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전선생강원일록 (苟全先生講院日錄) 김중청 (金中淸)
구전선생강원일록 (苟全先生講院日錄) 김중청 (金中淸)
柳希亮(21世)柳自新의 5子
2019-05-21 14:54:52
柳希奮 柳希發 柳希亮 柳孝立 기사
구전선생강원일록 (苟全先生講院日錄) 김중청 (金中淸)
畿伯柳希亮來奠
정충신-북천일기-류희량
『구전선생강원일록(苟全先生講院日錄)』은 김중청(金中淸 ; 1567~1629)의 1615년(광해군 7) 3월 16일부터 1616년(광해군 8) 10월 15일까지의 일기이다. 당시에 정언 벼슬에 있으면서 조정에서 있은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체제 및 내용은 월 일, 그날의 일진과 날씨를 간략하게 쓰고 그날에 조정에서 있은 일들을 기록하였다. 본인과 생각이 같지 않은 부분은 맨 끝에 가소(可笑)라고 기록하였고, 당시 정치 중심에 있었던 이이첨, 이원익, 정인홍 등등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과거를 시행하고 창경궁을 수선하는 일등과 일식 월식과 유성이 나타나는 일까지 자세하게 해서로 기록하였다. 여행 중에도 찾아온 사람, 숙박한 곳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두었다. 이 일기는 광해조 7~8년의 중앙 정계의 기록으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김중청의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구전(苟全)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첨지중추부사 몽호(夢虎)의 아들이며, 월천 조목의 문인으로 161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전적, 예조정랑을 역임했으며, 161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15년 정언이 되어 이원익을 논핵하라는 대북파 정인홍의 부탁을 거절하여 파면되었다. 1621년 승지로서 선유사가 되어 호남을 순행했다. 이후 산직(散職)에 머물면서 인조반정 후에도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三月)二十五日(辛丑)
雨。[격자1]答玉堂曰。已爲參酌定罪。勿爲煩論。朴榟再度呈辭。司鑰請謁。以製述二幅來示。乃表二詩一也。內官所作云。與李司書瀷考之。表一則二下一則三中。詩則上之下。仍以玩物喪志爲賦題寫其紙尾以送。觀其所述雖失詞家體㨾。而亦非人間手段。故題以四字。巳時晴。玉堂處置。遆李挺元。餘皆出之。朴榟三辭遆差。正言柳汝恪輔德南以俊亦呈病。有政。吏判望朴弘耈朴承宗柳希奮韓孝純李爾瞻吳億㱓朴揵七人擬入。是日以明朝進賀[격자1]大殿誕辰。柳希發製進[격자1]東宮箋文承文院正書以來。正字李培元陪到查準。翊衛司李士脩奉印安寶後印封着署。余乃爲之。柱宇來覲而還。日官所報。未時日暈。申時日上有冠色內赤外靑。柳活歷見。裴大維爲輔德。金質幹爲執義。南以俊爲司諫。
(三月)二十六日(壬寅)
晴。柳希亮柳孝立孫倜朴自興裴大維辛光業朴自凝李瀷及余九人陪從。奉箋孫倜李瀷奉禮物柳孝立辛光業。乘輿時引出及降輿等贊呼弼善例爲。而今無弼善。故余代爲之。朴自凝已爲奉箋事。而托稱傷足移付孫正郞。其辭氣之間殊無可觀。[격자1]世子還宮後僚属問安。仍達[격자1]書筵久停未安之意。[격자1]大殿及邸下賜送酒食。邀朴守緖李慕共破。夕司鑰來言。自[격자1]上小便
(五月)初三日(戊申)
晴。大諫三呈已上見避。有政。柳夢寅爲大諫。李挺爲司諫。崔應虛爲掌令。鄭遵爲持平。柳活朴鼎吉爲吏佐。李大燁爲吏正。柳希發爲應敎。許淮朴鼎吉黃廷幹四李相繼來見。是朝尹聖任來見。以柱宇同年拜
(五月)十八日(癸亥)
晴。送諸李于南關王廟。朴鼎吉兄弟豊陵守朴景行李汝瞻韓定國正國趙子百金擇之及柱宇皆會。是日讀書堂揀擇。朴鼎吉孫倜柳活柳希發柳希亮高用厚朴弘道鄭道任性之李偉卿金蓍國柳㵸。正言李瀷避嫌之辭道。非但䧟君之辭滿紙狼籍。至於大阿倒持。旣發還諱。殊無諫官風采。勿辭云云。
(五月)二十二日(丁卯)
晴。行忌祭。有政。朴榟爲執義。柳希亮爲司諫。奇允獻金江陵爲掌令。辛光業鄭寅爲持平。柳汝恒李邃爲正言。吳汝穩爲獻納。李埁爲副修撰。權守之令公終日來叙。夕往見黃公直已下歸。暫見李瀷。趙景觀亦至焉。余付司果兼實祿春秋記事官。
(七月)十八日(癸亥)
陰夜大雨。都目政。李尙伋爲豊倅。金九鼎爲㫌善。金奉祖爲監察。柳孝立爲弼善。余不得擬諸守令。往見敬承。
(十二月)二十九日(辛未)
晴。往見盧得俊鄭行之。投剌。禮判稱病不見。大燁文甫出接。益燁文饒則入剌。旣久還出。洽余馳歸。見鄭履之。仍訪李仲仁不遇。往朴弘道家見之。韓定國亦往焉。夕往訪孫執義李偉卿朴子挺朴鼎吉皆不遇。歸路見馨甫。定國又來其處。聞賞格[격자1]命下。朴自興柳希發希亮南撥丁好善好寬陞
양서선생문집 (瀼西先生文集) 이광윤 (李光胤)
典翰 柳希奮
『양서선생문집』은 이광윤(李光胤 ; 1564~1637)의 시문집이다. 이광윤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讓西)이다.
