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希亮(21世) 監司公

柳希亮에 대하여(4)

감사공 2023. 3. 5. 11:57

柳希亮(1575~1628)生涯

나의 이야기(行跡)

 

2019-07-07 19:26:29

 

柳希亮(1575~1628)生涯

 

派祖(11)에서 曾祖父(18)까지의 系譜

 

中門祗候使公派(仁修*11)密直使監察 代言(*12)開城尹公(*13)

 

中郎將(仲宜*14)宗中兵馬都節制使(紹老*15)司憲府監察(承祖*16)

 

軍器寺僉正(悌根*17)敦寧府正(壽千*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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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父(19)暗行御史, 嘉靖譜 收單 時 淸洪道觀察使, 漢城判尹, 刑曹, 工曹判書를 두루 歷任文寧府院君 柳潛(1509~1576)이시고, 父親(20)光海王國舅漢城判尹, 開城留守, 輔國領敦寧府使, 壬辰倭亂 直後 衛聖正功臣 1등에 등재된 文陽府院君 柳自新(1541~1612)母親左議政歷任林塘 鄭惟吉(本名:鄭楊貞)朝鮮中期女流詩人의 한분인 逢原府夫人 東萊鄭氏(1541~1620)六男四女 中 妹弟朝鮮王朝 第15代 光海王(1575~1641=在位기간 15)와 동갑(光海왕의 妃 柳氏1576~1623) 宣祖 乙亥 43에서 태어나셨다.

 

女流詩人 逢原府夫人 東萊鄭氏(鄭楊貞) 作 二首

 

1.출왕서빙고강사(出往西氷庫江舍)

 

來訪沙鷗約 江皐木葉飛 園收芋栗富 網擧蟹鮮肥

 

내방사구약 강고목엽비 원수우율부 망거해선비

 

갈매기와 약속하고 찾아와 보니/강 언덕엔 나뭇잎 날리네

 

동산에서는 토란과 밤을 가득 거두고/그물을 건지니 살찐 게가 신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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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褰箔看山翠 開樽對月輝 夜凉淸不寐 松露滴羅衣

 

건박간산취 개준대월휘 야량청불매 송로적라의

 

발을 걷고 푸른 산 바라보며/술동이 열고 달빛을 대하니

 

밤은 서늘하고 맑아 잠 못 이루는데/소나무 이슬이 비단옷 적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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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弟姉妹 六男四女進士公 文陵君 柳希鏗(1561~1583) 判決事 文原君 柳希聃(1563~1614) 兵曹判書 文昌府院君 柳希奮(1564~1623) 副提學 柳希發(1569~1623) 僉正公 柳希安(1581~1638) * 左尹, 漢昌君 趙國弼 * 郡守 李德一 * 光海主 妃 * 縣監 金時輔이다.

 

