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왕사(龜谷王師)
구곡왕사(龜谷王師)
柳仁修(中門使)11世
2019-05-30 09:12:27
구곡왕사(龜谷王師).
환암의 법을 이었다고 하나 왕사의 생몰 연대가 전해지지 않는 스님이다. 아마도 고려 말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격동기에 살았던 선사이기 때문일 것이지만 스님의 기록은 너무 미미한 것이다. 공양왕은 환암의 제자 찬영(粲英)을 왕사로 삼으려 했으나 신하 윤소종이 반대한 일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구곡은 철저하게 은둔해 버렸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잠적이 스님의 행장을 자세하게 남기지 않은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선사와 공민왕과의 인연을 <동사열전>은 다음과 같이 짧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고려 공민왕은 평소 그의 도행을 숭상하여 직접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와 보현육아백상도(普賢六牙白象圖)를 그려주고 구곡각운(龜谷覺雲)이란 네 자를 친필로 써 주었다.’
왕이 달마와 보현을 소재로 한 불화를 손수 그려 주었을 정도면 선사의 도행(道行)을 얼마나 흠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고, 왕이 불화(佛畵)의 많은 소재 중에서도 달마와 보현을 선택한 것은 선사의 선정력(禪定力)과 교화의 행덕(行德)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구곡의 법은 벽계 정심(碧溪 淨心)으로 이어지는데, 벽계대사 역시 생몰연대가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말 나옹의 법과 보우의 법이 모두 벽계 회상(會上)에서 모아졌다가 벽송 지엄(碧松 智嚴)으로 뻗어나간다는 법맥설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수미(守眉)( / )
조선 세조 때의 승려(僧侶). 속성(俗性)은 최씨(崔氏). 호는 묘각(妙覺). 수미는 13세에 도갑사(道岬寺)에서 출가하여 계(戒)를 받았다. 그는 처음에 교학(敎學)에 뜻을 두어 불경(佛經)을 강(講)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서 신미(信眉)를 만나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읽고 계율(戒律)을 익혔다. 그러나 수미는 교학과 계율의 한계를 깨닫고 선(禪)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구곡(龜谷)을 찾아가 지도를 받았으나 계합하지 못하고 등계(登階: 벽계(碧溪) 정심(正心))의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수미는 세조를 만나면서 불교의 중흥에 노력하였다. 즉, 그는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되어 조선 초부터 억불정책에 의해 황폐화된 불교를 중흥시키고 종문을 정돈하였다. 그는 1457년(세조 3) 도갑사로 돌아와 황폐화된 사찰을 중수하고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 3구(軀)를 조성하였고 학승(學僧)들을 모아 지도하였다. 그는 다음해(1458)에 신미. 학열(學悅)과 함께 경차관(敬差官) 윤찬(尹贊), 정은(鄭珢)을 도와 해인사(海印寺)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명산복지(名山福地)에 분치하였다. 또 그는 1459년(세조 5) 『석보상절(釋譜詳節)』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합본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를 출간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미와 함께 선도(禪道)를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완산(腕山)과 몽산(蒙山) 등의 법어(法語)를 해석하고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수미의 활동은 조선 전기에 불교의 중흥을 가져 왔다. 특히 그는 세조의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조선 전기의 왕사는 태조 때 무학과 세조 때의 수미 2명뿐이다. 수미의 왕사 책봉은 불교의 사회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고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수미는 조선 초기의 불교 중흥에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의 입적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세수 63세, 법랍(法臘) 51이었다. 그의 부도는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에 있다. [참고문헌] 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 영암군지, 조선금석총람, 조선불교통사, 조선선교사, 전남도지
구곡왕사(龜谷王師).
