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박엽(朴燁)=柳德新의 둘째 사위柳德新(20世)柳自新 弟 본문
박엽(朴燁)=柳德新의 둘째 사위
柳德新(20世)柳自新 弟
[간략정보]
한자 朴燁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성격 문신
성별 남
생년 1570년(선조 3)
몰년 1623년(인조 1)
본관 반남(潘南,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
대표관직(경력) 병조정란|해남현감|황해도병마절도사
집필자 이장희
[정의]
1570(선조 3)∼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본관은?반남(潘南). 자는 숙야(叔夜), 호는 약창(葯窓). 증 영의정 소(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천(應川)이고, 아버지는 참봉(參奉) 동호(東豪)이며, 어머니는 이주국(李柱國)의 딸이다.
1597년(선조 3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병조정랑·직강(直講)을 역임하고 해남현감 등을 지냈다. 그 뒤 광해군 때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광해군의 뜻에 따라 성지(城池)를 수축해 북변의 방비를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6년 동안 규율을 확립하고 여진족의 동정을 잘 살펴 국방을 튼튼히 해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
당시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모욕하고도 무사하리만큼 명망이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 뒤, 광해군 아래에서 심하(深河)의 역(役)에 협력하고, 부인이 세자빈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그를 두려워하는 훈신들에 의해 학정의 죄로?평양 임지에서 처형되었다.
『응천일록(凝川日錄)』에는 1613년(광해군 5)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형장(刑杖)을 남용해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작상(爵賞 : 관작이나 포상)을 받으려 했다고 한다. 또한 사사로이 부(府)의 여자종을 범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마음대로 했다고 기록되었다.
『속잡록(續雜錄)』에는 같은 해 겨울 호조판서 황신(黃愼)의 계청(啓請)에 의해 양전(量田 : 토지 측량)의 관서를 설치하고 8도의 좌우균전사(左右均田使)를 정했는데, 그가 호남우도의 균전사가 되어 혹독한 형벌을 적용해 폐해가 컸다고 되어 있다.
또한 평안감사 재임 때에는 음탕하고 포학하며 방자해 거리낌이 없어 새로 익랑(翼廊) 70여 칸을 지어 연달아 장방을 만들고 도내 명창 100여 명을 모아 날마다 함께 거처하며 주야로 오락과 음탕을 일삼았으며, 수를 배로 늘려 결미(結米)를 독촉해 이행하지 않으면 참혹한 형을 가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가 처형을 당하자 군중이 모여들어 관을 부수고 시체를 끌어내어 마디마디 끊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응천일록(凝川日錄)』
『속잡록(續雜錄)』(조경남)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
박엽(5) 박엽을 도운 재치있는 기생 전설의 의미 역사를 본다
박엽에게는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백주라는 기생과의 일화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누가 이렇게 현대식으로 각색을 했습니다.
박엽이 평양감사로 있을 때 있은 일이다.
어느날 그가 동헌에 나가앉아 여러 사람들과 한담을 하는중에 문득 장기소리가 나오자 서로 장기겨루기를 하자고 하였다. 박엽은 원체 장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여서 대뜸 장기경기를 벌려놓았다.
그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했는데 그중에는 소백주(小柏舟)라는 평양출신의 젊은 기생도 끼여있었다. 박엽은 장기판에 여자들이 끼여들면 질색이였는지라 소백주를 보자 이마살을 찌프렸다. 하지만 그날따라 친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차마 큰소리를 치지 못하였다.
《여봐라, 저 기생에게 일러라. 녀자가 장기경기를 구경하면 안된다고.》
아전이 허리를 굽석거리고나서 소백주에게 뛰여갔다.
《얘, 감사어른이 자리를 피하라고 하신다.》
그러자 소백주는 당돌하게 대꾸했다.
《남자만 사람이고 여자는 사람이 아니오이까? 더구나 감사어른께선 공무를 보시지 않고 휴식삼아 손님들과 장기놀이를 하는데 멀찌감치 서서 구경하는게 뭐가 잘못이나이까?》
아전은 소백주를 생각해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얘, 어쨌든 감사의 명령이니 일단 자리를 피하고 보렴.》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당돌했다.
《소녀의 행동이 나라법에 어긋난다면 벌을 받겠사와요.》
《원, 애두.》
아전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와 박엽에게 말하였다.
《감사나리, 사실 저애는 혹시 나리께서 질가봐 걱정되여서…》
사실 그 아전은 소백주가 공연히 봉변을 당할가봐 거짓말을 하였다.
《뭐라구?》
박엽은 기생에게서까지 동정을 사고있다는 생각에 밸이 울컥 치밀었으나 주위에 사람들이 있고 또한 놀음판이 깨여질가봐 참고말았다.
