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希亮(21世) 監司公

구전선생강원일록 (苟全先生講院日錄) 김중청 (金中淸)

감사공 2023. 3. 29. 13:00

구전선생강원일록 (苟全先生講院日錄) 김중청 (金中淸)

柳希亮(21世)柳自新의 5子

2019-05-21 14:54:52

柳希奮 柳希發 柳希亮 柳孝立 기사

 

구전선생강원일록 (苟全先生講院日錄) 김중청 (金中淸)

 

畿伯柳希亮來奠

 

정충신-북천일기-류희량

 

구전선생강원일록(苟全先生講院日錄)은 김중청(金中淸 ; 1567~1629)1615(광해군 7) 316일부터 1616(광해군 8) 1015일까지의 일기이다. 당시에 정언 벼슬에 있으면서 조정에서 있은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체제 및 내용은 월 일, 그날의 일진과 날씨를 간략하게 쓰고 그날에 조정에서 있은 일들을 기록하였다. 본인과 생각이 같지 않은 부분은 맨 끝에 가소(可笑)라고 기록하였고, 당시 정치 중심에 있었던 이이첨, 이원익, 정인홍 등등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과거를 시행하고 창경궁을 수선하는 일등과 일식 월식과 유성이 나타나는 일까지 자세하게 해서로 기록하였다. 여행 중에도 찾아온 사람, 숙박한 곳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두었다. 이 일기는 광해조 7~8년의 중앙 정계의 기록으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김중청의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구전(苟全)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첨지중추부사 몽호(夢虎)의 아들이며, 월천 조목의 문인으로 161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전적, 예조정랑을 역임했으며, 161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15년 정언이 되어 이원익을 논핵하라는 대북파 정인홍의 부탁을 거절하여 파면되었다. 1621년 승지로서 선유사가 되어 호남을 순행했다. 이후 산직(散職)에 머물면서 인조반정 후에도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三月)二十五日(辛丑)

 

[격자1]答玉堂曰已爲參酌定罪勿爲煩論朴榟再度呈辭司鑰請謁以製述二幅來示乃表二詩一也內官所作云與李司書瀷考之表一則二下一則三中詩則上之下仍以玩物喪志爲賦題寫其紙尾以送觀其所述雖失詞家體㨾而亦非人間手段故題以四字巳時晴玉堂處置遆李挺元餘皆出之朴榟三辭遆差正言柳汝恪輔德南以俊亦呈病有政吏判望朴弘耈朴承宗柳希奮韓孝純李爾瞻吳億㱓朴揵七人擬入是日以明朝進賀[격자1]大殿誕辰柳希發製進[격자1]東宮箋文承文院正書以來正字李培元陪到查準翊衛司李士脩奉印安寶後印封着署余乃爲之柱宇來覲而還日官所報未時日暈申時日上有冠色內赤外靑柳活歷見裴大維爲輔德金質幹爲執義南以俊爲司諫

 

(三月)二十六日(壬寅)

 

柳希亮柳孝立孫倜朴自興裴大維辛光業朴自凝李瀷及余九人陪從奉箋孫倜李瀷奉禮物柳孝立辛光業乘輿時引出及降輿等贊呼弼善例爲而今無弼善故余代爲之朴自凝已爲奉箋事而托稱傷足移付孫正郞其辭氣之間殊無可觀[격자1]世子還宮後僚属問安仍達[격자1]書筵久停未安之意[격자1]大殿及邸下賜送酒食邀朴守緖李慕共破夕司鑰來言[격자1]上小便

 

(五月)初三日(戊申)

 

大諫三呈已上見避有政柳夢寅爲大諫李挺爲司諫崔應虛爲掌令鄭遵爲持平柳活朴鼎吉爲吏佐李大燁爲吏正柳希發爲應敎許淮朴鼎吉黃廷幹四李相繼來見是朝尹聖任來見以柱宇同年拜

 

(五月)十八日(癸亥)

 

送諸李于南關王廟朴鼎吉兄弟豊陵守朴景行李汝瞻韓定國正國趙子百金擇之及柱宇皆會是日讀書堂揀擇朴鼎吉孫倜柳活柳希發柳希亮高用厚朴弘道鄭道任性之李偉卿金蓍國柳㵸正言李瀷避嫌之辭道非但䧟君之辭滿紙狼籍至於大阿倒持旣發還諱殊無諫官風采勿辭云云

 

(五月)二十二日(丁卯)

 

行忌祭有政朴榟爲執義柳希亮爲司諫奇允獻金江陵爲掌令辛光業鄭寅爲持平柳汝恒李邃爲正言吳汝穩爲獻納李埁爲副修撰權守之令公終日來叙夕往見黃公直已下歸暫見李瀷趙景觀亦至焉余付司果兼實祿春秋記事官

 

(七月)十八日(癸亥)

 

