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공 2023. 3. 6. 12:54

1568(선조 1)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인초(軔草). 수천(壽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잠()이고, 아버지는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자신(自新)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해 1605(선조 38) 세자익위사사어로 세자를 보필하고, 이듬 해 재령군수로 부임하였다. 군수로 재직 중이던 1609(광해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광해군의 처남인데다 당시 조카 효립(孝立 : 希鏗의 아들)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해 논란이 일었다.

1610(광해군 2) 안산군수로 옮겼다가 정언·문학·지평 등을 역임한 뒤 이듬 해 홍문관부교리·사헌부헌납·예조정랑·사헌부지평을 거쳐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조정랑 의망(擬望 : 3인의 후보자를 왕에게 추천함)4품의 위치였기에 낭천(郎薦 : 전랑의 추천)이 막혔으나 외척세력에 영합한 정량 이후(李厚)의 적극 천거로 제수되었고, 유씨 자제들이 차례로 전당에 의망되어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1612(광해 4) 직강 때 권필(權韠)의 시 내용을 문제삼은 무고로 유배케 하였다. 1615(광해 7)에는 광해군 생모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追崇)하기 위해 설치한 존숭도감(尊崇都監)의 낭청으로 일하였다.

그 뒤 전한·응교·직제학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이조참의 때 이이첨(李爾瞻) 등이 적극 발의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가담하였다.

그 뒤 동지의금부사 때 이이첨 등과 함께 허균(許筠)의 심복들이 남대문에 격문을 붙여 역모를 도모했다는 이유로 정적 허균(許筠)을 능지처참케하였다. 그 뒤 사포서제조, 겸동지경연을 역임하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의 형 희분(希奮)과 함께 주살(誅殺)되었으며, 자손들은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와 형 희분 모두 광해군 폐비 류씨의 형제로서 형은 소북인데 반해 그는 대북이어서 서로 사이가 나빴다. 그러나 임해군(臨海君영창군(永昌君진릉군(晉陵君능창군(綾昌君)의 화가 모두 이들의 모의 때문이었다 한다.

형이 그의 눈먼 아들의 혼사를 구했으나 모두 허락지 않았는데, 한사덕(韓師德)이 권세가인 형과의 결탁을 위해 형의 집안에 딸을 보냈다가 인조반정 후 탄핵되었다.

충렬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