配位貞夫人 綾城 具氏(父 具思誠)와 혼인, 선조(宣祖) 36(1603) 癸卯 年 生員試을 거쳐 1608(戊申-光海 卽位年)別試乙科 2위로 及第하였다. 1605(乙巳-宣祖38) 724日 成均館 儒生 時에 정호성,허실, 최성원 등과도 열읍의 향교와 모든 서원에 鄭仁弘이 지은 발남명집설을 비방하는 서찰을 보내게 되었고, 1606(丁亥-宣祖39) 118日 柳希亮31에 왕에게 오현의 문묘를 건의하였었고, 119재차 上疏하였다. 1608(戊申-光海 즉위년) 33別試 乙科 2위로 及第하였고 1609(己酉-1)2434藝文館 檢閱除授 받고 史官(44)으로 시사청에 입시하고, 設書(73)除授 받고, 正言(96)으로 除授 받고, 吏曹佐郞(911)으로 除授 받았으며, 1610(庚戌-光海 2) 2835典籍으로 除授 받고, 持平(818)으로 除授 받는 동시, 文學(818)으로 除授 받았으며, 1611(辛亥-光海 3) 52136校理除授 받고, 副修撰(826)으로 除授 받았다. 1612(壬子-光海 4) 27日 父親文陽府院君 柳自新72하시어 지금의 시흥시 능곡동에 장사지내셨다. 1614(甲寅-光海 6) 62039議政府舍人으로 除授 받고, 成均館 直講 신분으로 郎廳에서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에서 직무하게 되었고, 弘文館 典翰 都廳 稱號 檢擧, 4柳希發吏曹正郞으로 3柳希奮三昌의 한분으로 文昌府院君으로, 長姪柳孝立(希鏗長男)兵曹正郞으로 柳希亮은 다시 같은 해 104直提學으로 除授 받고, 둘째 姪 柳忠立文學으로 제수 받았으며, 2柳希聃하였다. 1615(乙卯-光海 7) 12040司僕正으로 除授 받았으며, 1616아들 柳斗立(1601~1628)이 만 14어린 나이에 進士試에 합격되었고, 교유하던 禮曹判書 任就正이 아들 임흥후(任興後)1616812日 文科及第하자 任就正이 만들어 준 성문(成文)柳希亮,許筠,鄭廣成,柳忠立,裵大維 13이 각각 官職姓名自筆하고 手決古文書現在까지 외부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4~5年 前 古文獻으로 競賣物로 나왔던 것을 確認하였다. 같은 해 柳希亮57日 讀書堂 관원에 선발되어 4兄 柳希發과 함께 湖當에 들게 되었고. 濟用監 正(520)으로 上疏하였고. 執義(68)除授 받고, 都廳弘文館 直提學 신분으로 火器都監 편찬 조직에 참여하여 加資되었다. 아들 柳斗立子 柳廣善(=淑人 朔寧 崔氏)1013태어났으며.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都廳司僕侍正으로 관원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都廳通訓大夫 司僕侍正 知製敎 兼 世子 侍講院 輔德으로 除授, 孫子 柳廣善 태어나던 해에 둘째 長姪柳忠立(1582~1620)月沙 李廷龜가 중국으로 주청사로 갈 때 시조 한 씩 지은 眞迹成均館大 博物館에 소장되어 남아있다. 長姪柳孝立郎廳에서 兵曹正郞 신분으로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에 근무 外三寸右議政 鄭昌衍(逢原府夫人 東萊鄭氏)3都提調 관원으로 같이 근무하였다. 41禮曹參議(114)姨從金尙容知敦寧으로 4柳希發吏曹參議으로 계속하여 同副承旨(123)로 작은 아버지 柳德新延安府使, 계속하여 右副承旨(413)長姪柳孝立副修撰으로 제수 받았고, 계속하여 刑曹參議(420), 承政院 右副承旨(56), 左副承旨(511)除授되었으며 許筠刑曹判書任就正左承旨로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당시 이들이 手決하였던 筆迹이 현재 남아있다. 1617(丁巳=光海 9) 32642副提學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1617(丁巳=光海 9) 京畿道觀察使(611)가 되었고, 비변사 兵馬節度右道防禦使를 겸직하였다. 文陽府院君 死後 5만에 柳根하고, 吳靖하고 金尙容神道碑가 건립되었기 본인은 지난 2007神道碑 ,음면을 탁본 표구하여 각각 오동나무 궤에 실크 보자기에 포장 서울대학교 한국학 연구원에 연구 보전토록 하였다. 柳希亮 自身은 진원부원군 柳根伯兄 柳格 神道碑(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몽촌리 소재)篆額을 썼다. 같은 해 작은 아버지 都正公 柳德新하셨고, 1619(己未=光海11)81844禮曹參判으로 除授되었고, 1620(庚申=光海12)1125日 母親 蓬原府夫人東萊鄭氏80하셨다.1621(辛酉=光海13) 아들 柳斗立20別試 丙科 4위로 합격하였다.

 

柳希亮은 당대에 글을 잘 쓰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김대덕의 名公眞蹟에 등재 되어있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삼존리(三尊里)라는 地名光海君 時代 兵曹判書,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류희분(柳希奮 1564), 副提學 류희발(柳希發 1569), 禮曹參判,京畿觀察使 류희량(柳希亮 1575) 三兄弟를 존경할만한 인물이라 하여 붙여진 地名이라 한다.

 

1623(癸亥=光海15) 314日 仁祖反正이 일어나게 되므로 셋째 兄 柳希奮과 넷째 兄 柳希發誅殺 되었으며 막내 동생 柳希安은 절도에 위리안치토록 하여 이로 인하여 柳希亮巨濟島流配되었다. 이 당시 柳廣善은 겨우 7였다. 光海主文城郡夫人世子世子嬪江華島流配된 후 光海主는 또다시 濟州道流配地가 옮겨졌고 世子世子嬪이 먼저 하게 되었고 文城郡夫人은 이 모든 것을 겪다가 火病으로 하셨다.

 

1628(戊辰=仁祖 6) 柳希亮54長姪柳孝立이 주축이 되어 27된 외아들 柳斗立, 그리고 柳孝立子 柳宗善,柳養善 등이 역모사건을 도모하다가 허적의 고변으로 좌절 誅殺되었고, 柳希亮은 이에 連坐되어 巨濟島 流配地에서 絞殺 生을 마치셨다.

 

當時 孫子柳廣善은 하루아침에 父親 柳斗立祖父 柳希亮이 함께 타계할 시 겨우 12였었다.

