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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조선중기 이율곡(1537~1850)나의 선조의 편년체 간략 기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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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이율곡(1537~1850)나의 선조의 편년체 간략 기록)

감사공 2023. 12. 15. 20:50


文化柳氏 大丞公 中門祗侯使公(十一世)派 八世 後 安山宗中 先祖 編年記錄
(參考:朝鮮王朝實錄司馬試文科榜目古文獻 等)
文化柳氏가 아닌 人名은 사위 & 當時 聯關人

1537 李 珥 (李栗谷 1537~1584=47歲 卒) 性理學者
1500
1501 李 滉 (退溪)1501~1570 朝鮮中期儒學者 (영남학파)
鄭惟吉金麟厚李 滉(賜暇讀書)
1502
1503
1504
1505
1506
1507
1508
1509 柳 潛 (1509~1576) 大丞公 19(墓所 始興市 陵谷洞 山32)
1510 金麟厚 (1510~1560) 朝鮮中期性理學者
1515 鄭惟吉 (1515~1588) 蓬原府夫人 東萊鄭氏父親
1528 柳 渾 生員進士(式年試)
柳 潛 生員
1531 鄭惟吉 司馬試(16)
1538 鄭惟吉 文科 壯元
1540 柳 潛 文科
1541 柳自新 (1541~1612) 大丞公 20(墓所 始興市 陵谷洞 山32神道碑 山33)
柳 潛長子同甲蓬原府夫人 東萊鄭氏 鄭楊貞結婚
鄭楊貞 蓬原府夫人 東萊鄭氏 (1541~1620) 合祔 ⦿朝鮮中期 女流詩人
柳自新鄭楊貞 사이에 64를 두셨다. 3光海王
1542 金克孝 敦寧府都正(1542~1618) 光海王妃 文城郡夫人姨母父
(金尙容金尙憲父親)
1544 鄭惟吉 李滉(1501), 金麟厚(1510)와 함께 東湖書堂에서 賜暇讀書
嘉靖譜 柳希潛(?~?)1545年 撰 謫所 義城(忠景公派)에서
禮賓侍 副正(實錄)僉正義興縣監(戊子譜)
1546 柳 潛 持平司憲府 持平
1547 柳 潛 弘文館 副修撰弘文館 修撰檢討官弘文館校理
1548 柳 潛 持平兵曹正郞慶尙 左右도 및 平安道에 파견하여 구황을 잘 하는지 與否를 살피게 하였다.(事實上 暗行御使)平安道御使副修撰
柳德新 (1548~1617) 墓所 始興市 陵谷洞 山32 (柳 潛次子)
1549 柳 潛 司憲府掌令修撰
1550 嘉靖299月春秋館에서 삼가 敎旨를 받들어 前後官을 아울러 記錄한다.
編修官通訓大夫 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輕筵侍講官承文院參校 臣 鄭惟吉
記注官通訓大夫 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輕筵侍講官 臣 柳潛
1552 柳 潛 司憲府 執義弘文館副應敎檢詳議政府舍人
鄭惟吉 嘉善大夫都承旨吏曹參判禮曹參判大司諫禮曹判書
鄭昌衍 (鄭惟吉1552~1636) 光海仁祖 兩代 王朝에서 左議政 역임
1553 柳 潛 尙衣院 正
恭嬪 金氏(臨海君,光海君 母 1553~1577=24歲 卒)
1554 柳 潛 司僕侍 正憲府飮酒하였다고 罷職을 청했으나 允許하지 않았다.
堂上으로 昇級掌樂院 正
1555 柳 潛 全州府尹
1558 柳 潛 刑曹參議
1559 柳 潛 同副承旨
1560 柳 潛 兵曹參議北京에 보내어 聖節賀禮하고 하여 謝恩하였다.
勅書를 내린데 대한 謝恩이다.大明會典太子 冊封 일에 알아보라
赴京使臣(부경)
鄭惟吉 弘文館·禮文館大提學이 되어 文衡에 들다.
吏曹判書知中樞府事
1561 柳 潛 兵曹參議
柳希鏗 (柳自新一男 1561~1583)
金尙容 (1562~1637) 蓬原府夫人 東萊鄭氏女弟 長子
1562 柳 潛 刑曹參判
1563 柳 潛 刑曹參判敍用하도록 하라
柳希聃 (柳自新2) 1563~1614)
1564 柳 潛 淸洪道 觀察使
柳自新 進士試
柳希奮 (柳自新31564~1623)
1565 嘉靖譜 柳希潛(?~?)1545年 撰 謫所 義城 父子發刊 (21걸림)
柳瀜(?~?)跋文 ⦿作成者 推定 1547年生까지 收單 記錄?
柳 潛 淸洪道 觀察使 時 發刊 協助 (嘉靖譜 101912)
柳 潛 同知中樞府使에서 守陵官으로 삼다.
柳自新 泰陵參奉
1566 柳 潛 資級하다.
柳自新 泰陵參奉 1資級 曾
柳希成 (柳德新長子 ?~? 卒年 未詳)
1567 柳 潛 漢城府 判尹知中樞府使工曹判書
鄭惟吉 進賀使나라에 다녀왔다.
1568 柳希發 (柳自新41568~1623)
柳希老 (柳德新21568~?미상)
鄭惟吉 慶尙,京畿 觀察使
1570 金尙憲 (1570~1652) 蓬原府夫人 東萊鄭氏女弟 2
1571 柳希契 (柳德新3?~? 卒年 未詳)
1572 柳 潛 刑曹判書체직하다
