奇俊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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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奇俊格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성격 문신
•성별 남
•생년 1594년(선조 27)
•몰년 1624년(인조 2)
•본관 행주(幸州)
•관련사건 이괄의 난
•대표관직(경력) 좌랑
•집필자 오수창
[정의]
1594(선조 27)∼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행주(幸州). 초명은 수격(秀格), 자는 붕만(鵬萬). 한성판윤 대항(大恒)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세(應世)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자헌(自獻)이며, 어머니는 종실 하원군 정(河原君鋥)의 딸이다. 유희분(柳希奮)과도 인척관계에 있었다.
[내용]
1615년(광해군 7)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듬해 알성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정언·병조좌랑·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이해에 허균(許筠)이 역모를 꾀한다고 상소하여 다음해에 그를 처형하게 하였으나, 고변을 늦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자신도 강릉에 유배당하였다. 1621년 사서에 서용되고, 병조좌랑으로 옮겼다. 북인에 속하지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에 찬성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남의 문장으로 응시하였다 하여 과거합격이 취소되었으며, 허균의 역모를 고발한 상소에 인목대비와 그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배척한 내용이 있다고 공격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내응하려 하였다는 혐의로 사형당하였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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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경이전항목다음항목[간략정보]
•한자 柳永慶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성격 상신
•성별 남
•생년 1550년
•몰년 1608년
•본관 전주(全州)
•관련사건 임진왜란|정유재란
•대표관직(경력) 정언|황해도순찰사|호조참의|대사헌|우의정
•집필자 이장희
[정의]
1550(명종 5)∼1608(광해군 즉위년). 조선 중기의 상신(相臣).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 헌(軒)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린(世麟)이고, 아버지는 참봉 의(儀)이며, 어머니는 노첨(盧僉)의 딸이다. 예조참판 영길(永吉)의 동생이다.
1572년(선조 5)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보였고, 1593년 황해도순찰사가 되어 해주에서 왜적을 맞아 60여급을 베는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행재소(行在所)에서 호조참의에 올랐다.
1594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가족을 먼저 피란시켰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병조참판에 서용되었다. 당론이 일어날 때에는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동인에 속했으며, 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이발(李潑)과 함께 북인에 가담하였다.
1599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이 같은 북인인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면서 대북·소북으로 갈리자, 유희분(柳希奮) 등과 함께 남이공의 당이 되어 영수가 되었다.
이 때 대북파에 밀려 파직되었다가 1602년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그런데 대북파의 기자헌(奇自獻)·정인홍(鄭仁弘) 등과 심한 마찰을 빚었고 뒤이어 세자 문제로 더욱 분란을 일으켰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진 뒤 선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윤승훈(尹承勳)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1606년 선조 즉위 40주년 행사를 앞당겨 하례(賀禮)하고 증광시(增廣試)까지 실시해 즉위 때와 같이 경축하게 하는 등 왕의 총애를 굳히려 하였다. 오랫동안 집권해 권력이 증대되고 그에게 뇌물 공여도 횡행하였다.
그 뒤 같은 소북파인 남이공과 불화해 탁소북(濁小北)으로 분파했으며, 선조 말년에 왕의 뜻을 따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광해군에 대신해 옹립하려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기 전에 영창대군을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이이첨(李爾瞻)·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유생의 명단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