환암의 법을 이었다고 하나 왕사의 생몰 연대가 전해지지 않는 스님이다. 아마도 고려 말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격동기에 살았던 선사이기 때문일 것이지만 스님의 기록은 너무 미미한 것이다. 공양왕은 환암의 제자 찬영(粲英)을 왕사로 삼으려 했으나 신하 윤소종이 반대한 일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구곡은 철저하게 은둔해 버렸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잠적이 스님의 행장을 자세하게 남기지 않은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선사와 공민왕과의 인연을 <동사열전>은 다음과 같이 짧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고려 공민왕은 평소 그의 도행을 숭상하여 직접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와 보현육아백상도(普賢六牙白象圖)를 그려주고 구곡각운(龜谷覺雲)이란 네 자를 친필로 써 주었다.’
왕이 달마와 보현을 소재로 한 불화를 손수 그려 주었을 정도면 선사의 도행(道行)을 얼마나 흠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고, 왕이 불화(佛畵)의 많은 소재 중에서도 달마와 보현을 선택한 것은 선사의 선정력(禪定力)과 교화의 행덕(行德)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구곡의 법은 벽계 정심(碧溪 淨心)으로 이어지는데, 벽계대사 역시 생몰연대가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말 나옹의 법과 보우의 법이 모두 벽계 회상(會上)에서 모아졌다가 벽송 지엄(碧松 智嚴)으로 뻗어나간다는 법맥설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제59조 구곡각운(龜谷覺雲) 한국불교 법맥 조사
2007. 12. 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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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조 구곡각운(龜谷覺雲)
師名覺雲 號龜谷 或曰小隱 尹紹宗諫斥粲英 故避隱不市 粲英卽太古之子 幻庵之弟 號圓應 別號古樗王師云 玄陵達摩折蘆渡江圖 普賢六平白象圖賜之 又手書龜谷覺雲四字 兼賜二十二字號 作禪門拈頌集說話十卷 刊行于世 湖南龍城人也 幻庵修之嗣 李牧隱作贊 具如狀
스님의 법명은 각운(覺雲)이고 법호는 구곡 이며 혹은 소은(小隱)이라고도 한다. 윤소종이 찬영을 배척하는 간계로 숨어서 시중에 나타나지 않았다. 찬영은 태고의 제자이며 환암의 사제이다. 호는 원응이며 별호가 고저이신 왕사께서 이르기를 “현응께서 <달마절로도강도>와 <보현육평백상도>를 하사하였다.”하였으며, 또 손수 <구곡각운> 4자를 쓰시고 겸하여 22자<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숭신진숭근수지도도대선사>의 호를 하사하였다.
선문염송집설화 10권을 지어 세상에 간행하였다. 호남의 용성 사람이다. 환암 혼수에게 법을 이었다.李穡 牧隱이 찬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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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龜谷書畫讚
達磨折蘆渡江圖,童子普賢六牙白象圖,覺雲龜谷大字共四軸。高廣如一。皆上親筆。今大曺溪宗師,禪敎都摠攝,崇信眞乘,勤修至道,都大禪師雲公 携以過韓山李穡。曰。侈上之賜莫如文。蓋示當今傳來世。非此無繇。故將求之縉紳間。子盍先之。且曰。長蘆白象。所以警夫不肖者。惠固罔極也。至若覺雲。吾名也。龜谷。吾號也。今夫出家學道者。有萬其衆。能以名號上徹。幾何人哉。又況銘諸心。注之手。發輝奎璧。絢耀一世。其爲幸之幸何如也。此吾所以必托之子也。臣穡謹俯伏展閱。旣退而言曰。浮屠氏重於世久矣。徒以因果罪福焉者。未也。高虛玄默。獨立乎萬物之表。則雖吾儒高尙者。亦莫能少之。恭惟聖上殿下深絜妙旨。所以取之者。得其道。是以。一斥近世之陋。將以復大祖之奮。而龜谷獨蒙知遇。旣賜廿又二字。褒崇之號。又於淸燕之餘。念玆在玆。親紆札翰。寵賚如此。則其人可知已。蓋龜谷。衣冠之胄也。氣稟已非庸衆比。養之以道者又熟。故達磨心而普賢行。顧其名也。以無心爲群有之宗。顧其號也。以藏六爲群動之本。其迹翛然。其中湛然。固已不物於物矣。其受今日之賜。非幸也宜矣。大字深穩如萬鈞鼎。變化如九轉丹。象步徐徐。江風滿衣。人情物態。各臻其極。聖人之心寓於筆。猶化工之妙著於物也。臣穡敢拜手稽首。爲之讚敍其首云。
