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無期 終身刑 流配
버림받은 無期 終身刑 流配
目 次
MBC 방영. YouTube. 音聲 動映像 파일 텍스트化.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凝川日錄. 編輯者 追加 綜合編輯. 本文 解說{茶山연구소 朴錫武(1942~)理事長. 역사비평가겸 작가 李德一(1961~ ). 제주대학 梁鎭健 교수. 범각스님. 제주일보 등}-----------------------------------------2
本文 登場 人物과 聯關 있는 人物情報와 行蹟은 朝鮮王朝實錄.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百科事典 拔萃. 流配地生活. 賜死. 流配地 絞刑. 流配地 自然死. 放浪居士. 順序는 編年 別 整理-----64
聯關 人物 行蹟 要約整理(姓氏“柳”氏의 本貫은 대부분 文化柳氏)
◎號.字 性 名(호.자 성 명/生沒年度/官職/流配地)-------------------66
戊辰(1628년)柳孝立. 柳斗立 逆謀事件-------------------------------137
編輯 後記---------------------------------------------------------215
버림받은 無期 終身刑 流 配
千年의 魂(혼)과 숨결이 살아있는 海南 大興寺 층계로 樓閣 너머 부근에는 한 선비의 傲慢(오만)과 謙讓(겸양)에 대한 美談이 230年이라는 歲月을 넘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南쪽을 바라보는 大雄寶殿과 西쪽에 無量壽閣, 이 두 懸板은 朝鮮 書體의 두 巨匠 圓嶠 李匡師(원교 이광사 1705~1777)와 秋史 金正喜(추사 김정희 1756~1886)의 眞迹입니다. 한때 두 懸板은 서로 反對 便에 걸려있었습니다.
大興寺
秋史 金正喜 眞迹 圓嶠 李匡師 眞迹
<編輯者 註>
海南 大興寺(해남 대흥사), 順天 禪庵寺(순천 선암사), 陽山 通道寺(양산 통도사), 榮州 浮石寺(영주 부석사), 報恩 法住寺(보은 법주사), 安東 鳳停寺(안동 봉정사), 公州 麻谷寺(공주 마곡사)가 현재 2018年6月28日부로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으로 登載됐습니다.
유네스코 世界遺産委員會는 제42차 會議에서 海南 大興寺와 順天 禪庵寺 등 7개 寺刹로 構成된 '韓國의 山寺'를 世界遺産 目錄에 올리기로 決定했습니다.
世界遺産委員會는 이들 山寺가 千年 이상 우리나라 佛敎의 傳統을 지키고 繼承한 綜合 僧院(승원)이라는 점을 높이 評價했습니다.
大興寺는 우리 國土의 최남단에 위치한 頭崙山(두륜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寺刹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海南 大興寺는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寺刹을 주도하고 있다.
頭崙山을 大芚山(대둔산)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寺刹名은 大芚寺(대둔사)였으나, 근대 초기에 大興寺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西山大師(西山大師)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衣鉢(의발)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大興寺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韓國佛敎史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風潭(풍담)스님으로부터 草衣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大宗師(대종사)가 배출되었으며, 萬化(만화)스님으로부터 梵海(범해)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大講師(대강사)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草衣禪師로 인해 大興寺는 우리나라 茶文化(차문화)의 聖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大興寺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표충사, 대광명전, 박물관)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범각스님 설명>
“圓嶠 李匡師 선생님께서 大雄寶殿 懸板을 써서 우리가 모셨는데 秋史 金正喜 선생님께서 扁額을 보시면서 저쪽에 있는 無量壽閣이라고 하는 扁額을 써서 이것을 걸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셔서 아마 草衣스님하고 交分이라든지 여러 가지 그런 것으로 인해서 아마 다시 無量壽閣으로 걸었던 것 같아요.”
<해설>
1840년 秋史는 濟州 流配 길에 大興寺를 들러 草衣禪師에게 圓嶠가 쓴 大雄寶殿 懸板을 떼어 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秋史 金正喜의 懸板이 걸리게 됩니다.
秋史 金正喜는 圓嶠 李匡師의 글씨체를 認定하지 않았습니다.
流配 길에 不便한 心氣는 그것을 더 거슬리게 했던 것입니다.
10年 뒤 懸板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秋史가 圓嶠의 것을 다시 걸어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다시 歸鄕이 풀려서 大興寺로 오셔서 이제 漢陽으로 가시는 過程 속에서 그때 공부를 하시고 오셔서는 예전에 걸렸던 扁額을 다시 李匡師 先生의 글씨로 다시 걸어 달라 그리고 자기 글을 저쪽에 걸어 달라 이렇게 해서 다시 李匡師 선생님의 大雄寶殿 懸板이 걸리게 됐습니다.”
圓嶠의 글씨를 認定하게 된 秋史, 妥協할 줄 모르고 傲慢할 정도로 自信滿滿하던 그는 10年의 時間이 흐른 後 變해 있었습니다. 自身을 省察해 스스로 낮추고 世上을 肯定하는 배운 時間, 그것은 流配였습니다. 어제까지 높은 자리에서 이름을 드높이던 선비가 汚名을 뒤집어쓰고 罪人이 됩니다. 世上은 그를 버린 것이었습니다. 自身을 거리에 내몬 사람들에 대한 怨望의 마음도 잠시, 까마득한 自身의 앞날에 대한 걱정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는 홀로 먼 길을 떠나야할 流配 罪人 身世가 돼버린 것입니다.
歸鄕이라는 말로도 잘 알려진 流配, 流配는 重罪를 멀리 追放시켜 한곳에 살게 하는 刑罰이었습니다.
朝鮮의 法에는 다섯 가지 刑罰이 있었습니다.
그중 流配는 死刑 다음으로 무거운 罰이었습니다.
原則的으로 流配는 無期 終身刑입니다.
군왕의 赦免이나 政勢의 變化가 없는 한 流配地에서 歸鄕할 수 없는 罰입니다.
流配를 간이들이 겪는 가장 큰 설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苦痛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함, 어느 날 갑자기 賜藥이 날아오지나 않을까 하는 不安感, 그것은 지금의 無期懲役, 그리고 死刑執行을 기다리는 罪囚의 心情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朝鮮王朝實錄에 記錄된 流配는 6000 件 가까이 된다합니다.
流配는 三國時代부터 있어 왔지만 朝鮮時代에 가장 많이 이용된 刑罰이었습니다.
流配의 가장 큰 原因은 反逆罪입니다. 주로 政治集團 사이에서 생긴 犯罪들로서 官僚層과 知識人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一般人의 流配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歷史書에 記錄된 事件은 生員, 進士試에 及第하고 文科를 通過한 大部分 官僚層의 流配였습니다.
流配는 朝鮮建國 初期에 가장 많습니다.
새 王朝는 政治的 肅淸(숙청)을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朝鮮 四大士禍도 수많은 流配者를 낳았습니다.
士林과 勳舊派(훈구파)의 對決로 士林들이 대거 退出됐던 것입니다.
朝鮮 中宗 때 士林派의 首長 靜菴 趙光祖(정암 조광조 1482~1519), 그는 1519년 일어난 己卯士禍의 犧牲者였습니다. 道學政治를 내세운 趙光祖는 急進的인 改革으로 旣存勢力을 緊張시킵니다. 그 反擊으로 결국 그는 叛逆이라는 罪名을 쓰고 화순 능주로 流配를 온 것입니다. 그가 화순 능주에 이르기 전 들렀던 海望書院, 이곳은 士禍로 肅淸된 그의 스승들을 配享한 곳이었습니다.
道學政治를 이루려했던 그들의 꿈은 그렇게 쓰러져 갔던 것입니다.
己卯士禍 이후 또 한 번 士林派 肅淸이 있었습니다.
1545년 仁宗이 在位 8개월 만에 죽고 어린 明宗이 卽位한 뒤 소윤인 윤원형(尹元衡)·이기 등이 乙巳士禍를 일으키자, 左議政 柳灌(류관 1484~1545)과 윤임(尹任)·유인숙 등과 함께 三凶으로 몰려 처음에는 絶島流配刑에 처해져 서천으로 귀양 갔지만, 突然 온양에 이르러 賜死되셨습니다.
1570년(宣祖 3) 伸寃(신원)되었으며, 1577년 復爵(복작)되었다. 諡號는 忠肅(충숙)이다.
19年 동안 진도 流配地에서 儒敎的 禮法을 전했던 蘇齋 盧守愼(소재 노수진 1515~1590) 그 또한 100여명 士林이 대거 流配 길을 떠난 乙巳士禍의 덫을 피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朝鮮 中期를 넘어 英祖시기에 이르면 流配는 다시 늘어나게 됩니다.
王權이 강해지면서 法의 적용이 嚴格해진 탓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理由는 黨爭이었습니다.
1801년 黨派간의 熾烈(치열)한 싸움은 辛酉迫害라는 대 肅淸을 불러옵니다.
天主敎徒를 彈壓한 辛酉迫害, 이 일로 蔓川 李承薰(만천 이승훈 1756
~1801), 李家煥(이가환 1742~1801) 등의 天主敎徒와 그와 관계된 學者들이 處刑됩니다.
