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希亮에 대하여(1)
柳潛
柳自新(첫째)---希鏗(11)希聃(12)希奮(13)希發(14)希亮(15)希安(16)조국필,이덕일,왕비,김시보
柳德新(둘째)---希成(21)希老(22)希契(23)希益(24)
希亮(15)---두립(1522---廣善(1523)---應龜(1524)---仁益(1525)---鼎相(1526)---琇(1527)---得臣(1528)---惠中(1529)---
萬永(1530)---寅鳳(1531)---正烈(1532)---志世(1133-420731)---------記錄 註釋 : 志世(1533-420731)
제15代 光海君의 丈人인 文陽府院君 柳自新(1541~1612)과 東萊 鄭氏 左相 林塘
鄭惟吉(1515~1588)의 二女(蓬原府夫人 東萊 鄭氏)사이에서 5子로 태어나다.
光海君과 柳希亮은 1575年生으로 同甲나기이다.
鄭惟吉의 三女는 金尙憲,金尙容 兄弟의 母이고 이들의 父는 安東 金氏 金克孝이다.
鄭昌衍은 鄭惟吉의 子이고. 鄭廣成의 父이다
柳自新과 安東 金氏 金尙容, 金尙憲 兄弟의 父 金克孝는 同壻지간이다.
柳自新,金克孝와 鄭昌衍과는 妹夫,妻男간이다.
希亮의 兄弟姉妹와 金尙容,金尙憲 兄弟는 姨從四寸간이다.
鄭惟吉,鄭昌衍 父子는 希亮의 兄弟姉妹와 金尙容,金尙憲 兄弟의 外祖父,外三寸이다.
1545년 30歲인 鄭惟吉,44歲인 李滉(1501), 金麟厚는 같이 동호서당에서 사가독서하 였다.
鄭惟吉(1515)은 정계로, 李滉(1501)은 학자의 길을 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鄭惟吉-鄭昌衍-鄭廣敬(東萊 鄭氏=서울시 사당동 묘역)은 3代이다.
1576년(丙子=宣祖 9)
光海君의 妃(中殿) 柳氏 태어나다.-仁祖反正 後 廢妃로 文城郡夫人(1623년10월8졸)
1581년(辛巳=宣祖14) 9월12일
男弟 希安 태어나다.
후에 羅州 丁氏 丁好誠의 女와 結婚
1601년(辛丑=宣祖34) 2월1일
아들 斗立(母=貞夫人 綾城 具氏)태어나다.
1603년(癸卯-宣祖36)
28歲에 司馬試(式年試)에 3등으로 合格하여 成均館 生員이 되다.
1605년(乙巳-宣祖38) 7월24일
成均館 儒生시 정호성,허실,최성원등과 팔도 열읍의 향교와 모든 서원에 鄭仁弘이 지은 발남명집설을 비방하는
서찰을 보냄.
1606년(丁亥-宣祖39) 1월18일
31歲에 오현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다.
재차 상소하다.
1608년(戊申-光海 0)
33歲에 別試 乙科 2위로 급제하다.
1609년(己酉-光海 1) 2월4일
34歲에 藝文館 檢閱 제수
史官(4월4일)으로 시사청에 입시하다.
設書(7월3일)로 제수
正言(9월6일)으로 제수
吏曹佐郞(9월11일)으로 제수
1610년(庚戌-光海 2) 2월8일
35歲에 典籍으로 제수
持平(8월18일)으로 제수
文學(8월18일)으로 제수
金尙憲 直提學으로 제수
1611년(辛亥-光海 3) 5월21일
36歲에 校理로 제수
姪 忠立를 注書로
副修撰(8월26일)으로 제수
1612년(壬子-光海 4) 2월7일
文陽府院君 柳自新 卒하다.
當代 任就正,柳希亮,許筠,鄭廣成,柳忠立,裵大維등 13人의 官職과 姓名을 自筆로 쓰고 手決한 古文書 存在 確認
1614년(甲寅-光海 6) 6월20일
39歲에 議政府 舍人으로 제수
成均館 直講 신분으로 郎廳에서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에 근무하다.
弘文館 典翰 都廳 稱號 檢擧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에 근무하다.
4째 兄인 希發을 吏曹正郞으로
3째 兄인 希奮 文昌府院君으로
長姪인 孝立은 兵曹正郞
直提學(10월4일)으로 제수
鄭昌衍의 子 鄭廣敬을 修撰으로
姪 忠立를 文學으로 제수
1615년(乙卯-光海 7) 1월20일
40歲에 司僕 正으로 제수
아들 斗立이 14歲 어린 나이에 進士試에 합격되다.
5월7일 독서당 관원에 선발되어 4째 兄 希發과 함께 湖當에 들다.
濟用監 正(5월20일)이 上疏하다.
執義(6월8일)로 제수
都廳에 弘文館 直提學 신분으로 火器都監 조직에 참여하여 加資되다.
