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세(柳志世*朗惠)TISTORY
府尹公派 種石 柳 光 烈 先生(近代人) 본문
류광열 柳光烈 (種石) 1898~1981(大丞公 32世 府尹公派)
柳光烈 선조는 언론·출판/언론·방송 분야 선조입니다.
문흥군 사원(文興君 思瑗)의 後孫으로 의빈도사 덕유(儀賓都事 德由)의 5代孫이요, 기당 항(幾堂沆)의 孫子요, 우산 인환(愚山 寅煥)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1898년 6월 27일 파주군 탄현면 낙하리에서 태어났다.
母親은 安東金氏 한영(漢永)의 따님이시고, 婦人은 金海 金氏이고,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으며 弟의 遺腹子였던 在萬이 있을 뿐이다.
이후 고양군 중면(現 고양시 일산신도시)으로 이주했다. 어려서부터 15歲까지 漢學을 修學하였고, 일찍이 16歲에 파주 동패리에서 漢文 교수를 역임하다가 1913년 중면사무소 書記에 임용되었고. 1914년에 경성부 보성법률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2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동기,이유는 미상)
1917년 方定煥과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기관지 新靑年(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1920년에 발행한 월간 잡지)을 발행하였고 잡지 『녹성』 을 발행하였다..
1919년 매일신보사(1904년에 창간되었던 일간신문)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시작하였고, 1920년 동아일보(1920년 4월 1일 창간한 일간신문)의 창간과 함께 창간사원으로 입사한 뒤에 상해특파원으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었고 사회부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1920년 3월 5일 창간한 대한민국의 조간일간지)로 옮겨 사회부장을 지냈고, 中外日報(1926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편집국차장을 거쳐 1933년에는 매일신보(일제강점기 동안)의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당시 우리말로 발행되던 민간 3대지와 매일신보의 네 신문사에 모두 근무하던 중 남경(南哀)사건의 필화로 일본헌병에 의해 1940년부터 5년간 연금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협찬동지회”를 조직 “국민당”에 가입하고, 1949년 국회의장 申翼熙(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의 비서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는 동안인 1954년에는 自由新聞(1945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의 주필이 되어 논설을 집필하였으며, 1954년에 한국일보(195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논설위원이 되어 1960년 민주당 과도정부 제5대 민의원(民議員)에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직을 잃었다. 1981년 별세할 때까지 계속해서 논설위원과 사빈(社賓)으로 재직하였다.
그의 知識은 전적으로 獨學으로 外國語를 익혀 얻어진 것이다. 기억력이 비상했던 그는 자유자재로 문장을 구사하는 文章家였고,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힘이 없었다. 일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박학다식한 데다 정확한 발음, 구수한 화술을 갖춘 류광렬은 라디오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1960년대 이서구 조풍연 등과 더불어 출연한 동아방송의 대담프로 ‘이 얘기 저 얘기’를 비롯해 여러 프로그램의 인기 출연자가 됐다. 그야말로 글발 말발이 뛰어난 팔방미인 언론인이었다.
1965년 성곡언론문화재단이사장, YMCA사랑방클럽 회장, 1967년 신문편집자협회명예회원에 추대 되고 한양대학교에서는 언론인으로서 사회에 공헌한 업적을 찬양하여 1970.3.1 졸업식을 기해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수여 하였다.
그후 71년 국사편찬위원 ․ 장덕수(張德秀)전기 편찬위원장 ․ 강석(江石) 장학회장 ․ 보사부(保社部) 의례준칙위원, 72년 YMCA교육위원, 74년 문예중흥추진위원, 75년 YMCA평의원(評議員)등을 종신토록 역임하였다.
훈․ 포장(勳 ․褒章)으로는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비롯하여 방송문화상, 대통령 및 정부의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일찍이 신홍우 박사와 가까이 지내면서 YMCA가 주최하는 농민 강습회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전담하여 강의하고, 월남청년상 심사위원, 성인활동위원, 교육사업위원 YMCA역사편찬위원등으로 본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1932년 고양군 중면 풍리 소재 토지의 일부인 임야 4만8천5백40평과 밭 6백90평, 대지 66평을 1977년 6월 YMCA에
기증하였다.
1981년에 별세하셨다.
2011년 자랑스런 고양인상을 수상 받으셨다.
저서로 •기자반세기 •間島小史•생화(生火)•조국(祖國)이 있다.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참고사항: 위 간도소사는 1931년 1월1일부터 한달간에 걸쳐 조선일보에 간도의 고찰이라는 제목과 고구려, 발해, 조선까지의 변천이라는 제목을 달아 국한문 혼용으로 연재하였었다.
