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得恭(28世)

영재 류득공(柳得恭)柳得恭(28世) 柳希聃의 後孫

감사공 2023. 3. 6. 13:35

영재 류득공(柳得恭)

柳得恭(28) 柳希聃後孫

 

2013-09-14 13:18:09

 

 

 

[정의]

1748(영조 24)?. 조선 후기의 실학자.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영암(泠庵고운당(古芸堂). 아버지는 춘()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74(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컸다. 그 뒤 제천·포천·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경도잡지 京都雜志·영재집 泠齋集·고운당필기 古芸堂筆記·앙엽기 盎葉記·사군지 四郡志·발해고 渤海考·이십일도회고시 二十一都懷古詩등이 있다.

특히 경도잡지는 조선시대 시민 생활과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서적이며, 발해고는 그의 학문의 깊이와 사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저서이다. 규장각검서로 있으면서 궁중에 비장된 우리 나라를 비롯한 중국·일본의 사료까지도 읽을 기회가 많았으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나온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오늘날의 학문 수준으로 보아 높이 평가할 수는 없으나, 서문에서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하였다.”고 주장해 민족주체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주체의식의 확립에 노력한 모습은 이십일도회고시에서도 잘 보여준다.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4,000년에 걸쳐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의 21개 도읍지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에는 거듭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민족의 주체 의식을 되새겨보려는 역사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시는 청나라의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均)으로부터 재기종횡(才氣縱橫 : 재주와 기백이 활발함), 재정부유(才情富有 : 재주가 많음)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참고문헌]

사마방목(司馬榜目)

발해고(渤海考)

한국사의 재발견(천관우, 일조각, 1974)

古鮮冊譜(前間恭作, 東洋文庫, 1946)

영재류득공(?齋柳得恭)(이용범, 이을호박사정년기념실학논총, 전남대학교호남문화연구소, 1975)

 

[관련시청각]

류득공(1749-?)

 

영재 류득공(柳得恭) 작품

柳得恭詩

柳得恭(28) 柳希聃後孫

 

2013-11-27 17:59:59

 

柳得恭詩

 

한국(韓國) 조선(朝鮮)

 

가로:27cm / 세로:16.4cm

 

유득공의 시 <근묵(槿墨)>34책으로 이루어진 첩장본(帖裝本)으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이 우리나라 선현들의 묵적 가운데 서간류의 소품을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작가는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조선초기의 정도전(鄭道傳), 강회백(姜淮伯), 대한 제국기의 이도영(李道榮)에 이르기까지 약 1136명에 달한다. 연대는 대략 600여 년에 걸쳐 있다. 작가의 신분별로 보면 임금에서 사대부에 이르며, 직업별로 보면 관료, 학자, 승려 등이 총 망라되어 있다. 또한 서체별로 보면 행서가 595, 초서가 468점으로 행초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서는 57, 전예는 16점으로 전예해행초의 구색을 모두 갖추었다. 문장의 내용면은 서간이 720, 시고가 353, 제발 및 기타 잡문이 62점으로 내용면에서도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근묵에는 600년 간에 걸친 우리 선현들의 생활사를 볼수 있기에 옛 사람의 사생활의 실태는 이러한 서간첩(書簡帖)이 아니고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중요한 사회사의 자료가 된다. 서법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운필하여 바쁜 가운데 비필난초(飛筆亂草)로 휘두른 것으로 그 필치는 유려하고 창달하여 보는 사람들의 심목을 흔결(欣決)케 하는 감동을 지니고 있다. 아무런 제약과 의도적인 작태가 없는 서간의 서품은 그것이 글씨의 본바탕이며 작가의 개성을 그대로 살린 작품으로 근묵은 600년의 살아 있는 서예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서간형식의 변천과 서압(署押)의 양상을 연구할 수 있어, 역사, 민속, 사회사, 서법연구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유득공(柳得恭) (영조241748 ?)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풍(惠風), 호는 냉재(冷齋)이다. 정조3년에 진사가 되어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등과 함께 규장각검서가 되어 사검서라 일컬어졌다. 군수 풍천부사 역임.

 

 

 

洛瑞館中 奉別趙處士 歸杜谷山中 客出驪駒響 悽悽下衣 故園億書帶 孤館長垣衣 直養應難戰勝方覺肥 驪江明日路 幾樹柳花飛 儒城 柳得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