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추사의 ‘사서루 賜書樓’ 본문
김정희의 편액

추사의 ‘사서루 賜書樓’
석야 신 웅 순
김정희 사서루 글씨, 27×74, 개인소장
사서루賜書樓는 정조 대왕께서 하사하신 서적을 유득공이 보관하기 위해 마련해둔 서재이다.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이 지은 「사서루기」에 사서루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사서루는 내 선군이 정종대왕께서 하사하신 서적을 봉장하던 곳이다. 옛교서관 골목에 있는데 다 락은 세칸이고 구조는 치밀하고 깨끗하다.앞에는 작은 밭이 있고 곁에는 찔레와 앵두 대여섯 그루 를 심었다. 선군께서는 퇴근하시면 늘 이곳에서 한가하게 지내셨다.…정조가 1776년 규장각을 건립 하자,규장각 학사들이 문필이 뛰어난 선비들을 선발하여 속관으로 삼자고 주청했다. 선군과 정유 박차수, 아정 이무관이 먼저 여기에 선발되었다. 박공은 시필이 절묘했으며 이공은 박식으로 유명 했다. 선군께서는 내원에 드시자 임금의 은총이 보통을 넘어 안팎으로 관직을 지내시고 마침내 문 학으로 집안을 일으키셨다. 20년을 공직에 계시면서 임금께서 하사하신 국조의 사책, 모훈과 경서, 동국문집, 산록, 집찬이 수백 권이었다. 종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글자체는 가지런했으며 빼곡 이 서가에 꽂혀 있는데 손을 대면 옥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선군께서 이를 위해 건물을 지은 것 은 전대에 없던 영광을 드러내고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다.…불초한 형제도 선군을 이어 내원에 출사했는데, 하사하신 서적이 수십권이나 된다.은영은 더욱 극에 이르렀지만 사실 선군께서 남기신 음덕 때문이었다. 삼가 함께 수장하고 글을 지어 기록해둔다.(박철상,『서재에 살다』,93.4쪽)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써주었는지 사서루에 대한 기록은 없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유득공의 사서루 편액임은 분명한 것 같다.
추사는 신위,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 등과 가깝게 지낸 사이이다. 1813년 어느날 추사는 술에 크게 취해 유본학의 시집을 읽고 그에 대한 비평을 시집 표지에 기록해 둔 사실이 있었다.(위의 책,95-96쪽) 추사는 연행을 다녀온 후 금석문에 몰두했다. 이 때 유본학을 통해 그의 아버지인 유득공의 금석학에 대한 지식들을 접했을 것이다. 유득공은 조선 금석학 연구의 선구자였다.
지금 양근군 사람이 밭을 갈다가 조그만 도장을 얻었다.전문은 ‘선복신원’이라 했는데, 아래쪽 두 글자는 반절이 닳아서 흐려졌다.위에는 된 해서로 관지가 있는데 ‘을묘’라는 두 글자였다.구리 로 된 작은 함 속에 담겨 있었는데 상인이 이를 사가지고 철원군으로 들어갔다. 양근 군수 유득공 은 기이한 것을 좋아하였다. 소교에게 매일 200리씩 달리게 하여 돈을 주고 그것을 구하고는 집에 수장하였다.(위의 책,90,1쪽)
유득공의 금석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금석문 연구는 고대사에 대한 지식과 인식 없이는 매우 힘든 작업이다. 유득공의 저작들은 그런 추사에게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김정희는 바로 유득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유득공처럼 사서루라는 명칭에 걸맞는 장서를 갖춘 인물도 없었다. 또한 사서루의 조형미에서 장중함이 묻어나는 것도 사서루가 임금님이 내린 서적을 봉장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위의 책, 95쪽) 글자 한 자 한 자에 의미를 두고 있는 추사이고 보면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사서루는 추사와 교분이 깊었던 유득공의 아들에게 써준 편액임이 틀림없다.
글씨체로 보나 연대로 보나 사서루는 유득공의 생전에 쓴 작품은 아니다. 「사서루」는 구성과 조형이「잔서완석루」와 거의 같다. 같은 연대에 씌여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추사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지 3년만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길을 떠났다. 이 시절에 추사는「잔서완석루」,「불이선란」 같은 생애 최고의 걸작을 남겨놓았다. 이 때는 이미 유득공의 사후 40여년이 지난 뒤였다.
사서루는 사라졌으나 사서루의 글씨는 남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추사의 편액 으로 추사는 유득공에게 진 학문의 빚을 갚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글씨 하나가 잃어버린 시간의 징검다리가 되어 새로운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유홍준의 사서루의 조형미 감상을 덧붙인다.
예서체의 중후한 골격을 기본으로 행서의 자율적인 변형을 가한 작품으로, 글씨의 머릿줄을 가 지런히 하고 하단을 자유자재로 풀어주는 힘과 변화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리긋는 견획 은 모두 기둥뿌리처럼 튼튼하게 하고 가로 삐친 횡획은 서까래같은 기분까지 내었다. 완당 글씨의 탁월한 조형미는 여기서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남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파격의 개성미를 완당은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유홍준의 ‘완당평전’에서)
- 주간 문학신문,2016.1.20
[출처] 추사의 ‘사서루 賜書樓’- 석야 신웅순|작성자 석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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