으나 일이 성사되지 못했다.
이이첨이 밤에 공사(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글)를 쓰면서 함께 구속된 유희량에게 “임금께서 이 공사를 보시면 필시 나의 무죄를 밝혀주실 것이다”고 말했다. 이튿날 형을 받으려고 옥을 나갈 때 이귀를 쳐다보며 말하기를 “대감은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대전께서 이제까지 보전하실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나의 공이 아니겠는가” 했다. 이귀가 말하기를 “유폐의 화액(인목대비의 서궁 유폐를 말함)을 겪으신 것이 누구 탓인가” 하자 이이첨이 대답을 못했다.
형을 받을 무렵 큰 소리로 말하기를 “하늘이 나의 무죄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살아서는 효자이고 죽어서는 충신이다” 하니 이위경이 뒤에 있다가 꾸짖으며 “우리가 죽게 된 것은 네가 악한 짓을 했기 때문인데, 어떻게 네가 충신이며 효자인가” 했다.
이이첨은 한찬남, 백대형, 정조, 윤인, 이위경 등과 함께 먼저 형을 받았고 이원엽, 이흥엽, 이익엽은 참형됐으며 이대엽은 옥중에서 죽었다. 이이첨 등은 원수진 사람들이 많아 그들이 참형당하자 도성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난도질하여 시체가 온전한 데가 없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외지에 유배시키도록 여러 차례 교지를 내리자 인조는 3월 23일 광해군과 폐세자 이지를 강화에 위리안치시켰다.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같은 집에, 폐세자 이지와 폐빈 박씨는 다른 곳에 안치시킨 후 병사를 배치하여 감시토록 했다.
쿠데타 명분은 명나라를 섬기는 것
인조 쿠데타의 대의명분은 광해군이 명(明)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리고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선조의 정실 부인 소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살해하고 불효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쿠데타군의 손에 죽음을 당한 관리들은 광해군의 현실주의 외교노선을 따라 망해가는 명나라와 신흥강국 후금(後金;후에 청나라;여진족 추장 누루하치가 여진의 각 부족을 통일하여 건국했다) 사이에서 실리적인 외교를 추진했거나 계모 인목대비 유폐에 찬성한 세력이 대부분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국가를 재건하고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후금과의 줄타기 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는 등 현실론적인 입장에서 부국강병을 꾀하던 임금이었다. 이러한 임금을 쿠데타로 내쫓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진 집단이 집권했으니,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의 참화와 임금이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인조는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못 되어 이괄의 난을 당해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고, 이괄의 난으로부터 3년 후인 1627년에는 후금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최명길 등이 나서서 후금을 형님으로 모시는 강화회담으로 겨우 휴전을 성사시켰으나 후금은 양국 관계를 주종관계, 즉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오매불망 망해가는 명나라를 짝사랑하는 집권층이었으니 당연히 이 제의를 거부했다. 분개한 청나라는(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두 차례의 변란을 당하기 이전부터 사회는 이미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인조 3년(1625) 6월 19일 실록에는 백성들 사이에 인조반정의 주역들을 비웃는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다.
<아, 너희 훈신들아
스스로 뽐내지 말라.
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그의 말을 타며
그의 일을 행한다면
너희들과 그 사람(광해군 시대의 권력자들)이
다를 게 뭐가 있나.>
같은 날 실록에서 사관은 오랑캐들의 침범을 예상하듯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남겼다.
<사신은 논한다. 우리나라가 영변에 진영을 설치하고 반드시 병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겨울철에 발생할지도 모를 적의 침범을 방비하게 하는 등 서쪽 관문을 굳게 지키게 한 계책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지금 되놈(후금을 지칭)들이 새로 심양에 웅거하여 동쪽을 침략하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으니 창성과 의주 사이에서 무기를 항시 휴대하고 변란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얼음이 언 뒤에는 압록강 일대가 하나의 평지가 되니 철기(鐵騎)로 달려오면 바람보다 빠를 것이다. 장수는 마땅히 국경에 부서를 개설하고 창성, 의주, 구성, 삭주의 인심을 수습해야 할 것이다.>
아무 대책도 못 세우고 허송세월만
그러나 정묘호란의 침략을 당하고도 국가 지도부는 아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허송세월했다. 군량을 확보하고 병기를 생산할 생각은 뒷전으로 미룬 채 정묘호란 때 절개를 지키다 죽은 부녀자들을 칭찬하는 데만 급급했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음은 인조 5년(1627) 7월 29일 황해감사의 보고.