鄭惟吉 禮曹判書로 있으면서 나라 사신 接伴使가 되어 능란한 詩文과 탁월 한 슬기를 發揮하여 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되었다.
臨海君 (宣祖11572~1609)
1573 柳 潛 庭試試官 (10)
1574 柳 潛 判尹
1575 柳希亮 (柳自新51575~1628)
光海王 朝鮮 15(宣祖2本名李琿 1575~1641)
柳希益 (柳德新41575~1598=23歲卒~뱃노리 中 溺死?)
韓汝稷 (1575~1638) 柳希亮同甲이며 切親同僚 工曹判書 嘉善大夫
1576 柳 潛 卒
光海王妃 文城郡夫人(柳自新31576~1623=47歲卒)
1577 恭嬪 金氏(臨海君光海君 生母 25歲卒)
1579 柳希鏗 進士試(文陵君)
柳孝立 (柳希鏗長子 1579~1628=49)
鄭昌衍 式年文科 讀書堂에 들어갔고吏曹佐郞同副承旨
1581 柳希安 (柳自新61581~?)
鄭惟吉 右贊成·判義禁府事·判敦寧府使를 거쳐 右議政 辭職
1582 柳忠立 (柳希鏗次子 1582~1620=38歲卒)
金尙容 進士 1590增廣文科
1583 柳希鏗 (23)
柳鼎立 (柳希聃長子 1583~)
鄭惟吉 右議政耆老所林塘體韓琦碑林塘遺稿
1586 光海君 文城郡夫人 文化柳氏와의 家禮(1312)
1589 柳自新 鄭汝立獄事事件 安岳縣監으로 特命받아 逆徒들을 잡아 處理하다.
柳山立 (柳希契長子 1589~?)
1590 ⦿光海君 三淸洞 詩 世子 冊封 前으로 推定(柳希發에서 보다)
丹壑陰陰翠靄間푸른 이내 속에 붉은 골짜기는 그늘졌는데
碧溪瑤草繞天壇맑은 시냇가 기이한 풀들이 천단을 에웠도다.
煙霞玉鼎靈砂老노을 어린 옥 솥에 단약은 익어가나
蘿月松風鶴未還다래넝쿨에 달 비치고 솔바람 일어도 학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柳希聃 生員
柳希奮 生員進士 兩科 合格
金尙容 增廣文科承文院副正字藝文館檢閱
1592 柳自新 行敦寧都正同知敦寧府使
⦿壬辰外亂 宣祖 義州蒙塵光海君世子로 삼았다. 分朝(당시 18)
⦿ 禮記일단 君臣義理해지면 그 어떤 경우에도 바꿀 수 없다.”
宣祖心情 : 光海君永昌大君 間世子依違原則을 벗어난다는 뜻
金尙容 江華仙源村 피난 兩湖體察使 鄭澈從事官
1593 柳希亮 刑曹判書安公神道碑銘 篆書(安鼎福 선조 安滉)
趙國弼 縣監(文陽府院君 柳自新의 첫째 사위)
1594 文城郡夫人 柳氏(當時 世子嬪)海州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柳希奮 翊贊
柳學立 (柳希益 子 1594~?)
1595 柳自新 成川府使
趙國弼 司禦
1596 柳自新 漢城右尹
柳希聃 松禾縣監
世子嬪産室排設하였다.
金尙憲 庭試文科副修撰佐郞副校理
1597 柳自新 漢城判尹(2)
柳希奮 別試 文科
世子嬪遂安에서 都城으로 돌아왔다.
1598 柳自新 明軍 毆打事件
柳希奮 禮曹佐郞
柳正立 (柳希奮 長子 1698~?)
金尙容 承旨聖節使 明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99 柳自新 開城留守
柳德新 林川郡守
柳希奮 成均館典籍弘文館修撰持平
1600 世子嬪産室排設하도록 하라(宣祖指示)
柳命立 (柳希奮 次子 1600~1647)
1601 柳自新 敦寧府知事知敦寧府使
柳希奮 侍講院司書侍講院文學成均館典籍
柳斗立 (柳希亮 子 1601~1628)
柳志立 (柳希成 次子 1601~1669)
朴 燁 (柳德新의 둘째사위)刑曹正郞司諫院正言은 좋지 않게 記錄
金尙容 大司諫定州牧使左遷
1602 柳希奮 司諫院正言吏曹正郞 兼 侍講院司書輔德直講
朴 燁 兵曹正郞成均館直講은 좋지 않은 것으로 記錄
1603 柳希奮 司馬試 饔院正
王世子 嬪殿誕日 承政院 弘文館 侍講院 翊衛司問安하고 賞賜하였다.
柳希亮 司馬試
柳希老 進士
朴 燁 戶曹正郞
1604 宣 朝 至誠大義格天熙運 尊號
柳希奮 弘文館副應敎司贍寺副正司諫弘文館典翰
趙國弼 洪川縣監
朴 燁 海南縣監刑曹正郞
1605 柳德新 溫陽郡守司僕寺僉正
柳希奮 典籍
柳希發 翊衛司 司馭
柳希亮 鄭仁弘 跋南冥集說 誹謗
朴 燁 平壤庶尹
1606 柳德新 沃川郡守
柳希奮 問禮官文館典翰
柳希發 載寧郡守
柳希亮 五賢文廟從祀建議
柳忠立 進士 生員試
柳鼎立 進士
1607 柳希聃 仁川府使
柳希奮 司藝司成司憲府執義成均館司成
朴 燁 平山府使
1608 柳自新 文陽府院君敦寧府事
柳希奮 弘文館直提學同副承旨右副承旨戶曹參判 兼 世子右副賓客
⦿光海王 卽位
⦿宣祖의 서거와 光海王卽位 오늘 嗣位하게 되면 中殿王大妃로 높여야 하고 世子嬪王妃로 올려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徽號를 올리는 冊命에 관한 일은 追後擧行하도록 하겠습니다. 元孫世子冊封하여야하는데 우선 元子呼稱하고 追後擧行 의당 護衛하는 武士들은 낮에는 中殿差備門밖에 있는 빈방에 있게 하고 밤에는 王子 賓廳에 직숙하게 하라


