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希亮에 대하여(4)
柳希亮(1575~1628)의 生涯
나의 이야기(行跡)
2019-07-07 19:26:29
柳希亮(1575~1628)의 生涯
◎ 派祖(11世)에서 曾祖父(18世)까지의 系譜
中門祗候使公派(仁修*11世)⟹密直使監察 代言(靖*12世)⟹開城尹公(洪*13世)
⟹中郎將(仲宜*14世)宗中⟹兵馬都節制使(紹老*15世)⟹司憲府監察(承祖*16世)
⟹軍器寺僉正(悌根*17世)⟹敦寧府正(壽千*18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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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父(19世)는 暗行御史, 嘉靖譜 收單 時 淸洪道觀察使, 漢城判尹, 刑曹, 工曹判書를 두루 歷任한 文寧府院君 柳潛(1509~1576)이시고, 父親(20世)은 光海王의 國舅로 漢城判尹, 開城留守, 輔國領敦寧府使, 壬辰倭亂 直後 衛聖正功臣 1등에 등재된 文陽府院君 柳自新(1541~1612)과 母親은 左議政을 歷任한 林塘 鄭惟吉의 女(本名:鄭楊貞)朝鮮中期의 女流詩人의 한분인 逢原府夫人 東萊鄭氏(1541~1620)의 六男四女 中 ❺子로 妹弟인 朝鮮王朝 第15代 光海王(1575~1641=在位기간 15年)와 동갑(光海왕의 妃 柳氏는 1576~1623) 즉 宣祖 乙亥 4月3日에 京에서 태어나셨다.
女流詩人 逢原府夫人 東萊鄭氏(鄭楊貞) 作 二首
1.《출왕서빙고강사(出往西氷庫江舍)》
來訪沙鷗約 江皐木葉飛 園收芋栗富 網擧蟹鮮肥
내방사구약 강고목엽비 원수우율부 망거해선비
갈매기와 약속하고 찾아와 보니/강 언덕엔 나뭇잎 날리네
동산에서는 토란과 밤을 가득 거두고/그물을 건지니 살찐 게가 신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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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褰箔看山翠 開樽對月輝 夜凉淸不寐 松露滴羅衣
건박간산취 개준대월휘 야량청불매 송로적라의
발을 걷고 푸른 산 바라보며/술동이 열고 달빛을 대하니
밤은 서늘하고 맑아 잠 못 이루는데/소나무 이슬이 비단옷 적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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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弟姉妹 六男四女는 ➊進士公 文陵君 柳希鏗(1561~1583) ➋判決事 文原君 柳希聃(1563~1614) ➌兵曹判書 文昌府院君 柳希奮(1564~1623) ➍副提學 柳希發(1569~1623) ➏僉正公 柳希安(1581~1638) ➐女* 左尹, 漢昌君 趙國弼 ➑女* 郡守 李德一 ➒女* 光海主 妃 ➓女* 縣監 金時輔이다.
