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希亮(21世) 監司公

보물을 늦게나마 발굴하게 되어 진정으로 부복하여 직계 선조님(류희량)께 대축하나이다.

감사공 2023. 3. 23. 12:25

보물을 늦게나마 발굴하게되어 진정으로 부복하여 직계 선조님(류희량)께 대축하나이다.

柳希亮(21)柳自新5

 

2016-05-12 23:28:42

 

이신흠의 조충도

 

이신흠

 

[간략정보]

 

한자 李信欽

 

분야 예술·체육/회화

 

유형 인물

 

시대 조선/조선 후기

 

성격 화가

 

성별 남

 

생년 1570(선조 3)

 

몰년 1631(인조 9)

 

본관 태안(泰安)

 

저서(작품) 사천장팔경도|초충도

 

대표관직(경력) 도화서 화원|부사직|첨추

 

집필자 홍선표

 

세년계회도 / 이신흠

 

 

[정의]

 

1570(선조 3)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화가.

 

[내용]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경립(敬立). 사과를 지낸 이희량(李希良)의 아들이다. 도화서화원(圖畫署畫員)으로 부사직과 첨추(僉樞)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훈호를 받았다.

 

이씨가보(李氏家譜)에 의하면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특히 초상을 잘 그려 붓을 들고 한번 그리면 거의 터럭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유작으로 사천장팔경도(斜川庄八景圖)초충도(草蟲圖)가 전하고 있다.

 

사천장팔경도는 일종의 계회도(契會圖)로서 조선 중기에 유행하던 절파화풍(浙派畫風)이 깃들어 있으며, 초충도에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화풍이 엿보인다.

 

[참고문헌]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

 

한국회화소사(韓國繪畵小史)(이동주, 서문당, 1972)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畵大觀)(유복렬 편, 문교원, 1969)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관련시청각]

 

이신흠(李信欽 : 1570~1631)

 

종손의 말에 의하면 묘소를 관리할 힘도 없었는데 문중에서 노력하여 겨우 묘소 인근에 토지가 약간 마련되어 신도비각과 영정각이 세워져 유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당당한 풍채와 늠름한 모습의 한음 영정은 백사 이항복의 영정을 그린 화가 이신흠(李信欽 : 1570~1631)의 솜씨로 그려져 오랜 전란의 와중에도 종손들의 노력으로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에는 모사본까지 많이 전해져 쉽게 접할 수 있다.

 

세년계회도 / 이신흠

 

유희량(柳公希亮)이 전서(篆書)로 〈사천장팔경도(斜川莊八景圖)〉

나이 75세에 보물을 늦게나마 발굴하게되어 진정으로 부복하여 직계 선조님(류희량 예조참판 1575~1628))께 대축하나이다.

 

이신흠의 사천장팔경 위부분 사천장팔경도 전서체 진적이라니 정말 고맙습니다.

 

선조님의 유품을 발굴하는데 커다란 용기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月沙(월사=이정구)집 제40권 원문

 

서 하(序下)

 

사천장팔경도시(斜川莊八景圖詩)서 팔경(八景)용수의 맑은 산 기운龍峀晴嵐’, 운봉의 흰 달雲峯皓月’, 사나사(舍那寺)에서의 신선 방문舍寺尋眞’, 침교의 권농砧橋勸耕’, 문암의 계곡門巖洞天’, 건지의 송백乾支松柏’, 군성의 새벽 고각郡城曉角’, 제탄의 저녁 돛단배蹄灘暮帆이다.