다음순간 박엽의 머리에 한가지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저 기생에게 내가 찾는다고 일러라.》
《예잇!》
박엽의 속내를 알리 없는 아전은 씽하고 달려가 소백주를 데리고 왔다.
박엽은 그를 훑어보고나서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장기걱정을 한다면서?》
《…》
《네 마음 참으로 갸륵하구나. 그런데 우리 어디 내기를 할가.》
소백주는 고개를 소곳한 채 박엽의 다음말을 기다리고있었다.
《네 만약 내기에서 지면 볼기를 맞을 것이요, 이기면 내옆에서 장기경기를 실컷 구경하도록 해주마.》
아전은 놀랐다.
박엽은 본시 성미가 조폭한지라 소백주가 지면 큰 봉변을 당할것은 뻔했다. 소백주를 위한다는것이 오히려 구렁텅이에 몰아넣었으니 어쨌으면 좋을지 몰랐다. 이제라도 저애가 돌아섰으면…
그런데 의외로 소백주는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겠사와요.》
사람들은 소백주의 말을 듣고 놀라와하였다. 일개 기생이 감사와 겨루다니?
박엽은 기고만장해서 큰소리로 말했다.
《네 여기 장기판에 있는 쪽들을 가지고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한 련에 다 들어가게 시조를 지어라.》
사람들은 다시금 놀랐다. 장기쪽들을 가지고 한련에 시조를 지으라고 하니 그것은 분명 어린 기생을 욕보이려는 속심이였기 때문이였다. 소백주는 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기판을 한번 훑고는 랑랑한 목소리로 시조를 내리읊었다.
상공을 뵈온 후에 사사(事事)를 믿자오매
졸직(拙直)한 마음에 병들까 염려려니
이리하마 저리차 하시니 백년동포(同胞)하오리다.
소백주의 구슬같은 맑은 목소리에 심취되였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탄복하였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은유수법으로 련정의 내용을 담은 시조를 재치있게 지었던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첫 구를 들었을 때 소백주가 무슨 연정에 잡힌 문구를 읊는가 하고 실망했었다. 그런데 마지막구까지 들어보니 감사가 요구한대로 장기쪽들을 가지고 훌륭한 시조를 만들어냈던것이다.
《상공》은 상공을 의미하거니와 장기의 상(象)을, 《사사》는 일일마다 또는 매사의 의미와 함께 장기의 사(士)를 그리고 《졸적》은 옹졸하고 고지식하다는 의미와 함께 장기의 졸(卒)을, 《병》은 앓는다는 뜻과 함께 장기의 병(兵)을, 《동포》는 함께 안는다는 뜻과 함께 장기의 포(包)를 형상하였다. 그리고 《이리하마 저리차》는 말그대로 이리하마 저리하자란 의미를 담고있으면서 《이리하마》에서 《마》는 장기의 마(馬)로, 《저리차》에서 《차》는 장기의 차(車)로 형상하였다. 결국 한자와 우리 말을 리용하여 장기의 쪽들인 《상, 사, 졸, 병, 마, 차, 포》를 가지고 시조를 훌륭하게 지어냈던것이다.
사람들은 저저마다 소백주의 시짓는 재간을 칭찬하였고 박엽은 어린 기생을 깔보다가 그만 코를 떼우고말았다.
일단 내기를 걸었으니 박엽은 약속대로 소백주를 옆에 두고 장기구경을 시키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한다.
이 시조는 원래 해동가요에 전하는 것이고, 이 일화는 인터넷에서 찾아낸 것이지만 표기법으로 보아 북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일부 표현을 고치긴 했지만 여자를 녀자라고 한다든가 조선시대를 리조라고 하는 등의 표현이 나오는 것은 이북식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박엽을 영웅시하는 이북의 역사관에 따라 박엽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설화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시조를 한양대의 유명한 한문학자인 정민 교수는 다르게 해석한다. 그의 해석은 실제로 장기판에 대한 훈수라는 것이다. 즉
상으로 공격하니 사 둘을 믿고 계시온데
졸이 버티고 있어도 병이 들어오면 어찌하나요?
마로 이리 공격해와도 차리 저리 박으시면 뒤에는 포가 버티고 있지요
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즉 곤경에 빠진 박엽의 상황을 교묘하게 훈수해서 이기에 만들어주는 지혜라는 것이다.
박엽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으로 엇갈리는 게 많지만 이런 일화가 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박엽이라는 인간이 우리가 인조실록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음을 짐작케 해준다. 요컨데 우리는 박엽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를 좀더 면밀히 분석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엽, 평양,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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