柳希亮 別試文科
趙國弼 臨海君謀叛事實安岳郡守
李德一 (文陽府院君 柳自新의 둘째 사위) 전 사용
鄭昌衍 吏曹判書(文陽府院君 柳自新 國舅 妻男)
金尙容 漢城右尹都承旨
金尙憲 文科 中試賜暇牘書校理應敎直提學同副承旨
1609 光海君 황제는 朝鮮國權署國事 光海君(姓諱)에게 勅書를 내려 諭示하노라
柳希奮 大司諫兵曹參判
柳希發 增廣文科 조카 同榜及第해 논란이 일었다.
柳希亮 藝文館檢閱說書正言吏曹佐郞禮曹參判
柳孝立 增廣文科
1610 柳德新 長興洞 집을 別宮으로 삼다.
柳希奮 吏曹參判都承旨特進官參贊
柳希發 大科及第安山郡守正言文學郎廳持平
柳希亮 典籍持平文學吏曹正郞分承旨
柳希亮-經理御史楊先生頌德詩稿
柳孝立 禮曹佐郞
柳忠立 文科
趙國弼 安岳郡守(文陽府院君 柳自新 國舅 사위)
李德一 兵曹佐郞
趙有道 (柳希奮 첫째 사위) 式年試에 혜택을 주다.
朴 燁 黃州牧使 兼 兵馬使行副護軍
1611 柳希聃 判決事
柳希奮 司憲府大司憲判尹刑曹參判大司憲議政府右參贊 兼 世子右賓客
柳希發 獻納禮曹正郞持平吏曹正郞副校理獻納
柳希亮 校理副修撰
柳忠立 注書兼說書
李德一 正言
趙有道 說書吏曹佐郞검사서(柳希奮李爾瞻간의 알력 자취가 됨)
朴 燁 소모장咸鏡南道 兵使이 좋지 않아 罷職
1612 ⦿柳自新 (文陽府院君)
⦿月汀(尹根壽)輓詞
國舅尊無兩둘도 없이 존귀한 국구로서
殊恩絶百僚특별한 은혜 백관 중에 뛰어 났지요
光華映一世빛나는 영화는 한 세대를 비추었고
寵遇極今朝총애하는 대우는 조정에서 으뜸이었지
憶作耆年會기로회에서 만났던 일 생각해 보니
偏承雨露饒유달리도 성은을 많이 받으셨지
驚心生死別생사의 이별에 가슴 놀라고
執紼只魂銷상여 줄잡으니 넋이 스러질 듯 하다오


⦿柳自新 朝鮮中期作詩
⦿秋山夕陽을 띄고 江心에 잠겼는데 一竿竹 둘러메고 小艇에 앉았으니
天公閑暇히 여겨 달을 좇아 보내도다


文陽府院君 神道碑文書體(同知敦寧府事 金玄成作詩 1542~1621)
⦿樂只자 오늘이여 즐거운자 今日이여 즐거운 오늘이 행여 아니 저물세라
매일에 오늘 같으면 무슨 시름 있으랴


⦿光海君 金直裁獄事
光海君 先 王妃-外家王妃-外家 , , 兄弟, 에 집중되어 있다. 결국 外戚男系(---)에 대응한, 女系(祖母---子婦)親族을 의미한다.


