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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590] 소소한 피서의 즐거움

감사공 2025. 6. 24. 21:42

[고전산문 590] 소소한 피서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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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18()

오백예순 번째 이야기

 

 

소소한 피서의 즐거움

 

 

 

보제원피서서(普濟院避暑序) - 홍성민(洪聖民)

 

 

기묘년(己卯年)(1579, 선조12) 626, 나는 성() 남쪽의 허름한 집에서, 더위를 몹시 심하게 먹은 상태였다. 친구인 홍언규(洪彦規) ()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백형(伯兄) 대유(大猷) 씨가 이웃 친구 대여섯 명과 약속하여 내일 아침 보제원(普濟院)에 모여 피서(避暑)를 갈 계획이니, 그대도 자질구레한 일은 떨쳐버리고 오게나." 하였다. 나는 "알겠네." 하고 답했다.

 

歲己卯月之六日之廿六余在城南弊廬病暑甚友人洪公彦規訪余來告曰吾伯兄大猷氏約隣朋六七輩趁明朝會普濟院謀避暑君其脫宂故來余應曰

 

 

다음 날 늦은 오후, 나는 말을 타고 성 동문을 나서서 보제원이란 곳으로 향했다. 멀리 보니 여러 벗들이 나보다 먼저 와서, 더러는 서 있고 더러는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나아가 보니 홍언규 형제와 박상초(朴尙初), 김사회(金士晦), 이모(▣▣) 모두 동쪽 이웃의 오랜 친구들이었다. 약속하고도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이응요(李應堯)와 홍응추(洪應推) 두 공뿐이었다.

翌日晡時鞭余馬出城東門向所謂普濟院者遙見諸君先我來或立或坐以侯之就其坐則洪彦規昆季朴尙初金士晦▣▣,皆東隣舊契而有約而未者獨李應堯洪應推兩公耳

 

 

 

이곳에 모인 이들은 어릴 적에는 신나게 쫓아다니거나 글공부로 모이기도 하여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바로 찾았고, 얼굴을 보지 않는 날이 없었다. 나이가 들고 세상 형편에 이끌리면서 사는 곳이 별처럼 뿔뿔이 흩어지게 되니, 함께 놀며 쫓아다니던 일도 저절로 소년 시절과 달라졌다. 세상일이 사람을 내몰아 몸이 자유롭지 못하니, 어떤 이는 벼슬 때문에, 어떤 이는 병 때문에, 어떤 이는 탈것이 없어서, 어떤 이는 하인이 없어서 그리워도 방문하지 못하고, 방문해도 만나지 못하며, 한 사람을 만나면 다른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이곳을 방문하면 저곳을 방문하지 못했다.

在此會者其在童稚或嬉而逐或文而會暫阻卽求無日不面至於年長勢牽星散其居游戲追逐自與少年時別世故驅人身不自由或以官或以病或無騎或無僕思之不得訪訪之不得遇遇其一不得遇其二訪于此不得訪于彼

 

1360일 동안 얼굴 보는 날보다 못 보는 날이 더 많았으니 만나면 위안이 되고 못 만나면 울적하였다. 세상살이의 즐거운 정취가 다시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오늘 이 모임에는 방문하고 싶었으나 못했던 이들, 방문했으나 못 만났던 이들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비록 며칠 동안 말을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집집마다 찾아가 문을 두들긴다 한들, 오늘 이 모임처럼 한꺼번에 모두 만나 조금도 아쉬움이 없는 경우와 같겠는가.

一年三百六十日之間見面少而不見面多見之則慰不見則鬱世間歡悰其復幾何今此之會則欲訪而未者訪而未遇者皆在此雖累日垂鞭之彼之此踵門剝喙[]未若此會之兼遇盡見而無少憾者也

 

마음이 잘 맞는 절친이라 예법에 얽매이지 않았다. 흩어져 앉고, 편안하게 드러누웠다. 옷깃을 헤치고 속마음을 드러내며 간간이 농담을 섞었다. 서로 술을 권하기도 하고 잔을 빼앗기도 하며, 입으로는 담소를 나누고 손으로는 과녁을 맞췄다.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 마치 소년 시절에 함께 어울려 놀던 때처럼 마음이 흡족하고 흥취가 무르익으니, 이날의 모임은 단지 더위를 피하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이에 몸은 높고 시원한 곳으로 오르고 눈은 넓고 아득한 경치를 바라보며 마음껏 거닐자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왔다. 찌는 듯한 더위를 벗어나 드넓은 기운을 들이마시니, 서로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6월에 홑옷을 입으니 시원하기가 그지없구나!”