<“오랑캐의 변란 때 절개를 지키다 죽은 부녀자가 모두 126인인데 그중 절의가 가장 크게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주에 사는 정득주의 아내 김씨는 적의 핍박을 당하자 그의 딸을 물에 던지고 아들을 업고 물에 빠져 죽었고, 해주 양인 임순립의 아내는 적을 만나 쫓기자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아무개의 아내는 물에 빠져 죽는다’고 부르짖고 죽었습니다.
장연에 사는 강취규의 아내 강씨는 적병을 만나자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적이 일으키려 하자 엎드린 채 나무뿌리를 잡고 버티니 적이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랐으나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양쪽 귀를 베어도 일어나지 않자 적은 그의 등을 찌르고 돌아갔습니다.”>
참다못한 지방 선비들이 ‘정부와 관리들은 대오각성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니, 인조 6년(1628) 8월 19일 광주에 사는 선비의 글에 그 전모가 잘 나타나 있다.
<“국가가 되놈을 상대로 화친했다 해도 지금까지 오랑캐와 화친했다가 끝까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군신 상하가 마음을 합쳐 방비책을 세워야 마땅한데도 적이 물러간 1년 동안 대소 관원들은 우스갯소리나 하며 담배만 피우고 기생이나 끼고 술타령을 할 따름입니다. 혹시라도 저 오랑캐들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고 다시 우리나라에 군사행동을 취한다면 무슨 병력으로 지킬 것이며 어떤 계책으로 방어할 것입니까.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나라 장수를 임명하는 규정을 보면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인지는 따지지 않고 오직 명성과 직위의 고하만 고려하므로 임용된 자들 모두가 훈작이 높은 사람들이라서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미 부귀가 극에 달했으니 전투에서 공을 세운들 무슨 득이 되겠는가’ 하며 제 목숨 구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조 14년(1636)에 조선은 또다시 여진족의 기습 침략을 당했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12월 1일 청 태종이 12만 대군을 친히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지 열흘도 더 지난 12월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사가 국경을 넘어 침략해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왜국의 침략을 알게 된 것이 왜군의 부산 상륙 4일 후였음에 비해 이 당시는 12일이나 지난 후에 기별이 전해졌다.
조정이 변고를 들었을 때 적은 이미 안주까지 병력을 전개한 후였다. 그 유명한 만주팔기 기병대가 질풍노도와 같이 내달아 서울로 진격해 온 것이다.
12월 14일에 적이 송도(개성)를 지났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인조는 강화로의 파천을 결정했다. 그러나 강화로 가는 길이 이미 적에 의해 끊기자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남한산성으로 향하게 된다. 왕이 황망하게 피난을 떠나는 모습은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다음은 인조 14년 12월 14일 실록.
<임금이 수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으므로 군신 중에는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고, 성 안 백성은 부자, 형제, 부부가 서로 흩어져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기 위해 남한산성을 떠났다.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 산길이 얼어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자 인조는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강화로 가지 못하고 산성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40일을 버티지 못하고 인조는 항복을 결심한다. 조선 개국 이래 오랑캐, 야만인이라고 업신여기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치욕스런 항복을 결심할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
홍명구 혼자서만 청나라 대군과 맞서 싸워
항복 소식이 알려지자 인조 15년 1월 28일 이조참판 정온과 예조판서 김상헌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온은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기 배를 찔렀는데, 중상만 입고 죽지는 않았다. 예조판서 김상헌도 여러 날 음식을 끊고 있다가 목을 맸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손들이 구조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들의 자살 미수사건에 대해 사관들은 이러한 논평을 남겼다.