종석 류광열 선조의 간도소사
류광열 선조의 간도소사를 읽고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가뭄에 마르지 않기에. .....학문과 지식 경륜을 국가와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진력해야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되는 글 이었다 문화류씨 선조의 국가와 역사 민족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일찌기 류득공 선조가 발해고를 쓰셨고 이후 류광열 선조가 간도소사를 쓰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해 오면서 필연적으로 거쳐 온 곳이 백두산 동북쪽 광막한 지역으로 간도이며 오늘날의 연길 화룡 왕청 이 세 현이다. 소수 부락시대를 거쳐서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간도지역에는 우리조선족이 여타 민족보다 다섯 배나 많이 거주한 지역이기도하다. 그럼에도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지키려 했던 옛 영토를 잃은 작금의 현실을 통탄해 하며 나라가 있음에도 군주의 힘이 없어 타 민족의 압제 앞에 울면서 떠나가신 간도의 애국영령들의 호소가 들리는 듯 하다고 쓰고 있다.
앞으로 이 책이 古土를 회복하는 원동력이 되어 나라 발전의 길잡이가 되길 염원해 본다.
이 책은 고구려에서 시작한 간도 유래부터 1930년 8월 민중운동까지 시기별로 간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세 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우리 민족이 간도에 뿌리 내리기 시작한 고구려 이후 발해 고려 조선 초기까지 우리영토로 자리 잡게 된 배경 등을 기술하였다.
둘째부분은 청국과의 영토 분쟁과 마찰이 일어나는 조선조 중 후반기인데 여기서는 간도의 영토분쟁이 시작된 청조의 발흥과 목극등의 정계비 사건 간도의 봉금령 등을 중점적으로 기술하고 이후 발생한 조선인의 이주문제 한ㆍ청간의 국경분쟁 등을 큰 논제로 다루었다.
특히 정계비 사건에서는 조선조의 실책을 논란하는 관점이 강조되었다.
오라 총관 목극등이 定界 할 때 조선의 접반사 박권과 관찰사 이선부가 노병을 구실로 답사에 참석 못한데 대하여 후일 평사 김선은 天節奉碑閣記에서 '불함산 꼭대기에 올라서서 선춘과 오라의 경계와 운ㆍ훤 兩界의 前野를 바라보니 거의 주위가 천리이다.
아ㅡ 詩傳에 말하기를 주나라 소공이 하루에 나라를 넓히기를 백리씩 하였다 하더니 지금 우리 조선은 나라를 물리기를 하루에 백리씩 하였도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고는 '이 어찌 사람을 죽여 들을 메운 뒤 국토를 잃은 것에 비교하랴
앉아서 국토를 상실하되 상실한 소이를 알지 못하니 족히 나라를 물리면서도 논란 할 수 없는 일이다. 강개하여 혀를 차고 탄식하니 노한 머리카락이 갓을 찌를듯 하구나.' 하였다.
후세 식견 있는 김노수는 이를 비판하여 ' 아 슬프다 우리나라 重臣이 늙고 겁약하여 자신은 눌러앉고 하급 관원에게 떠넘겨 방관하고 한마디도 애써 논쟁 치 아니하여 앉아서 동방천년 선춘령의 옛 경계를 잃었으니 志士의 공분을 어찌 금할 수 있으랴?' 하였다.
세 번째는 조선조 말 고종대에 이르러 간도 문제가 제기되어 관리를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여 조선인의 입지가 회생의 기미를 보였으나 일본이 우리나라 주권을 차지하면서 간도가 일ㆍ청간 분쟁의 희생물이 되는 갖가지 사건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일본 청국 러시아의 각축전과 조선의 독립운동 공산당 창립 등 시대적 혼란 속에 격는 고초와 함께 이러한 와중에도 간도를 지키려는 민중운동 자치운동을 기록하였다. 특히 이 책에는 정계비, 감계담판, 간도협약, 만몽협약 등 역사적 사건기술과 함께 관련된 각종문서 협약 조문을 원문 그대로 실어서 간도의 역사는 물론 조선 조 부터 근대어 이르는 우리나라 북방영토 문제 및 국내외 정세에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첫 번째
백두산 동편의 광막한 땅인 간도 지역이 고구려 옛 영토이고 발해가 건국한 땅이며 거주민의 인구도 조선인이 중국인보다 5배 이상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1712년 세운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한 내용 속에서 우리나라의 국경은 서쪽 으로는 압록강이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지나 송화강이 경계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
외교권을 빼앗아간 일본이 청국과 우리 땅 간도를 만주의 안봉선 철도 개축권과 교환하는 천인공노한 만행을 자행한 일도 나타나 있다.
