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당명(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에 대한 유래
조선시대의 당명(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에 대한 유래
朝鮮王朝時代 聯關 자료해설
2019-05-26 11:00:03
(동인/東人)
조선 중기의 정파.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 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후배 관인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어 주로 선배들로 구성된 서인(西人)에 맞섰다. 명칭은 후배측 입장에서 분파의 계기를 이룬 김효원(金孝元)의 집이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중심 구성원은 유성룡(柳成龍) ․ 이산해(李山海) ․ 이발(李潑) ․ 우성전(禹性傳) ․ 최영경(崔永慶) 등이었다. 대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처음부터 학연적 성격이 짙었다. 특히 심성(心性)을 강조하면서 훈척정치(勳戚政治)와의 투쟁과정에서 사상적 지주로 형성되어온 이황의 학문이 사상적 중심이 되었던 만큼, 구체제의 요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렬하고 훈구정치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하여 수뢰혐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 등의 방식으로 서인을 압박하였으나, 그러한 공세적 입장으로 인하여 오히려 시류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가담함으로써 순수성이 훼손되는 부작용도 겪었다. 1582년(선조 15) 이이(李珥)가 중재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을 자처한 이후로 그들과의 사이에 굳어진 양당체제에서 명분과 실력면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1589년 자파 인물인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수세에 몰렸으나, 2년 후 서인 지도자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에 의해 축출되자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전부터의 내부적 입장 차이가 이때 서인에 대한 공세를 둘러싸고 격화되어, 정철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는 이산해 ․ 정인홍(鄭仁弘) 중심의 북인(北人)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우성전 ․ 유성룡 등의 남인(南人)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조식의 문인이고 후자는 이황의 문인이라는 학연적 성격을 가졌다.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기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질성(同質性)이 사라지고 모두 동인이라는 명칭도 의미를 잃었다.
(서인/西人)
조선 중기의 정파. 15세기 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탄압을 이겨내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훈구정치(勳舊政治)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후배 관인들인 동인(東人)에 대립한 선배 세대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명칭은 분파의 중심인물이었던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도성 안 서쪽에 있었던 데서 기인하였다. 초기에는 학문적 구심이나 확고한 중심인물이 없었지만, 중립적 입장에 서서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가 동인 일부의 극단적인 주장에 그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임을 자처하게 되자 그와 성혼(成渾)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선조대 중반까지 적극적인 체제 개혁을 내세운 동인의 공격을 받는 수세적인 입장에 있다가, 1588년(선조 21) 모반을 기도했다는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계기로 정철(鄭澈)이 중심이 되어 동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정철이 국왕의 후계를 세우자고 건의한 것이 선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곧 실세하였다. 그 후 정치의 주도권을 남인과 북인에게 넘겨준 상태에 있었으나, 광해군대 북인이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입지가 좁아지자 1623년에 무력을 동원하여 인조를 추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였다[仁祖反正]. 인조대에는 공신세력과 일반 사류들의 대립이 계속되어 통일된 정파적 입장을 가지고 정치를 운영하지는 못하였고, 효종 즉위 후에 공신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강력하게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김육(金堉)과 김집(金集)의 대립 등 그 내부에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그 후 현종대 왕실 상례(喪禮)문제 등을 쟁점으로 남인과 크게 대립하였고[禮訟] 숙종대에 들어가서도 계속되는 공방전에 진퇴를 거듭하였으나 1694년의 남인 축출로 권력을 확고히 함으로써 조선 후기까지 중앙권력은 대개 이들의 후계세력이 장악하였다. 숙종 초기에 이미 그 내부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분파되었고,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蕩平策) 밑에서 정치세력과 명분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므로, 한 정파로서 어느 정도 통일된 입장을 유지한 것은 숙종대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하고 이이와 성혼의 권위를 적극 내세웠으므로 그들을 성균관(成均館)의 공자 사당[文廟]에 모시려는 정책이 남인과의 대립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그 학통은 김장생(金長生) ․ 김집 ․ 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고, 17세기에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예론(禮論)의 정리를 과제로 하였다. 학문과 정치의 주제로 삼은 명(明)나라에 대한 사대나 왕실 상례 등이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으나, 조선 후기에는 그것들 자체가 사회 주도이념으로서의 구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구성원들은 대동법(大同法)․호포제(戶布制)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농사 방법 등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남인/南人)