1616년(丙辰=光海 8)
斗立의 子 廣善(母=淑人 朔寧 崔氏)이 10월13일 태어나다.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의 都廳에 司僕侍正 관원으로 근무하다.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의 都廳에 通訓大夫 司僕侍正 知製敎兼 世子 侍講院 輔德
孫子 廣善 태어나던 해에 시조 한수의 글이 남아있음(成均館大 博物館)
長姪인 孝立은 郎廳에서 兵曹正郞 신분으로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에 근무하다.
둘째長姪인 忠立(1572년생) 시조 한수의 글이 남아있음(成均館大 博物館)
外三寸인 右議政 鄭昌衍은 3인의 都提調 관원으로 근무하다.
41歲에 禮曹參議(1월14일)로
姨從인 金尙容이 知敦寧으로
4째兄인 希發을 吏曹參議으로
同副承旨(1월23일)로
작은 아버지 德新은 延安府使로
右副承旨(4월13일)로
長姪인 孝立을 副修撰으로 제수
刑曹參議(4월20일)
承政院 右副承旨(5월6일)로
左副承旨(5월11일)로
許筠을 刑曹判書로
任就正을 左承旨로
당시 이들이 手決하였던 筆跡이 현재 남아있다.
1617년(丁巳=光海 9) 3월26일
42歲에 副提學에 제수되다.
京畿監司(6월11일)가 되다.
1619년(己未=光海11) 8월18일
44歲에 禮曹參判으로
1620년(庚申=光海12) 11월25일
蓬原府夫人 東萊 鄭氏 卒하다.
1621년(辛酉=光海13)
아들 斗立이 21歲에 別試 丙科 4위로 합격하다.
1623년(癸亥=光海15) 3월14일
仁祖反正이 일어나다.
希奮,希發에게 주벌토록하라
希亮,希安은 절도에 위리안치토록 하라
당시 金尙憲은 大司憲이였다.
巨濟島로 流配되다.
廣善은 겨우 7歲였다.
文城郡夫人 卒
1628년(戊辰=仁祖 6)
54歲에 巨濟島 流配地에서 絞殺되다.
27歲된 외아들 斗立도 絞殺되다.
長姪인 孝立과 子 宗善,養善
廣善은 겨우 12歲였다
☞ 希亮事
=許穆의 미수기언=記言別集
☞ 거모동의 망고개 유래
☞ 柳希亮 製進=梧里先生文集附錄卷之三
☞ 柳格 神道碑(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몽촌리)의 篆額을 쓰다
☞ 推案및鞠案 義禁府編(1623)---奎章閣 15149
☞ 41歲에 孫子 廣善 태어나던 해에 시조 한수 쓴 글이 남아있음.
☞ 10字로 쓴 글이 남아있음.
1641년(辛巳=仁祖19)
嘉善大夫禮曹參判 李沃(1641∼1698)이 廣善의 姨從弟이며 廣善의 墓碑銘을 쓰다 .
1647년(丁亥=仁祖25) 10월5일
廣善의 2子 應龜 태어나다.
1654년(甲午=孝宗 5)
閔昌道 출생하고 1714년 梅墩(柳廣善)의 梅墩稿의 序文을 쓰다.
1678년(戊午=肅宗 4)
閔昌道 증광문과 을과로 급제, 다음해에 문과증시에 병과로 급제
1684년(甲子=肅宗10) 10월29일
廣善 졸하다.
1689년(己巳=肅宗15)
閔昌道는 弘文錄을 만들때 副提學 柳命賢등 13인 중의 한사람으로 발탁되다.
1690년(庚午=肅宗16)
閔昌道는 사가독서하던중 湖當試에 수석하여 肅宗으로부터 상으로 표피를 받다.
1694년(甲戌=肅宗20)
閔昌道는 大司成이 되었다.
1714년(甲午=肅宗40)
梅墩(柳廣善)의 梅墩稿의 序文을 문장과 글씨에 능한 閔昌道가 쓰다.
閔昌道는 곽산의 佛糧碑文과 영변의 普賢寺 月渚大師碑文을 撰하였다.
1791년(辛亥=正祖15)
파주산성 축조를 청하다.---柳希亮이 京畿監司로 있을시 비변사 兵馬절도사 右道 防禦使를 겸직하였다는 실록
2007년 10월15일
後孫 志世(1533-420731)가 참고자료를 정리 기록하며 특히 梅墩(柳廣善)의 梅墩稿를 이미 사본하여 재 제본(2책6권)하였고 많은 종친을 비롯한 국내학자, 현대인에게 이를 선양하고, 연구 하도록 약 130,000字(한글화 및 주석을 달면 1,000,000字 이상예상)의 방대한 글의 해설을 유능한 한국학 학자에 의뢰하여 진행중에 있으며 2008년 말경 완성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