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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공의 호(號), ‘아사(鵝沙)’에 관한 단상(斷想) 본문

중문지후사공파(11世仁修 后)

대승공의 호(號), ‘아사(鵝沙)’에 관한 단상(斷想)

감사공 2023. 7. 1. 20:31

대승공의 호(), ‘아사(鵝沙)에 관한 단상(斷想)

 

中門祗候使公後(대승공33) 厚井 柳 炳 五

 

 

우리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시조이신 대승공(大丞公) () ()자 달()자님(‘柳車達’)의 호()가 아사(鵝沙)인 데, 한글 발음상 아사라 하면 얼핏 그 이미지로 아사(餓死: 굶어서 죽음)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에, 괜히 언짢아지며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아니하다.

 

대승공의 호가 아사(鵝沙)였다는 것은 우리 족보에도 분명히 기재되어 있고, 공주시에 소재하는 동학사 근처의 동계사(東雞祠)에 모셔져 있는 대승공의 위패에도 그렇게 씌여 있다(위패 덮개를 열면 大丞公 鵝沙 柳先生 神位라 씌여 있음).

 

대승공의 호 鵝沙(아사)는 한글이 창제되기 500여년 전에 이미 지어진 별호이었으므로, 鵝沙(아사)의 한글 발음 때문에 먼저 餓死(아사)라는 어휘가 연상된다 해서 오늘날의 단순한 한글음 느낌으로 그리 기분 상해 할 필요는 없겠다. 더구나 옛날에는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 오늘날의 작명학처럼 음양(陰陽)이나 음령(音靈) 또는 수리(數理)와 같은 사항은 거의 고려하지 아니하고, 대부분 그 뜻(‘意味’)에만 주안점을 두고 지었기 때문이다.

 

그럼 대승공의 호 鵝沙(아사)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또 당시 이를 지은 사람은 어떤 뜻(‘意圖’)을 품고서 지었던 것일까. 얼른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는 거위 ()이고 ()는 모래 ()이므로 거위, 모래란 의미가 된다. 거위와 모래···. 일단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마음에 와닫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무런 의미가 느껴지지 아니하는 명칭을 대승공의 호로 지었단 말인가? 거기다가 ()자는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한자인가!

 

그래서 찬찬히 한자자전 등을 뒤져 보았다. ‘()자에는 가금(家禽: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의 하나인 거위란 뜻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거 같다. 그런데 거위는 원래 야생의 조류인 개리(swan goose)회색기러기(graylag goose)를 잡아다 길들여서 식용(食用)으로 개량한 것으로, 이는 인류가 최초로 시행한 조류 품종 개량의 사례라고 한다.

 

그러나 ()자에는 모래란 뜻 외에 의외로 봉황(鳳凰)이란 뜻(‘의미’)도 있다. ‘()자는 “‘모래라고도 하지만 “‘봉황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자에는 봉황이라는 훈(:〯〯〯〯 , 의미)이 별도로 있는 것이다.

 

봉황(鳳凰)은 상서롭고 고귀한 품위를 지닌 상상의 새로서 기린·거북·용과 함께 사령(四靈: 신령스러운 네 가지 동물)의 하나로 알려져 있고, 한나라 때부터는 이를 암수로 나누어 수컷은 봉() 암컷은 황()이라 구분하였다. 봉황은 성천자(聖天子: 덕이 높은 천자)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까닭은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게 될 징조이므로, 천자가 스스로 성군임을 표방(標榜: 주의나 주장 등을 앞에 내세움)하며 이를 이용한 데 기인한다. 그래서 천자의 궁문에 봉황을 장식하여 봉궐(鳳闕) 또는 봉문(鳳門)이라 하였고, 천자의 수레를 장식하여 봉거(鳳車)나 봉련(鳳輦) 또는 봉여(鳳輿)라 하였다.

