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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柳璥 선조 본문

文化柳氏大宗會

柳璥 선조

감사공 2023. 4. 7. 19:29

류경 선조

貞愼公(10t)上位先祖

 

2019-06-05 12:53:35

 

류 경 (柳 璥)

 

- 1211 ~ 1289 : 高麗 元宗朝 名臣 大丞公 9

 

자 천년(天年), 장지(藏之)

 

공은 문간공 공권(文簡公 公權)의 손이요, 복야공 택(僕射公 澤)의 아들로서 희종(熙宗) 7辛未에 태어났다.

 

고종조(高宗朝)에 문과에 급제하여 41甲寅 (1254)에 상서(尙書)에 오르고, 이듬해 태복경(太僕卿)으로 국자시(國子試)를 관장하여 시부(試賦)로써 왕윤(王胤)34인과 십운시(十韻詩)로써 리수경(李受庚)54인을 선발하였다.

 

45戊午 (1258) 3월에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으로 재직중, 별장 김준(別將 金俊)등과 함께 당시에 세도가(勢道家)인 최의(崔宜)를 제거하고, 왕실에 정권을 회복시켜 60년 동안 끌어오던 최씨 세도를 꺾고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종식시켰다.

 

이에 고종께서 공에게 이르기를 [()등이 과인을 위하여 비상한 공을 세웠도다.]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을 제수하였다.

 

얼마후 지주사 좌우위상장군(知奏事 左右衛上將軍)에 전직되었는데 공께서 [근래에 지주사를 지낸이는 모두 권신(權臣)이었다.]하고, 총록(寵祿)의 성만(盛滿)함을 두려이 여기고 극력 사양하여 오직 상장군으로서 우부승선만을 겸임하였다.

 

동년 41일에 추성위사공신 일등(推誠衛社功臣 一等)에 책록됨과 동시에 쌀 이백석과 비단 백필,주택,전답 등을 하사받았다. 7월에 조정에서 벽상공신(璧上功臣)의 예에 의하여 공신의 아들에게 6품의 관작을 내리고 아울러 전답 백결과 노비 긱 5인을 내리었다. 11월에 첨서추밀원사(簽書推密院事)에 전직되었다가 12월에 추밀원부사(推密院副使)에 승진하였다.

 

46己未 (1259) 봄에 유주(儒州) 고을을 위사공신 류경의 고향이라 하여 현()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문화(文化)로 개칭하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동년 4월에 고종께서 병이 위독함에 공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여 6월에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원종(元宗) 원년 庚申 (1260) 9, 공께서 동지추밀원사로써 동지공거(東知貢擧)가 되어 문과에 위문경(魏文卿)33인을 선발하고, 3壬戌 (1262)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조득주(趙得珠)등을 선발하였다. 동년 10월에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승진함과 아울러 도형벽상(圖形壁上)의 은전(恩典)을 입고, 이어 수사도문하성사 태자소부(守司徒門下省事 太子少傳), 수태부참지정사(守太傳參知政事), 문하시랑 동중서문평장사(門下侍郞 同中西門下平章事),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등을 두루 지냈다. 8丁卯 (1267) 10월에 동수국사(同修國史)로서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의 삼대 실록을 편찬하고, 이듬해 4월 문하시랑으로 지공거가 되어 윤승관(尹承琯)43인을 선발하였다.

 

10己巳 (1269) 4, 환관 김경(金卿)의 참소를 입어 흑산도에 유배되고 가산을 몰수당한 후 10월에 타도(他島)로 옮기었다. 이듬해 삼별초란에 강화도에서 적에게 사로 잡혔는데 요행히 적을 속이고 탈출하여 도보로 왕을 배알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고 다시 평장사 판병부사(平章事 判兵部事)를 제수하였다. 이때 양민(良民)으로 노예가 되어 원()나라에 팔려가는 풍습이 있었는데 공께서 유천우(兪千遇)와 함께 그들을 구원하여 양민으로 회복시켰다. 이로서 원나라 다루가치(達魯花赤: 지방장관)의 참소를 입어 관직을 파직 당하고 애도(哀島)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소환되었다.

