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吳䎘 본문
오숙이전항목다음항목[간략정보]
•한자 吳䎘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성격 문신
•성별 남
•생년 1592년
•몰년 1634년
•본관 해주(海州)
•관련사건 이괄의 난|정묘호란
•저서(작품) 천파집
•대표관직(경력) 승문원권지정자|에조좌랑|순검사종사관|헌납|동부승지|경상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
•집필자 김갑주
오숙(1592-1634)
[정의]
1592(선조 25)∼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수억(壽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정방(定邦)이고, 아버지는 전부(典簿) 사겸(士謙)이며, 어머니는 한성서윤 이집중(李執中)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10년(광해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2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약관에 과거로서 이름을 날리었다. 곧 승문원의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어 당시 문장가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이정구(李廷龜) 등이 모인 자리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문(陳奏文)을 초안했는데, 문장이 뛰어나 이덕형의 천거를 받아 다음날 설서(說書)에 승진하였다.
그 뒤 예조좌랑을 지내다가 조정의 어진 정치를 볼 수 없어 벼슬을 버리고, 장유(張維)·이명한(李明漢) 등과 교유하며 삼각산에서 독서하였다. 1619년에 병조좌랑이 되었고, 이 때 강홍립(姜弘立)이 후금군에 항복을 알리는 부경진주사(赴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갔다왔으며, 다음 해에 괴산군수가 되어 많은 기민(飢民)을 구하였다. 그 해 가을에 순검사종사관으로 삼남을 순찰하였다.
1621년에는 종사관으로 원수 한준겸(韓俊謙)을 따라 관서(關西)의 군무(軍務)를 돌아보고 돌아와 삼각산에서 독서로 소일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 문하의 8학사의 한 사람이라 해 지탄을 받았으나 친교가 있던 심기원(沈器遠)의 주선으로 정언(正言)이 되었다.
곧 지평(持平)으로 옮겨서 풍기를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우고,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수찬(修撰)·교리(校理)·헌납(獻納)이 되었고, 문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으로 뽑혀 호당(湖堂 :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1624년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병조참지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 겸 주청부사가 되어 바닷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6년 청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동부승지로서 정묘호란을 당해 왕을 강도에 호송했으며, 우승지·사옹원제조·상의원제조·형조참의·여주목사·예조참의·경상도관찰사, 좌승지 겸 승문원부제조를 역임하였다.
1633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마침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이 가도(假島)에 유진(留鎭 : 진을 치고 주둔함.)해 일어난 대청 관계를 원만히 해결해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사신 황손무(黃孫武)의 접반사로 가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송도에서 죽었다.
문장이 간결 명료했고, 특히 기유시(紀遊詩)에 뛰어났다. 이조참판 겸 양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천파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청선고(淸選考)』
『명곡집(明谷集)』
『천파집(天坡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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