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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류자신은 광해군의 장인이다. 본문

文陽府院君 柳自新&蓬原府夫人 東萊鄭氏(鄭楊貞)(20世)

류자신은 광해군의 장인이다.

감사공 2023. 3. 24. 09:49

류자신은 광해군의 장인이다.

文陽府院君 柳自新(國舅) 20

 

2016-07-03 17:16:58

 

류자신은 광해군의 장인이다. 태릉참봉, 형조참판에 동지중추부사, 한성부판윤을 엮임했으며 광해군 즉위 후에는 문양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아들 류희분을 비롯 일가 친척들이 모두 높은 자리를 차지했으며 당대에 많은 권세와 호사를 누렸다.

 

이 때 권필은 광해군의 비 류 씨와 그 아우 유희분 등 척족의 전횡을 풍자·비방하는 7언 절구 궁류시를 지었다.

 

대궐의 푸른 버드나무 버들개지 흩날리는데

 

도성의 명사님들 잘보이려 아첨하는구나

 

조정에선 온통 태평 성대라고 즐거워 하례하는데

 

바른말이 포의에게서 나올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궁류는 중전 광해군 비를 지칭한 것이고 포의는 물론 권필을 말하고 있다. 이 시로 권필은 친국을 받았고 장형을 맞고는 귀양길에 올랐다. 그날 동대문 밖 주막에서 폭음하고는 이튿날 장독으로 죽었다.

 

인조반정 후엔 관작과 봉호가 추탈되었으며 아들 류희분·류희발은 1623년에 류희량은 거제도 유배중 1628년 장 조카 孝立사건에 연류 아들 斗立과 처형되었다.

 

죄인 박승종·류희분·류희발·박정길과 전후 역옥에 관계되어 처형된 자의 자손들은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았더라도 모두 외딴 섬에 위리 안치시키고, 이미 먼 변방으로 정배하여 배소에 가 있는 자일지라도 위리 안치시켜 내외 사람들과 교통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역당 중에 더욱 친절했던 자들은 이미 정배되었다가 사면을 받아 양이시켰거나 방환시켰더라도 다시 멀리 귀양 보내어 난역의 싹을 두절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금부가 아뢰기를,중략아뢴 대로 하라. 류자신(柳自新)의 사위와 손자도 똑같이 처치하게 하라.”

 

- 인조 18, 6(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 212(갑진) 1번째 기사

 

류자신의 딸도 인조 반정 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 7개월만에 사망했다. 외척의 권세 말기가 어떤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류자신의 졸기이다.

 

문양 부원군 류자신이 졸하였다. 정원에 전교하기를,“문양 부원군이 서거하니 지극히 놀랍고 슬프다. 위와 내전, 세자 및 세자빈이 거행해야 할 의식 절차를 속히 의논하여 아뢸 것을 해조에 말하라.하였다. 자신은 왕비의 아버지이다. 아들 류희분·류희발·류희량과 손자 류충립이 모두 벼슬하여 권세를 부리고 호사를 누렸으며 형제와 사위, 친족들에 고관들이 연이었는데 자신은 어리석어 술만 마시다가 나이 80에 죽었다. -광해 50, 4(1612 임자 / 명 만력(萬曆) 40) 27(임신) 4번째기사

 

그는 성천 부사시에는 사헌부 탄핵을 받았고 한성부윤시에는 명나라 군사를 구타했다해서 파면당했으며 판성부윤시에는 감동관을 구타하여 체직되기도 해 부침을 여러번 겪기도 했다.

 

시조----추산이 강심에

 

추산이 석양을 띠고 강심에 잠겼는데

 

일간죽 둘러메고 소정에 앉았으니

 

천공이 한가히 여겨 달을 조차 보내도다

 

저녁놀을 띤 가을 산이 강물에 잠겼다. 낚싯대를 드리우며 조각배에 앉아있으니 이를 한가롭게 여기신 하느님이 달을 보내주셨다. 낚시를 드리운 풍경을 보고 하느님이 달을 보내주다니 예사 솜씨가 아니다. 달로 화룡점정, 차원이 다른 한 폭의 산수화를 완성했다.

 

그런 그였으나 예술적 감각은 뛰어났다. 강호한정의 운치와 수준 높은 정취를 표현할 줄 알았다. 또한 이런 여유와 풍류를 즐길 줄도 알았다. 도덕적 행위와 예술적 정감은 서로 다른 모양이다. ‘청구영언에 시조 한 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