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공 2023. 3. 4. 20:38

蓬原府夫人東萊鄭氏墓碣

蓬原府夫人(東萊鄭氏)

 

2019-05-22 13:29:10

 

 蓬原府夫人東萊鄭氏墓碣

 

柳根 撰

 

吳靖 書

 

蓬原府夫人東萊鄭氏領敦寧府事文陽府院君柳公之配也領敦寧 國舅例授職非有策勳不得封君而 國舅封府院君正一品外命婦封貞敬夫人而國舅夫人封府夫人國制待國舅若是其隆盛文陽公與府夫人俱嘉靖辛丑生夫人年十四歸文陽文陽享年七十有二卒于萬曆壬子春二月癸丑之春追公衛聖元勳 贈竭忠盡誠同德賛謨佐運之號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公卒之九年庚申冬府夫人年八十而終以根旣銘文陽公諸石諸孤於憂服之中又求根一語將刻之碑陰根今雖老且病義不敢辭夫人曾祖考文翼公諱光弼議政府領議政扶植己卯諸賢于斯道有大功配享 中宗廟庭 國朝以來數相業以文翼爲稱首祖考諱福謙江華府使 贈領議政以子貴也考曰惟吉二十四魁戊戌 謁聖試能文章繼祖父爲左議政妣曰元氏貞敬夫人原州人禮曹叅判繼蔡之女也夫人幼有至性歲壬子議政遭內艱癸丑▨▨▨▨▨▨▨▨▨▨▨舍時議政胤子蓬萊相公生纔經歲夫人年十三色憂甞衣不解帶十夜不離間議政素鍾愛益奇之嘉其氣質淑頴悟過人敎以古訓閨範內則之外凡經史之可誦者靡不習自甲寅于歸之上事舅姑下恤婢僕篤於婦儀一門內外翕然爲賢婦五十九年如鼓瑟琴逮至文陽下世之後雖以衰麻在身之年執喪供祭一出於誠服闋之後不以家事爲念惟奉先祀賙門族是務無間於所天在世之時坤殿以七十偏親終能勝喪爲莫大之幸涓吉迎入于通明殿設宴以慰翌日上設酌親執盞以壽錫賫便蕃又明日東宮亦設宴三殿各自製詩以紀盛事每歲 宮中有大小慶禮未甞不奉邀俱歡情禮備至此實古今所罕聞者十數年來諸子諸孫出入臺省金玉輝暎夫人以榮爲懼常謂諸子曰爾曹致位列卿皆由先世積德發於今日門戶之盛可憂非可喜也爾等盍各畏愼牧以卑遜諸子公退必齊會膝下夫人就寢然後方退私室日以爲常子希發久在東銓夫人甞謂曰爾自叅議陞叅判爾兄長西銓一家二人並居兩銓爾宜先解以謝人言凡其識見透徹皆類此生長文獻世家習於耳目者無非義方諸子幼少時勿許出就外傳親自敎導易致成就上有寡兄年今八十九夫人事之如母如得 天厨珍膳必先分送然後始許進庚申冬患微恙 上遣御醫多方救藥終不救訃聞上震悼輟視朝自歛殯至襄奉皆官庇用一特禮禮官率禮吊祭 三殿各遺中使護喪致吊致祭一如前喪鳴呼生榮死哀非此之謂也歟若其子若孫職名具錄前碑今不重載仍竊惟念公之孫忠立中庚戌文科別試聞喜之席公持座上賓賀杯謂根曰子希奮中丁酉別試希亮中戊申別試子希發長孫孝立中己酉增廣今忠立又釋褐三子二孫是即五子登科云厥後孫鼎立中戊午增廣庶孫厚立中同年別試武科孫命立己未秋榜魁進士夫人在世時也是果非積善餘慶乎鳴呼盛哉 天啓二年十月 日刻

 

 

 蓬原府夫人 墓碣(陰記)해설

 

 

 

봉원부부인 동래정씨는 영돈녕부사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공의 배위(配位)이다. 영돈녕부사는 국구(國舅)에게 의례 주는 직위로, 책훈이 없으면 봉군(封君)되지 못하지만 국구로서 부원군 정일품에 봉해졌다. 외명부로는 정경부인에 봉해졌으나 국구부인이 되었으므로 부부인에 봉해졌다. 나라의 제도로써 국구를 이와 같이 융성하게 대우하였다.