配位는 貞夫人 綾城 具氏(父 具思誠)와 혼인, 선조(宣祖) 36年(1603年) 癸卯 年 生員試을 거쳐 1608年(戊申-光海 卽位年)에 別試乙科 2위로 及第하였다. 1605年(乙巳-宣祖38) 7月24日 成均館 儒生 時에 정호성,허실, 최성원 등과도 열읍의 향교와 모든 서원에 鄭仁弘이 지은 발남명집설을 비방하는 서찰을 보내게 되었고, 1606年(丁亥-宣祖39) 1月18日 柳希亮은 31歲에 왕에게 오현의 문묘를 건의하였었고, 1月19日 재차 上疏하였다. 1608年(戊申-光海 즉위년) 33歲에 別試 乙科 2위로 及第하였고 1609年(己酉-光1)2月4日 34歲에 藝文館 檢閱로 除授 받고 史官(4月4日)으로 시사청에 입시하고, 設書(7月3日)로 除授 받고, 正言(9月6日)으로 除授 받고, 吏曹佐郞(9月11日)으로 除授 받았으며, 1610年(庚戌-光海 2) 2月8日 35歲에 典籍으로 除授 받고, 持平(8月18日)으로 除授 받는 동시, 文學(8月18日)으로 除授 받았으며, 1611년(辛亥-光海 3) 5月21日 36歲에 校理로 除授 받고, 副修撰(8月26日)으로 除授 받았다. 1612年(壬子-光海 4) 2月7日 父親인 文陽府院君 柳自新이 72歲로 卒하시어 지금의 시흥시 능곡동에 장사지내셨다. 1614年(甲寅-光海 6) 6月20日 39歲에 議政府舍人으로 除授 받고, 成均館 直講 신분으로 郎廳에서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에서 직무하게 되었고, 弘文館 典翰 都廳 稱號 檢擧, 4째 兄인 柳希發을 吏曹正郞으로 3째 兄인 柳希奮은 三昌의 한분으로 文昌府院君으로, 長姪인 柳孝立(希鏗의 長男)은 兵曹正郞으로 柳希亮은 다시 같은 해 10月4日에 直提學으로 除授 받고, 둘째 姪 柳忠立은 文學으로 제수 받았으며, 2째 兄인 柳希聃이 卒하였다. 1615年(乙卯-光海 7) 1月20日 40歲에 司僕正으로 除授 받았으며, 1616年 아들 柳斗立(1601~1628)이 만 14歲 어린 나이에 進士試에 합격되었고, 교유하던 禮曹判書 任就正이 아들 임흥후(任興後)가 1616년 8月12日 文科에 及第하자 任就正이 만들어 준 성문(成文)에 柳希亮,許筠,鄭廣成,柳忠立,裵大維 등 13人이 각각 官職과 姓名을 自筆하고 手決한 古文書가 現在까지 외부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4~5年 前 古文獻으로 競賣物로 나왔던 것을 確認하였다. 같은 해 柳希亮은 5月7日 讀書堂 관원에 선발되어 4째 兄 柳希發과 함께 湖當에 들게 되었고. 濟用監 正(5月20日)으로 上疏하였고. 執義(6月8日)로 除授 받고, 都廳에 弘文館 直提學 신분으로 火器都監 편찬 조직에 참여하여 加資되었다. 아들 柳斗立의 子 柳廣善(母=淑人 朔寧 崔氏)이 10月13日 태어났으며.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의 都廳에 司僕侍正으로 관원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의 都廳에 通訓大夫 司僕侍正 知製敎 兼 世子 侍講院 輔德으로 除授, 孫子 柳廣善 태어나던 해에 둘째 長姪인 柳忠立(1582~1620)과 月沙 李廷龜가 중국으로 주청사로 갈 때 시조 한 首씩 지은 眞迹이 成均館大 博物館에 소장되어 남아있다. 長姪인 柳孝立은 郎廳에서 兵曹正郞 신분으로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에 근무 外三寸인 右議政 鄭昌衍(逢原府夫人 東萊鄭氏의 弟)은 3人의 都提調 관원으로 같이 근무하였다. 41歲에 禮曹參議(1月14日)로 姨從인 金尙容이 知敦寧으로 4째兄인 柳希發을 吏曹參議으로 계속하여 同副承旨(1月23日)로 작은 아버지 柳德新은 延安府使로, 계속하여 右副承旨(4月13日)로 長姪인 柳孝立이 副修撰으로 제수 받았고, 계속하여 刑曹參議(4月20日), 承政院 右副承旨(5月6日), 左副承旨(5月11日)로 除授되었으며 許筠을 刑曹判書로 任就正을 左承旨로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당시 이들이 手決하였던 筆迹이 현재 남아있다. 1617年(丁巳=光海 9) 3月26日 42歲에 副提學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1617年(丁巳=光海 9) 京畿道觀察使(6月11日)가 되었고, 비변사 兵馬節度右道防禦使를 겸직하였다. 文陽府院君 死後 5年 만에 柳根이 撰하고, 吳靖이 書하고 金尙容이 篆한 神道碑가 건립되었기 본인은 지난 2007년 神道碑 양,음면을 탁본 표구하여 각각 오동나무 궤에 실크 보자기에 포장 서울대학교 한국학 연구원에 연구 보전토록 하였다. 柳希亮 自身은 진원부원군 柳根의 伯兄 柳格 神道碑(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몽촌리 소재)의 篆額을 썼다. 같은 해 작은 아버지 都正公 柳德新이 卒하셨고, 1619年(己未=光海11)8月18日 44歲에 禮曹參判으로 除授되었고, 1620年(庚申=光海12)11月25日 母親 蓬原府夫人東萊鄭氏가 80歲에 卒하셨다.1621年(辛酉=光海13) 아들 柳斗立이 20歲에 別試 丙科 4위로 합격하였다.