 

봉황은 난잡하게 날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 앉지 않는다.”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조를 쪼아 먹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그 고고(孤高: 세상 일에 초연하여 홀로 고상함)한 처신 때문에, 봉황은아주 청렴(淸廉: 성품·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음)하고 지절(志節: 지조와 절개)이 굳은 고귀한 군자(君子)·성인(聖人)을 암시하기도 한다. 닭의 새끼 봉황이 되랴” “닭이 천이면 봉이 한 마리 있다의 속담에서 닭이 보통 사람을 가리킨다면 봉은 뛰어난 사람을 지칭함을 알 수 있듯이, 봉황은 새 중에서 으뜸이므로 매우 뛰어나게 잘난 사람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에는 또 다른 뜻으로 짐승의 암컷이라는 뜻(‘의미’)도 있다고 한다.

 

, 드디어 대승공의 호 鵝沙(아사)에 내포돼 있는 진정한 뜻(‘意味’)의 윤곽이 드러나는 거 같다. 鵝沙(아사)거위와 모래의 뜻이 아니고 거위와 봉황의 뜻인 것이다.

 

이제 거위와 봉황에 이르게 되니까, 바로 닭과 학(두루미)이 떠오르고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群鷄一鶴(군계일학)떼지어 있는 닭들 가운데 있는 한 마리의 학이라는 의미로, ‘많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매우 돋보이는 (아주 뛰어난) 한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평범한 많은 사람들 중 뛰어난 한 사람을 의미하는 군계일학(群鷄一鶴)과 동일한 취지를 내포하는 뜻으로 지은 호()였을 것이라 미루어 생각해 볼 때, “鵝沙(아사)群鷄一鶴(군계일학)()()로 대체하고 ()봉황(鳳凰)을 의미하는 ()로 대체한 것임을 간파할 수 있다. 군아일봉황(群鵝一鳳凰), 아니 ()에는 암컷의 짐승이라는 뜻도 있으니 먼저 군아일황(群鵝一凰)을 염두에 두고 도출해 만든 문구 ()에서, 이를 다시 두 자로 줄여 鵝沙(아사)라 작호(作號)한 것으로 이해함은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대승공의 호를 많은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 매우 돋보이는 (뛰어난) 봉황과 같은 사람이란 취지에서 지은 것이라면, 의당 鵝凰(아황)이라 지어야지 왜 鵝沙(아사)로 변경하여 지었을까? 그 까닭은 당시 봉황(鳳凰)은 성천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글자는 황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고 만일 일반 민중이 사용하면 불경(不敬)의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이런 문제의 발생을 회피하기 위하여 마치 피휘(避諱: 왕이나 성인 또는 선조들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는 뜻을 표하기 위하여, 획의 일부를 생략하거나 의미가 서로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代置하는 것)처럼그 자의(字義)봉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자를 선택한 것이라 여겨진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그의 이름(‘本名’) 외에 별도로 가지게 되는 호()는 본인이 스스로 지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문인들은 자기 스스로 를 여러개씩 지어서 사용하기도 함), 또는 집안 어른이나 스승 또는 친구 등 지인이 지어 주는 경우도 있다.

 