情親契密不拘以律其坐也散其臥也偃披襟露款間以戲謔或觴之或侵之口談笑而手射帿熙熙然怡怡然意洽興闌有若少年同隊時此日之會非獨避暑爲也於是身騰高爽目送曠漠隨意徜徉淸風自來脫炎蒸而挹灝氣相顧而笑曰六月單褐不已涼乎

 

잠시 후 햇볕이 잠시 가려지고 먹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더니, 즐거운 일이 무르익으려 하자마자 빗발이 갑자기 쏟아졌다. 허둥지둥 모여서 술잔과 안주 그릇을 치우고 과녁을 걷었다. 하인들이 얼굴빛이 변하여 아뢰기를, “비가 오는데 도롱이[]가 없으니 장차 어찌합니까?” 하였다. 시간이 흘러 저물녘 비가 처음 그쳐 서늘한 기운이 생겨나려 하고 비 갠 뒤의 석양이 서산을 밝게 비추니 흥에 겨워 행장을 정리하여 성 동쪽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서로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더위를 씻고 돌아오니, 이 즐거움이 어떠한가?” 다만 사는 집이 제각기 달라 어떤 이는 동쪽, 어떤 이는 남쪽이었다. 말을 멈추고 이야기를 마치자 길을 나누어 흩어지니,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俄而日影暫閟黝雲四合樂事纔融雨脚驟下聚首蒼黃撤杯盤而捲射帿奴僕失色而告曰雨作無簑將若之何徐焉晩雨初收微涼欲生霽後殘陽明照西山乘興理裝向東城而入相顧而笑曰滌暑以還此樂如何第以家住各異或東或南駐馬語罷分岐而散不能無悵然者

 

아아! 하루 동안에도 처음에는 만나서 얼굴 보는 걸 위안 삼고 피서를 즐거워하였다가, 중간에는 비가 오는 것을 근심하고, 이내 비가 그치자 기뻐했으며, 마침내는 헤어짐을 원망하였다. 그 위안, 즐거움, 근심, 기쁨, 원망은 모두 끊임없이 만나는 일마다 마음이 흔들려서지만, 어째서 위안되는지, 즐거운지, 근심하는지, 기뻐하는지, 원망하는지는 누가 그렇게 만드는 지는 모른다.

一日之內始以會面爲慰避暑爲樂中焉以雨作爲憂俄以雨霽爲喜終焉以分岐爲恨其慰也其樂也其憂也其喜也其恨也此遇事而動情不可已者而未知所以慰所以樂所以憂所以喜所以恨者孰使之然哉

 

나는 조물주(造物主)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다. 하루 한바탕의 일에도 즐거운 실마리가 생기자마자 근심의 실마리가 금새 싹트니, 이는 필시 편안함과 근심이 고개 돌리는 사이에 서로를 찾아서이다. 하물며 한 해는 어떠하겠는가! 한 해를 미루어 백 년에 이르러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무릇 비가 오고 그치는 것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고, 근심과 기쁨도 기약할 수 없다. 만나면 위안이 되고 헤어지면 원망스러운 것은 그리움이 깊고 관계가 친밀한 데서 비롯한다. 예로부터 슬픔과 기쁨은 정()이 지극한 부분에서 쉽게 흔들리니, 온전히 조물주가 했다고만 맡겨둘 수 없지만 또한 조물주에게 맡기지 않을 수도 없다.

吾爲造物兒有所感也一日一場懽緖纔成憂端旋萌此必舒蹙相尋於轉頭間況一歲乎一歲而推之則至百年亦如是也夫雨之作雨之收出於意慮之所未料其憂喜不可期者也會面而慰分岐而恨此發於思之深契之密者自來悲歡易動於情至之地不可全任於造物者之爲也而亦不可不委於造物也

 

위로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며, 기뻐하게 하고, 원망하게 하는 것은 저 조물주에게 있으니,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러한 모임을 자주 가져서 만나는 날들을 늘린다면, 위안도 있고 근심도 있고 기쁨도 있고 원망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기쁨과 위안은 크고 근심과 원망은 작은 경우에야! 우리들이 억지로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은 오직 이 모임뿐이다. 이것이 아니면 달리 꾀할 바가 없다. 감히 이 말로 여러 벗들에게 권하여 뒷날의 약속으로 삼고자 한다.