<사신은 논한다. 강상과 절의가 이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데 이를 꺼린 자들은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지목했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다보지 않겠는가.>
궁중 신하들이 자살 미수 소동을 벌이던 그 시각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는 홀로 청나라의 대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목숨을 잃었으니, 인조 15년 1월 28일 실록은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가 금화에서 크게 싸우다 패해 죽었다. 홍명구가 적의 움직임을 듣고 자모성에 들어가 지켰는데, 얼마 후 오랑캐 기병이 경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의 별장 장훈에게 2000기를 보내 구원하게 했다. 그 뒤 대가(임금이 탄 가마)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날랜 병사 3000명을 선발해 진두지휘하여 떠났다.
한편 병사 유림에게 동행할 것을 재촉했는데, 유림이 뒤따라오다가 강동에 이르러 조정의 명령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군대행동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홍명구가 꾸짖기를 “임금이 화란을 당했으니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다. 더구나 적이 군사를 나누어 전투를 하도록 함으로써 남한산성 공격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계책이다” 하고 마침내 진격하니 적들이 도망했다. 금화에 이르러 적을 만나 수백 명을 베고 사로잡힌 백성과 가축을 되찾았으니 그 수가 몇십 몇백을 헤아렸다.
군사를 백전산으로 옮겼을 때 적의 연합군 1만 기가 침범해 왔다. 홍명구가 이들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두 명의 장수를 죽였는데 시체가 즐비했다. 조금 후 적의 한 부대가 산 뒤편을 돌아 나왔는데, 말을 버리고 언덕에 올라 모포로 몸을 감싸고 밀어붙이며 일제히 진격해 오니 그 형세를 막을 수 없었다. 홍명구가 급히 유림을 부르며 구원을 청했으나 유림이 도망하는 바람에 휘하의 장사들이 많이 전사했다.
홍명구가 의자에 걸터앉아 관청의 인장을 가져다 부하에게 주며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죽어야 마땅하다” 하고 활을 당겨 적을 사살했는데, 몸에 세 개의 화살을 맞자 스스로 뽑아버리고 칼을 빼어 치고 찌르다가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실록에 의하면 홍명구는 사람이 영리하고 강직했으며 문장과 기량과 견문이 후진들 가운데 첫째로 꼽혔던 인물이다. 이른 나이에 갑과(과거에서 제1등급. 1등인 장원, 2등인 방안, 3등인 탐화 세 사람을 일컬음) 장원으로 합격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 후 관서 관찰사로 복무하여 서북 방어를 위한 여러 방안들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건의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며 전투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홍명구의 분전 소식이 알려지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내가 평소 그의 사람됨을 알았다. 이렇게 나라가 결딴난 때에 단지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구나” 하며 이조판서에 추서하라고 명했다. 또 장례 비용을 국가에서 마련하고 그의 어미에게 녹봉을 지급하며, 문려(집의 문과 마을 입구의 문)에 정표(사람의 선행을 칭송하고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했다. 또한 자손에게 벼슬을 내렸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고
인조 15년(1637) 1월 30일은 조선 국왕이 청의 칸(汗:황제)에게 머리를 숙인 치욕의 날이다. 그 항복의 장면을 사관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필치로 기록해 놓았다.
<용골대와 마부대(청나라 장수 이름)가 남한산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出城)을 재촉했다. 임금이 백마를 타고 의장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소현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다.
임금이 산에서 내려와 가시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가 달려왔다. 임금이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했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부터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했다.
임금이 삼정승과 판서, 승지 각 5인, 한림(예문과 검열의 통칭. 사관으로서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관직), 주서(승정원 정7품) 각 1인을 거느렸고 세자는 시강원(왕세자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유교 도덕을 수양시키는 일을 맡은 관청), 익위사(왕세자 호위를 맡은 관청)의 관리를 거느리고 삼전도에 따라 나갔다.
멀리 바라보니 칸(汗;청 태종)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둥근 진을 치고 좌우에 옹립했다. 악기를 연주했는데,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임금이 걸어서 진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임금을 진문 동쪽에 머물게 했다.