中 殿 王世子 大內에서 의절대로 望哭禮를 행하였다.
柳德新 中和府使敦寧都正
柳希奮 正憲大夫承旨
柳希發 直講權韠내용을 問題삼은 誣告流配케 하였다.
恭嬪金氏恭聖王后追崇하기 위해 설치한 尊崇都監郎廳 柳希成 定山縣監
柳忠立 正言修撰
趙國弼 功臣敎書에 관하여 전교하였다.遂安郡守
趙有道 正言罷職請願遞差시킴吏曹正郞
朴 燁 長興府使全羅道에 차임承旨
1613 光海君 功臣 대거 錄勳(衛聖功臣, 翼社功臣, 定運功臣, 亨亂功臣 등 네 가지였다.)
光海君 體天興運峻德弘功 尊號
光海君 翼社功臣은 임해군 제거定運功臣柳永慶 제거亨亂功臣 金直裁제거
柳自新 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衛聖功臣(1=10)錄勳
柳希聃 竭忠盡誠衛聖功臣(3=53)錄勳(同德贊謨佐運 6줄임)
柳希奮 竭忠盡誠同德贊謨衛聖功臣(2=17)錄勳(佐運 2줄임)
柳希奮 翼社功臣 1等 勳號
柳忠立 吏曹佐郞西原縣監
柳希奮 錄勳都監宣賜御膳宴會圖(李恒福과 함께 作詩 圖畵)
趙國弼 3(竭忠盡誠衛聖功臣)錄勳
鄭昌衍 2(竭忠盡誠同德贊謨衛聖功臣)錄勳
趙有道 副校理吏曹佐郞
慶有後 (柳希奮의 둘째 사위) 生員
李誠胤 錦山君(竭忠盡誠同德贊謨衛聖功臣)錄勳
朴 燁 貪慾問題였다함.義州府尹府使
柳希霖 (竭忠盡誠同德贊謨衛聖功臣)錄勳
⦿蓬原府夫人 東萊鄭氏 癸丑獄辭 時 沙溪 관계
⦿내가 金長生을 잡아다가 추문하고자 한다.” 하니, 鄭氏가 아뢰기를,
金長生은 당대의 大儒로서 많은 선비들이 떠받들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잡아다가 추문한다면 크게 인심을 잃을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光海王
뜻이 드디어 풀어졌다고 한다.
1614 柳希聃 掌隷院判決事
⦿月汀(尹根壽)輓詞
地望尊無兩지위와 명망은 둘도 없이 높은데
謙虛每下人겸허하여 항상 남에게 나추었네
桐鄕曾佩綬동향에서 일찍이 수령을 지내었고
貊國更便民맥국에서 다시금 백성을 잘 다스렸지
綠鬢辭昭代젊은 나이에 밝은 시대를 하직하였으니
丹旌渡漢津명정(銘旌)은 한강 나루를 건너는 구려
榮名慟中折영예로운 명성이 중도에 꺾인 게 가슴 아프니
簫挽秪傷神만시를 읊으매 마음만 상한 다오


柳希亮 議政府舍人典翰直提學
柳希亮 火器圖鑑儀軌(當時 品階 弘文館直提學都廳) 서울大學校 奎章閣 所藏
火器圖鑑址(舊 機器局飜沙廠서울시 有形文化財 51)表石三淸洞
柳希亮 弘文館 直提學
柳希亮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 本廳
柳忠立 文學
柳孝立 正言兵曹正郞文學弘文錄記錄副校理火器圖鑑儀軌
柳希亮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 郎廳
柳斗立 進士
柳誠立 柳希老長子
趙有道 校理獻納
朴 燁 長興府使武人
鄭昌衍 右議政左議政耆社에 들고 几杖을 받았다.
李元翼과 더불어 上疏 鄭蘊을 구하여주었다.辭退하고 杜門不出하다.
鄭昌衍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 都提調(右議政)
1615 ⦿蓬原府夫東萊鄭氏(鄭楊貞:本名) 下賜宴 瑞葱臺通明殿 3(王妃世子)
蓬原府夫人東萊鄭氏 四人로 서로 주고받았다.(詩 內容 省略)
柳希奮 [宣祖大王懿仁王后]尊號都監儀軌
柳希發 應敎典翰直提學都廳
柳希亮 司僕正濟用監正執義
柳希亮 光海君私親誌石改修都監儀軌
柳孝立 掌樂正弼善
柳忠立 應敎弼善
柳正立 司馬試
柳中立 司馬試
柳斗立 司馬試
柳益立 司馬試
趙有道 檢詳典翰都廳
朴 燁 嘉善大夫잠시 停啓하다
金尙憲 恭聖王后冊封誥命謝恩箋文光海王의 뜻에 거슬려 罷職
仁穆大妃西宮 幽閉 등에 反對하면서도 仁祖反正에 나서지 않았다.
1616 柳德新 延安府使
柳希亮 同副承旨右副承旨刑曹參議承政院右副承旨左副承旨
柳希亮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 都廳
柳希亮 萬曆丙辰至月上院 簡札(成均館大學校 所藏)
柳希亮 名公眞跡(高麗大學校 所藏)
柳希亮 任就正 子 文科及第 祝賀 13職責手決
許筠柳希亮任就正柳孝立鄭廣成朴自興安昌君裵大維
⦿柳希亮 斜川莊八景圖 畵幅篆書
⦿이경엄은 중국 동진시인도잠(365~427)이 지은遊斜川을 읽고 자신의 별장과 도잠이 노닌 곳의 地名이 같음을 기뻐하며 그림을 完成한 다음 글씨로 이름난 柳希亮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篆書斜川莊八景圖를 써주기를 부탁하고 知人들에게 를 부탁하여 完成作品(2022.04.28., 국립중앙박물관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柳希發 湖當에 들어 賜暇讀書
柳希亮 湖當에 들어 賜暇讀書
柳希亮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 都廳
柳孝立 濟用監正副修撰
柳孝立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 郎廳
柳忠立 輔德司僕寺正
⦿奉呈 月沙 相公 行軒
雨雪霏霏冬已成問公何事啓脩程回天昔荷先朝獎請翟今承簡命行槎泛鴨江三渡遠月 分燕塞一輪明遙知奉 詔歸來日五色 絲綸慰
聖情 萬曆 丙辰 至月 日 侍敎生 柳忠立再拜
길 떠나는 月沙 상공께 올리다 진눈개비 쏟아지는 한겨울 추운 날에
공께서 무슨 일로 먼 길을 떠나시나 천자의 마음 돌려 선조 장려 입었고
왕후 관복 아뢰려 간명 받고 길 떠나네 압록강 세 차례나 건너는 먼 사신길
연경(燕境)에 달이 떠서 환하게 비추겠지 조칙을 받들고서 돌아오는 그날에는
오색의 조서(詔書)로서 성상 마음 위로 하리