 

충렬왕(忠烈王) 2丙子 (1276) 7월에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감수국사판판도사사(監修國史判版圖司事)에 승진되었는데, 당시 원나라 공주(公主)가 충렬왕의 후궁으로 들어와 세도를 떨치고 있었다. 12월에 간사한 무리들이 다루가치 말천구에게 익명의 투서를 올려 무고하기를 [정화궁주(貞花宮主: 忠烈王 前妃)가 총애를 잃고 공주를 시기,저주하고 있으며, 또 제안공 숙(齊安公 淑)과 김방경(金方慶)43인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하였다. 이에 공주가 즉시 정화궁주를 가두고 다루가치 말천구가 왕숫과 김방경 등을 가두었다. 공께서 여러 재상(宰相)과 함께 무고임을 극력 간하자 공주가 깨우치고 모두 석방하니 왕이 내시를 보내어 공을 치하 하였다.

 

3丁丑 (1277) 정월에 세자부(世子傳)를 겸하고, 감수국사로서 고종실록을 편수하였다. 동년 12월에 대장군 위득유(魏得儒), 노진의(盧進義) 등이 또 [김방경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무고함에 왕은 김방경을 고문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공께서 나아가 사리를 들어 아뢰므로써 마침내 무고로 밝혀져 석방되었다.

 

4戊寅 (1278) 2월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겸하고 10월에 사직표문(辭職表文)을 올렸는데 왕이 허락치 않고 오히려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승진 시킴에 다시 표()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이윽고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 上將軍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이로부터 궁중의 연회(宴會)에는 왕이 반드시 공을 불러 대접하였다.

 

15乙丑 (1289) 10월에 크게 우뢰가 치고 검은 비가 내리는 이변(異變)이 있더니 바로 11월 초2일에 공께서 돌아가시니 향년 79세였다. 왕이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시고 문정공(文正公)의 시호를 내리셨다.

 

처음 양근(楊根)에 장례를 모셨다가 후에 이장하여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의 종개천 선영(鐘開川 先塋) 외국 자좌(外局 子坐)에 모시었다.

 

공께서 본래 체구가 작고 비대(肥大)하였는데 인품이 방정(方正)하여 바라볼수록 엄연하였으며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도량이 넓고 깊었다. 대사(大事)를 결단하고 사람을 대함에 관대할뿐 아니라 지감(知鑑)이 있어 상신(相臣) 원부(元傳)와 허공(許珙)등은 모두 공의 천거로 등용된 인물이다. 일찌기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사조(四朝)의 실록을 편찬하고, 국자시 및 과시(科試)를 네 차례 관장하였는데 그때마다 문장을 논함에 체제(體裁)를 먼저 취하고 공졸(工拙)을 뒤로 쳐서 훌륭한 선비들을 선발하였으니 이른바 이존비(李尊庇), 안향(安珦), 안진(), 이혼(李混)등의 명사가 다 공의 문생(門生)이었다.

 

공이 처음 과시를 관장할 때 좌주(座主) 평장사 임경숙(任景肅)이 관복(官服)에 띄고 있던 검은 무소뿔에 새긴 붉은 띠를 풀어주며 [공의 문하에 공과 같은 이가 있으면 이것을 전하시오.]하였다. 후에 문생 이존비가 시관이 되었거늘 공께서 띠를 그에게 전하려 하였으나 이미 임연(林衍)의 난리에 분실하여 저자에서 다시 구입하였는데 바로 전에 잃었던 그 띠였다. 그후 사림(士林)들이 기이한 일이라고 전송()하였다.

 

배위 평양군부인 단양장씨(平壤郡夫人 丹陽張氏)는 낭장 세의(郎將 世儀)의 따님인데 11녀를 두고, 묘소는 공의 묘소 우록 간좌(右麓 艮坐)에 있다.

 

아들 승()은 도첨의사사(都簽議司事)로 시호 정신공(貞愼公)이요, 사위 여흥 민훤(驪興 閔萱)은 첨의찬성사(簽議贊成事)로 시호 양경공(良敬公)이다.

 

공께서 지은 참사시(參社詩) 1편과 사직표(辭職表) 5, 낙산사찬(洛山寺贊) 1편등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하고 있다.

 

공의 묘소를 실전 하였더니 고종 3丙寅 (1866) 2월에 후손 병준(秉濬), 기영(基榮), 근철(根喆) 등이 종개천 산하에서 유주류씨세장도(儒州柳氏世葬圖)르 발견하고, 마침내 낙동대신 류후조(洛東大臣 柳厚祚)의 협력을 얻어 득전하였다. 동년에

 

봉축과 아울러 묘비를 개수하였는데 묘표는 이조참판 달성 서승보(達城 徐承輔)가 짓고, 이조참판 연일정해상(延日 鄭海尙)이 비문을 썼다.

 

 

 

출처 : 고려사, 여지승람. 동문선, 묘표, 문화류씨보감, 유주세덕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