조선 중․후기 동인(東人)으로부터 북인(北人)과 함께 분파된 정파. 1588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에 타격을 가한 서인에 대해, 절충적 입장을 지킨 유성룡(柳成龍) ․ 김성일(金誠一) 등을 중심으로 성립하여, 적극적인 서인 배격을 주장한 정인홍(鄭仁弘) ․ 이발(李潑) 등의 북인과 맞섰다. 학맥으로 이황(李滉)의 제자와 지역적으로 경상좌도의 기반에서 성장한 사림이 중심이 되었다. 시비의 분별보다 정파간의 협동에 의한 정국의 안정에 중점을 두는 입장을 지녔으며, 임진왜란 중에 서인 ․ 북인 세력과 공존하면서 정국을 주도해 전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싸움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강력한 주전론의 비판을 받아, 전란 말기에 실세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북인의 독주에 대해 서인과 함께 비판적 입장을 취하다가, 인조를 추대한 서인의 정변(인조반정)을 인정하고 이원익(李元翼) ․ 정경세(鄭經世) ․ 장현광(張顯光) 등을 중심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때는 몇몇 쟁점에서 서인과 대립하기도 하나, 그보다는 오히려 서인 일반과 손잡고 공신세력의 권력독점과 대청 강화책을 비판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대체로 공신과 서인세력에 눌려 열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기호지역 출신인 허목(許穆) ․ 허적(許積)과 북인의 후예인 윤휴(尹) 등이 크게 진출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기호 출신과 영남 출신은 입장에 차이를 보이면서, 중앙 정치에서의 활동과 새로운 사상의 탐구에 기호남인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왕실 상례를 둘러싼 논쟁[禮訟]에서 왕가의 특수성을 주장하여 상복 기간을 길게 잡는 이론으로 서인과 대립하던 중, 1674년의 2차 논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현종 말기와 숙종 초년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대거 숙청되고, 9년 뒤 정국을 뒤집었으나, 다시 5년 만에 서인에 밀려 실세하였다. 그 뒤로는 영조 ․ 정조대의 탕평책 아래에서 오광운(吳光運) ․ 채제공(蔡濟恭) 등을 중심으로 큰 역할을 한 적도 있으나, 서인 ․ 노론이 주도하는 정치판도를 뒤집지는 못하다가 정조가 죽은 뒤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대체로 국왕권의 강화와 소농민의 안정을 추구하는 입장을 지키면서, 국왕보다 사족(士族)의 정치 주도권을 강조하는 서인과 이념적으로 대조되었다. 특히 17세기 이후로는 유형원(柳馨遠) ․ 이익(李瀷) ․ 정약용(丁若鏞)으로 대표되는 실학파의 한 흐름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업적에는 광범위한 개혁론이 포함되는데, 거기에는 실세한 시기가 많은 데서 기인한 강렬한 현실비판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익이 화폐 유통을 반대한 것, 적서차별 철폐에 대한 소극적 입장, 신분제 극복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것 등에서 드러나듯이 복고적인 입장도 강하게 나타난다. 한편, 새로운 사상에 대한 탐구는 천주교(天主敎)를 수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북인/北人)
조선 중기의 정파. 16세기 후반에 성립된 동인으로부터 남인과 함께 분파되었다. 1588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을 숙청하였다가 곧 실세한 서인에 대해, 정인홍(鄭仁弘) ․ 이발(李潑) 등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배격과 유성룡(柳成龍) 등의 공존의 입장이 대립하였고 이들이 각기 북인과 남인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학통상으로는 동인이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및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중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이 된 데 비해 북인은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주전론(主戰論)을 펼친 명분을 바탕으로 연소한 신진들의 지지를 모아 전란 후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전란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바탕으로 대북(大北) 대 소북(小北), 대북내에서의 골북(骨北) ․ 육북(肉北) 등으로 분파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서인과 남인에 비해 복잡한 학통도 한 원인이 되었다. 몇 차례의 부침을 겪은 끝에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피해를 극복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학통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시도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 배격[晦退辨斥]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선조의 적자(嫡子)이자 국왕의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선조비(宣祖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축출하려는 정책을 펴면서 서인과 남인을 크게 배격하였다. 그것이 결국 자기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결과로, 무력을 동원한 서인의 광해군 축출[仁祖反正]로 정계에서 숙청되었다. 그 후 남이공(南以恭) ․ 정온(鄭蘊) 등이 인조대 정치에 참여하였으나 정파로서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일부 인물들은 남인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사상은, 정통 주자성리학과 거리를 둔, 조식을 스승으로 하였던 데 나타나듯이, 서인 및 남인과 어느 정도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으나, 명(明)이 후금(後金)과의 싸움에 군대를 동원하라고 요구하였을 때에는 광해군과는 달리 대개 출병에 찬성하는 등 사대 명분론 등에서는 다른 사림들과 입장을 함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