이 事件으로 丁若鏞과 그의 兄 丁若銓은 강진으로 流配를 떠나게 됩니다.
辛酉迫害는 宗敎를 구실로 老論이 南人을 축출한 事件입니다.
100여명이 處刑되고 400여명이 流配된 當代 最大의 시국사건이었습니다.
禮訟論爭 같은 西人과 南人의 싸움도 수많은 流配를 낳았습니다.
朝鮮王朝實錄에 3千번이나 등장했던 尤庵 宋時烈(우암 송시열 1607~1689), 老論의 영수였던 그 또한 덕원과 장기를 거쳐 거제까지 流配地를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은 섬 흑산도, 100여 년 전 이곳에 流配를 온 이는 흑산도 바다 같은 性情을 지닌 이였습니다.
강화도 조약을 비판하면서 光化門에서 도끼를 메고 上疏했던 勉菴 崔益鉉(면암 최익현 1833~1906)입니다.
때로 그의 上疏文처럼 강한 소신과 直言 때문에 流配간 적은 있습니다.
그래서 朝鮮 선비들에게 流配는 굴욕적인 刑罰을 넘어 良心과 기계를 證明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朝鮮의 知識人이라면 流配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流配를 한번 갔다 와야 할 정도, 갔다 와야 朝鮮의 어떤 正常的인 知識人이고 待接받을 만큼 流配가 一般的인 것이라고 해도 過言이 아니어서...”
流配人들의 강한 所信은 流配地에 影響을 미치기도 합니다.
흑산도 이전에 濟州 流配를 갔었던 崔益鉉은 그곳에 抵抗 儀式을 남깁니다.
그가 濟州에서 交流했던 이들이 主軸이되 濟州 抗日運動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濟州에서도 가장 살기 어려웠다는 대정, 바람 많고 척박했던 이곳은 濟州 民亂의 中心地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濟州에서도 가장 流配者가 많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곳 民亂과 流配는 關聯性이 많습니다.
李在守의 亂을 비롯한 民亂 主導者들이 流配者의 後孫인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人生의 問題를 지적하고 그런 叛亂을 主導한 勢力들이 보면 대게 流配人들과 關聯된 분들입니다. 그래서 流配가 갖고 있는 反體制的이고 반골적인 성향이 濟州道에 浸潤(침윤)되어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大衆을 中心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民亂의 流配人들이 自然스럽게, 流配인 後孫들이 自然스럽게 관계되고 그것은 濟州道의 近代社會에서도 自然스럽게 한몫을 하게 됩니다.”
流配는 罪質에 따라 거리의 差等을 둡니다. 中國의 大明律에 따라 2천리, 2천5백리, 3千里로 區分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먼 곳도 2千里가 넘지 않는 朝鮮 땅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먼 곳으로 돌아 거리수를 채우는 方法을 活用하곤 했습니다.
삼남대로와 영남대로 그리고 관동대로, 잘 알려진 朝鮮時代의 流配길 들입니다.
流配는 西南 海岸가 地域이 많아 삼남대로를 통해 流配地로 떠난 이들이 많았습니다. 漢陽에서 삼남대로를 따라 내려와 만나는 남태령 옛길, 이곳은 장사를 하기 위해, 또 科擧를 보기위해 漢陽을 갈 때 지나는 길목이었습니다. 젊은 時節 遠大한 꿈을 품고 넘었던 그 科擧길이 서글픈 流配길이 돼버린 것입니다.
하루 80리길이나 걸어서 流配地로 향했던 流配길, 流配길의 經費는 個人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가난한 선비는 下人도, 말 한필도 없이 홀로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流配 길은 때로 죽음까지 불사해야하는 길이었습니다.“대게 流配 길에 처해지기 전에 곤장을 맞기 때문에 이미 매를 맞아서 몸이 상당히 弱化된 상태에서 이틀 길을 하루에 걷게 한다든지 3일 길을 하루에 걷게 한다든지 이런 식의 어떤 流配命令을 내리면 도중에서 죽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죠.”
韓半島에서 가장 길고 느린 길 삼남대로, 漢陽에서 出發한 선비는 열흘가까이 걸어서 전라도 삼례에 到着합니다. 王族이 流配돼 세 번 禮儀를 갖춘대서 由來된 삼례, 이곳에서 西南 海岸 쪽과 東南 海岸 쪽 流配 가는 이들이 갈라집니다.
한나절을 더 걸어 到着한 정읍 모처 이곳에서 尤菴 宋時烈(우암 송시열1607~1689)은 濟州 流配 중에 漢陽으로 護送되다 賜藥을 받게 됩니다.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길, 流配 길은 生과 死가 熾烈(치열)하게 交叉(교차)하는 空間이었습니다.“나한테 流配가 풀렸다. 다시 돌아오라. 하는 말하자면 말을 타고 올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期待感을 가지고 流配를 가면서도 내가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그러니까 두 가지가 相反되는 생각을 가지고 가죠.
”湖南平野와 羅州平野를 잇는 높은 고개, 지금은 노령산맥이라 불리는 갈재, 옛 지리지에 이곳은 도적떼가 약탈하는 危險한 고개라고 記錄되어 있습니다.
流配者가 걸어가는 곳곳에 苦痛과 죽음 그리고 危險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고개 넘으면 또 한고개가 기다리고 있는 곳, 流配地로 향하는 길은 그야말로 고단한 고갯길이었습니다. 갈재를 넘어 到着한 나주, 함께 流配 길을 떠난 丁若鏞, 丁若銓 兄弟는 이곳에서 헤어집니다.
丁若鏞은 월출산을 넘어 강진으로, 兄 丁若銓은 무안을 거쳐 흑산도로 가야했습니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旣約이 없는 두 兄弟, 이들은 栗亭점 酒幕에 들어가 눈물로 밤을 지새웁니다.
두 兄弟가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던 것입니다.
<弟 丁若鏞의 心情>
“초가주막 새벽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 보니 離別할 일 慘憺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해설>
그렇게 流配는 모든 것과 離別을 고 하는 길이였습니다.
한때 누리던 權勢와 지위는 물거품처 럼 사라집니다. 家族, 親舊와 헤어져 야만 합니다. 이렇게 流配者는 바람 부는 廣野에 홀로 서야만 했던 것입 니다.“高官大爵으로 살다가 流配를 당하는 일은 그야말로 切望이죠. 挫 折이고. 말하자면 삶이 끊어져 버린 거죠. 茶山 丁若鏞
그래서 廢族이 돼서 다시 살아서 돌아와야만 되는 거니까. 자칫 잘못하면 賜藥을 받을 수도 있는 거니까”월출산 동쪽 끝자락, 영암과 강진을 잇는 고개 누릿재, 남쪽 섬이나 海岸가 流配地를 향하는 이들은 이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茶山 丁若鏞도 濟州로 가는 秋史 金正喜도 이곳을 지나야 했습니다.
이제 故鄕은 돌아가기에 너무 먼 길이 돼버렸습니다.
茶山은 이 길에서 북쪽 산(도봉산)을 닮은 월출산을 보고 아득한 故鄕을 그리워했습니다.
<茶山의 心情>
“누리령 고개위에 우뚝한 바위들, 나그네 뿌린 눈물 언제나 젖어있네. 월남 땅을 향하여 월출산을 보지 말라.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 도봉산 같은지.”
삼남대로의 땅 끝은 海南 이진항, 여기까지 오면 陸地에서의 流配길 旅程은 모두 끝나게 됩니다.
濟州道나 섬으로 가는 流配者들은 이곳에서 배를 타야 합니다.
또 한 번의 더 險難한 旅程이 남았던 것입니다.
<宋時烈의 心情>“여든이 넘은 늙은이가 萬里 푸른 물결 한가운데 왔도다.
말 한마디가 어찌 큰 罪랴만은 세 번이나 내쫓겼으니 앞이 막혔구나. 북녘 大闕을 향해 머리를 돌려보지만 남쪽 바다에는 季節風만 부네”
本土와 격리된 絶海孤島, 섬은 이탈이 어려워 流配地 로 가장 많이 이용됐습니다.
섬이 많은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濟州道는 最適의 流配地였습니다. 전라도지역에 流配客들이 넘치자
尤庵 宋時烈 英祖 때 전라 監司는 이런 狀啓까지 올립니다.
<全羅監司의 하소연>
“본 道에 流配된 자가 너무 많아서 住民과 流配者가 함께 죽을 지경입니다.”
<해설>
섬 중에서도 流配客들을 감시할 行政力이 미치는 곳, 수군진이 설치된 섬이 자연스레 流配지가 됩니다. 가장 먼 섬 濟州, 重罪人들이 이곳에 왔습니다.
流配者들은 한 달 가까이 배를 타고 화복 포구에 到着합니다.
風浪 때문에 難破 당하기 쉬운 섬 現代의 交通手段과는 달라 濟州는 오는 過程 자체가 큰 刑罰이었던 것입니다.
“삼남대로를 걸어오는 길도 대단했고요. 또 강진이나 이진에서 出發해서 濟州道까지 오는 濟州 바다를 넘는 길도 만만한 길이 아니었고요. 때로는 漂流도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해서 流配길 자체가 참 苦難의 길이였고.”