 

 

(月沙)의 조카 이자릉(李子陵)이 늘 사천(斜川)의 경치가 좋다고 내게 자랑하였으나 나는 이른바 사천이란 곳을 본 적이 없으며 팔경이라는 것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자릉이 소매 속에 하나의 시권(詩卷)을 가지고 와서 내게 시를 적어 달라고 했다. 그 시권의 전면에는

 

이신흠(李信欽)의 그림에 유희량(柳公希亮)이 전서(篆書)로 〈사천장팔경도(斜川莊八景圖)〉라 썼으며, 소암(疎庵) 임무숙(任茂叔)이 서문을 짓고 남창(南窓) 김여경(金餘慶)이 글씨를 썼다. 그 다음에는 도정절(陶靖節)사천십운시(斜川十韻詩)를 베껴 쓴 다음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노선생(老先生)이 그 시에 차운하고 소서(小序)까지 써 놓았다.

 

내가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 전장이란 것은 본 적이 없지만 이른바 팔경이란 것은 내가 이미 다 구경한 것이었다. 을사년(1605, 선조38) , 내가 경기 관찰사로서 영릉(英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여강(驪江)을 건너 벽사(甓寺)를 유람하고 지평(砥平)을 경유하여 용문사(龍門寺)에 투숙한 다음 내외령(內外嶺)을 넘어 사나암(舍那庵) 등의 절에 올라갔으며 다시 양근(楊根)을 거쳐 대탄(大灘)에 배를 띄우고 강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왔다. 이리하여 무릇 산중에 머무는 사흘 동안 거의 모든 곳을 샅샅이 유람하였는데 천암만학(千巖萬壑)의 온갖 경치들을 일일이 구경할 겨를조차 없었다. 어찌 일일이 그 이름들을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산기운이란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고 단지 희뿌옇고 푸르스름한 공기가 산에 서려 있던 것만 기억할 뿐이며, 달이란 것이 당시에 어떠한 형상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고 단지 밝고 은은한 빛이 산봉우리에 어려 있었던 것만 기억할 뿐이며, 신선을 방문했다는 것은 무슨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고 단지 석탑(石塔)에서 전조(前朝)의 고적을 찾고 선감(禪龕)에서 나옹(懶翁)의 의발(衣鉢)을 구경했을 뿐이다.

 

산사를 나왔을 때 취한 몸을 남여(藍輿)에 실은 채 한 석동(石洞)을 지나 세 개의 큰 시내를 건너니 바위가 두 손을 모은 듯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 마치 석문(石門)과도 같고 물이 감돌아 흐르는 것이 마치 띠와 같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문암(門巖)이며, 이른바 사천(斜川)이다. 산 아래 몇 곳의 마을이 멀리 보이고 뽕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자릉이 말한 전장인가. 시내 저편에 불쑥 솟은 멧부리에 소나무와 회()나무가 울창하였으니, 이것이 건지(乾支)인가. 다리 아래 큰 들판에는 농군들이 논밭에 가득하였으니, 이것이 침교(砧橋)인가. 군재(郡齋)에서 잠 깨었을 때 성의 고각(鼓角) 소리가 새벽에 울려 퍼지고 시야에 가득 보이는 안개 낀 물결에 돛단배가 떼 지어 떠 있었으니, 군성(郡城)의 고각과 제탄(蹄灘)의 돛단배가 바로 이것인가 아닌가. 그림을 펼쳐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니 마치 예전에 다니던 곳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으니, 종소문(宗少文)의 와유(臥遊)보다 훨씬 낫다 하겠다.

 

이렇고 보면 사천의 팔경을 내가 자릉보다 먼저 구경한 것이다. 그림도 직접 구경한 것보다 못하거늘 하물며 문자로 형용한 것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팔경을 시로 읊지 않고 도 정절(陶靖節)의 십운시(十韻詩)에 차운하니, 이는 고인(古人)의 심회에서 느낀 바를 읊은 것이다.