마무리 장에서 종석(류광렬) 선조는 고구려와 발해의 융성 시 간도는 고구려와 발해가 주인이었고 고려 때는 윤관장군이 간도 평야에 정기를 날리고 천리 땅을 개척하였다.그러나 이씨조선이 되어서는 아침에는 한족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저녁에는 여진의
깃발아래 무릎을 꿇는 굴욕의 역사를 끼쳤다. 이백년 전 목극등이 정계 할 때에 국명을 받은 중신이 노질로서 입회를 사양하고 저들의 자의로 세운 정계비가 이미 조선의 국경을 축소한 것인데 그 비문에 '동쪽으로 토문강(지금의 두만강이 아니라 만주 용어로 쑹화강의 지류)이 된다' 라는 명백한 글이 있음에도 저들은 간도를 자국영토라 고집하였다.
이조 말 조선인에게도 국토에 대한 의식이 생기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우리 땅은 줄일 수 없다'는 이중하가 있었고 사포대를 설치하여 청국 관민들이 두려워 엎드리게 한 이범윤도 있었다 그러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후 무순 탄광과 안봉선 철도와 간도 문제를 일ㆍ청이 교환하므로서 의지까지 없는 수십만 간도주민은 조선외교권에서 일본외교권 아래로 다시 청국의 치하로 전전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참담함을 종석 선조는 아래와 같이 표현하셨다.' 이러한지 수십 년에 풍전고원의
고국의 변동과 함께 무한한 비애를 가슴속에 안고 아침에 마적의 총소리에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 전에 저녁에 여윈 얼굴에는 관군의 토벌에 우는 눈물이 흘렀다.
사람 없는 한밤중에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고 비탄하기 몇 번이며 고단한 몽혼이 고국을 방황하기 몇 번 이던고 막북 호지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이변으로 추웠으리라.
영하 수십 도의 한천에서 내리는 눈이 멀리 지평선을 덮고 막막한 간도 평야가 한없이 황량 할 때에 그 광야에 서있는 조선인의 심정도 한없이 황량하였으리라. 잿빛에 쌓인 간도의 천지는 조선인 에게 실로 정한이 면면한 山河이었다'
아ㅡ얼마나 가슴 저리고 애절한 심정이며 동포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우국 애민충정의표현인가?
글을 읽다가 북 받치는 격정으로 몇 번이나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진 글은 ' 이러한 공포와 불안 중에도 세계역사는 그들에게 수많은 과업을 부과하였다. 이 납을 씹는 듯한 중에서도 민중은 고요히 그러나 힘 있게 자랐다. (중략)
새로운 아이를 낳으려는 신부에게는 거대한 진통이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간도, 발해의 간도, 고려의 간도, 조선조의 간도 통감부 출장소의 간도, 장작림의 간도, 장학량의 간도 이것은 수많은 피비린내 나는 기록을 남기면서 세계의 간도로 걸어간다. 이것은 우주의 진화법칙이 명하는 것이요 세계 역사가 명하는 것이다. 이중하도 울었고 이범윤도 울었고 조선의 수많은 애국지사도 울었고 통감부 출장소 관원으로 갔던 일본인 까지도 상제에게 따라 우는 곡쟁이 같이 울었다. 혹 이글을 쓰는 노둔한 기자도
우는지 모르겠지.' 라고 쓰셨다
이어서
울면서 한탄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강조하며 경계를 가지고 싸우는 세대는 인류 前史로 감추어질런지 모른다 면서. 우리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함과 동시에 희망의 불씨를 불어넣고 있다. ' 세계의 표류아인 조선인아 ! 모든 역사의 페이지 위에서 울고 있는 불행아들아! 대지는 공평하다. 경계를 가지고 싸우던 세대는 인류 전사로써 지구상에서 감추어질런지 모른다. 동방의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는 조선인도 세계의 새 주인 으로 부른다. 그 부르는 소리는 전 지구에 찼다.
세계의 간도! 세계의 조선인! 위대하여라. 영웅적 걸음을 힘 있게 걸어라.'
이렇게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참고사항: 위 간도소사는 1931년 1월1일부터 한달간에 걸쳐 조선일보에 간도의 고찰이라는 제목과 고구려,발해,조선까지의 변천이라는 제목을 달아 국한문 혼용으로 연재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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