流配는 절대 權力者에게도 찾아옵니다.
王도 피할 수 없는 罰이 流配였던 것입니다.
“朝鮮朝 500년 동안에 濟州道에 流配人이 200여명이 왔다고 하거든요. 200여명 가운데 唯一하게 王이 濟州道에 流配 왔는데 그분이 바로 光海君 입니다.”
朝鮮 15대 國王 光海君(妃, 王世子, 王世子嬪 포함) 그는 仁祖反正으로 廢位된 후, 강화도를 거쳐 濟州道에 流配를 옵니다.
1592년 壬辰倭亂의 발발로 宣祖는 恭嬪(공빈) 金氏의 소생인 둘째아들 光海君 李琿(광해군 이혼 1575~1641)을 급히 世子로 삼았고 分朝를 맡아 이끌며 戰亂 수습에 努力을 기울였다. 日本이 수도 및 평양, 개성 등을 占領하자 宣祖는 遼東(요동)으로 亡命하기 위해 世子에게 朝鮮에 殘留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라 指示한다. 이때 光海君의 小朝廷이 分朝이고, 宣祖의 의주 行在所는 원조정(元朝廷)에 대한 대칭 槪念이다.
光海君은 領議政 崔興源(최흥원 1529~1603)을 비롯해 分朝에 남은 重臣 10여 명을 이끌고 평안도 맹산·양덕, 황해도 곡산을 거쳐 강원도 이천에 자리를 잡고 활발한 活動을 벌이며 敵軍을 교란하다가, 이 地域에 日本軍의 威脅이 가까워지자 다시 황해도와 평안도 성천을 거쳐 영변에 머물며 分朝를 이끌어갔다. 이때 光海君은 각 地域에서 孤軍奮鬪한 義兵長들과 장수들에게 사람을 보내 상을 내리고 官職에 任命하는 등 그 功을 격려, 일본군이 서울을 물러난 뒤에도 各地를 다니며 軍과 백성을 격려하여 民心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또한 分朝의 의용대 또한 일본군 攻擊에 앞장서면서 對日抗戰의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데 寄與했다. 分朝에서 活動한 大臣의 한 사람인 鄭琢(정탁 1526~1605)은 정유재란(1597)이 발발하던 해에 李舜臣이 謀陷(모함)을 받고 監獄에 갇혔을 때, 1千 298字에 달하는 長文의 上疏文을 올려 李舜臣의 死刑을 만류하여 그의 목숨을 구하였던 事實도 있었다. 光海君은 죄 없는 백성이 겪어야 할 참혹한 不幸을 수없이 본 사람이었다. 영명했던 그는 戰爭의 慘禍를 누구보다도 몸부림 칠 정도로 實感하고 있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북방 누루하치의 철 기병은 막강한 戰鬪力으로 명나라를 파죽지세로 쳐내려 갔고, 멀지 않은 未來에 朝鮮을 넘볼 것이라는 것을 豫見하였다. 그리하여 북방에 정보력을 집중하는 한편, 후금을 인정하는 실리적인 外交를 폈던 것도 사실이다.
卽位 후 自身과 生死苦樂을 같이 하였던 사람들에게 衛星功臣으로 冊封하였다.
尹善道는 光海君의 亂政을 걱정한 時調 한수를 1616년(광해군8) 成均館 儒生으로서 廣昌府院君 이이첨(李爾瞻)·密昌府院君 박승종(朴承宗)·
文昌府院君 류희분(柳希奮) 三昌 등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李爾瞻 일파의 謀陷을 받아 함경도 慶源으로 流配됐었다.
(尹善道의 時調)
님을 믿을 것가 못 미들슨 님이시라
미더온 時節도 못 미들줄 아라스라
믿기야 어려오랴마는 이니밋고 어이리
<풀이>
님(광해 임금)을 믿겠는가 못 믿을 것이 님이로다
믿어 온 시절도 (사실은)못 믿을 것으로 알고 있었도다
믿기는 어렵지 마는 그렇다고 또 아니 믿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 光海君의 亂政 속에서 自身의 處身하기 어려운 處地와 光海君에 대한 솔직한 心境을 읊은 것이다.
한편, 1월 9일에 光海君은 가도사(假都事)에게 명하여 尹善道를 함경도 경원으로 압송하게 하였고, 1월 13일에 유학 이형을 먼 변방에 위리안치 했다.
<歷史資料 編輯>
여기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1623년 仁祖反正을 起點으로 王妃의 親庭(文化柳氏) 집안이 滅門之禍되었으나 祖父되시는 工曹判書 潛(1509), 長子 文陽府院君 柳自新(國舅), 逢原府夫人 東萊鄭氏(當時 女流詩人 鄭楊貞)과 文陽府院君 長子인 柳希鏗(進士 文陵君), 次子인 柳希聃(判決事). 文陽府院君 柳自新의 弟 柳德新(都正公)과 子弟들, 柳希鏗의 次子 柳忠立(大司成) 등은 이미 1623년 以前에 自然死 하셨기 때문에 仁祖反正이란 凶惡한 苦痛를 보지 않았음은 물론 京畿道 始興市 陵谷洞 山 32 墓域, 永慕齋 山 33번지 文陽府院君 柳自新 新道碑는 始興市 향토유적 제4호로 指定 溫存할 수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1623년 西人勢力의 仁祖反正으로 수십 명이 處刑당하고, 200여 명이 流配당했다.
이는 王朝의 붕괴로 이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이 終身刑인 定配의 사건이라 볼 수 있으며 그들 중에서도 文化柳氏가 多數를 이루고 있었다.
11~12세 이상의 文化人이 反正人物들이 仁祖의 處刑 命令에 이어 다음과 같이 定配 命令을 내린 것이다.
이들 중에는 朝鮮 제15대 王(光海君)과 王妃(文城郡夫人 柳氏) 王世子 夫婦는 물론 外戚이라 할 수 있는 國舅 文陽府院君 柳自新(1541~1612)의 三子인 文昌府院君 兵曹判書 柳希奮(1564~1623), 四子 副提學 柳希發(1568~1623) 등은 즉시 處刑당하고, 五子인 京畿監司, 禮曺參判 柳希亮(1575~1628)은 巨濟島로 圍籬安置 되었고, 22世 우부승지 柳孝立(1579~1628)은 제천에, 進士 柳斗立(1601~1628), 待敎 柳命立(1600~1647)은 巨濟島, 柳正立은 濟州에, 柳時立은 대정(大靜)에, 柳英立은 정의(旌義)에, 柳厚立은 남해 곡포(曲浦)에, 柳中立은 평산포(平山浦)에, 柳顯立은 거제 지세포(知世浦)에, 충현 縣監 柳鼎立(1583~1628)은 南海에 流配되었으며, 그 후 柳鼎立은 南海에서 解配되었으나 官職에 나아가지 않았다.
仁祖反正 以前 當時 이른바‘六希八立’(國舅 文陽府院君 柳自新 의 六男과 八孫을 뜻함)으로 불리였던 모두가 滅門之禍 되었다.
柳益善은 연좌시켜야 하는데, 현재 제천(堤川)에 있으니, 낭청을 내려 보내어 교형(絞刑)에 처하겠습니다.
凝川日錄에 금부가 仁祖에 또 아뢰기를 대개, “逆賊 罪人으로 나이가 차지 않은 자 중에는 11~12살짜리도 있으니, 만약 위리하여 출입을 못하게 금한다면 반드시 말라 죽을 염려가 있을 것이므로 이들은 모두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定配하되, 먼 변방으로 나누어 보내어 한 고을에 2~3인씩 본관의 노비로 정하고 위리안치 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모두 온전히 살 수 있어 측은히 여기시는 어진 정사에 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계사가 매우 온당하다. 나이가 차지 않은 자는 위리안치하지 말고 그들을 보전하도록 하라.”하였다.
丙子胡亂 속에 교동도로 移監된 光海君은 三田渡의 恥辱을 겪고 피해의식이 충만했던 仁祖는 三田渡의 屈辱 이후 쌀쌀한 바다 날씨에 濟州道 먼 곳으로 移送 가는 光海君에게 솜옷 한 벌을 보내주어 약간의 성의 표시를 했다하나 배위의 光海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도록 바다의 모든 方向을 가림 막으로 遮斷하였다는 말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째째해 보이는 성의 표시였지만 光海君은 적어도 자기가 죽임을 당하는 運命으로 보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바다 위라는 것만 알고는 엎드려 한 가닥 慰安을 받았을 것이라는 推測이 든다.
光海君을 교동에서 濟州까지 압송해 온 護送 隨行員 組織의 規模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아 光海君이 重要 監視 대상인의 存在로 認識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속오군 留鎭軍(유진군) 중에서 30名이 번갈아 가며 宿直하였다고 한다.
流配生活이라지만 거의 刑務所와 같은 幽閉生活이었다. 光海君은 流配地에서 집밖으로의 外出은 물론 방 밖으로의 外出도 制限을 받았다 한다.