 

處世若浮漚 세상에 사는 것 덧없는 물거품

 

勞生迄可休 고단한 인생살이 마침내 쉬어야지

 

所以古之人 그런 까닭에 옛날 사람은

 

卒歲聊優游 평생토록 유유자적 살았느니

 

睠彼林中臯 저 숲 속의 물가를 보니

 

薆薆臨長流 긴 강물이 눈앞에 아련하여라

 

策杖弄春物 지팡이 짚고서 봄 경치 구경하니

 

搖曳沙中鷗 한가히 노니는 백사장의 갈매기

 

幽居愜仙賞 선경(仙境) 같은 이곳 내 맘에 드는데

 

何用登蓬丘 무엇하러 애써 봉래산을 오를건가

 

緬懷千載遊 고인의 유람을 아득히 회상하니

 

淵明眞我儔 도연명이 참으로 나의 무리로세

 

有友適相隨 벗이 있으면 서로 어울려 놀고

 

有酒仍相酬 술이 있으면 서로 주고받는다

 

酣來悄無言 취하면 쓸쓸한 모습 말이 없으니

 

誰會此心不 이 마음을 알아줄 이는 누구런고

 

淸風自遠來 맑은 바람이 먼 곳에서 불어와서

 

曠然舒我憂 이내 시름을 후련히 풀어 주누나

 

爲問征途人 묻노라 저 길 가는 사람이여

 

穰穰何所求 분주히 다니며 무엇을 찾는고

 

斜川莊八景圖詩序

 

龍岫晴嵐雲峯皓月舍寺尋眞砧橋勸耕門巖洞天乾支松柏郡城曉角蹄灘暮帆

 

吾姪李子陵常詑我以斜川之勝余未嘗覩所謂斜川者其所云八景余未知其如何一日子陵袖一卷求余題詩前面李信欽畫柳公希亮篆斜川莊八景圖疏庵任茂叔序南窓金餘慶書次寫陶靖節斜川十韻詩五峯老先生步其韻兼有小序余始諦觀其畫莊雖未曾覩而所謂八景則皆余所曾領略者在乙巳春余按畿節當其拜英陵還也跨驪江遊甓寺遂自砥平投宿龍門寺踰內外嶺陟舍那諸庵歷楊根泛大灘順流070_152d而下留山中凡三日遊覽殆遍千巖萬壑使人應接不暇惡可一二數而名之嵐者吾不知爲何物而但記其霏微空翠月者吾不知其何狀而但記其晃朗隱映於峯嶽之間尋眞者吾不知其何事而但記其石塔訪前朝古跡禪龕閱懶翁衣鉢而已出山時藍輿扶醉過一石洞涉三大溪石拱之若門水縈之如帶卽所謂門巖也卽所謂斜川也山下數村遠遠桑柘依依此是子陵之所謂莊耶溪外有岡松檜鬱蒼此是乾支耶橋下大野農人滿隴此是砧橋耶郡齋睡起城角曉發滿眼煙波風帆如簇郡之角灘之帆此也非耶披圖而指點070_153a然如逢舊識宗少文之臥遊不啻過也是則斜川八景吾已得於子陵之先畫旣不如親見況可以文字形容之乎故余不賦八景而但次靖節公十韻詩蓋有以寄曠世之感也詩曰

 

處世若浮漚勞生迄可休所以古之人卒歲聊優游眷彼林中皐薆薆臨長流策杖弄春物搖曳沙中鷗幽居愜仙賞何用登篷丘緬懷千載遊淵明眞我儔有友適相隨有酒仍相酬酣來悄無言誰會此心不淸風自遠來曠然舒我憂爲問征途人穰穰何所求

 

 

[D-001]도 정절(陶靖節)의 사천십운시(斜川十韻詩) : 도연명(陶淵明)이 사천(斜川)이란 곳을 유람하고 읊은 유사천(遊斜川)이란 시와 짧은 자서(自序)가 있다.