龜谷
和氣在天。虛靈在物。惟藏神用。弗或天閼。疇均此施。六合爲一。
達磨
是身虛空。天水一色。渺然而逝。風淸日白。芥乎其間。唯一不識。
普賢
六牙大象。布武大野。富貴風流。見此粲者。哀哉兔逕。方騁吾駕。
法名
無心爲心。出入大虛。友風子雨。亦曰勤渠。妙悟所以。非師誰歟。
(출처;牧隱文藁卷之十二)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 동자보현 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큰 글씨로 쓴 각운(覺雲)ㆍ귀곡(龜谷) 모두 네 개의 두루마리다. 높이와 넓이가 꼭 같은데 모두 임금의 친필이다. 지금의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숭신진승 근수지도 도대선사(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崇信眞乘勤修至道大禪師)인 각운(覺雲) 公이 이것을 가지고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들려서 이르기를
“임금께서 주신 것을 빛나게 하려면 글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니 대저 현세의 사람에게 보이며 후대에 전함에 있어서 이것이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장차 큰 선비에게 글을 받으려 하는 것이니 그대가 먼저 하여 달라.” 하고 또 이르기를
“장노도(長蘆圖)와 백상도(白象圖)는 나(각운 자신)를 경계하시기 위한 것이니 그 은혜 본시 망극하온 바이다. 각운(覺雲)은 나의 이름이요, 귀곡(龜谷)은 나의 호(號)다. 지금 출가하여 도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 수가 몇 만 명인데 이름과 호가 임금에게 알려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물며 또한 마음에 명심하시고 손을 대시고 글씨를 발휘하여 문채를 한 세상에 빛나게 하셨으니 그 행복하고 행복함이 어떠한가, 이것이 저가 기필코 그대에게 부탁하는 소이이다.” 하였다.
신(臣) 색(穡)이 삼가 엎드리어 펴 보고 물러앉아서 말하기를
“불교가 세상에서 소중히 여긴지가 오래 되었다. 다만 인과(因果)를 말하며 죄와 복을 운운하는 자는 말단에 속하는 것이요, 고준하고 허허로우며 그윽하고 묵묵히 만물의 표상에 우뚝 선 사람에 대하여는 곧 우리 유학(儒學)의 고상한 사람이라도 그를 경멸히 여기지 않는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 전하(聖上殿下)께옵서는 묘지(妙旨)에 계합하셨으므로 소이 불교를 취하여 도를 얻으셨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근세의 속된 폐해를 척파하시고 장차 태조(太祖)의 옛 도리를 회복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귀곡(龜谷)은 유독 인격과 학식에 은혜를 입어 이미 22자(字)의 길이 숭앙할 호를 내려셨고 또 직무의 여가에 항상 그를 생각하시와 친히 서화를 제작하셨다. 이와 같이 총애하셨으니 곧 그 사람이 어떠한 줄은 알 수가 있다.
대저 귀곡은 양반의 후예다. 타고난 기질이 벌써 보통 사람과 달랐고 도학으로 닦은 공부가 또한 원숙하였다. 짐짓 마음은 달마(達磨)로데 행은 보현(普賢)이었다. 그의 이름으로 보아 무심으로 묻 유의 宗을 삼았고 그의 호(號)를 보아 육도중생을 보듬는 것으로 모든 행동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의 행적은 자연스러웠고 그의 마음은 담연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물질을 물질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가 오늘에 받은 하사품은 요행이 아니요 당연한 것이다. 큰 글씨는 깊고 온화하여 만근 무게의 솥과 같으며 변화한 품은 구정구포한 금액단과 같다. 코끼리의 걸음이 뚜벅뚜벅 옮겨지는데 강바람이 옷에 가득하니 인간의 정서와 물건의 형태가 모두 그 극치에 도달하였다.
