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공 2023. 4. 1. 20:27

鄭澈(松江)

朝鮮王朝時代 聯關 자료해설

2019-05-27 12:51:00


鄭澈(松江)

 

조선 중기 문신·학자·시인.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延日). 인종의 귀인(貴人)인 큰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궁중 출입이 잦아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明宗)과 친숙해졌다.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어 그 일족으로서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명종 6) 유배에서 풀려나자 온 가족이 고향인 전라도 창평(昌平)으로 이주하여 김윤제(金允悌기대승(奇大升)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사사하였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같은 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1561(명종 16) 진사시에 합격한 뒤 직강·헌납·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8(선조 11) 승지에 올랐으나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이후 3년 동안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관동별곡(關東別曲)》 《훈민가(訓民歌) 등의 가사를 지었고 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다음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벼슬길에 나서 체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사직, 강화 송정촌에서 만년을 보냈다. 정치인이면서도 당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더불어 한국 시가사상(詩歌史上) 쌍벽(雙璧)으로 일컬어진다. 후학인 숙종 때의 김만중(金萬重)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을 중국 초()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비겨, 동방의 이소라고 절찬한 바 있다. 작품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