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廣善(23世) 梅墩居士 遺稿集

류광선 (柳 廣 善)

감사공 2023. 4. 19. 16:02

류광선 (柳 廣 善)

文化柳氏 歷史 & 現代 人物

 

2019-06-24 10:55:56

 

<류광선 : 1616~1684 仁祖反正 以後 學者. 大丞公 23: 中門使公派>

 

자 여거(汝居). 호 매돈(梅墩)

예조참판 제교 희량(霽橋 希亮)의 손이요. 탁영정 두립(濯纓亭 斗立)의 아들로 광해군(光海君) 8丙辰 1013, 시흥 안산(始興 安山)에서 태어났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준수하여 겨우 말을 하면서부터 시()를 외우더니 10여세에 이미 속문(屬文)에 능하였다.

 

13세에 가화(家禍)를 만나 조부와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섬기되 효성이 지극하여 언젠가 모친께서 안질(眼疾)로 고생하시는데 파리가 많은지라 공께서 파리채를 잡고 삼하(三夏)를 하루도 쉬지 않고 날리었다. 항상 말하기를재앙을 만난 가문의 자제로서 글을 못하면 어찌 다른 사람과 대할 수 있으리요.하고, 마침내 많은 책을 읽기 수년에 문장이 크게 성취되었다. 이로부터 고금의 서적을 구입하여 일실(一室)에 가득히 싸놓고 주야로 송독(誦讀)하여 마침내 문장(文章)의 대가(大家)로서 1500편의 시문을 저술하였다. 이에 선비들이 외우고 사모하여 금옥(金玉)같이 귀히 여겼으며 미수 허목(眉榮 許 穆)은 공을 일러 좋은 교우(交友)하였다.

 

숙종(肅宗) 10甲子 1029, 향년 69세로 돌아가시어 묘소는 시흥군 군자면 능길리 표좌(始興郡 君子面 陵吉里 卯坐)에 모셔졌다.

 

공의 유고(遺稿) 8권이 있어 희암 채팽윤(希庵 蒙彭胤)6책으로 간행하였는데, 서문(序文)은 판서 민창도(判書 閔昌道), 발문(跋文)은 성호 이 익(星湖 李 溜)이 짓고, 묘지(墓誌)는 이종제 이조참판 박천 이 옥(李 沃)이 지었다.

 

배위 해주정씨(海州鄧氏)는 진사 인()의 따님으로 3남을 두어 영구(永龜), 응구(應龜), 정구(貞龜)는 재종숙 시선 (再從叔 是善) 후로 출제하였다. 서출에 26녀가 있어 아들은 명구(明龜)와 익구(益龜), 사위는 방이성(方履成) 안후달(安後達) 안처항(安處恒) 김문필(金文弼) 이 승(李 昇) 박중흠(朴重欽)이다.

 

후손은 시흥군 군자면 거모리(始興郡 君子面 去毛里)에 세거하고 있다.

 

墓詰. 人物考. 號譜.

 

 

채팽윤(蔡彭胤)에 대하여

 

1669(현종 10)1731(영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은와(恩窩). 현감 시상(時祥)의 아들이다.

 

1687(숙종 13) 진사가 되고, 1689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지낸 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때 숙종의 명에 의하여 오칠언(五七言십운율시(十韻律詩)를 지어 후일 나라를 빛낼 인재라는 찬사와 함께 사온(賜醞)의 영예를 입었다.

 

그뒤에도 호당(湖堂)에 선임된 자들과 은대(銀臺)에 나아가 시부를 지어 포상을 받았으며, 그가 금중(禁中)에 노닐 때면 언제나 숙종이 보낸 내시가 뒤따라다니며 그가 읊은 시를 몰래 베껴 바로 숙종에게 올리게 하리만큼 시명(詩名)을 날렸다.

 

1691년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거쳐 1694년 정언(正言)에 있으면서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나,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출향(文廟黜享)을 주장한 이현령(李玄齡)의 상소에 참여하였다 하여 삭제되었다.

 

그뒤 벼슬에서 물러나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며 지내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로 승지에 제수되고, 이듬해 도승지·대사간을 거쳐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감시장시관(柑試掌試官)이 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이 전날 양현(兩賢)의 모독과 관계되었다 하여 응거(應擧)를 거부, 교체되는 파란을 겪었으며, 1730(영조 6)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렸고,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해남의 두륜산(頭輪山) 대화사중창비(大花寺重創碑)와 대흥사사적비(大興寺事蹟碑)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29권이 있고, 소대풍요 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朝鮮金石總覽

 

朝鮮寺刹史料

 

 

 

 

민창도(閔昌道)에 대하여

 

1654(효종 5)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 좌의정 희()의 아들이다.

 

1678(숙종 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정언이 되었고, 1689년 부제학 유명현(柳命賢) 등이 홍문록(弘文錄)을 만들 때 1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그해에 헌납·부교리를 지냈고,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중 호당시(湖堂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숙종으로부터 상으로 표피(豹皮)를 받았다.

 

1690년 헌납으로 사서(司書)를 겸하였고, 이어 이조좌랑·승지를 거쳐 1691년 경상도관찰사,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1693년 이조참의, 1694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1722(경종 2) 신임사화 때 장수(長水)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곽산의 개원사(開元寺) 불량비문(佛糧碑文)과 영변의 보현사(普賢寺) 월저대사비문(月渚大師碑文)을 찬하였다.

 

 

 

* 2009년부터 201810년에 걸쳐 後孫 安山宗中 會長 柳志世本文漢學者의 도움을 받아 풀이를 겸한 1300여편의 漢詩文을 편집 출간하였다.

 

위 작품을 한시문을 연구하는 모든 분들의 교본이 되리라 본다.

 

이유는 작가의 당시의 주위 환경과 작시 당시 작가의 공교한 심정을 정확히 이해를 못하고 단순히 한자풀이만으로 되지않기를 바라는 심정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