柳山立 進士
梅墩居士 柳廣善(柳希亮 孫 柳斗立 子) 出生 墓誌銘 姨從弟 李沃(京畿觀察使禮曹參判)序文 閔昌道(大司成)星湖集 李瀷 50筆寫 蔡膨胤(刑曹參判)
金時輔 將官
趙有道 舍人典翰
金世濂 (柳希發 첫째 사위)增廣試 及第禮曺佐郞侍講院司書修撰
朴 燁 成川府使停啓
1617 ⦿文陽府院君(柳自新) 神道碑 建立(後 拓本 표구 1梧桐나무
실크보로 包裝 2007105서울大學校 奎章閣寄贈하다.
柳德新 都正
柳希奮 右賓客贊成右贊成兵曹判書
柳希發 吏曹參議를 다스리려 議政府啓下하다.
柳希發 李爾瞻 등이 적극 발의한 仁穆大妃 廢妃論에 가담하였다.
柳希亮 弘文館副提學京畿監司(369)禮曺參判
柳希亮 晉原府院君 柳根伯兄 柳格 神道碑 篆書(忠北槐山郡沼壽面 夢村里)
柳希亮 嘉善大夫 京畿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開成留守 巡察使
柳希亮 備邊司 謄錄 公洪監司 추가 薦望 單子
柳希安 判官(從五品)
柳孝立 軍器寺正軍資監正
柳忠立 應敎司成議政府舍人
柳鼎立 翊贊(柳希聃長子}
柳時立 洗馬
金世濂 司書正言啓下(의 승낙)郭山歸鄕 보내졌다.啓下가도사가 押送
議政府啓下하다.呈辭하여 言路 더렵히고 말았다.
趙國弼 內禁衛副司果開城留守
趙有道 應敎상의원정典翰행사직
趙裕善 修撰(趙國弼 子)
李誠胤 (錦山君柳德新의 첫째 사위) 上疏를 올림
金尙容 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反對해 벼슬을 버리고 原州로 거처를 옮겨
를 피하였다.
1618 ⦿三昌(李爾瞻朴承宗柳希奮이 서로 견제하며 주고받은 詩文)⦿
李爾瞻에서
봄을 찾는 즐거운 일 바빠서가 아니라不是尋春樂事忙
다만 서로 모여 심장을 의탁하려는 것이오只要相會託心腸
매화 역시 우리들 의사를 알아채고梅花亦解吾人意
좋은 날을 먼저 가려 암향을 보내주네先占天和送暗香
라고 하였고,
朴承宗에서
열흘을 서로 찾아 아흐레가 바빴어라十日相尋九日忙
지난날의 쌓인 심사 얼마나 애태웠나向來懷抱幾回腸
찬 매화 여윈 대는 청표는 한가지라梅寒竹瘦同淸標
향기로운 궁중 술에 모두 함께 취해 보세盡醉芳樽內醞香
라고 하였고,
柳希奮에서
망이 다르다고 행여나 말을 마소憑君休道異閒忙
철석같은 심장을 더욱 더 굳히자구나但願彌堅鐵石腸
복사꽃 붉고 오얏꽃 흰 건 도무지 상관 않고李白桃紅都不管
향기로운 성명을 늦도록 보전하세歲寒期保姓名香
하였다.
그러나 세력과 지위가 서로 기울자, 마침내 그 화합을 보전하지
못하고 패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도 承宗만은 죄도 가벼웠을
뿐더러 죽으면서도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가상하다 할 만하며,
그 시 역시 柳希奮李爾瞻에 비하면 낫다고 보겠다.