대승공의 호 鵝沙(아사)는 그 고귀한 의미로 보나, 특히 상위 17(15, 212, 3등이하 3,000여명) 이내로 선정되어 매우 높은 등급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호. 이들 중 왕건이 사망(943)하기 3년 전인 940년에 신흥사(新興寺)를 중수(重修)하며 이 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짓고 그 동·서 벽에 그려 넣은 삼한공신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 칭함 의 훈호를 받았음에도, 아무런 미련 없이 고향 유주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산 대승공의 고매(高邁: 인격이나 품성, 학식 등이 높고 빼어남)한 인품으로 볼 때, 이를 대승공 본인이 스스로 지었던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 문화류씨와 관련이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文獻)으로 인정되는 흥률사중수량상소기서(興律寺重修梁上所記書 : 공민왕 5, 1356)흥률사중수 당시 법원선사(法圓禪師)가 써서 오동나무 통에 담아 이를 상량대에 홈을 파 넣고 밀봉해 놨던 기록인 데, 조선 숙종 10(1684) 흥률사를 재중수할 때 발견되었고, 여기에 문화류씨의 시조(‘柳車達’)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음 등으로 추리할 때, 아무래도 대승공과 큰 인연이 있었던 불문(佛門)의 어느 고승이 지어 줬을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의 쇠퇴로 말미암아 야기되었던 후삼국의 극심한 혼란기에, 당시 후고구려(901)〔→마진(905)태봉(911) 궁예(弓裔)왕의 일개 수하 장수(將帥)에 불과하였던 왕건(王建)이지만, 대승공(大丞公)은 이 사람이 장차 삼한을 통일하고 태평성대를 가져올 인물(人物)이라 믿고, 같은 패서지방의 호족이었던 류천궁(왕건의 장인) 등과 함께 왕건이 최초로 나주(당시 금성’)에 출정할 때(903)부터 수십년에 걸쳐 상당수의 가병家兵; 률사중수량상소기문수레를 운반한 신군(神軍) 일천여명이란 표현 참고과 막대한 군량(軍糧)을 지원하였다.

 

대승공이 왕건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당시에, 궁예는 스스로 미륵보살임을 자처하며 소위 관심법(觀心法: 궁예가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초능력으로, ‘역심을 품은 자의 마음을 모두 꿰뚤어 볼 수 있다는 신통력)이란 술수(術數)로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전횡(專橫)을 서슴지 않았고, 급기야 매우 신뢰하던 왕건까지 의심하고 깊이 견제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생사여탈을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행하는 궁예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은 크게 공포를 느끼며 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대승공은 대의(大義)를 우선시하는 지조(志操: 원칙과 신념을 끝까지 지니거나 지키는 꿋꿋한 의지)와 변함없는 의리(義理: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써 목숨을 걸고 의연(毅然: 의지가 굳세어서 끄떡없음)히 왕건을 계속 지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왕건은 대승공의 헌신적인 익찬(翊贊: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이끌어 감)의 공()을 결코 잊지 아니하고, 전장에서 함께 생사를 걸고 전투를 치룬 장군이나 책사가 아니었음에도, 대승공을 5명의 1등 공신에 이은 12명의 2등 공신에 포함시켜(상위 합계: 17)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책봉(冊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왕건의 높은 신뢰와 평가가 있었지만, 대승공은 고려 개국공신으로서 대승(大丞)이라는 향직(鄕職, 3)을 제수 받고 통합삼한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이란 훈호를 받음에 족하였기 때문에, 더 큰 영달은 바라지도 않았고 아예 개경에서 얼씬대지 아니하고 바로 유주(儒州)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래서 다른 공신들과 달리 대승공의 아들2류효금(柳孝金)’은 개경에 볼모로 잡혀 있지 않게 되었고, 이후 6세대문화류씨의 중시조(中始祖)로 간주하는 7()()’자 님(‘柳公權’)의 윗 세대들을 말함에 걸쳐서 유주(儒州)에서 조용히 평범하게 잘 지낼 수 있었다.

 

대승공은 삼한통일 후 전국을 유람하며, 보이지 않는 덕행(德行)을 행하였다. 그 일례가 공주 계룡산 자락에 이르러, 과거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신라 제19대 눌지왕(訥祗王)의 왕제들王弟: 복호(卜好),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며 충성을 다하였던 (그러나 이제 고려의 삼한통일로 인하여 멸망한 나라가 되어버린) 신라국의 충신(忠臣) 박제상(朴堤上)의 초혼각(‘東雞祠)을 짓고,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충의정신(忠義精神)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와 같은 대승공의 고귀(高貴)한 품격(品格: 사람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과 높은 지절(志節)을 오랫동안 자연스레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어느 스님이 대승공을 내심 존경하며 진정 칭송하는 마음에서, 신성한 상상의 새인 봉황(‘鳳凰’)에 비유하여 그 고귀한 의미를 담아 은유적으로 아사(鵝沙)란 호()를 지어준 것이리라.