성인의 마음이 붓으로 옮겨지는 것이 마치 화가의 미묘한 물감이 캠버스에 그림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신 이색은 감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에 대하여 찬을 지으며 그 첫 머리에 서술하노라.
귀곡(龜谷)
화기(和氣)는 하늘에 있으며 허령(虛靈)함은 사물에 있다. 오직 신령한 용(用)을 간직하였으니 하늘도 막을 수 없다. 누가 이것을 고르게 베풀어서 우주를 하나로 만들 것인가.
달마(達磨)
이 몸은 허공이요 하늘과 물이 한빛이로다. 아득히 멀리 가는데 바람은 맑고 날은 밝구나. 그 가운데 겨자! 오직 하나 불식일 뿐이로다.
보현(普賢)
어금니 여섯 개인 큰 코끼리는 큰 들로 걸음을 내딛었네, 부귀와 풍류 이 훌륭한 모습을 보라. 슬픈지고 토기길에는 바야흐로 나의 가마 지나간다.
법명(法名)
무심으로 마음을 삼아, 큰 허공으로 드나들도다. 바람은 벗이 되며 비는 아들이라. 그것도 부지런한 일이구나 오묘한 그 까닭 알아낼 사람, 스님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출처] 제59조 구곡각운(龜谷覺雲) |작성자 kjcnh
太古普愚의 求法修行과 霞霧山
無空
원문출처
불교통합과 사회 안정이 종조(宗祖)의 정신
태고보우는 공민왕의 지원을 얻어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신설하여 구산선문의 통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통불교와 원융불교의 사상을 고려의 불교교단에 현실화한 조치였다. 태고보우의 원융부설치와 <치문경훈>의 보급, 그리고 통불교와 원융사상의 보급은 고려말기의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로 인해 고려불교가 큰 통합의 틀을 현실적으로 마련하여 한국불교가 과거의 때를 벗고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어진 계기가 되었다.
태고보우의 이러한 정신은 부처님의 정신에서 오교구산(五敎九山)으로 분열된 불교교단에 대해 화합의 정신을 되살리고, 원융부(圓融府)의 설치를 통해 이를 실천하여 조선조와 일제의 암울한 시대를 통일된 법맥으로 견디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태고보우가 고려시대에 간화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중국에 건너가 석옥청공으로 견성오도를 인가 받았다. 태고보우가 석옥청공으로부터 가사를 전해 받았지만 당시 고려의 원융불교의 토양에서 오도한 인물이며, 중국의 임제선 자체를 한국에 이식한 인물은 아니다. 태고 보우는 귀국한 뒤에 임제종을 자처하거나, 당시 이후 임제종이 한국에 성립된 흔적은 없다. 태고의 행장(行狀)이나 사리탑비명에는 모두“고려국 국사 대조계사조 전불심인 행해묘엄 비지원융 찬리왕화 부종수교 대원보제 일국대종사 마하실다라 이웅존자 시원증 탑명(高麗國國師 大曹溪嗣祖 傳佛心印 行解妙嚴 悲智圓融 贊理王化 扶宗樹敎 大願普濟 一國大宗師 摩悉多羅 理雄尊者 諡圓證 塔銘)”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임제종의 명칭이 전혀 없으며,‘대조계사조(大曹溪嗣祖)’란 이름에서도 태고보우의 사리탑비를 세운 이가 송광사(松廣寺)주지 석굉(釋宏)인 것을 고려할 때 한국불교의 조계종의 사조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태고보우의 법통은 임제종이 아니라 한국의 선맥인 조계(曹溪)의 사조인 것이다.