용골대가 들어가서 보고하고 나와 청 태종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렸으니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임금이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했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한 후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용골대 등이 임금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했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화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임금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했다. 칸은 남쪽을 향해 앉고 임금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앉고 왕세자가 그 아래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했다.
우리나라 신하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화에서 잡혀온 신하들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했다. 차 한 잔을 올렸다. 칸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나라의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두 나라가 한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했다. 우리나라 신하가 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했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정이중이 나가서 쏘았다. 활과 화살이 우리나라 제도와 같지 않아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와 장수들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궁중 잔치)하고 행주(잔에 술을 부어 돌림)하게 했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했는데, 치울 무렵 오랑캐 종 두 사람이 개를 끌고 칸의 앞에 이르자 칸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 주었다. 임금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칸에게 절하도록 청했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나인이 대신했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칸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나오자 임금이 친히 고삐를 잡아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담비의 모피로 만든 옷)를 가져와서 칸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왔는데, 이 나라 의복제도를 보니 우리와 같지 않다. 따라서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을 표시하기 위해서다” 하니 임금이 받아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했다.
도승지 이경직에게 국보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과 옥책(제왕의 존호를 올릴 때 송덕문을 새긴 책)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1624) 변란으로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보전되었다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임금은 밭 가운데 앉아 진퇴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에 돌아가게 했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있도록 했는데, 이는 장차 북쪽으로 데려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임금이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빈궁을 호위하게 했다. 임금이 소파진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치욕스런 항복의 예를 마친 인조는 수많은 인질을 청나라 군영에 볼모로 남겨두고 창경궁으로 가기 위해 나루터로 향했다. 그 장면을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졸(나루터를 지키는 병사)은 대부분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임금의 옷을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올랐다. 임금이 건넌 뒤 칸이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했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임금을 인도해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울부짖으면서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했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1만 명을 헤아렸다.>
서울은 참혹한 죽음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2월 3일 실록은 ‘경성(서울)에 사는 백성이 가장 혹독하게 화를 당해 남아 있는 자라고는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나이 70이 넘은 사람들뿐인데, 대부분 굶주리고 얼어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친명사대는 쿠데타를 위한 명분이었을 뿐
인조 15년(1637) 11월 25일 신하들 간에 우스꽝스런 일들이 벌어져 있었다. 인조가 치욕의 역사 현장인 삼전도에 비를 세우고 관리들에게 비문을 짓게 하자 너도나도 발뺌을 하고 나선 것이다.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에게 명하여 삼전도비의 글을 짓게 했는데, 장유 등이 상소하여 사양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해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했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이 글을 썼다.>
여기 언급된 관리들도 “명나라에 사대하고 청나라를 쳐부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들이었을 것이니, 빈 수레가 요란하듯 책임 없이 떠드는 자들의 말이 언제나 달콤한 법이다.
인조 쿠데타의 대의명분은 인목대비에 대한 광해군의 불효와 친명사대(親明事大)를 하지 않았다는 두 가지였다. 따라서 인조 정권은 청나라의 침략을 당했을 때 목숨 바쳐 싸우는 것이 대의명분에 합당한 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묘, 병자호란을 당하자 그동안의 친명사대정책과는 달리 청나라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주화론(主和論)이 득세했다. 결국 친명사대는 쿠데타를 위한 명분에 불과했던 셈이다.
눈치도 없이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은 임금이 항복을 하기 전날 청나라에 볼모로 넘겨졌다. 인조 15년 1월 29일 혹한이 몰아치는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윤집, 오달제의 하직인사를 받는 장면이 목격됐다. 아끼던 신하를 오랑캐의 나라로 보내는 임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최명길, 이영달 편에 국서(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외교문서)를 오랑캐 진영에 보내고, 화친을 배척한 윤집, 오달제를 잡아 보냈다. 윤집 등이 하직인사를 했다.
임금:“그대들의 식견이 얕다고 하지만 그대들의 주장은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마침내 이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고금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윤집:“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
임금:“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느냐.”