柳希奮 兵曹判書에서 辭職하다.李爾瞻 大罪 上疏
柳希發 堂上(正三品)吏曹參判同知義禁活人署提調兼同知經筵(從二品)
李爾瞻 등과 함께 許筠의 심복들이 남대문에 격문을 붙여 역모를 도모 했다는 이유로 政敵 許筠을 능지처참케 하였다
柳希安 司僕僉正(從四品)
柳孝立 備邊司儒將으로 薦擧하다. 營建都監都廳掌樂正 兼 弼善
柳忠立 兼輔德弘文館直提學
柳鼎立 文科 增廣試
柳命立 進士
柳福立 進士
柳斗立 進士
趙國弼 左尹
趙有道 戶曹參議同知事同副承旨承旨
金世濂 進士 이상길이 억울함을 풀어주라고 上疏하다.
朴 燁 平安道 監司
1619 柳希亮 忠烈錄(金應河將軍)追悼文
柳孝立 兼輔德戶曹參議
柳忠立 同副承旨工曹參議大司成(成均館의 으뜸 벼슬)
柳鼎立 忠原縣監
趙國弼 右尹刑曹參判
趙有道 副提調刑曹參議
金世濂 전리로 놓아 보냄
1620 蓬原府夫人 東萊鄭氏 (鄭楊貞:本名)
⦿女流詩人 逢原府夫人 東萊鄭氏(鄭楊貞) 2
⦿1.출왕서빙고강사(出往西氷庫江舍)
來訪沙鷗約 江皐木葉飛 園收芋栗富 網擧蟹鮮肥
내방사구약 강고목엽비 원수우율부 망거해선비
갈매기와 약속하고 찾아와 보니강 언덕엔 나뭇잎 날리네
동산에서는 토란과 밤을 가득 거두고그물을 건지니 살찐 게가 신선하네
⦿2.褰箔看山翠 開樽對月輝 夜凉淸不寐 松露滴羅衣
건박간산취 개준대월휘 야량청불매 송로적라의
발을 걷고 푸른 산 바라보며술동이 열고 달빛을 대하니
밤은 서늘하고 맑아 잠 못 이루는데소나무 이슬이 비단옷 적시네


柳希奮 辭職書를 되돌려 받다.
柳希發 副提學
柳希亮 刑曹判書 安滉(廣陽君) 神道碑 전액 篆書(安鼎福 先祖)柳根金玄成
柳孝立 右副承旨
柳忠立 (柳希鏗 次子 1582~1620)
趙國弼 刑曹參判
金世濂 성상이 알았다며 마땅히 헤아려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1621 光海王 尊崇都監儀軌
柳正立 文科(別試文科)
柳命立 文科 답안지 문장이 아름다웠으나 애석하게 떨어뜨렸다함
柳命立 文科
柳中立 文科(별시문과) 柳希發次子
柳益立 文科(별시문과)
柳斗立 文科(20)
金時輔 司僕判官
1622 柳命立 待敎
中 殿
⦿5백년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 나는 야위어도 천하는 살찌리라”(이수광 지음)
光海王上疏文 (내용 丁卯虜亂 天下大義를 잃을 것입니다.)
나 같은 아녀자가 마땅히 관여할 일이 아니나 쓸데없는 휴지 한 장이로되, 마음이 극히 답답하여 서계하나이다. 변방 장수 능히 적을 치지 못하므로 나같이 분해하여 반듯이 등창이 나서 죽을 것이니 더욱 통곡함을 더 하리로소이다.’


柳馨遠 進士반계수록實學者(1622~1673)~夏亭公派
朴 燁 朴燁의 의견를 타당하다 하였음.狀啓를 올리다.加資하다.
1623 仁祖反正(金瑬李貴金自點 ) 명분은 網常論尊明排淸論이었다.
文城郡夫人柳氏世子世子嬪 江華 喬洞 流配地 柳氏世子世子嬪 卒
文城郡夫人柳氏 陰曆十月初八日(安山宗中 秋季時祭日과 같음) 47歲 卒
⦿夫人墓表石陰記
天啓三年癸亥十月初八日病卒於江華 命輟朝三日進素膳
五日禮曹堂上郞廳內官及京畿監司終始護喪干殯諸具該曹
一一下送 上遣中使致祭 特命隧葬閏十月二十九日葬于楊
州赤城洞亥坐巳向禮曹請以王子例一等禮葬定軍守護王子
墓步數外加給三百步返魂於長興洞舊第定內官宮人奉朝夕
朔望及四名日四仲朔祭奠官備祭需