고려불교의 통합과 부흥
태고보우는 공민왕 재위시절 왕사에 책봉된 후 퇴락한 고려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무단히 노력하였다. 태고보우는 공민왕 5년(1356)에 내불당(內佛堂)과 봉은사에서 설법을 열어 조정을 감화시켰고, 공민왕에 의해 같은 해 4월 24일 왕사(王師)에 봉해졌다. 태고보우는 공민왕의 지원을 얻어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신설하여 구산선문의 통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통불교와 원융불교의 사상을 고려의 불교교단에 현실화한 조치였다. 또한 태고보우는 <치문경훈(緇門警訓)>을 유포하였는데, 이것은 유불선의 경책(警訓)을 모아 놓은 것으로 <치림보훈(緇林寶訓)>을 기초삼아 중국의 영중(永中) 선사가 고승대덕과 문인, 대부들의 좋은 글들을 모은 것이다. 영중선사는 서문에서“도(道)는 본래 말이 없으나 말로 인해 도가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삼교(儒ㆍ佛ㆍ道)의 서적들이 지어지게 된 까닭이다”라고 말하여 <치문경훈(緇門警訓)>이 유불선의 영역을 통합한 의도가 있는데, 태고보우는 이 책을 통해 분열된 고려사회를 유불선 통합의 큰 틀에서 화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378년 명회(明會) 스님이 이 책을 판각할 때, 태고보우 스스로 쓴 <치문경훈서(緇門警訓序)>에 “내가 남방에 다니며 법을 구할 때, 다행히 이 <치문경훈>을 만나, 이를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 널리 유포시켜 국가와 민족에 유익하게 하려고 한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 빼어난 학자인 명회가 큰 서원을 내어 널리 단월의 인연을 모아 판각하고 인쇄하여 유포하려하니, 국민들로 하여금 한 번 보고 듣게 하여 모두 훌륭한 인연을 맺고 마침내 다함께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리라. 이것이 이 <치문경훈>의 큰 뜻이다.”라고 하였다. 훗날 <치문경훈>은 사원교육과정의 기본교재로 쓰였고 조선후기의 월담설제(月潭雪霽, 1632-1704)에 의해 교과로 편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고금을 통해 태고보우의 정신이 불교교단의 통합과 사회 안정에 있음을 지금도 알 수 있다.
한국불교의 중흥조
태고보우가 왕사로 재직하면서 언제나 고심했던 것은 당시의 불교계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고려말 불교계는 종파불교로 분열되고, 권력과의 결합을 통해 사회적 폐해가 심각하였다. 태고보우의 원융부설치와 <치문경훈>의 보급, 그리고 통불교와 원융사상의 보급은 고려말기의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로 인해 고려불교가 큰 통합의 틀을 현실적으로 마련하여 한국불교가 과거의 때를 벗고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어진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조에도 계승되어 부용영관을 이은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서산과 부휴의 문하에서 모두 스스로 태고종통(太古宗統)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서산대사의 법통을 밝힌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의 <청허당행장(淸虛堂行狀)>에는 스승의 법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임제종풍이란 그 근본이 있고 원류가 있다. 우리 동방의 태고 화상이 중국으로 들어가 하무산에서 석옥의 법을 이었다. 그리하여 환암(幻庵)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전하였으며, 구곡은 등계정심(登階正心)에게 전하고, 정심은 벽송지엄(碧松智嚴)에게 전하였으며, 지엄은 부용영관(芙蓉靈觀)에게 전하고, 영관이 서산 등에게 전하였으니, 석옥은 임제의 적손(嫡孫)이다.