오달제:“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임금은 “고금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오달제:“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전하께서 성에서 나가시게 된 것을 망극하게 여깁니다. 신하된 자들이 이런 때 죽지 않고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드디어 두 신하가 하직하니 임금이 내시에게 술을 대접하게 했다. 그때 두 신하를 잡아가기 위해 대기하던 사신이 “포로를 빨리 보내라”고 재촉하자 임금은 “어찌 그리 재촉하는가” 하고 짜증내며 두 신하가 술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한다. 두 신하가 술을 다 마시고는 “시간이 늦었습니다. 하직하고 떠날까 합니다”하고 말하자 임금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임금과의 하직인사가 끝난 후 주화론자의 대표격인 최명길은 주전론자의 대표인 윤집과 오달제를 밧줄로 묶어 청나라 진영에 나갔다. 청나라 칸이 결박을 풀라 이르고는 최명길에게 초구 한 벌을 내렸다. 최명길은 이 옷을 입고 칸에게 네 번 절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국가란 반드시 자신이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치는 법’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후 이 사실을 알리는 담화문을 보면 당시의 비참했던 정황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다음은 인조 15년 2월 19일 실록.
<내가 덕이 부족한 몸으로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 되었다. 운명이 험한데다 나라일도 어려움이 많아 잇따라 변고를 당하고 두 번이나 파천했으니, 백성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적지 않다. 하늘이 바야흐로 재앙을 내리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어렵게 알고 징계할 줄을 모른다.
오직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만을 생각하고 뜻밖의 화가 거듭 닥칠 줄을 깨닫지 못한 나머지 외로운 성에서 포위당한 채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았다. 지키는 군졸이 부족하자 유신(儒臣)들을 군사에 편입시키고, 저축한 식량이 모자라 콩 반쪽으로 배를 채웠다. 집을 뜯어 꼴로 충당하고 나무뿌리로 불때어 밥을 지었는데 위급한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나 장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굳게 지킬 것을 죽기로 맹세하며 외부 구원을 기다렸는데, 호남과 영남의 5개 진이 잇따라 패하고 서북의 군사는 소식이 전혀 없었다. 포탄이 날아와 성벽을 공격하니 맞는 곳마다 모두 날아갔는데, 사람 수와 식량을 계산하니 열흘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아들(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한 손자가 종묘사직을 받들어 모시고 강화에 건너가 있었으므로 신민을 의탁할 희망이 아직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사람의 지모가 훌륭하지 못해 자연의 요새도 함락되고 말았다.>
인조는 창졸간에 청나라에 항복하고 나서야 지난날 국방력을 키우지 못한 것을 통탄하고 있으니, 패전하여 나라가 망한 후 과거를 탓하는 것은 어리석은 임금의 공통적인 행동이다.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하건대 후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고 단련하여 환란에 대비할 것을 생각했지만 각 마을이 이로 인해 불안해 했다. 미곡을 무역하여 군량을 비축하려 했지만 민력(民力)이 크게 곤궁해졌던 것이다. 명예와 절개를 포상함은 세상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인데도 근거 없는 의논이 이로 인해 더욱 심해졌고, 요역과 부세를 부과하여 독촉함은 완악함을 경계하기 위한 것인데도 포악한 관리가 이로 인해 횡포를 부렸다.
조정에는 아첨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었고, 세상에는 순후한 풍속이 결여됐다. 재앙과 이변이 번갈아 나타났는데도 나는 두려워할 줄 몰랐고 원망과 한탄이 떼로 일어났는데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는 천성이 용렬하고 어두워 정치의 요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합당한 정치를 펴려다가 도리어 혼란으로 몰고 간 것이다. 대군이 몰려오기 전에 나라는 이미 병들었으니 ‘국가란 반드시 자신이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치는 법이다’라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임금은 이어 백성이 자신을 버리지 말 것을 애원하고 있다.