 

도일[石谷]朝鮮時代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돌산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 하여 돌고을·돌골·골고지라고 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며, 망고개는 원래 낮은 고개였는데, 朝鮮 中期文臣 류자신(柳自新)의 아들인 류희량(柳希亮)의 묘를 쓸 때 이곳에 흙을 긁어모아야 左靑龍 右白虎가 완연하다 하여 고개를 높이고, 이때부터 막은 고개라고 하였다가 변하여 망고개가 되었다 한다.

 

 

 

許穆의 미수기언=記言別集柳希亮事 眉叟 許穆 卒(1595~1682=88)

 

柳希亮字龍卿柳氏敗連坐絞於巨濟斯人者素稱良善韓義禁與書爲訣曰無相負云余心善之追聞之亦可悲臨刑問金吾小吏曰韓知事有書否出其書見之歎曰爲我謝之當死刑人情安得不亂我平日作室於南郊因號曰祭郊今我絞於巨濟此先讖也嘗名兒曰斗立今兒二十七死天之所定又何恨以此復之遂就刑云其不亂如此平日之操可知戊申仲夏上旬

 

 

 

柳希亮의 자는 용경(龍卿)이다. 류씨는 남의 죄에 연좌(連坐)되어서 거제도(巨濟島)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당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본래 선량한 사람이라고 남들이 말하여 왔다. 한 의금 부사(韓義禁府事)가 편지로 서로 저버리지 말자.’고 영결(永訣)하였다기에 내가 속마음으로 착하게 여겼는데, 나중 들으니 심히 슬픈 일이었다. ()을 당할 때에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아전에게 묻기를,

 

한 지사(韓知事 한 의금 부사를 말함)의 편지가 없더냐.”하니, 아전이 있다고 하고 그 편지를 내어 주자, 보고는 탄식하기를,

 

나를 대신하여 답장해다오. 내가 사형을 당하는 마당에 어찌 정신이 어지럽지 않으리요마는, 내가 평일에 남교(南郊)에 집을 짓고 인하여 제교(祭郊)라 이름하였는데, 지금 내가 거제도에서 교수형을 당하게 되니 이것은 먼저 참언(讖言)이 된 셈이요, 아이의 이름을 두립(斗立)이라 하였는데, 지금 아이가 스물일곱 살에 죽게 되니 이것은 다 하늘이 정한 것이라 또 무엇을 한하리요. 이러한 뜻으로 답을 써 보내라.” 하고 드디어 형장(刑場)에 나섰다 한다. 그 정신이 어지럽지 않기가 이와 같으니 평일의 조행을 가히 알 수 있다. 무신년 5월 상순에 쓰다.

 

아이의 …… 되니 : 두립(斗立)의 두()()’()’의 합자(合字)20을 말하고, ()논어(論語)“30에 서고[三十而立]”에서 딴 것으로, 2030사이인 27세에 죽은 것이라고 보았다.

 

 

 

유배지 거제도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당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본래 선량한 사람이라고 남들이 말하여 왔다. 한 의금 부사(韓義禁府事)가 편지로 서로 저버리지 말자.’고 영결(永訣)하였다기에 내가 속마음으로 착하게 여겼는데, 나중 들으니 심히 슬픈 일이었다. ()을 당할 때에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아전에게 묻기를, “한 지사(韓知事 한 의금 부사를 말함)의 편지가 없더냐.”하니, 아전이 있다고 하고 그 편지를 내어 주자, 보고는 탄식하기를,

 

柳希亮 製進=梧里先生文集附錄卷之三

 

峰陰 柳希亮의 필적으로 斜川莊八景圖 篆 作-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1647(丁亥=仁祖25) 105日 柳廣善2子 應龜 태어나다.

 

16841029日 孫 廣善 卒하다. 嘉善大夫禮曹參判 李沃(16411698)柳廣善姨從弟이며 柳廣善墓碑銘을 썼고,閔昌道1694(甲戌=肅宗20)大司成이 되었다.

 

1690(庚午=肅宗16) 사가독서 하던 중 湖當試에 수석 하여 肅宗으로부터 상으로 표피를 받았던 1714(甲午=肅宗40) 閔昌道梅墩(柳廣善)梅墩稿序文을 쓰다.

 

閔昌道는 곽산의 佛糧碑文과 영변의 普賢寺 月渚大師碑文하였다.

 

아쉬운 것은 柳希亮의 고문헌이 많이 남아있으나 본인에게 주어진 원고의 지면으로 다음 기회에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古文獻原本을 보시려는 분은 다음 포털싸이트에서 류지세(文化人=柳志世)”을 검색하여 보시면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ryujise/?t__nil_login=myblog

柳希亮(21世)의 26世 柳繼相 先祖가 長子(柳希鏗(21世)댁으로 養子로 들어가게 되었다.

柳希亮(21世)의 26世 柳繼相 先祖가 長子(柳希鏗(21世)댁으로 養子로 들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