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海主&文城郡夫人柳氏(21世)

광해군의 수필첩(手筆帖)에 쓰다

감사공 2023. 3. 31. 12:15

광해군의 수필첩(手筆帖)에 쓰다

光海王(光海君)

 

2019-05-26 10:43:08

 

광해군의 수필첩(手筆帖)에 쓰다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우리 집에 광해군의 수필첩이 둘이 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첫머리에 칠언 율시 두 수가 실려 있는데, 그 왼쪽에 1605(선조 38) 맹추(孟秋) 24이라 쓰여 있고 그 밑에는 동궁(東宮)’이란 두 글자를 전각(篆刻)한 소인(小印)이 이금(泥金)으로 찍혀 있으며, 그 다음에 칠언 절구 두 수를 실은 다음 그 왼쪽에다 연월일(年月日)’과 소인을 위와 같이 쓰고 찍었다. 그 다음에는 율시(律詩) 두 수와 절구(絶句) 두 수가 실려 있는데 율시와 절구에는 각각 그 오른쪽에 경차(敬次)’라는 두 글자를 쓰고 왼쪽에는 각각 1615(광해군 7) 중추(仲秋) 20이라고 쓴 다음 그 밑에다 역시 위와 같이 소인을 찍었다. 여기서의 원운(元韻)은 선조의 어제(御製)인데, 1605년에 이 시를 쓴 것은 나중에 추서(追書)한 것이며 1615년에 그 소인을 찍은 것은 잘못 찍은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금원에 올라 조망한 선조 어제의 칠언 율시 한 수와 폐주(廢主)가 이 옥운(玉韻)에 받들어 화답한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율시는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했을 때에 눈[]을 읊은 것이고, 절구는 서울에 돌아왔을 때에 기쁨을 노래한 것이며, ‘경차(敬次)’는 폐주가 그 운에 보운(步韻)하여 자신의 뜻을 읊은 것이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이처럼 임금이 지은 어제의 시를 나같이 식견이 부족한 미천한 신하가 감히 이와 같이 논찬(論贊)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폐주의 시 또한 애연(藹然)히 충군(忠君)과 효친(孝親)의 뜻이 있으며, 또한 그 말이 상국(上國)이나 부왕(父王)과 관련될 경우에는 반드시 이를 별행(別行)으로 써서 그 공경하고 조심함을 지극히 하였을 뿐 아니라, 그 자획(字劃)이 또한 단아(端雅)하고 해정(楷正)해서 방심(放心)한 자태가 없으니, 그 때 만일 이와 같은 마음을 계속 보존하여 이것저것 딴 생각을 하는 일이 없이 그 제왕의 복록을 계속 누리기만 하였더라면, 이 수필첩이 참으로 얼마나 보중(寶重)스러운 것이 되겠는가. 그런데 도리어 지금 이것이 사람들로부터 천시당한 나머지 오히려 저 여항(閭巷)의 조금 이름이나 지위가 있는 자들의 그것만큼도 못한 형편이니, , 참으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이것은 일찍이 한 나라에 군림하여 다스리던 분의 것으로, 국가가 또한 아직도 그 속적(屬籍)을 끓어 버리지 않고 있는만큼, 그 시나 글씨 또한 응당 존경하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거기에 어제의 시가 그 머리에 실려 있는 경우이겠는가. 그러므로 이것을 보는 이들은 응당 이를 존경하여야 하고 업신여겨서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