강화도와 교동도에서 15年 이상의 歲月을 보낸 뒤에 남은 餘生을 보낼 光海君을 실은 流配船(移送船)은 1637년 6월 6일. 교동도의 포구에서 제주로 떠나 濟州道로 가는 뱃길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風吹飛雨過城頭 (풍취비우과성두) 瘴氣薰陰百尺樓 (장기훈음백척루)
滄海怒濤來薄幕 (창해노도래박막) 碧山愁色帶淸秋 (벽산수색대청추)
歸心厭見王孫草 (귀심염견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 (객몽빈경제자주)
故國存亡消息斷 (고국존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 (연파강상와고주)
“푸른 물결 성내 굽이치는 저녁녘 멀리 푸른 산도 가을의 슬픔을 띄었도다.
내 마음 한결 왕자 보기를 싫어하건만 나그네의 꿈엔 용상이 자주 보이도다.
나라의 存亡은 얻어 들을 길 없고 저녁놀 江山을 뒤덮을 제 홀로 孤舟에 엎드렸도다.“
都城 千里 밖으로 떠나야 하는 光海君의 心境이 도드라집니다. 아울러 自身의 廢位가 몰고 올 朝鮮의 어두운 앞날을 豫見하는 듯한 詩句는 그의 놀라운 慧眼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濟州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入港하였다. 포구에서 하루를 보낸 光海는 濟州로 들어와 處所에 安置되었다.
光海君(1575~1641)은 濟州로 移送 4年만인 1641년(인조 19) 7월 1일에 67歲로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던 生涯를 마감하게 되는데 光海君이 最後를 마친 이 집에 대한 記述은 朝鮮人이 아니라 外國人에 의해서 部分的으로 描寫되어 있다. 光海君이 쓸쓸히 죽은 때는 하멜이 표류해오기 12年 前이다,
社會 最下流 階層의 人間들이 光海를 영감이라 이렇게 함부로 불렀으니 평소 光海君이 당한 受侮(수모)의 수준에 理解가 간다. 기록은 光海가 이런 受侮를 당하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꿋꿋이 참았다고 했다. 濟州 牧使들이 光海君을 내놓고 虐待했다는 말은 없다. 光海君 末年에 濟州 牧使 李時昉(이시방)이 光海君을 각별하게 모셨다고 特記하고 있는데 末年에 老衰해진 光海君에게 대한 人間的인 연민의 情이 일어났기 때문인 듯하다,
濟州 牧使 李時昉은 反正軍에 末席으로 參加했던 反正인사였다. 光海君에 대한 反正 패거리 중에 唯一하게 베푼 마지막 人情이었던 것이 光海君에게는 多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流配 중에 숨을 거둡니다. 光海君의 訃音을 듣고 달려 가보니 계집종이 이미 싸늘하게 식은 光海君의 屍身을 염을 하고 있었다. 屍身이 상할 것을 염려한 李時昉은 朝廷에 狀啓를 올리고 지시가 있기 전 卽時 喪服을 입고 상을 치뤘다.
그의 臨終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죽기 전에 어렸을 때 헤어진 生母 공빈 김씨 곁에 묻어달라는 遺言을 남겼다고 한다.
仁祖는 禮曺參議를 보내서 禮를 표하고 그 해 9월 그의 屍身을 漢陽으로 運柩해서 매장했다.
光海君과 文城郡夫人 墓
그리고 光海의 生存했던 딸에게 物質的인 特典을 베풀고 光海君의 外孫(文化柳氏 後裔)들이 墓를 돌보도록 하였다. 그것이 그가 光海君에게 표했던 마지막이자 最大의 好意였다. 어찌되었건 國葬을 치르지 못한 悲運의 王이 됐던 것입니다.
<編輯者 註>
廢妃 柳氏{폐비 류씨, 1576년 음력 7월 21일(8월 15일)~1623년 음력 10월 8일(10월 31일)}은 朝鮮 제15대 王 光海君의 妃이다.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이라고도 한다. 文陽府院君 判尹 柳自新의 딸이며 본관은 文化이다. 1576년 태어나 1587년(선조 20년) 12歲 때 선조의 次男 光海君의 아내로 간택(光海君은 13歲 柳氏는 12歲)되어 文城郡夫人으로 봉해졌다. 그 뒤 光海君이 王世子로 책봉되자 王世子嬪이 되었으며, 그 후 光海君이 34歲로 卽位하자 王妃로 冊封되었다.
1623년 음력 3월 12일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反正을 일으켜 王으로 卽位하면서 柳氏도 남편 光海君과 함께 廢位되어 강화도에 流配되기 前에 王妃께서 反正을 일으킨 자들의 面前에서 단아하게 叱責하시길,
<王妃의 叱責>
"오늘의 反正이 大義를 위한 것이오?, 아니면 一身의 영달을 위한 것이오?." 하셨다. 이에 反正한 자들이 매우 곤혹스러워 하였던 사실로 전하고 있다.
그 해 6월 아들 폐세자 질과 며느리 朴氏가 流配地에서 탈출기도 실패 후 自決하였고, 결국 이 해 음력 10월 8일 柳氏도 廢位된 지 7개월여 만에 斷食과 火病으로 流配地에서 死亡하였다.
경기도 양주 적성에 장사지냈으며, 廢妃인 까닭에 陵은 造成되지 않았다.
2002년 11월 15일부로 사이버 朝鮮王朝라는 사이트에서 남편 光海君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柳氏를 “혜장왕후(惠章王后)”, 능호를 열릉(烈陵)으로 하여 추숭하였으나,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認定받지는 않는다. 일부 한자 문화권 사이트에서 光海君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등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사이버 朝鮮王朝라는 사이트에서 당시 위 표기로 2006년 廢妃 직계 後裔라 할 수 있는 本人이 當時代의 悲運의 歷史를 생각하며 各地에서 參與하여주신 文化柳氏 賢宗 약 50여명을 모시고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로 이동 雙墳 앞에서 정중하게 參拜를 올린 事實은 本人에게 늘 慰安이 되어 오고 있다.
“文城郡夫人柳氏之墓”
碑頭의 前面에는 구름속의 태양을 表現하고 後面에는 구름속의 달을 表現
光海君 墓와 妃의 墓 碑頭는 表現方式이 同一하다.
墓域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산59번지에 光海君과 文城郡夫人 柳氏와 쌍봉으로 南向하고 있다.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3호로 指定되었다. 墓域은 곡장(160×170×63)을 두르고 그 안에 封墳을 만들었으며 오른쪽이 光海君, 왼쪽이 文城郡夫人의 墓이다. 墓域은 全體的으로 단촐한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大君의 禮葬(예장)에 준하였기 때문이며 封墳 周圍에 石物은 없다.
文城郡夫人의 墓域을 보면 封墳 앞에 墓表가 있는데, 墓表는 민무늬의 장방형 대석(85×64×24)에 비신(57×18×164), 이수 부분은 구름무늬에 일월도가 있다. 光海君의 묘표와 달리 해가 구름에 가려져 있는 模樣이고 뒷부분은 달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 묘표의 앞면에는 “文城郡夫人柳氏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天啓三年癸亥閏十月二十九日禮葬”이라 쓰여 있다. 즉, 1623년에 세워진 것이며 뒷부분에 行蹟이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고, 글씨체로 보아 後代에 누군가가 다시 새겨 넣은 것으로 보인다. 글씨체도 조잡하다. 묘표 앞에는 상석(147×90×47)이 있고, 장대석을 놓았다. 상석 앞의 향로석(27×24×48)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夫人墓表石陰記
天啓三年癸亥十月初八日病卒於江華 命輟朝三日進素膳
五日禮曹堂上郞廳內官及京畿監司終始護喪干殯諸具該曹
一一下送 上遣中使致祭 特命隧葬閏十月二十九日葬于楊
州赤城洞亥坐巳向禮曹請以王子例一等禮葬定軍守護王子
墓步數外加給三百步返魂於長興洞舊第定內官宮人奉朝夕
朔望及四名日四仲朔祭奠官備祭需
가칭 “혜장왕후(惠章王后)”의 諡冊文(사이버 朝鮮王朝)
恩德을 내려 받아 現世에 거하며 오늘 이곳을 찾은 님의 親庭 피붙이인 저희(文化柳氏安山宗中 後裔)는 祖姑母 王后께 삼가 再拜하고 머리 조아려 말씀을 올리나이다. 우리 名家에서 태어나시어 한결같이 端雅하고 誠實하고 아름다우며, 그윽한 넉넉함과 곧고 고요함을 갖춘 빼어난 閨秀로, 일찍이 偃月(인월=반달이 못된 달)의 姿態를 이루어 이미 俔天(현천)의 德을 드러내시니,列朝께서 나라에 큰 福이 내리심이라, 儲邸(저저)에 들어서저오시어 매양 上殿의 顔色을 살펴서 받들되 기쁘고 즐겁게 하시었고, 항상 아랫사람을 거느림에 정숙하고 和睦하시었나이다. 그 厚德하심이 가칭 惠宗大王(光海임금)과 짝하시어 與望을 밝히셨으며, 國母로서 상서로움이 宮闕의 안 길에 서리어 모이게 하시었고 中宮의 위에 오르시어 王化를 天下에 기틀을 잡게 하시었고 國母의 儀表를 온 天下에 비추시었으니, 그 慶事스러움이 우리 모두에게 돌아오게 되었나이다. 中宮의 자리에 오르신 후에 늘 聖身에 德을 닦으시니, 이 나라 강토가 德化를 입어 그 厚德하심을 天下가 다투어 칭송하였으나, 그 聖德이 일백 년도 지나지 않아 사라짐(仁祖反正)을 어찌 알았겠나이까. 四百四十二年이 지난 지금에도 반짝이는 이슬 꽃이 널리 퍼짐이여, 달빛도 愁心에 젖었나이다. 厚德하신 용모와 着衣를 펼쳐 그려 뵙는 것이 여전히 계신 듯 하고, 버려두신 선패(仙佩)를 뵙는 것이, 마치 어디서 쉬고 계신 것만 같나이다. 이에 王后의 親庭 後孫들이 건곤(乾坤)처럼 크고 日月처럼 밝으신 그 厚德하심을 思慕하고 그리며, 존시(尊諡)를 가칭 '혜장(惠章)'이라 올리옵니다. 부디, 이 보책(寶冊)을 받드시고 오직 그 厚德하심을 天下를 위해 다시 보이시고 우리 門中(文化柳氏安山宗中)을 굽어 살피시어 後孫들이 千萬年이 지나도 그 厚德하심을 높이 稱頌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삼가 冊文을 올리나이다.