陰夜大雨都目政李尙伋爲豊倅金九鼎爲㫌善金奉祖爲監察柳孝立爲弼善余不得擬諸守令往見敬承

 

(十二月)二十九日(辛未)

 

往見盧得俊鄭行之投剌禮判稱病不見大燁文甫出接益燁文饒則入剌旣久還出洽余馳歸見鄭履之仍訪李仲仁不遇往朴弘道家見之韓定國亦往焉夕往訪孫執義李偉卿朴子挺朴鼎吉皆不遇歸路見馨甫定國又來其處聞賞格[격자1]命下朴自興柳希發希亮南撥丁好善好寬陞

 

양서선생문집 (瀼西先生文集) 이광윤 (李光胤)

 

典翰 柳希奮

 

양서선생문집은 이광윤(李光胤 ; 1564~1637)의 시문집이다. 이광윤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讓西)이다.

 

이 책은 1904년에 간행되었다. 권두에 양서선생헐마장잡영제목(口西先生歇馬莊雜詠題目)과 연보가 있다. 1~2는 시 243, 3은 시, 잡체(雜體) 44, 4는 시 집구(集句) 123, 5는 교서(敎書) 7, 표전(表箋) 8, 소차(疏箚) 5, () 3, 6은 상량문 2, 축문 2, 제문 17, 통문 2, 묘지 3, 행장 1, 부록인 묘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차운(次韻)이나 화운(和韻) 형식으로 지은 것이 많은데, 김수(金口이항복(李恒福) 등과 창수한 것이 많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장천사(張天使공천사(口天使) 등 중국 사신과 경회루(慶會樓벽제역(碧蹄驛파주관(坡州館태평루(太平樓) 등에서 화답한 시와 피란시(避亂詩)가 여러 편 있다. 이밖에 도연명(陶淵明)귀거래사(歸去來辭)나 소식(蘇軾)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글자를 이용하여 지은 시가 상당수 있다.

 

잡저는 연아체(演雅體무산일단운체(巫山一段雲體자고천제(口口天體악부체(樂府體직금체(織錦體오측체(五側體수미음체(首尾吟體장두체(藏頭體) 등으로 되어 있다. 집구는 일정한 시제(詩題)를 정하여 이백(李白두자미(杜子美백낙천(白樂天이구령(李九齡피일휴(皮日休정단몽(程端蒙진준경(陳俊卿) 500여명 시 가운데 운부(韻部)에 따라 한 구절씩 가졌다가 네 구절로 한 수의 절구(絶句)를 만들고, 원 저자의 이름을 밑에 표시한 것이다. 교서에는 세 번씩이나 좌의정을 사직한 이항복에게 내린 불윤비답(不允批答), 영중추부사로 관직을 그만둔 정탁(鄭琢)에게 내린 것 등이 있다. 소차에는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올린 상소, 이이첨(李爾瞻한찬남(韓纘男) 등의 죄상을 탄핵한 몇 편의 옥당차자(玉堂箚子)등이 있다. 통문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 있다.

 

저자의 특징적인 면모는 잡체와 집구 등에서 접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시인으로서의 저자의 해박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이광윤은 진사 잠()의 아들이다. 3세에 이미 글자를 배우고 8~9세에 문장을 지었으며 초서를 잘 썼다. 1585년에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2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교리·수찬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서천군수·부제학을 지냈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모당일기 (慕堂日記)

 

이월육일 ( 二月六日 )

 

謁先祠讀點坤卦柳粹甫來議鄕事去將夕往話希魯亭察訪叔亦來聞來相( 鄭仁弘 )

 

遆任(左相)

 

朴弘耉爲右鄭昌衍爲左奇自獻則首台奇鄭則雖目小北共受南人而朴全身南也吏判柳希芬亦小北而不南士者也暫有轉軸之勢無乃天不欲喪吾國邪文上舍景虎字君燮者奮知人也爲人愷悌不雜始學於來巖來巖晚節行事致書於其師云爾瞻國之憸小人而先生與之同議其書爲爾瞻犬鷹輩所獲時輩目之背師時調度使李稢來南

 

(五月)二十四日

 

朝以基人耕麥根種太午憩霽光亭淸道倅過駐移時話崔沂爲黃海監司有一告變語甚狂妄不實崔謂不可煩上聽杖下指命朝廷聞而上卷傘沂推鞠則云其人極爲狂悖不實推內指文昌柳希奮及兵判三父子領相舍弟及鄭右相漢陰弟三子同情云云開寧文官鄭獜瑞作䟽章其指與新安李昌文同瑞之猶子亦告鄭左相左相傳言監司亦爲被囚云云尙州黃鳳壽有冨産而不得於鄕里今春入居于京城下第纔旬亦被逆黨之訢今已傘去尙州人甚恐云云將夕還堂謁先祠

 

법성일기 (法城日記)

 

석실금문정공묘지 ( 石室金文正公墓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