<지난 잘못을 가지고 나를 멀리 버리지 말고, 상하가 합심하여 어려움을 널리 구제함으로써 천명이 계속 이어져 태조, 태종의 유업을 떨어뜨리지 말도록 하라.>
전쟁이란 냉혹한 것이다. 승전국은 한없는 영광을 누리겠지만, 패전국엔 멸망과 약탈이 뒤따르고 백성들은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리다. 다행히 청나라는 조선왕조를 멸망시키지 않고 왕조의 명맥을 이어가게 했다. 청이 조선왕조를 멸망시키지 않고 왕조의 법통을 허용한 것은 그동안 조선이 여진족에게 시행한 교린정책 덕분이며, 또 명-청 교체기에 조선을 자극하여 조선이 반청(反淸) 세력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제 나라 백성을 포로로 뺏기고 몸값 흥정
청나라는 철수하는 과정에서 주전론을 주장했던 신하들과 엄청난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실록은 ‘온 나라 백성들 중 태반이 연루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야사(野史)에는 20만~50만이 끌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수치는 당시 조선의 인구 수로 볼 때 다소 과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은 병자호란 당시뿐 아니라 정묘호란 때도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다. 인조 5년(1627) 5월 16일 실록을 보면 각 지방별 포로의 숫자와 당시 정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평양: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2190인, 피살자 158인, 도망쳐 돌아온 자가 344인, 뼈를 묻은 남녀가 1169인.
강동:포로로 잡혀간 남녀 225인, 도망쳐 돌아온 자 67인, 빼앗긴 말과 소가 790마리.
삼등:포로로 잡혀간 남녀 1500인, 피살자 28인, 도망쳐 돌아온 자 111인.>
실록 기록을 근거로 살펴보면 평양, 강동, 삼등, 순안, 함종, 숙천 등 여섯 고을에서만 포로가 4986인, 피살자 290인, 만주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자가 623인이다.
청나라가 이처럼 많은 조선 백성을 포로를 끌어간 이유는 남자의 경우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거나 여자의 경우 성적 노리개로 쓰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실상은 돈을 받고 조선에 되팔기 위해서였다. 포로매매 실상에 대해 인조 16년(1638) 3월 11일 좌의정 최명길은 이렇게 말한다.
<신이 심양 관사에 있을 때 (포로로 끌려간) 한 처녀의 값을 정하고 속(贖;돈 주고 사 온다는 뜻)하려 했는데 청나라 사람이 약속을 위반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가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끝내 그녀의 시체를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최명길은 인조 15년 4월 21일에도 포로의 몸값에 대한 보고서를 올린 바 있다.
<우의정 최명길이 보고했다.
“속환하는 일은 오늘날 급한 일입니다. 정묘년 화친(정묘호란 후 형제간의 우의를 맺은 조약)을 약속했을 당시엔 한 사람 값이 겨우 10여 필이었는데, 지금 들으니 10냥으로 올랐다고 합니다. 저들이 약정한 값은 본래 저렴했는데 값이 점점 올라가는 것은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골육의 속환에 다급하여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비싸게 요구하는 폐단을 초래하게 된 겁니다. 한 사람 값을 몇백 금으로 논하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 가난한 백성은 끝내 속환할 길이 없게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조정에서 규칙을 만들어 사람마다의 값을 노소와 귀천에 따라 다소 차등을 두더라도 많은 자의 경우 100냥을 넘지 못하게 하고, 저들이 높은 값을 요구한다면 차라리 버려두고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액수를 넘기지 못하게 하소서. 이를 어기는 자를 중죄로 논한다면 저들 역시 유익함이 없는 줄 알고 스스로 공평한 값을 부를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신이 제 나라 백성을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몸값 흥정이나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인들은 스스로 탈출하거나 몸값을 지불하고 귀국했다. 조선 여성들이 본국으로 탈출하는 사례가 속출하자 청나라는 “포로 중에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탈출한 사람을 모두 잡아오지 않으면 또다시 침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임금은 도망한 사람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쇄환령(인조 19년)을 내리고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한다.
<내가 사기를 잘 주선하지 못해 조용했던 강토가 병자, 정묘년의 큰 변란을 당해 군병들은 모두 전사하고 남녀 백성들이 포로로 붙들려 갔으니, 환란의 참혹스러움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다.
내가 그 당시 정의를 다하여 싸울 것을 명령하는 것은 실로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허겁지겁 성을 나와 항복해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까닭은 구차하게 자신만 온전하려는 계책이 아니라 사실은 온 나라 민생을 다 살리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상처는 더욱 심해졌고 백성들은 거듭 화를 당하고 있는데, 이번 쇄송의 일로 온 나라가 놀라움에 떨고 있다.