이 책은 1904년에 간행되었다. 권두에 「양서선생헐마장잡영제목(口西先生歇馬莊雜詠題目)」과 연보가 있다. 권1~2는 시 243수, 권3은 시, 잡체(雜體) 44수, 권4는 시 집구(集句) 123수, 권5는 교서(敎書) 7편, 표전(表箋) 8편, 소차(疏箚) 5편, 서(書) 3편, 권6은 상량문 2편, 축문 2편, 제문 17편, 통문 2편, 묘지 3편, 행장 1편, 부록인 묘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차운(次韻)이나 화운(和韻) 형식으로 지은 것이 많은데, 김수(金口)·이항복(李恒福) 등과 창수한 것이 많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장천사(張天使)·공천사(口天使) 등 중국 사신과 경회루(慶會樓)·벽제역(碧蹄驛)·파주관(坡州館)·태평루(太平樓) 등에서 화답한 시와 피란시(避亂詩)가 여러 편 있다. 이밖에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나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글자를 이용하여 지은 시가 상당수 있다.
잡저는 연아체(演雅體)·무산일단운체(巫山一段雲體)·자고천제(口口天體)·악부체(樂府體)·직금체(織錦體)·오측체(五側體)·수미음체(首尾吟體)·장두체(藏頭體) 등으로 되어 있다. 집구는 일정한 시제(詩題)를 정하여 이백(李白)·두자미(杜子美)·백낙천(白樂天)·이구령(李九齡)·피일휴(皮日休)·정단몽(程端蒙)·진준경(陳俊卿) 등 500여명 시 가운데 운부(韻部)에 따라 한 구절씩 가졌다가 네 구절로 한 수의 절구(絶句)를 만들고, 원 저자의 이름을 밑에 표시한 것이다. 교서에는 세 번씩이나 좌의정을 사직한 이항복에게 내린 불윤비답(不允批答), 영중추부사로 관직을 그만둔 정탁(鄭琢)에게 내린 것 등이 있다. 소차에는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올린 상소, 이이첨(李爾瞻)·한찬남(韓纘男) 등의 죄상을 탄핵한 몇 편의 「옥당차자(玉堂箚子)」 등이 있다. 통문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 있다.
저자의 특징적인 면모는 잡체와 집구 등에서 접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시인으로서의 저자의 해박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이광윤은 진사 잠(潛)의 아들이다. 3세에 이미 글자를 배우고 8~9세에 문장을 지었으며 초서를 잘 썼다. 1585년에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2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교리·수찬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서천군수·부제학을 지냈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모당일기 (慕堂日記)
이월육일 ( 二月六日 )
謁先祠。讀點坤卦。柳粹甫來議鄕事去。將夕往話希魯亭。察訪叔亦來。聞來相( 鄭仁弘 )
遆任。(左相)
朴弘耉爲右。鄭昌衍爲左。奇自獻則首台。奇鄭則雖目小北。共受南人。而朴全身南也。吏判柳希芬亦小北。而不南士者也。暫有轉軸之勢。無乃天不欲喪吾國邪。文上舍景虎。字君燮者。奮知人也。爲人愷悌不雜。始學於來巖。來巖晚節行事。致書於其師云。爾瞻。國之憸小人。而先生與之同議。其書爲爾瞻犬鷹輩所獲。時輩目之背師。時調度使李稢來南。
(五月)二十四日
朝以基人耕麥根種太。午憩霽光亭。淸道倅過駐移時話。崔沂爲黃海監司。有一告變。語甚狂妄不實崔謂不可煩。上聽杖。下指命。朝廷聞而上卷傘。沂推鞠。則云其人極爲狂悖不實。推內指文昌柳希奮及兵判三父子領相舍弟及鄭右相漢陰弟三子同情云云。開寧文官鄭獜瑞作䟽章。其指與新安李昌文同。瑞之猶子。亦告鄭左相。左相傳言。監司亦爲被囚云云。尙州黃鳳壽有冨産。而不得於鄕里。今春入居于京城下。第纔。旬亦被逆黨之訢。今已傘去。尙州人甚恐云云。將夕還堂。謁先祠。
법성일기 (法城日記)
석실금문정공묘지 ( 石室金文正公墓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