使之慰使之憂使之喜使之恨者在彼吾無如之何頻作此會以長會合之日則可以慰可以憂可以喜可以恨而在我者無憾況其喜慰大而憂恨小者乎吾輩之所當勉而源源不絶者惟此會而已非此無可謀敢以此語勉諸君以爲後日約

 

 

 

 

6, 벌써 여름이다. 많은 이들이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산이나 바다, 혹은 외국으로 휴가 갈 계획들을 벌써 세워뒀을 것이다. 이제 피서는 단순히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목적뿐 아니라 새해부터 쉼 없이 달렸던 나 자신에게 휴식을 주는 기회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유교적 가치관에서는 노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에, 임금부터 선비까지 제대로 피서를 즐기지 못하였다. 독서로 피서를 했던 정조는 물론이거니와, 정약용은 바둑 두고, 활 쏘고, 그네 뛰고, 시 짓기를 했다. 현대 한국인들의 피서를 보면 정해진 시일 내에 몇 달간 묵혔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11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열심히논다. 수양의 끈을 놓지 않은 옛날 피서 모습이나 현대인들이 피서가서 열심히 노는 모습은 뭔가 제대로쉬지 않는다는 묘한 인상을 준다.

 

쉰다는 것은 게으름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더운 여름이지 않은가. 그 더운 여름에 제대로 게으름을 부려야지 독서하거나 열심히 놀거나 둘 다 더위 먹기 딱 좋은 환경이다. 가족들끼리 여행을 가도 부모님이나 혹은 아이들의 상태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 이래서야 남들 놀 때 같이 놀지 못하는 가이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피서는 어떤 형태일까. 홍성민이 지은 위의 서문처럼 오랜 친구들끼리 가까운 교외 나들이가 그 하나의 예시일 듯하다.

 

홍성민(洪聖民, 1536~1594)은 조선 중기 인물로, 그와 그의 부친 홍춘경(洪春卿), 큰형 홍천민(洪天民), 조카 홍서봉(洪瑞鳳) 모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아 34호당이라고 일컬어졌다. 1590(선조23) 사은사로 명나라에 건너가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로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봉된다.

 

이 서문은 그의 1579(선조12) 그의 나이 44세 때 지었다. 보제원(普濟院)은 동대문 밖에 있는 구휼 기관으로, 공무 수행자에 대해 말과 숙식 제공 등이 주된 임무였으나, 그밖에 굶주린 백성들에 대한 구휼 업무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안암 오거리에 보제원 터라는 표석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그 옛날 안암동은 안암천이 흐르는 밭이었고 개운사(開運寺), 안암사(安巖寺) 사찰로도 유명하다.

 

허름한 집에서 더위에 시달리던 홍성민에게, 홍언규라는 이가 찾아와 피서를 가자는 제안을 한다. 들어보니, 모이는 인원들이 자기와 가깝게 지냈던 상초(尙初) 박숭원(朴崇元), 사회(士晦) 김해(金澥), 응요(應堯) 이증(李增), 응추(應推) 홍인서(洪仁恕) 등등이었다. (홍언규와 그의 큰형 홍대유는 졸옹집이외의 문집에는 보이지 않는다.)

 

홍성민과 이들은 어렸을 적 함께 뛰놀고 공부했던 사이였는데, 이제는 전부 1년에 한 번 만나기 힘든 사이가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이 모임이 있기 몇 년 전 홍성민은 대사간, 박숭원은 지평, 이증은 전라 감사, 김해는 사간을 지냈었다. 다들 벼슬살이에 바빴던 것이다. 이들이 피서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흡사 초등학생들의 소풍을 보는 듯하다. 이리저리 흩어져 아무렇게나 눕거나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술잔을 권하거나 뺏기도 하고, 과녁을 설치하여 간만에 활 솜씨를 비교하였다. 편안함, 나른함, 게으름이 글 속에서 풍겨온다. 그러다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자 허둥지둥 안주와 술잔을 거두었다가, 소나기가 지난 뒤 노을이 붉게 물들자 또 그 흥취에 행장을 정리하여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길에도 말을 멈추고 수다를 떨며 하고픈 말을 다 하고 나서야 다시 제각기 흩어졌다.

 

사람의 감정은 상황에 따라 쉽게 흔들린다. 불시에 비가 오면 근심하다가 개이면 기뻐한다. 벗들도 만나면 반갑고 즐겁다가도 헤어지면 금새 슬프고 아쉬워진다. 특히 정이 지극한 사이에서는 그 강도가 심해진다. 이러한 흔들림은 조물주의 안배인지라 인력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홍성민은, 기쁨과 근심은 어차피 반복되니 조물주에게 내맡겨두고, 우리는 자주자주 만나서 나중에 못 만났다는 아쉬움을 줄이자고 말한다.

 

요즘 연구에 의하면 행복은 순간적인 강렬한 경험보다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또 행복은 돈, 성공, 성취, 명예에 있지 않고 오히려 가족과 친구, 공동체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런 결과는 그 옛날 홍성민이 언급한 결론과 똑같다. 혹시 올해 일이 밀려 피서 계획을 세우지 못한 분들은, 연락이 뜸했었던 옛 친구들과 부지런히 모임 약속을 잡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담소 삼매경에 빠져 보는 것은 어떨까.

 

후원아집도(後園雅集圖)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글쓴이 이도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