슬프다. 우리 백성이 이역 땅에 잡혀가 골육을 그리워한 나머지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하기를 마치 그물을 벗어난 토끼가 숲 속으로 뛰어들어가듯 했다.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하기 바빠 이미 본업도 잃었는데, 일제히 찾아내 결박하여 (청나라로 다시) 보내기를 도적 대하듯 하여 자식은 부모를, 남편은 아내를 이별하고 있다.
헤어질 때에 정리가 극도에 달해 목매어 죽기도 하고 일부러 굶어 죽기도 하며 심지어 수족을 잘라 이별을 보류하는 자도 있다. 추위와 굶주림에 괴로움을 당해 가는 도중이나 옥중에서 죽는 자도 많이 있다. 게다가 관리들이 엄한 독촉에 쫓기고 연루될까 두려워 여행하는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 그의 족속을 대신하여 보내는 일도 있었다.
아, 싸움터에 나가 창을 맞거나 피난하다 포로가 된 것은 얼떨결에 생겼던 일이라 어쩔 계책이 없었을 것이며, 나 역시 손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쇄송은 나로 인해 빚어진 일인데도 관리들을 호령하여 결박하는 일을 스스로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인민의 부모가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번 일을 당한 백성들이 아무리 나를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는 나의 죄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불행하여라 조선의 환향녀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 패하면 가장 비참한 것은 여자의 신세다. 어쨌거나 스스로의 목숨 건 탈출이나 골육이 돈을 주고 사오거나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많은 포로들이 귀국함으로써 제 나라 백성을 외국에 성적 노리개로 바치는 참극은 면하게 됐다.
그러나 이미 몸을 더럽힌 채 귀국한 여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조선사회는 한바탕 시끌벅적했다.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자들의 처리 문제가 정국의 중요 이슈로 부각되었으니, 다음은 인조 16년 3월 11일 실록.
<신풍부원군 장유가 예조에 ‘외아들 장선징의 처가 강화에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을 삼아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 장가를 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보고했다. 전 승지 한이겸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됐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을 시켜 격쟁하여 원통함을 호소했다.
예조가 아뢰기를 “포로로 갔다가 돌아온 사족의 부녀자가 한 둘이 아니니 조정에서 반드시 십분 참작하여 명백하게 결정한 뒤에야 피차 난처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부부가 된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이에 좌의정 최명길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옛날 노인에게 들으니 선조 시절에 임진년 왜변이 있은 뒤 어떤 종실이 상소하여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답니다. 어떤 문관이 다시 장가들었다가 아내가 쇄환되자 선조께서 후취를 첩으로 삼으라고 명했고, 그 처가 죽은 뒤에야 정실로 올렸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재상이나 조관으로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아 명문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
신이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속환을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의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신이 심양으로 갈 때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 주고 떠났답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이 더럽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최명길의 구구절절한 사연에도 불구하고 실록은 ‘이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극도로 명분론이 득세하던 시절이었으니 자기 딸과 부인을 청나라에 포로로 빼앗기고 새 장가 드는 것이 명분상으로는 옳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분이 어땠을까. 이 시절 사관도 명분론의 늪에 빠져 최명길의 발언을 비판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개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청나라에)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 해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나,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 가풍을 더럽힐 수는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 때의 일을 인용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 임금의 명령이 사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전교가 있었다 해도 본받을 만한 내용은 아니니 오늘에 다시 행할 수는 없다.
아,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제 나라 백성을 지킬 힘이 없어 아녀자와 딸들을 강탈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절개’와 ‘사대부 가풍’ 운운하는 발언을 보면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나라에서는 이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으니, 환향녀들은 오랑캐 나라에 끌려가 몸 버리고 노예살이 하다 왔건만 집안에서 받아주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비구니가 되는 사례가 허다했다. 이것이 후일 ‘화냥년’의 어원이 되었으니, 불행하여라 조선의 여인들이여!
김용삼의 太平路 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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