<청허당집>에 따르면 한국불교의 법맥을 임제의 가풍으로 인식하고“선사여! 나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밝은 대낮 맑은 하늘에 치는 벼락의 위엄이로다”라고 하였고, <선가귀감>에서는 임제종의 종풍에 대해 “임제종을 알고자 하는가. 맑은 하늘에 벼락 치는 소리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태고보우를 계기로 조선불교의 선맥이 임제종의 종풍을 이은 사실을 밝힌 것인데 그 시원은 당연히 태고보우에게 있는 것이다. 이외 이정구(李廷龜)가 찬한 <서산비(西山碑)>와, 계곡장유(谿谷張維)가 찬한 <대흥사청허비(大興寺淸虛碑)>에도 같은 내용이 전해지며, 서산의 증법손이자, 언기의 손제자인 월저 도안(道安, 1639~1675)도 숙종4년 발간한 <불조종파도(佛祖宗派圖)>에서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서산의 법통은 서산을 잇는 언기, 쌍흘, 해안 등에 의해 다시 그 정통성이 주창되고, 이어 <청허집>의 재간행과 청허대사비의 설립, <사명당송운대사행적>을 통해 태고법통설은 한국불교의 통설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의 임진왜란 이후 서산의 문도들에 의해 법통설이 강조되게 된 것은 자신들이 한국불교 조계종의 법손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한 것인데, 후대인 영조 40년(1764) 사암채영(獅巖采永)이 간행한 <불조원류(佛祖源流)>에도 태고보우를‘해동정맥 제일조 태고보우국사(海東正脈第一祖 太古普愚國師)’로 명명하고 후손인 청허 휴정을 제6세로 정하였다. 이처럼 서산의 법계는 태고 보우를 초조로 삼고 있으며, 서산의 법손은 조선 후기의 승단에 계승되어 태고보우를 제1조로 숭앙하기 때문에 태고보우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중시조(中始祖)라는 존호가 명불허전(名不虛傳)인 것이다.
결론
최근 한국의 불교연구는 태고보우에 대해 한국불교의 중흥조로서 그 법통의 정통성을 밝히는 연구들이 다수 출현하였다. 태고보우는 고려후기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왕사(王師)와 국사(國師)에 봉해져 혼란한 고려시대의 정신적 스승으로 한 시대를 이끌었으며, 쇠락한 불교계를 다시 일으켜 오늘날 한국불교의 해동제일조(海東第一祖), 또는 중시조(中始祖)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불교의 후손들이 태고보우선사를 추앙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18대 법손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가사(袈裟)를 전해 받음으로써 견성오도를 인가받고, 달마(達磨)이후 혜능(慧能)으로 이어지는 임제선의 법맥을 엄연히 계승한 사실 때문이다.
태고보우는 고려의 불교계 혼란을 극복하고,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을 비롯한 여러 종파들을 원융사상에 입각해 통합하여 한국불교사에 불조(佛祖)의 살아있는 정맥(正脈)을 다시 잇게 한 역사적 인물이다. 태고보우에게 볼 수 있는 일불승(一佛乘)과 원융사상(圓融思想)은 신라시대 원효(元曉) 이후 통불교(通佛敎)로 일컬어지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태고보우의 이러한 정신은 부처님의 정신에서 오교구산(五敎九山)으로 분열된 불교교단에 대해 화합의 정신을 되살리고, 원융부(圓融府)의 설치를 통해 이를 실천하여 조선조와 일제의 암울한 시대를 통일된 법맥으로 견디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태고보우와 석옥청공의 만남은 현대 한국과 중국의 양국불교 현실과 비교할 때, 불교의 정신을 통해 중국과 한국 사이에 놓여 진 종교와 철학, 차와 시문의 교류가 다시 활기차게 흐르게 할 수 있는 역사적 단서를 제공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태고보우와 석옥청공이 하무산 천호암에서 만나 불교의 정신을 교감하고 교류했던 것처럼 불교를 통한 양국의 불교연구와 교류가 더욱 확대되길 바란다.
[출처] 太古普愚의 求法修行과 霞霧山 8|작성자 byunsdd
♣ 본 사실에 대하여 설명이 필요하신 분은 류재풍 종장님께 의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