2006년12월11일 光海君과 王后 參拜者 모두 俯伏하고 柳 志 世 吟
王妃께서 당시 政爭(黨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부 大北의 臣下들의 過誤와 일신(一身)의 영달 위한 일부 성리학파들의 반란으로 廢妃되신 지 383년만인 2006년(병술년) 12월 11일에 우리 宗中의 충정으로 復位 되시기를 祈願 하나이다. 復位 후인 ?년?월?일에 신위를 본 종친회 회관(후에는 종묘 永寧殿)에 神主를 모실 때에 즈음하여 宗中에서 謚冊文을 올려 시호(諡號)를 가칭 '혜장(惠章)'이라 하고, 시호법(諡號法)에 부드럽고 질박하며 자혜롭고 어진 것을 '혜(惠:柔質慈仁)'라 하고 따뜻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모양을 지닌 것을 '장(章:溫克令儀)'이라 하였으므로 그리 定하려 합니다.
本 諡冊文은 王后을 稱頌하는 現時代 學者들의 뜻과 우리 宗中의 뜻을 加味하여 가다듬어 專門家의 諮問을 받아 定立되도록 安山宗中를 代表하여 교정하고자 합니다.
<編輯者 註>
王妃가 옥후 중에도 왕께 長文의 서한(朝野記聞의 中殿의 上疏文:천하의 대의를 잃을 것입니다.)을 보내시어 말씀하시길, "후금과의 관계를 버리시고 明을 도우소서"하셨다. 이에 王이 참으로 난감해 하셨던 사실. 王이 폐위된 후 군(君)으로 격하되시고, 王妃도 廢位되시어 군부인(郡夫人)으로 격하되셨다. 23일에는 왕과 강화(江華)로 안치되셨는데, 얼마 후에 세자 내외(內外)가 自盡(자진)하자 크게 傷心하시어 食飮을 전폐하시더니 10월에 역시 자진하셨던(48세) 사실이다.
왕이 辛巳년 7월 초 하루에 流配地 제주(濟州)에서 승하하시자 王의 유지대로 母의 묘(墓)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南陽州)에 성릉(成陵)이 모셔져 이에, 王后의 릉도 강화에서 모셔와 이곳 옆에 모시게 된 사실. 위와 같은 이러한 사실(歷史)를 우리들은 잘 알고 있나이다.
이로 인하여 王后의 孫이 絶孫되어 찾아드는 사람 없다 너무 서러워하지 마십시요 너무 늦은 감은 있으나 王后의 親庭 피붙이인 長大한 우리(文化柳氏安山宗中)들이 있아옵니다. 뜻있는 저희들이 가끔 王后을 알현(謁見) 하겠나이다.
<2006년12월11일 編輯者>
되돌아오는 길에 사당동 蓬原府夫人 東萊鄭氏 할머니 親庭家 어른(鄭惟吉,鄭昌衍) 墓域을 탐방하였다.
그 후 2010년경부터 全州 李氏 종약원의 이재천 회장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매년 7월1일 光海君 忌晨祭(기신제)를 奉行하여오고 있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
매년 7월1일 光海君 忌晨祭
中殿 柳氏의 1歲 위인 오라버니 霽嶠·峯陰 柳希亮(제교. 봉음 류희량)은 1623 仁祖反正으로 지금의 화성시 三尊(希奮.希發.希亮)里 중에서 唯一하게 巨濟島로 流配 위리안치 되어 5年이란 苦難의 歲月을 보냈으나 뜻하지 않게 仁祖反正 時 제천으로 流配되었던 長姪인 柳孝立과 아들인 柳斗立(15歲에 進士試 급제, 20歲에 文科에 급제) 등이 歸養살이하면서 다른 뜻을 품어, 女人의 가마를 이용해 서울에 있는 光海君 때의 臣下로서 새 朝廷을 怨望하는 자들의 집을 來往하면서 궁중의 시녀와 내시, 대궐문의 守門將 등을 통해 大闕을 쉽게 侵入할 수 있게 하였고, 미리 柳孝立의 子 宗善과 무리들을 서울에 잠입시키는 한편, 전 세마(洗馬) 허유(許逌), 전 좌랑 정심(鄭沁), 전 전적 김탁(金鐸) 등과 모의하고, 도감초관(都監哨官) 윤계륜(尹繼倫)과도 몰래 손잡아 내응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628년(인조 6) 1월 3일에 전 부사 허적(許?)의 고변으로 거사 直前에 탄로나 버렸다. 비변사에서 군사를 동원해 고변한 허선(許選) 등과 함께 잠복해 동대문과 남대문으로 무기를 싣고 들어오던 거사자들을 모두 逮捕하였다. 이에 光海君을 上王으로 삼고 仁城君 李珙(인성군 이공)을 추대하려는 柳孝立, 柳斗立 등의 음모는 불발로 끝나고 가담자 모두 處刑됨에 따라 이러한 逆謀事件에 연좌되어 流配地인 巨濟島에서 힘든 生活을 하고 있다가 絞首刑을 받게 된다.
霽嶠·峯陰 柳希亮 眞迹
記言別集 卷之二十六 遺事의 柳希亮事 原文
柳希亮字龍卿。柳氏敗。連坐絞於巨濟。斯人者素稱良善。韓義禁與書爲訣曰。無相負云。余心善之。追聞之。亦可悲。臨刑。問金吾小吏曰。韓知事有書否。曰。有。出其書見之。歎曰。爲我謝之。當死刑。人情安得不亂。我平日。作室於南郊。因號曰祭郊。今我絞於巨濟。此先讖也。嘗名兒曰斗立。今兒二十七死。天之所定。又何恨。以此復之。遂就刑云。其不亂如此。平日之操。可知。戊申仲夏上旬。
霽嶠·峯陰 柳希亮 眞迹(成均館 大學 圖書館)
玉皇高拱五雲端 황제가 오색구름에 팔짱끼고 앉았는데
絳節何人自弁韓 붉은 부절 받들고서 변한서 온 이 누구인가
追遠至情虞孝盡 조상 추모하는 마음 순임금처럼 지극하여
簡賢敷奏翟儀完 현인에 뽑혀 아뢰니 왕후 위의(威儀) 완성 되네
卽今大事無踰此 현재의 큰일로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니
從古忠臣不擇安 예부터 충신이란 편안함을 택하지 않네
十載舊賓珍重意 십 년 된 오랜 손님 진중한 뜻 지녔는데
薊門霜雪黑貂寒 계문의 눈서리에 검은 초피(貂皮) 차가워라
만력 병진 동짓달 상완(上浣 : 상순)
류희량(柳希亮 [1575(선조8) ~ 1628(인조6)])
柳希亮의 자는 용경(龍卿)이다. 柳氏는 남의 죄에 연좌(連坐)되어서 거제도(巨濟島)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당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본래 선량한 사람이라고 남들이 말하여 왔다. 한 의금부사(韓義禁府事)가 편지로‘서로 저버리지 말자.’고 영결(永訣)하였다기에 내가 속마음으로 착하게 여겼는데, 나중 들으니 심히 슬픈 일이었다. 형(刑)을 당할 때에 金吾(금오⇒의금부의 별칭)의 아전에게 묻기를,“한 지사(韓知事 한 의금 부사를 말함)의 편지가 없더냐.”하니, 아전이 있다고 하고 그 편지를 내어 주자, 보고는 탄식하기를,“나를 대신하여 답장해다오. 내가 死刑을 당하는 마당에 어찌 정신이 어지럽지 않으리요마는, 내가 평일에 남교(南郊)에 집을 짓고 인하여 제교(祭郊)라 이름 하였는데, 지금 내가 巨濟島에서 絞首刑을 당하게 되니 이것은 먼저 참언(讖言)이 된 셈이요, 아이의 이름을 斗立이라 하였는데, 지금 아이가 스물일곱 살에 죽게 되니 이것은 다 하늘이 정한 것이라 또 무엇을 한 하리요. 이러한 뜻으로 답을 써 보내라.” 하고 드디어 형장(刑場)에 나섰다 한다. 그 정신이 어지럽지 않기가 이와 같으니 평일의 操行(조행)을 가히 알 수 있다. 戊申年 5월 上旬에 쓰다.