 

[D-002]종소문(宗少文)의 와유(臥遊) : 남조(南朝) ()나라 종병(宗炳)의 자가 소문(少文)이다. 그는 명산대천을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늙어서 병이 들자 자기가 유람하였던 산수를 벽에 그림으로 그려 두고 누워서 구경하였다 한다. 宋書 卷93 宗炳列傳

 

 

사천에 세상 일 모두 잊고 부르는 귀거래사 맴돌다

 

용문산 서쪽, 별천지 같은 팔경

 

유희량(柳公希亮)이 전서(篆書)로 〈사천장팔경도(斜川莊八景圖)〉

사나사

 

이경엄 집안 이씨의 선영 근처에 위치한 '사나사'풍경

 

구곡은 대개 개인들의 취향에 따라 설정되는 반면 팔경은 그 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설정되기도 한다. 가령 지난 호에 다뤘던 여주팔경과 같은 읍치팔경이 그것이다.

 

그러나 팔경이라고 해서 모두 그처럼 넓은 지역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사대부들의 개인 소장인 별서(別墅)에 대한 팔경이 흔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팔경은 집 주인 스스로 짓는 경우도 있지만 주변 지인들에게 부탁해 자신이 머물고 있는 별서의 아름다움을 노래해 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한 별서팔경 중 경기도 양평 옥천면 일대에 설정됐던 사천장팔경(斜川庄八景)이 있다. 사천장은 조선중기 대제학에 올랐던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오봉 이호민(1553~1634), 현기 이경엄(1579~1652) 부자의 별서이다.

 

그 장소는 현재의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일대이며 그들이 그곳에 별서를 지은 것은 광해군 4년인 16122월에 일어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때문이었다.

 

이때 김직재는 이호민의 형, 이사민의 사위였으니 이호민에게는 조카사위였으며, 더구나 무옥을 일으킨 당사자인 황해도 봉산 군수였던 신율(申慄)은 그 자신의 사위였다. 이로 인하여 이호민은 무옥의 피해자이자 가담자가 되는 일을 겪으며 관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로부터 연안 이씨의 선영인 마유산 근처에 별서를 경영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는 대략 1617년을 전후한 때였다. 당시 문장가들인 상촌 신흠(1556~1628), 택당 이식, 계곡 장유(1587~1638)와 같은 사람들도 대개 벼슬에서 물러나 신흠은 김포에 감지당(坎止當)을 이식은 양평에 택풍당 마지막으로 장유는 안산에 해장정사( 海莊精舍)와 같은 별서를 지었으니 나름 유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호민의 아들인 이경엄은 선영 근처에 사천장을 지었던 것이다.

 

이윤호 작 우후오월(雨後五月)’. <작가 소장>

 

그러고는 곧 이어 팔경을 노래하지 않고 화원을 초대했다. 앞에 말한 이식의 경우 동계팔경을 설정하여 노래 한 후에 화원인 이신흠(1570~1631)으로 하여금 <동계팔경도>를 그리게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경엄은 그 반대였다. 그 또한 이신흠을 불렀지만 그는 아직 사천장에 대한 팔경시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팔경도를 그리게 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림이 완성되자 그는 글씨로 소문난 제교 유희량(1575~1628)에게 전서체로 사천장팔경도를 써 주기를 부탁했다.

 

1617, 이경엄은 이렇게 만들어진 팔경도를 들고 내로라하는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팔경시를 구했다. 이는 짬을 낼 수 없어서 사천팔경을 직접 와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팔경시를 쓰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을 없앨 수 있었다.

 

이경엄은 미리 팔경시를 부탁할 사람들을 지정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자신의 별서를 노래하면 그만큼 자기 소유의 별서가 문화적 위상이 높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부친인 이호민과 관계가 있는 당대의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펼쳐 놓고 시를 구한 것이다.

 

이는 대단히 현명한 것으로 사천장과 가까운 여강에 살던 소암 임숙영(1576~1623)은 그 그림을 보고 <제사천장팔경도(題斜川庄八景圖)>라는 화제시를 지었는가 하면 만퇴헌 김중청(1567~1629)<사천장팔영(斜川莊八詠)>을 지었다. 물론 그들은 사천장에 다녀 간 것이 아니라 이경엄이 지니고 온 그림을 보고 지은 것이다.