 

대승공 사후인 성종(成宗) 7(988) 고려에 유교적 제사가 본격 도입되어, 종묘(宗廟: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유교식 제례를 봉행하던 왕실 사당)의 명칭을 태묘(太廟)라 정해 건설한 뒤 유교식 왕실 제사가 시행되었는 데, 태묘에 안치된 군주에게는 묘호廟號: 왕이 죽은 뒤 그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 붙이는 존호, () 또는 조()가 사용됨가 올려졌고, 상당수 삼한공신들에게는 시호(諡號: 왕이나 고위 벼슬아치 등이 죽은 뒤,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이는 호)를 내리고 태묘에 배향(配享: 공신이나 학덕 있는 사람의 신위를 종묘나 서원 등에 모시는 일)하였다.

 

삼한공신 중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유금필·김선평·이도·함규·김선궁·홍규·김훤술·윤신달·권행 등에게는 태사(太師: 임금의 고문, 1)나 시중(侍中: 중서문하성 등의 으뜸 벼슬, 1) 또는 삼중대광(三重大匡: 1품의 문관품계 또는 향직 정1)에 추증(追贈: 공이 있는 벼슬아치 등이 죽은 뒤, 관직과 품계를 높여 주던 일)되고, 또한 시호가 내려져서 태묘(太廟)나 안동 삼태사묘(三太師廟) 등에 모셔졌다.

 

그러나 이 무렵 이미 대승공과 그 자손들은 개경 중앙정치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대승공은 유교적 제사 제도의 본격 도입을 계기로 이뤄진 삼한공신에 대한 추증과 시호의 부여 대상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태조 왕건이 죽은(943) 45년이 지난 후(988)에 이뤄진, 다른 집안의 시조인 삼한공신들에게 추증된 관직이나 품계 및 시호에 비해 우리 시조 대승공의 관직·품계가 떨어진다고 해서, 전혀 마음이 위축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진정 중요한 것은 대승공이 왕건으로부터 받은 공신 훈호가 고려태조 통합삼한 익찬 벽상 2등 공신(高麗太祖統合三韓翊贊壁上二等功臣)으로서, 3천여명이나 되는 삼한공신들 중 월등히 높은 상위 17명 이내이었다는 엄연한 사실(事實, fact)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유교적 제사의 본격 도입을 계기로 고려 개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들에 대해 추증과 시호의 부여가 이루어질 때, 태조 왕건이 생존해 있었다면 분명 대승공도 상당한 추증과 시호를 받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리한다면, 봉황(鳳凰: 상서롭고 고귀한 품위를 지닌 상상의 새)에 비유될 만큼 너무나 훌륭하셨던 대승공(大丞公)의 혈통을 이어 받은 우리 후손(後孫)들은 대승공의 고귀한 품격(品格: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과 지절을 그대로 체받아서, 모름지기 평범한 삶 속에서 늘 다른 사람을 신뢰와 의리로써 도와 주고, 또 지조와 절개로써 우리 나라와 사회의 발전 및 이익에 묵묵히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남을 도와주되 이를 생색내거나 자랑하지 아니하며, 나라와 사회에 큰 공을 세우게 되더라도 이를 빌미로 영달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자기 분수(分數: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에 맞는 평상(平常)의 삶을 지키 겸손(謙遜: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아니함)의 정신(精神: 마음의 자세나 태도)을 꿋꿋하게 지켜나가야 하겠다.

 

 

 

 

안녕하셨습니가?

소인 柳志世입니다.

다름아니오라 최근 중문지후사공파 柳炳五(33)라는 분이 최근에 저와 인연이 되어 전화와 한번 만났던 일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종사에 관심이 있는 분으로 뵈었습니다.

만남 중에서 아래 글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나올 유주춘추에 기고하려는데 한번 검토하여 보시라고 하였으나 저는 종사에 깊이가 없는지라 다른 분들께 보여드려 판단하여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한번 보시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별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평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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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석 류종현         능암 류재풍 두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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