여러 가지 書體 가운데 巨濟島 流配 중 쓰신 것으로 추정되는 眞迹이 남아 있다.
柳希亮之女 <凝川日錄에서 1631(辛未*仁祖9)>
府啓大槪。松林副正彥璟。以王室之親。甘心托婚於逆屬。乃以其子。作贅於 柳希亮之女。請削奪官爵。答曰依啓
사헌부에서 아뢴 것은 대개,‘송림부정(松林副正) 언경(彦璟)이 왕실의 친족으로 역적의 가족과 혼인하기를 달게 여겨, 그 아들을 류희량(柳希亮)의 딸에게 장가보냈으니 관작을 삭탈하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編輯者 註>
梅墩 柳廣善(매돈 류광선 1616~1684)은 仁祖反正 1623년 겨우 7歲 되든 해에 禮曺參判 祖父(柳希亮)님은 巨濟島로 父親(柳斗立)은 제천으로 流配되어 滅門之禍를 몸소 맞게 되어 11~12歲 미만 어린이라 이렇다 할 벌을 겨우 피할 수 있었으나 5年이 흐른 12歲(1628)되던 해에 堂叔 柳孝立과 父親 柳斗立 등의 逆謀事件으로 堂叔과 父親 등은 곧바로 處刑되고, 저 멀리 巨濟島에서 圍籬安置되어 孤獨하게 流配生活을 하고 계시던 祖父(柳希亮)님마저 絞首刑을 받아 他界 하시자 生死의 기로에서 어쩔 수 없이 流配 命令이 내려진 것은 아니지만 流配 刑罰중에서 가장 약한 本鄕安置 신세로 어린 나이에 故鄕을 떠나 八道를 流浪生活을 하며 平生 고달픈 길 위의 作詩者로 헤매야만 하였다.
始祖 大丞公의 23世. 字는 여거(汝居), 호는 매돈(梅墩). 매돈유고(梅墩遺稿) 詩文集은 現在 두 가지가 있으며 그중 하나는 6권 6책으로 되어있고, 또 하나는 매돈고(梅墩稿)로 3권으로 되어있어 作詩는 생각보다 더 많으며 일부 겹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본 해설 책은 6권 6책을 근거로 한 것이고 후에 겹치지 않는 매돈고(梅墩稿) 3권에 있는 작품은 추가 하려하고 있다. 柳廣善의 墓誌銘은 姨從弟 禮曹參判 博泉 李沃(이옥 1641∼1698)이 지었고, 序文은 大司成 閔昌道(1654∼1725)가 썼으며, 遺稿集 本文은 副提學 蔡彭胤(1669∼1731)이 筆寫하였다.
원본은 미국 하버드 대학 옐친 도서관에 있다고 한다.
梅墩遺稿 권 1권∼5권에 시 1,260수, 권6은 모두 63편으로 사(詞) 2편, 부(賦) 6편, 전(箋) 1편, 계(啓) 1편, 통문(通文) 1편, 잠(箴) 4편, 비(碑) 1편, 명 4편, 송(頌) 5편, 송사(頌辭) 1편, 찬(贊) 3편, 서(序) 2편, 설(說) 2편, 기(記) 6편, 기후(記後) 2편, 변(辨) 1편, 평(評) 2편, 찬·명(銘)·전(傳)·행장 각 1편, 제문 14편, 부록인 묘지명(墓誌銘)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아직 刊行하기 위한 편집 마무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차례가 다소 뒤바꾸어지는 등 첨삭이 덜 된 부분이 간혹 눈에 띈다. 내용은 구성의 체재에서 알 수 있듯이 거의 詩로 채워져 있다.
영·호남에서 關北(관북)까지 발길 닿는 대로 流浪하며 읊은 詩들로 우리나라의 名勝地는 모두 網羅되었고, 각 고을의 人心까지 아울러 전하고 있다. 1권 3쪽의 〈曬腹書 쇄복서〉는 뱃속에 貯藏된 數많은 冊을 하늘에 쬐어 말린다는 中國 郝隆(학륭)의 古事를 인용한 詩題로 집안이 仁祖反正으로 一時에 沒落한 悲哀를 表現하고 있다.
4책에는 영·호남의 奇勝(기승)을 流浪하며 적은 것이 담겨져 있다. 〈서행록 西行錄〉은 길을 나서며 준비한 行裝의 品目을 자세히 적고 있는데, 古劍(고검) 한 자루가 끼어 있어 옛 선비들이 검(劍)도 멀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종덕 정리>
<編輯者 註>
梅墩遺稿(매돈유고)나 梅墩稿의 모두 첫머리 詩文은 獨鶴吟으로 시작되고 있다.
獨鶴吟
丹頂凝砂雪作衣 亭亭逈立臨苔磯 得非出遊徐佐鄕 無乃歸來丁令威
窺鱗啄萍意己闌 引領欲試冲雲飛 天長玄圃老心遠 秋收靑田孤夢歸
淸夜頻驚松上月 戞然一響聞天扉 昏鴉無意自滿林 聇向塵寰爭是非
또한 梅墩 居士 柳廣善(1675-1616=60歲) 先祖님이 回甲을 맞아 單身 九月山 始祖 大丞公 할아버지 墓所에서 祭祀에 올리는 글을 다음과 같이 하고 祭를 올렸으며
維歲次乙卯十一月乙酉朔十五日己亥裔孫廣善謹具酒果之奠來祭于始祖大丞公之墓而敢告曰奧我鼻祖肇迹玆卿功
膚暢轂翼輔麗王慶紹蟬聯源瘠流長如楊伯僑若杜當陽維西岳鳳舞龍翔遺塚傳奇於문效祥八百經祀冠冕相望裔孫
辱先隤聲玷光痛在詬大心焉若湯然猶念夲在遠難忘暮齒省掃至願始償尊靈不昧翼垂陰相聊薦菲薄神來洋洋尙饗
學者들에 의하면 6권 중 제5권의 91쪽〈謹次瞻谷堂叔韻(근차첨곡당숙운)은 100韻(1000字)의 巨作으로 그의 가장 뛰어난 作品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奎章閣 圖書에 있다.
<編輯者 註> 謹次蟾谷堂叔韻寄崔文叔吟案一百韻
采藥黃山北誅茅白谷陽 風塵迷故國蓬梗寄他鄕 貌謝悲秊疾愁煩怨夜長
徒燃心裏火嬴得鬢邊霜 北極長回首南雲每入望 哀哀猿獨叫急急鴈孤翔
美景羞臨鏡佳辰强擧觴 天邊久憔悴澤畔幾彷徨 古匣琴書澁寒畦杞菊荒
方當摧羽翮何必露文章 危險人心見竣辛世味嘗 殊方輕旅客末俗重豪强
競笑登樓粲誰憐鑿壁匡 十年磨古劒三月聚行糧 魚鳥時相狎機心亦己忘
窮居雜氓戶行路混几常 弱歲懼奇禍中年困避羌 幸存殘命在倍覺客神傷
東走無蒪興西歸失草堂 雍州空送淚杜曲但回腸 往者胡馳突于今尙獗狂
威儀思覩漢民望屬歸唐 戮力嗟諸將中興美我王 少康終復禹太戊竟興商
玉壘親戒卒金輿返未央 無生全卽墨效死守邦疆 胡虜誰乘釁皇家未絶綱
哀彼靑衿子空潛白首卽 艱危見節義歲晩有松篁 大老調元鼎群公補袞裳
華陽歸牧馬海上泣看羊 老去靑藜杖平生古錦囊 戰爭看白蟻世事覺黃梁
一自兵戈後難逢宴會場 生靈但愁苦道路有捿遑 慕義無廉蘭交情孰范張
厮徒綬若若僕隸氣揚揚 士有悲登屺民多賦陟岡 股肱誰耿賈明哲果宣光
府庫須金帛宮闈出粉粧 舳艫連海浦漕轉接荊襄 不避當道虎誰驅入室狼
連雲空粉堞蔽日但金槍 長痛三靈震潛悲萬姓瘡 河西碓控扼關右壯堂隍
幾日天衢直何時寓縣康 殘生同旅燕歸思逐危檣 自倚顯鸚鵡人嫌詠鳳凰
宜須存戒懼豈可闕周防 大府多英俊名材信杞樟 渭竿來入武莘耒往扶湯
撫點肝腸苦傷時涕洒滂 開帷風淅淅臥病雨浪浪 燒短三條燭銷殘一辨香
沉思竄嶺徼遠憶放江湘 閱史千秋近看圖百代忙 講書悲夏子學易笑京房
歲暮凋群品天寒悶衆芳 姓名嫌記問身世學潛藏 舊物烏皮几行藏白木床
形神甘寂寞生活劇凄凉 魍魎秋山外黿鼉水國傍 登高暫策理乘興棹相將
崔子眞超衆碓才不可當 詞鋒剸兕象述作富元央 芬苾開芝室淸和飮桂醬
群書探百子墳典考三皇 淸夜時來會文星色動芒 族親敦異姓居住喜同坊
爽論金天肅新詩玉佩鏘 共看開縫帙相示出縹箱 己科懸金邙寧論佩玉璜
但能長揭揭不肯强蹌蹌 每憤人無罪曾憐我有喪 仁慈眞卹急明決可誅贓
我性元多癖耽奇疾在肓 山前拜老石宅畔識枯桑 世共多憎嫉君猶不見妨
阻談心怫鬱接袂氣軒昻 刺史與文敎名儒盛郡痒 民安歌宿麥政洽詠甘棠
新菜初盈把佳魚欲滿筐 居然具茅屋從此頓行裝 坡暖宜栽栗田肥可種薑
柴門臨別浦孤島送鳴榔 靜試囊中法閑探肘後方 市皆無駿骨世未有王良
仰面天何邈低頭地亦茫 今來疲困頓當日志騰驤 望絶名聞盛寧期道德彰
世紛嗟史逸점熄歎詩亡 驅雀惜禾黍養鷄搔背庠 堪飢面色黑耐凍肉皮黃
往歲仍軍旅頻年値旱蝗 塵琴絶絃柱誰復聽峩洋 惟被石橋老我之諸父行
被恩歸故里養拙臥寒塘 天道由來定吾宗必再昌 餘生那自保窮達任穹蒼
註釋⇒本人은 漢詩에 대하여 門外漢이지만 하나의 作品이 100韻이나 되는 이렇게 긴 作品을 어느 漢詩 作品에서도 보지 못하고 梅墩居士 柳廣善 先祖의 作品에서 처음 접하였으며 어느 누구도 當時의 作家의 心情에 맞게끔 解釋하실 분도 아직 찾지 못하였다.
