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공 2023. 4. 2. 09:53

丙子胡亂

朝鮮王朝時代 聯關 자료해설

 

2019-05-27 13:13:31

 

후금의 막대한 공물요구와 명과 후금사이에 중립적 입장을 고수해온 조선에게 분명하게 후금()의 신하가 되라는 선택강요에 조선조정이 이에 반발, 요구해온 공물과 청에게 복종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명나라 편에 섬으로서 야기된 전쟁.

 

애초에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은 명나라에 사대주의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에 대해 청이 마치 이빨빠진 호랑이를 섬기는 조선의 행태에 대해 경종을 주고자 한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등거리외교로 청의 분노를 야기하였다.

 

그런 이유로 정묘호란이 없었더라면 병자호란이 있을 턱도 없거니와, 잘 생각 해 보면,정묘호란이 일어난 다음에도 국제정세에 바르게 대처하여 청과의 외교를 가까이 했더라면 병자호란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건만, 나라의 운명을쥔 위정자들이 이를 바로보지 못하고 결국 애꿓은 백성들만 그들의 말발굽아래 짓밝히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삼전도의 치욕

朝鮮王朝時代 聯關 자료해설

2019-05-27 13:14:31


인조 14년인 병자년(1636) 12월 초에 태종은 직접 12만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 합니다. 조선은 적을 맞아 결사항전을 했지만 청나라의 강력한 군대에 전황은 불리해져 인조는 세자와 남한산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산성에는 겨우 만이천여명이 있었고. 먹을것도 50일분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해 1월 초엔 청의 12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으나 이 때 조정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그 사이 청의 군사들이 강화도로 피신했던 세손과 왕자들이 모두 잡히게 되자 결국 1637130일 인조는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삼전동)로 나아가 청 태종 앞에 꿇고 항복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청은 조선에 강화조건을 제시합니다.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를 지킬 것,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을 내놓을 것,

 

조선 왕의 장자·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