 

문양공과 부부인은 다같이 가정 신축년에 출생하였다. 부인은 14세에 문양공에게 출가하였다. 문양공은 향년 72세로 만력 임자년 봄 음력 2월에 사망하였다. 계축년 봄에 위성원훈에 추록되고 갈충진성 동덕찬모좌운의 호칭이 내려졌으며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이 사망한 지 9년이 되는 경신년 겨울에 부부인이 향년 80세로 사망하였다. 내가 이미 전에 문양공의 비문을 지어 석각하였는데 공의 아들들이 복상 중에 또 내게 비문을 받아서 비음(碑陰)을 새기려고 하니, 지금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부인의 증조고(曾祖考)는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로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다. 기묘사화 때 여러 유교 명현들을 도운 공적이 있어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국조 이래 여러 차례 재상을 지냈으며, 문익(文翼)이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조고(祖考)는 복겸(福謙)으로 강화부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아들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친은 유길(惟吉) 24세인 무술년에 알성시에 장원하였는데 문장에 뛰어나 조부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모친은 정경부인 원씨(元氏)로 원주인(原州人) 예조참판 계채(繼蔡)의 따님이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매우 착하였다. 임자년에 의정공이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계축년에 돌아왔을 당시 의정공의 맏아들인 봉래상공이 출생한 지 일 년 이 되었고 부인은 당시 13세였 는데, 근심하는 낯빛으로 의대를 풀지 않고 열흘 밤을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의정공은 본래 부인을 종애했었는데 이에 더욱 기특하고 여기고 그 기질이 정숙하여 남보다 뛰어난 것을 가상해 하였다. 의정공이 고훈과 규범과 내칙을 가르친 것 이외에도 읽을 수 있는 경사는 스스로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인년에 시집와 위로는 시부모를 모셨고 아래로는 종복들을 돌보아 부도(婦道)에 충실하였으니 문중의 안팎에서 모두가 하나같이 현부(賢婦)로 여겼다. 59년을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으며 문양공이 하세한 후 비록 본인이 상중에 있었지만 한결같이 정성으로 상제 노릇을 하고 제사를 받들었으며 상을 마친 후에는 가사를 생각지 않고 오직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문족을 위로하고 돌보는 일에 힘써 부군이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하였다.

 

곤전은 부인이 나이 70세로 남편의 상을 무사히 마친 것을 아주 큰 다행으로 여겨 길일을 택하여 통명전에 맞아들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다음날엔 왕이 주연을 베풀어 친히 잔을 들고 장수를 기원하고 편번(便蕃)을 하사하였다. 또 다음날 동궁도 연회를 베풀었으며 삼전이 각기 시를 지어 성대한 일을 기리었다. 해마다 궁중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으면 맞이하여 모시고 함께 기쁨을 나눴는데 정성과 예를 극진히 하였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십 수 년 동안 여러 자손들이 대성(臺省)에 출입하며 높은 벼슬로 빛났는데 부인은 이러한 영화를 걱정하며 ????너희들의 지위가 경의 반열에 이른 것은 모두 선조께서 쌓은 덕이 오늘날 나타난 것이다. 집안이 번성하는 일은 우려할 일이지 기뻐할 일이 아니니, 너희들은 각별히 삼가고 조심하며 몸을 낮추어 겸손한 자세로 처신하라????하였다. 여러 자제들은 퇴궐하여 그 슬하에 함께 모였다가 부인이 잠자리에 든 뒤에야 제 방

 

으로 물러 나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들 희발(希發)이 오랜 동안 동전(東銓)에 있었는데 부인은 일러 말하기를 ????너는 참의에서 참판에 올랐고 너의 형은 서전의 판서이니 한 집안에 두 사람이 함께 양전에 벼슬하게 되었다. 네가 먼저 사직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식견이 이와 같이 투철하였다. 이는 문헌 세가에서 자라나면서 보고 들으면서 익힌 것으로 모든 일이 의롭고 반듯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밖에 나가 사부에게 나아가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친히 가르치고 이끌어 쉽게 성취할 수 있었다.

 

위로 형이 있는데 지금 나이가 89세로 부인은 마치 어머니처럼 모시어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먼저 나누어 보낸 뒤에 자신에게 올리게 했다. 경신년 겨울에 가벼운 병환을 얻었는데 왕이 어의를 보내 다방면으로 치료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하였다. 부음을 듣고 왕은 매우 슬퍼하며 정사를 철폐하고 몸소 지극히 염빈하였다. 장례 절차를 모두 관의 도움으로 특별한 예로 치렀다. 예관들이 예를 갖추어 조문하고 제사 지냈으며 삼전은 각각 중사를 보내어 호상하고 치조, 치제하였으니 한결같이 문양공의 상() 때와 같이 하였다. 아아! 살아서 영광이고 죽어서 애통하다는 말이 이를 일러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 자손의 직명은 문양공의 비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 중복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가만 생각해 보건대 공의 손자 충립(忠立)은 경술년 문과별시에 합격하였는데 문희연에서 공은 상빈의 자리에 앉아 축하주를 주며 나 근()에게 ????아들 희분(希奮)은 정유년 별시에 합격하였고 희량(希亮)은 무신년에 별시에 합격하였으며, 희발의 장손인 효립(孝立)은 기유년 증광시에 합격하였다. 지금 충립이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아들 셋과 손자 둘, 곧 다섯 자손이 등과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후에 손자 정립(鼎立)이 무오년 증광시에 합격하였고 서손 후립(厚立)은 같은 해 별시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손자 명립(命立)은 기미년 가을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니, 부인이 살아계실 때의 일이다. 이것이 과연 선()을 쌓은 집안에 넘치는 경사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번창하도다.

 

천계 2 10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