뿐만아니라 身心을 닦는 聖地(修理寺)에서 梅墩居士 柳廣善은 이런 詩를 읊었다.
修理山 남쪽 중턱에 修理寺라는 절이 있다. 지금은 비록 영락했어도 예전엔 큰 절이었다고 한다. 신라 진흥왕 18년(558년)에 建立된 유서 깊은 사찰로 한때
암자만도 12곳을 거느렸으나 壬辰倭亂과 韓國動亂을 거치면서 쇄락했다고 한다.
創建 當時 身心을 닦는 聖地라 하여 修理寺라 했는데 그 후 산 이름조차 修理山이 되었다고 한다. 修理寺는 고려중기 佛敎의 종파인 유가종 중심 도량의 한곳이요 王室과 관계가 깊었던 곳이었다. 그것을 고려의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쫓기고 있을 때 보호를 받은 곳이 삼각산 신혈사 유가종 사찰 장의사요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修理寺는 당시 安山에 있으면서 王室과 두터운 인천이씨, 안산김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인천이씨는 대대로 유가종 승려를 배출해온 가문이었다. 고려 8대 현종은 강조가 쿠테타를 일으켜 왕실의 불륜의 씨앗이라며 목종을 폐위 비운의 고아를 데리다 앉힌 주인공이다.
태조 왕건의 손자면서도 어려서 조실부모한 현종은 소년 시절에는 억지로 삭발 출가를 하기도 하였다. 적통이 끊기게 되자 김치양이 헌애왕후와 사통해서 낳은 아들을 임금으로 삼으려 흉계 절간의 왕손에게 내거나 독이 든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구사일생으로 현종은 살아났다. 그것은 스님들의 도우심 때문인데 한 노승이 방안에 토굴을 파서 그 위에 침대를 놓아 숨기는 등 방책을 썼다. 그러니 현종이 유가종의 사찰과 밀접하고 修理寺는 繁昌할 수 있었다. 그러한 修理寺를 仁祖反正과 柳孝立,柳斗立 모반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光海君의 다섯째 妻男 柳希亮의 孫子인 柳廣善이 다음과 같이 詩를 읊었다.
<編輯者 註>
修理寺에서(梅墩居士 柳廣善 作)
限不藏身萬衲中 승이 되어 숨지 못한 것이 못내 한이 되어
百年江漢暮途窮 백년 강한에 저물어 길이 막히었네
無端旅倚東樓柱 까닭 없이 동쪽 누각의 기둥에 기대나니
月落泉鳴曉洞空 달은 지고 샘물 울고 새벽 고을이 비었다.
1988년간 “시흥군지에서”
이러한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비록 流配라는 罰을 받지 않았더라도 11歲~12歲가 되어 成長하게 되면 政敵으로부터 연좌 모함이 있기 때문에 賤人 이하로 八道를 彷徨하여야 했음을 알 수 있다.
梅墩居士 柳廣善 기록
字汝居號梅墩文化人斗立子年十三遭家禍 廣善曰曰禍家子不文又何以齒人讀書數年文乃大暢於是斥臧獲市天下古今書蓄一室而居焉晝夜誦覽發爲文章事母孝母病眼廣善操扇辟蠅貫三夏無一息
집안이 禍를 당하였으나 글을 배워야 한다는 一念으로 가난을 걱정하지 않고 天下古今의 책을 사들이고 學問에 전념하였다.
어머니가 眼疾(눈병)이 심하였는데 삼복더위에 파리를 쫓느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精誠스럽게 부채질을 하는 등 孝子였다는 古文書 事實(상위 원문)이 여러 곳에 記錄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詩文에 능통하여 朔寧 崔氏인 어머니 여동생의 子이고 25歲 손아래인 承旨,京畿觀察使,禮曹參判을 지낸 博泉 李沃(1641~1698)에게 詩文을 가르쳐 주었으며,博泉 李沃이 한때는 己巳換局으로 북청(北靑)에 流配되었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풀려나 승지에 등용되고 京畿道觀察使를 거쳐 1692년 禮曺參判이 되었다. 그러나 직간(直諫)을 잘하여 여러 차례 流配당하였으며 그와 뜻이 통하여 함께 遊覽하며 交分을 쌓았다는 사실이 作品 곳곳에 隱喩(은유)되어있다.
<해설>
女性도 流配에서 除外되지 않았습니다.
辛酉迫害의 風浪속에 黃嗣永(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고 黃嗣永은 處刑됩니다.
그의 婦人이자 丁若鏞의 조카인 丁蘭珠, 그녀는 濟州 官奴로 流配됩니다.
그녀의 아들 黃景漢은 가장 어린 流配者였습니다.
당시 두 살이었던 景漢은 추자도 流配 命을 받고 어머니 丁蘭珠(정난주)와 生離別을 해야만 했습니다.
濟州로 향하던 길에 丁蘭珠가 아들을 내려놓은 추자도, 그의 아들은 住民이 發見해 기릅니다.
黃景漢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왜 버려졌는지 모른 채 살았습니다.
그가 流配者였던 사실은 백여 년이 지난 후 世上에 알려졌습니다.
“오상선씨가 소 풀 먹이러 왔다가 아이를 구해서 키워가지고 지금도 오씨와 황씨는 結婚을 하지 않고 한 집안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流配地에 到着하면 고을 守令이 流配者의 居處를 정합니다.
그 주인을 保守主人이라 불렀습니다.
流配人들은 때로 保守主人에게 冷待를 받기도 합니다.
朝鮮 正朝 때, 추자도에 流配온 萬言詞 安肇煥(만언사 안조환)은 노골적으로 구박받은 事例입니다.
“방 한 칸에 罪人이 되고 나그네인 나는 잘 때가 없네. 갈대로 엮은 자리 한 장 주어 처마 밑에서 거처하니 찬 땅에 습기가 축축하고 벌레들도 많기도 많구나.”
流配者들은 政治的 生命에 따라 相反된 待遇를 받곤 합니다.
政界 復歸 可能性이 있는 流配者는 후한 待接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流配者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됩니다.
“만약에 이 人物이 나중에 中央 朝廷에 다시 復歸해서 要職에 오를 可能性이 있다. 라고 치면 집주인이 未來를 바라고 投資槪念으로 해서 대우를 잘 해줄 수도 있는데 도저히 中央에 다시 復歸할 可能性이 없다. 라고 할 경우에는 아주 賤待를 많이 하죠. 그래서 비가 세는 방에 못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마굿간에서 자기도 하고”
포항 장기, 이곳은 100여년의 시간차를 두고 조선의 大學者 두 사람이 流配를 옵니다.
바로 尤庵 宋時烈과 茶山 丁若鏞입니다.
士林을 左之右之했던 宋時烈과 天主학쟁이라는 汚名을 쓴 丁若鏞의 流配生活은 대단히 달랐습니다.
그를 기리는 서원이 세워질 정도로 장기에서 尤庵의 影響力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茶山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웠고 視線도 차가웠습니다.
“여기가 예전에 살던 집으로 이전을 합니다.”