柳希亮은 당대에 글을 잘 쓰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김대덕의 名公眞蹟에 등재 되어있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삼존리(三尊里)라는 地名은 光海君 時代 兵曹判書,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류희분(柳希奮 1564生), 副提學 류희발(柳希發 1569生), 禮曹參判,京畿觀察使 류희량(柳希亮 1575生) 三兄弟를 존경할만한 인물이라 하여 붙여진 地名이라 한다.
1623年(癸亥=光海15) 3月14日 仁祖反正이 일어나게 되므로 셋째 兄 柳希奮과 넷째 兄 柳希發은 誅殺 되었으며 막내 동생 柳希安은 절도에 위리안치토록 하여 이로 인하여 柳希亮은 巨濟島로 流配되었다. 이 당시 孫인 柳廣善은 겨우 7歲였다. 光海主와 妃인 文城郡夫人과 世子와 世子嬪이 江華島에 流配된 후 光海主는 또다시 濟州道로 流配地가 옮겨졌고 世子와 世子嬪이 먼저 卒하게 되었고 妃인 文城郡夫人은 이 모든 것을 겪다가 火病으로 卒하셨다.
1628年(戊辰=仁祖 6) 柳希亮은 54歲에 長姪인 柳孝立이 주축이 되어 27歲된 외아들 柳斗立, 그리고 柳孝立의 子 柳宗善,柳養善 등이 역모사건을 도모하다가 허적의 고변으로 좌절 誅殺되었고, 柳希亮은 이에 連坐되어 巨濟島 流配地에서 絞殺 生을 마치셨다.
當時 孫子인 柳廣善은 하루아침에 父親 柳斗立과 祖父 柳希亮이 함께 타계할 시 겨우 12歲였었다.
도일[石谷]은 朝鮮時代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돌산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 하여 돌고을·돌골·골고지라고 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며, 망고개는 원래 낮은 고개였는데, 朝鮮 中期의 文臣 류자신(柳自新)의 아들인 류희량(柳希亮)의 묘를 쓸 때 이곳에 흙을 긁어모아야 左靑龍 右白虎가 완연하다 하여 고개를 높이고, 이때부터 막은 고개라고 하였다가 변하여 망고개가 되었다 한다.
