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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공모전 당선작2] 소머리 식당의 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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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3일 (수)
2024 '한국고전종합DB' 활용 공모전 고전명구 부문 당선작
소머리 식당의 기철학
공을 들여 만들고 교역함은 경직과 공상의 일이니,
이것이 바로 말과 음식이 서로 응하고 서로 부합하는 것들이다
功作交易。耕織工商之事。是乃言語飮食。相應相符者也。
공작교역。경직공상지사。시내언어음식。상응상부자야。
- 최한기(崔漢綺 1803~1877), 『기측체의(氣測體義)』 「신기통 권2(神氣通 卷二)」 구통(口通)
소머리 곰탕집은 말과 음식이 교류하는 곳이다. 혜강 최한기의 표현대로 만 오천 원짜리 음식을 앞에 두고 말하고 먹는 것이 서로 응하며, 서로 다른 기(氣)와 기가 설왕설래하는 장소이다. 곰탕 한 그릇 앞으로 삼삼오오 평범한 이웃도 오고 직장인도 오고 부자도 오고 가난뱅이도 오고 경찰도 오고 사기꾼도 오고 건달도 와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허공에 올렸다 내려놓는다.
주방은 수기와 화기가 부딪치는 곳이다. 나는 직원으로서 나의 기를 발산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앞치마를 적시다가, 때로는 한가한 도락이 일렁거리는 홀을 힐긋 부러운 듯이 바라볼 때도 있다. 객들은 곰탕 그릇 위로 대부분은 그저 담백하고, 어떤 때는 허세가 끼어 지나치게 달고, 어떤 때는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만큼 짜고, 어떤 때는 싸하니 매운 기세를 담은 말의 조미료로 내가 만든 곰탕과는 또 다른 곰탕을 끓이고 있는 중이다.
객들이 조금 뜸하면 나는 핏물을 뺀 25킬로그램의 정형된 소머리를 들통에 넣고 생강과 월계수 잎과 커피를 넣어 초벌로 끓여서 씻은 뒤 생강과 소주 등을 넣고 세 시간 정도 더 끓여서 익힌다. 들통에서 끄집어낸 소머리는 생사고락을 해탈한 부처처럼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있고, 솥 닦는 수세미로 써도 될 만큼 몹시 까끌까끌한 혓바닥은 마치 거구의 여자가 신는 260센티짜리 하이힐 밑창 같이 길쭉하다. 그 혓바닥 너머로 소가 처음 칼맛을 봤을 때의 비명이 들리는 듯한데, 주방 건너편 홀로부터 소의 혓바닥을 소금에 찍어 먹는 남자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끼어든다. 소의 혓바닥과 인간의 혓바닥의 접속의 순간이다. 이 지상의 살아있는 모든 혀는 부드럽지만 죽고 나면 거칠다. 더 이상 어떤 분장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에 이른 사람의 그것처럼 소쿠리에 널부러진 소의 뻣뻣한 혓바닥이 비로소 어떤 침묵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의 식당은 말과 음식이 응한 뒤에 결국 돈이 응하고 순환하는 기의 공간이다. 소는 그 한복판에서 자신의 체(體)를 바쳐서 인간에 용(用)하는 갸륵한 사족동물이다. 내가 영위하는 삶도 객들의 일용할 양식도 소의 희생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에 미치면 자신의 사멸로 거대한 통(通)을 이루고 가는 한 생명의 모습에 숙연해진다. 너무나 잔인하지만 언제나 소는 죽음으로써 혜강이 말한 장엄한 운화(運化)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글쓴이 홍정숙
'한국고전종합DB' 활용 공모전 고전명구 부문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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