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希亮(21世) 監司公

韓汝溭 柳希亮(21世)柳自新의 5子

감사공 2023. 4. 6. 20:00

韓汝溭

柳希亮(21)柳自新5

 

2019-06-03 13:46:22

 

예조 판서 한공(韓公) 묘갈명

 

공은 휘는 여직(汝溭), 자는 중안(仲安), 성은 한씨(韓氏)이다. 한씨는 고려 시대에 크게 번성하였는데, 시조인 태위(太尉) ()으로부터 대대로 명공(名公)과 귀인(貴人)이 많이 배출되어 최고의 명문 집안으로 불렸다. 오래전에 문경공(文敬公) ()와 문열공(文烈公) 상질(尙質)이 있었고, 문열공에서 8대를 내려와 청천군(淸川君) ()이 있었는데, 공에게는 부친이 된다. 선조(宣祖) 때의 공신으로 관직이 열경(列卿)에 올랐다. 모친은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 최정수(崔貞秀)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3(1575, 선조8) 212일에 태어났으며 공의 형제 여덟 명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다. 만력 32(1604)에 성균관 생원으로 선발되어 처음 벼슬로 유릉 참봉(裕陵參奉)에 제수되었고, 6년 뒤에 명경과(明經科)에 갑과(甲科)로 합격하여 관직이 높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사로 인해 연이어 외직으로 밀려났다. 재령 군수(載寧郡守)로 있을 때 계축옥사(癸丑獄事)에서 상주(上奏)하는 일을 맡았다 하여 규례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나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해 6월에 해주(海州)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공이 또한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비록 풀려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해 거의 10년 동안이나 관직에서 물러나 지냈다.

당시에 류희량(柳希亮)이 왕후의 아우(오류: 오빠 왕후는 1576이고 柳希亮光海王韓汝溭이 동갑으로 3사람이 1575年生)로서 높은 관직에 기용되어 선량한 사람들과 교분을 맺고 있었는데, 공과는 같은 해에 태어났고 게다가 한마을에 살았으므로 매우 친하게 지냈다. 소인들이 정사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는데도 임금이 혼몽하여 이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걱정하여,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환심을 얻어 재주와 인망이 있는 인사를 끌어다 기용할 생각으로 공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공이 그래 보아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고 대답하자 마침내 그만두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공을 다시 기용하여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그때 광해군이 내린 관작과 포상들을 모두 박탈함에 따라 공이 규례대로 자급이 강등되어 승정원에서 체직되었으나, 상이 특별히 다시 임명하여 좌부승지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이 경기 관찰사로 있었으므로 난이 평정되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였다.

무진년(1628, 인조6)에 예조 참판을 거쳐 동의금에 제수되었다. 이때 유효립(柳孝立)의 사건이 일어나 그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2품에 올랐다. 그해에 숭정황제(崇禎皇帝)가 황위에 올랐는데, 공이 열경(列卿)의 지위로 연경(燕京)에 가서 황제의 등극을 진하하였다.

병자년(1636)에 좌참찬으로 남한산성에서 상을 호종하고 대사헌에 이배(移拜)되었으며, 상이 도성으로 돌아온 뒤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숭정대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행 예조 판서(行禮曹判書)로 별세하니, 숭정 11(1638) 914일 향년 64세였다. 상이 이틀 동안 조회를 폐하였고, 그해 10월에 인천(仁川)의 계곡(桂谷)에 예장(禮葬)하였다.

공이 조정에서 30년 동안 벼슬하면서 거친 관직을 보면, 광해군 때에 대표적인 것으로 춘방(春坊)의 설서(說書)와 문학(文學), 양사(兩司)의 정언(正言)과 지평(持平), 병조 좌랑, 예조 정랑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능성(綾城)과 재령(載寧)의 수령에 제수되어 모두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질 정도로 정사를 잘하였다. 인조를 섬기면서부터 마침내 크게 드러나 승정원 좌승지와 예조 참판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공주 목사(公州牧使)와 경기 관찰사를 지냈으며, 다시 조정에 들어와 형조(刑曹), 예조(禮曹), 공조(工曹)의 판서(判書), 행 대사헌(行大司憲), 의정부의 우참찬과 좌참찬, 도총부 도총관, 의금부 판의금을 지냈다. 별세한 뒤에 영사 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이라 하여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은 평소 사소한 일에 연연해하지 않았고 풍류를 매우 즐겼으며, 벗과 사귈 때는 진심을 다하였고 일에 임해서는 이해관계에 따라 마음이 바뀌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또한 독서를 좋아하고 필법이 호탕하였으며 별호를 십주(十洲)라 하였다.

임종을 맞아 자제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높은 관직에 올랐다. 그런데 죽어서까지 사치스러운 예법을 써서야 되겠느냐. 장례와 제사를 반드시 검약하게 치르고 묘도(墓道)에 비를 세워 내 마음을 부끄럽게 하는 일은 하지 말라.”

하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 구씨(具氏)는 정랑 구곤원(具坤源)의 따님이다.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큰딸은 사인(士人) 심정(沈靖)에게 시집갔으나 자식 없이 일찍 죽었다. 둘째 딸은 사평(司評) 윤강(尹堈)에게 시집가 정축년(1637, 인조15)에 강도(江都)의 함락으로 집안이 망하자 절개를 지켜 죽었다. 아들 혜()도 일찍 죽었고, 혜의 아들 오규(五奎) 또한 31세로 죽었다.

외손(外孫)에 남녀 2명이 있는데 외손자는 전 의금부 도사 윤세장(尹世章)이고, 외손녀 사위는 호남 관찰사 조귀석(趙龜錫)이다. 오규의 아들은 숙()이요, 딸은 사인 이세무(李世茂)에게 시집갔다. 공은 또 서출(庶出)인 아들 박()을 두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허황되고 지나친 명성을 / 虛美溢譽

군자는 자처하지 않았고 / 君子不居

검소하고 과시하지 않음을 / 儉而無侉

군자는 자랑으로 여겼다네 / 君子所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