許穆의 미수기언=記言別集에 柳希亮事 眉叟 許穆 卒(1595~1682=88歲)
柳希亮字龍卿。柳氏敗。連坐絞於巨濟。斯人者素稱良善。韓義禁與書爲訣曰。無相負云。余心善之。追聞之。亦可悲。臨刑。問金吾小吏曰。韓知事有書否。曰。有。出其書見之。歎曰。爲我謝之。當死刑。人情安得不亂。我平日。作室於南郊。因號曰祭郊。今我絞於巨濟。此先讖也。嘗名兒曰斗立。今兒二十七死。天之所定。又何恨。以此復之。遂就刑云。其不亂如此。平日之操。可知。戊申仲夏上旬。
柳希亮의 자는 용경(龍卿)이다. 류씨는 남의 죄에 연좌(連坐)되어서 거제도(巨濟島)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당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본래 선량한 사람이라고 남들이 말하여 왔다. 한 의금 부사(韓義禁府事)가 편지로 ‘서로 저버리지 말자.’고 영결(永訣)하였다기에 내가 속마음으로 착하게 여겼는데, 나중 들으니 심히 슬픈 일이었다. 형(刑)을 당할 때에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아전에게 묻기를,
“한 지사(韓知事 한 의금 부사를 말함)의 편지가 없더냐.”하니, 아전이 있다고 하고 그 편지를 내어 주자, 보고는 탄식하기를,
“나를 대신하여 답장해다오. 내가 사형을 당하는 마당에 어찌 정신이 어지럽지 않으리요마는, 내가 평일에 남교(南郊)에 집을 짓고 인하여 제교(祭郊)라 이름하였는데, 지금 내가 거제도에서 교수형을 당하게 되니 이것은 먼저 참언(讖言)이 된 셈이요, 아이의 이름을 두립(斗立)이라 하였는데, 지금 아이가 스물일곱 살에 죽게 되니 이것은 다 하늘이 정한 것이라 또 무엇을 한하리요. 이러한 뜻으로 답을 써 보내라.” 하고 드디어 형장(刑場)에 나섰다 한다. 그 정신이 어지럽지 않기가 이와 같으니 평일의 조행을 가히 알 수 있다. 무신년 5월 상순에 쓰다.
아이의 …… 되니 : 두립(斗立)의 두(斗)는 ‘이(二)’와 ‘십(十)’의 합자(合字)로 20을 말하고, 입(立)은 《논어(論語)》의 “30에 서고[三十而立]”에서 딴 것으로, 20과 30사이인 27세에 죽은 것이라고 보았다.
유배지 거제도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당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본래 선량한 사람이라고 남들이 말하여 왔다. 한 의금 부사(韓義禁府事)가 편지로 ‘서로 저버리지 말자.’고 영결(永訣)하였다기에 내가 속마음으로 착하게 여겼는데, 나중 들으니 심히 슬픈 일이었다. 형(刑)을 당할 때에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아전에게 묻기를, “한 지사(韓知事 한 의금 부사를 말함)의 편지가 없더냐.”하니, 아전이 있다고 하고 그 편지를 내어 주자, 보고는 탄식하기를,
柳希亮 製進=梧里先生文集附錄卷之三
峰陰 柳希亮의 필적으로 斜川莊八景圖 篆 作-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1647年(丁亥=仁祖25) 10月5日 柳廣善의 2子 應龜 태어나다.
1684年10月29日 孫 廣善 卒하다. 嘉善大夫禮曹參判 李沃(1641∼1698)이 柳廣善의 姨從弟이며 柳廣善의 墓碑銘을 썼고,閔昌道는 1694년(甲戌=肅宗20)大司成이 되었다.
1690年(庚午=肅宗16) 사가독서 하던 중 湖當試에 수석 하여 肅宗으로부터 상으로 표피를 받았던 1714年(甲午=肅宗40) 閔昌道가 梅墩(柳廣善)의 梅墩稿의 序文을 쓰다.
閔昌道는 곽산의 佛糧碑文과 영변의 普賢寺 月渚大師碑文을 撰하였다.
아쉬운 것은 柳希亮의 고문헌이 많이 남아있으나 본인에게 주어진 원고의 지면으로 다음 기회에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古文獻의 原本을 보시려는 분은 다음 포털싸이트에서 “류지세(文化人=柳志世)”을 검색하여 보시면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ryujise/?t__nil_login=myblog”
柳希亮(21世)의 26世 柳繼相 先祖가 長子(柳希鏗(21世)댁으로 養子로 들어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