⦿一說에 의하면 流配地 江華道에서 世子世子嬪이 나무에 올라가 망을 보게 하고 땅굴을 파서 逃亡하려 했으나 어렵게 판 것이 너무 짧다보니 들켜 世子絞殺 당하자 世子嬪은 목매어 따라죽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文城郡夫人柳氏가 너무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남편인 光海主와 같이 바다에 投身하자고 권하였으나 이에 하지 않아 홀로 목매어 自盡하였다. 한다.
이후 仁祖李适靑太宗에게 삼전도 앞에서 降服을 하고, 柳孝立,柳斗立 등의 謀叛事件으로 두려움을 感知 光海主를 밖을 보지 못하게 하고 濟州道移配 圍籬安置 하였고, 光海主移配地에서 (1641~1637)18동안 갖은 下待를 받아가며 67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를 記錄하고 있는 本人(光海主同甲 妻男 柳希亮代孫 柳志世)2023늦가을 濟州道訪問하여 到着地 바닷가,流配所,葬禮地를 둘러보며 400年前 大姑母大姑母夫분들의 悲哀를 느끼게 하였다.


⦿光海主 王妃가 목매어 自盡한 것은 朝鮮王朝에서 唯一한 일이라 한다.
仁祖反正 後 光海君의 폐세자(廢世子)
⦿1.세자를 폐하니 이때 나이 26세였다. 그는 나룻배에서 시 읊기를(鶴山樵談)
麈寰翻覆似波瀾 / 번복되는 세상일 파도 같으니
何必憂愁心自閑 / 하필 근심하리 마음 절로 한가 하다네
二十六年眞一夢 / 26년 참으로 한 꿈이로다
好須歸去白雲間 / 구름 사이로 돌아가게 되어 좋다네 하였다.
⦿2. 光海君의 폐세자(廢世子)가 귀양살이에 있으면서 를 읊기를,
本是同根何太薄 / 본시 형제간인데 이다지도 박할 쏜가
理宜相愛亦相哀 / 서로들 사랑하고 슬퍼해야 하지 않소
綠何脫此樊籠去 / 어떻게 하면 이 유배지를 벗어나
綠水靑山任去來 / 녹수청산 자유롭게 오고 갈꼬 하였다.
柳希奮柳希發 斬刑子孫들은 圍籬安置되었다.
臨海君永昌大君晉陵君綾昌君鄭仁弘李爾瞻 모두 이들의 謀 議때문이었다. 고 말한다.
柳希亮 巨濟島 流配(士類自處하다) ‘맑은 척리(戚里)’ 澤堂先生別集
柳孝立 提川 流配
柳益立 文科 及第取消하다.
柳是立 (柳希奮 孫子 1623~1685)
趙有道 水原府使안례를 불문에 붙이고 방면하라中道付處를 따르지 않았다
趙國弼 漢昌君
朴 燁 仁祖處刑하다.平安道 監司珍奇寶物 등을 沒收했다.
金世濂 副修撰副校理賜暇讀書(湖當)들다.
鄭昌衍 左議政
金尙容 判敦寧府事兵曹禮曹吏曹判書
金尙憲 仁祖反正 후 등용되어 大司憲大司成大提學六曹判書
1624 李 适 亂 發生
趙有道 放免
金世濂 修撰
1626 金世濂 弘文館 校理持平獻納侍講官
李敏樹 (柳希亮의 사위)刑曹正郞削職兒馬 一賜給
1627 金世濂 宣醞하여 物品下賜받음.
金尙容 丁卯胡亂때는 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1628 柳希亮 流配地 巨濟島 54) 絞殺
아들 柳斗立과 조카 柳孝立謀逆事件連坐되어 流配地에서 絞殺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柳希亮 柳希亮事 許穆의 미수기언<記言可考>조선시대 명현의 사적을 적은 책
柳希亮 柳希亮 事
柳孝立 (柳希鏗長子) 逆謀魁首正刑
柳斗立 (柳希亮獨子 27) 正刑
柳宗善 (柳孝立長子) 正刑
柳養善 (柳孝立次子柳忠立系子) 을 받다가
柳鼎立 (柳希聃 長子)
柳正立 (柳希奮 長子)珍島安置
柳時立 (柳希發 長子)巨濟島安置
柳廣善 27父親53祖父가 돌아가시는 悲運을 맞게 되어 家勢가 완전히 沒落하게 되었다. (當時 겨우 12) 梅墩居士(梅墩遺稿 6)
⦿修理山寺 作詩
한스럽다 승이 되어 이 몸 하나 숨기지 못하고
평생을 물가에 늙어 운수 얄궂어라
까닭 없이 동루의 기둥이 무너지더니
달은 지고 샘물소리에 새벽 골 안이 비었구나