 

그것은 집안 아저씨인 월사 이정귀(1564~1635)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정귀는 앞에 말한 상촌 신흠 · 계곡 장유 · 택당 이식과 함께 월상계택으로 불리던 당대의 문장가이다. 그 또한 그림을 봤다. 그러나 그는 이경엄이 팔경도를 그리려 팔경을 비정하기 전에 미리 사천장 일대의 골짜기를 두루 다니며 팔경을 봤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천장팔경도시서(斜川莊八景圖詩序)>를 지었다.

 

청정산수.

 

김동철 작 청정산수(양수리)

 

이정귀가 그림을 보고 말하는 팔경은 용수의 맑은 산 기운(龍峀晴嵐운봉의 흰 달(雲峯皓月사나사(舍那寺)에서의 신선 방문(舍寺尋眞침교의 권농(砧橋勸耕문암의 계곡(門巖洞天건지의 송백(乾支松柏군성의 새벽 고각(郡城曉角제탄의 저녁 돛단배(蹄灘暮帆)이다.

 

이는 지봉 이수광(1563~1628)이 노래한 사천장팔영(斜川莊八詠)과 조금 다르다. 이수광은 문암동천·건지송백의 순으로 잡았으며, 운봉의 흰 달을 빼고 대신 용수청람(龍岫晴嵐), 용문산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넣어서 팔영을 완성했다. 이처럼 서로 조금씩 다를 수 있는 팔영은 선정은 물론 이정귀는 앞에 말한 시에서 팔경도에 대한 내용을 소상히 밝혀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나의 조카 이자릉(李子陵)이 늘 사천(斜川)의 경치가 좋다고 내게 자랑하였으나 나는 이른바 사천이란 곳을 본 적이 없으며 팔경이라는 것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자릉이 소매 속에 하나의 시권(詩卷)을 가지고 와서 내게 시를 적어 달라고 했다. 내가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 전장 ()이란 것은 본 적이 없지만 이른바 팔경이란 것은 내가 이미 다 구경한 것이었다.

 

을사년(1605, 선조38) , 내가 경기 관찰사로서 영릉(英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여강(驪江)을 건너 벽사(甓寺)를 유람하고 지평(砥平)을 경유해 용문사에 투숙한 다음 내외령(內外嶺)을 넘어 사나암(舍那庵) 등의 절에 올라갔으며 다시 양근(楊根)을 거쳐 대탄(大灘)에 배를 띄우고 강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왔다. 이리하여 무릇 산중에 머무는 사흘 동안 거의 모든 곳을 샅샅이 유람하였는데 천암만학(千巖萬壑)의 온갖 경치들을 일일이 구경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조카가 비정한 팔경을 자신이 진작 구경한 곳이라고 하며 도연명(陶淵明)이 사천(斜川)을 돌아보고 지은 <사천십운시(斜川十韻詩)>에 빗대어 스스로도 십운시를 지어 주었다. 그러나 이경엄은 사천장의 경영을 시작 할 무렵 도연명의 사천에 대한 시를 알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사천팔경도>가 들어 있는 시첩인 사천시첩첫머리에 보이는 이경엄의 글이 그것을 말해 준다.

 

만력 무오년(1618) 가을에 내가 사천에 있었는데 우연히 도연명집을 보다가 이 시 <사천에서 노닐다(遊斜川)>가 있음을 발견하고는 고금에 일치함을 기뻐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 떠 스스로 귀거래해 은거하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부친 이호민 또한 본디 마을이 사나였음을 말하고 후에 도연명의 사천을 따라서 사천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들의 선영이 있는 곳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사나사(舍那寺)가 지척이다. 그리하여 불교적 이름으로 지어진 사나마을을 그들이 고쳐 사천을 취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천팔경도>는 현재 삼성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 전시에는 나오지 못했다.

 

- 이지누 (‘경기 팔경과 구곡: ··사람전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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