趙國弼 (漢昌君)迎日 정배 三水郡 魚面堡移配 圍籬安置
李德一 (文陽府院君 柳自新의 둘째 사위)
金時輔 (文陽府院君 柳自新의 네째 사위) 富寧으로 正配 圍籬安置
趙有道 配所로 다시 보내다.
鄭昌衍 判中樞府使로 소장을 올려 辭職하였으나 允許하지 않았다.
1629 金世濂 金鎏가 지조가 가상하고 재능도 있다며 적극 옹호
1630 金世濂 총명하고 기억력 좋아 壯元及第하였다.檢討官執義弘文館應敎司諫
金尙容 耆老社
1631 金世濂 副應敎執義司諫문안관으로가도에 보냄.黃都督을 만나다.玄風縣監
1632 金尙容 右議政老齡으로 辭退
1633 趙有道 釋放되다.
1635 柳志立 進士
金世濂 잡혀왔다 곧 釋放
1636 金世濂 司諫執義
金尙容 丙子胡亂 廟社神主를 받들고 嬪宮元孫遂行 江華島避難
1637 ⦿光海主 作詩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江華道에서 濟州道 移配) 배위에서)
風吹飛雨過城頭 瘴氣薰陰百尺樓 滄海怒濤來薄暮 碧山愁色帶淸秋
歸心厭見王孫草 客夢頻驚帝子洲 故國存亡消息斷 烟波江上臥孤舟
궂은 비바람은 城頭에 모질게 휩쓸고 울울한 瘴氣百尺樓에 가득 찾도다. 푸른 물결 성내 굽이치는 저녁녘 멀리 푸른 도 가을의 슬픔을 띠었도다. 내 마음 한결 왕자 보기를 싫어하건만 나그네의 꿈엔 龍床이 자주 보이도다. 나라의 存亡은 얻어들을 길 없고 저녁노을 江山을 뒤덮을 제 홀로 孤舟에 엎드렸도다.


金世濂 府使大司諫黃海監司
金尙容 ⦿이 함락되자 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殉節하였다.
政治的으로 西人하면서 仁祖 初西人老西少西으로 갈리자 老西領首가 되었다.
한 때 죽음을 놓고 스스로 焚身한 것이 아니라 失火때문이라는 異說도 있었다.
1758領議政追贈되었다.
金尙憲 丙子胡亂 때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다. 仁祖가 청에 降服하자 罷職되었다
1638 柳希安 卒
金世濂 大司成
1639 柳學立 士人論賞
金世濂 承旨吏曹參議
金尙憲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嫌疑를 받고 청나라에 押送되었다가 년 만에
풀려났으며, 歸國 左議政에 올랐다. 事後西人政權이 유지되면 서 節槪를 지킨 大老로 추앙받았다.
1641 光海主(最終 流配地 濟州道 67)光海初喪錄
李敏樹 義州府使
1642 柳志立 文科
金世濂 함경監司
李敏樹 義州府尹
1643 柳志立 注書로 삼았다.
金世濂 元孫 輔養官
1644 金世濂 平壤監司
1645 金世濂 右副賓客大司憲都承旨戶曹判書
1647 柳應龜 (1647~1706) 父 梅墩居士 柳廣善
李敏樹 參議
1649 柳山立 典性 參奉(父 免山 縣監 希契)
1650 柳誠立 進士
1651 趙有道 無罪釋放
李敏樹 楊洲牧使
1653 柳志立 (柳希成 次子)黃州判官
1654 李敏樹 (縣令慶尙右道 暗行御史의 지적받음)
1669 李誠胤 (錦山君) 현종 10年 諡號 忠貞成宗大王後孫으로光海王時
李爾瞻 등을 벨 것을 청하는 등 했으나 끝내 流配되어 (1623년 인조반정)
柳志立 卒
1675 柳廣善 祭始祖大丞公文(回甲時 黃海道 九月山 始祖 大丞公 墓를 올림)
金世濂 文康이란 諡號를 내렸다.1708년 안리사 節義吉再와 같았다 한다
1677 柳是善 (柳希奮 孫子) 上疏文
1684 柳廣善 梅墩居士(1684-1616=687부터 祖父를 잃어버리고 獨學)
1685 柳是善 卒
1741 柳 琴 (一名 璉 1741~1788)
1748 柳得恭 (1748~1807)
1774 柳得恭 生員
1777 柳本藝 (1777~1842)1827 檢書官 製進
1778 柳持恭 (1778~1838)1814 進士
1779 柳得恭 奎章閣 檢書抱川堤川楊根 郡守豊川府使京都雜誌 多數 작품
1793 柳晩恭 (1793~1869)1814進士
柳本經 (1793~1835)1825進士
1796 柳成熙 (1796~1837)1837進士(進士試졸년시 간지 丁酉1897-1796=101?)
1800 柳觀熙 (1800~1837)1837進士(進士試졸년시 간지 丁酉1897-1800=97?)
1805 柳本元 (1805~1841)1828進士
1807 柳本正 (1807~1865)1831進士
柳冕熙 (1807~1838)進士
1810 柳永燾 (1810~1870)文科及第(回甲及第)正言掌令(60歲 登科)
1811 柳章熙 (1811~1882)進士
1813 柳芝熙 (1813~?)1852進士奉化郡守同敦寧
1816 柳本憲 (1816~1869)1850進士


⦿大丞公 三十三世 柳志世 謹 拔萃 作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