茶山은 尤庵과는 사뭇 달랐던 自身에 대한 冷待를 茶山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중림서원이 마산리의 남쪽에 있으니 쭉쭉 뻗은 대나무와 느릅나무 새잎이 단비에 젖었네. 촛불 들고 멀리서 찾아가도 반기지 않고 시골사람들, 아직도 宋 尤庵만 이야기 하는구나”
流配의 어려움에는 風土病도 있었습니다.
南海 노도에 流配 온 西浦 金萬重, 그는 이곳에 流配 된지 3年 만에 風土病으로 生을 마치게 됩니다.
濟州에 流配된 소현세자의 두 아들 또한 風土病으로 숨졌습니다.
流配地를 일컫던 말, 장기서린 곳, 장기란 細菌이 생기는 더위와 濕氣를 말합니다.
風土病은 장기로 인해 생긴 病이었습니다.
추사도 濟州 流配時節 風土病과 싸웁니다.
그의 流配는 극악한 섬에서 살아남기 위한 鬪爭이었습니다.
“벌레들에게 시달렸을 것 아니에요. 빈대라든지 이라든지, 이런 것들. 그리고 겨울에는 추워서 떨고. 그러다보니까 잘 못 먹은 대다가 그런 벌레들에게 시달리고 그렇게 살다보니까 風土病에 걸리거든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죽음이 攻擊하는 속에서 살아내기 거든요.”
流配 길에서 모든 것과 헤어졌던 流配者들, 그들은 流配地에서 가장 큰 離別을 만납니다.
바로 世上과의 離別, 孤立이었습니다.
그들이 살아 나가야할 배수는 孤立이라는 象徵的으로 보여줍니다.
탱자 가시 담을 둘러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곳, 그곳에 流配者를 가두는 것을 圍籬安置라고 했습니다.
이는 重罪人들에게 해당되는 刑罰로 流配中의 流配였습니다.
3미터 담으로 둘러싸여 圍籬安置 生活을 했던 기준, 그의 苦痛은 絶叫에 가깝습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고 백주 대낮 이라도 황혼 무렵 같았다. 산 무 덤이라 하는 것이 이것 아니겠는 가. 황천 아래로 들어가는 것 같 았다.”
圍籬安置라는 갇힌 空間에서 流配 者들은 비로소 자신의 處地를 實 感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衣食住를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流配의最惡圍籬安置
이제 그는 高官이 아닌 罪人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나이에 大司憲까지 올랐던 趙光祖는 그 박탈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 니다.“그 누가 가련타 하리. 화살 맞은 새 같은 신세를. 스스로 우습 구나. 말 잃은 늙은이 같은 마음이 잔나비와 학이 내가 돌아오지 않는 다고 꾸짖네. 나가기 어려운줄 어 이 알리. 복분 중에 있는 것을”
하루아침에 낙엽처럼 땅에 떨어져 버린 자신의 處地, 그리고 앞이 보 이지 않는 캄캄한 앞날들, 그런 絶
望的인 心情을 못이긴 流配者는 脫出하거나 심지어 自殺같은 極端的인 行動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진도, 그 수려한 景觀 뒤에는 流配者들의 서글픔이 있습니다.
설움을 못이긴 한 流配者가 配所를 나와 산을 오릅니다.
그는 벼랑 위 바위 속에 들어가 한 달 동안 울분의 時間을 보냅니다.
戊午士禍로 流配 온 忘軒 李 胄, 그는 赦免 消息이 없자 自暴自棄했던 것입니다.
“사군자가 이 세상에 나면 반드시 忠孝로서 스스로 기대하는데, 나는 일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이 世上을 살아갈 뜻이 없었다.”
모래우는 소리가 십리나 간다는 명사십리, 이곳에 모래울음 傳說이 생긴 건 한 流配者가 살다간 以後입니다.
朝鮮 後期 문신 李世福(이세복 1695년-1786), 그는 流配의 피맺힌 설움을 이 바닷가에 토해냈습니다.
손톱이 닳도록 모래밭 위에 詩를 쓰고 밤마다 서럽게 울었던 李世福, 그가 떠난 후에도 밤이면 이곳에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流配地에서 漢詩를 남긴다든가, 歌詞를 남긴다든가 하면서 流配 生活을 自身의 삶으로 끌어들이는 그런 사람도 많이 보이고, 그렇지 않고 人生 파탄이 오는 사람들도 있고, 거의 요즘 말로하면 精神病的 수준의 그런 狂氣를 보이는 流配人들도 있고 그렇죠.”
流配者들은 머나먼 流配地에 와서도 끊임없이 監視를 받아야 했습니다.
保守主人은 流配人을 監視해 관아에 報告 해야 만 했습니다.
流配者의 일탈이나 陰謀를 念慮해서였습니다.
朝鮮의 名筆 圓嶠 李匡師가 함경도 부령에 流配되자 그곳에 學派가 形成됩니다.
불안한 朝廷은 그를 진도로 移配시키지만 또다시 제자가 몰려 이곳 신지도까지 오게 합니다.
<해설>
“요즘말로하면 거의 學派를 하나 形成하게 되는데 조정에서 그것을 알고 그 다음에 찾아온 제자들은 곤장 쳐서 다 解散시키고 流配地를 제일 남쪽 끝으로, 가장 북쪽에서 제일 남쪽 끝으로 流配地를 바꾸는 그러한 일화들도 있고, 그래서 이런 A급 政治犯들의 경우에는 상당한 流配를 갔어도 상당한 風波를 몰고 다닌다.”
流配者가 아무리 먼 僻地에 있다 하더라도 政敵들의 警戒는 절대 늦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라도 賜死 命令이 날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화순으로 流配 온 趙光祖는 살아 돌아가지 못합니다.
불과 35일 만에 賜死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일곱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집주인을 불러서 내가 나중에 당신의 신세를 갚으려고 했는데 못 갚고 오히려 참혹한 꼴을 보여주게 돼서 미안하다. 라고 사과하고, 그 다음에 심부름하던 아이도 불러서 내가 너에게 신세를 갚으려고 했는데 갚지 못하고 죽게 돼서 미안하다. 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되죠.”
그는 끝내 알리지 못한 自身의 忠情을 詩로 적고 賜藥을 들이킵니다.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 거짓 없는 이내 정성을 환하게 비추리라
趙光祖가 죽고 그의 屍身은 친구 학포 양팽손이 거둡니다.
賜死된 지 1년 동안 그의 屍身은 故鄕에 가지 못합니다.
流配된 자는 그 죽음까지도 悲慘한 運命이었던 것입니다.
流配라는 것이 심한 경우 집안의 沒落으로 이어집니다.
國事犯에 연루되면 子孫들의 벼슬길까지 막히게 됐던 것입니다.
때문에 流配者들은 늘 가족에 대한 죄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流配地에서 茶山은 科擧길이 막혀 공부하지 않는 아들들을 꾸짖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미안함을 그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廢族이 되어 글도 못하고 禮節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내 귀향 살이 고생이 몹시 크긴 하다만 너희들이 讀書에 정진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流配者들에게 家族은 미안함의 대상이자 끝없는 그리움이었습니다.
평소 孝子로 이름이 났던 西浦 金萬重,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流配가 더 苦痛스러웠습니다.
그가 流配地에서 남긴 많은 글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오늘 아침 어머니를 그립다는 말을 쓰자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이미 눈물을 앞을 가리네.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다시 던져버렸는고”
流配地에서 家族의 죽음을 맞을 경우 그들은 그대로 무너지고 맙니다.
秋史는 濟州 流配 中에 婦人의 죽음을 듣게 됩니다.
罪人의 婦人이 되게 한 것에 대한 罪責感, 婦人의 마지막 숨소리를 듣지 못하고 葬禮마저 마주할 수 없다는 기막힌 슬픔, 孤獨 속에서 맞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切望의 끝에 서게 합니다.
“월하노인 통해서 저승 세계에 하소연하네, 내세에는 우리 夫婦 바꾸어 태어나리.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아 천리 밖에서 그대에게 이내 悲痛한 心情을 알게 하리라”
천리 길을 걸으며 離別하고 천리 바다를 건너며 切望하며, 圍籬安置를 견디며 눈물 흘렸던 流配者. 이렇게 홀로된 그는 드디어 世上과 對面하게 됩니다.
“한 人間을 날개를 전부 다 잘라버리는 그런 경우죠. 날아가지 못하게. 그러면 이제 靈魂으로 날아야죠. 마음의 自由自在로서 날아야 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좀 더 慘憺한 그런 삶인데, 慘憺한 삶인데 그야말로 眞率한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뜨겁게 交叉하는 곳 流配地.
그들이 이곳에서 마주한 것은 앞으로 견뎌내야 할 시련과 좌절이었습니다.
“홀로 거처하는 곳이라 왕래하는 사람 없네. 다만 고독한 나를 비춘 밝은 달을 불러본다. 번거로운 그대들아 내 人生事 묻지 말게나. 일학마다 구름이오 산은 겹겹이네”
罪人이라는 汚名을 쓰고 險難한 流配 길을 오른 流配者들, 그들은 고개를 넘으며 權力의 虛妄함을 처절히 느끼고 그동안 自身의 이름을 빛내주었던 모든 것들과 訣別하게 됩니다.
파도가 굽이치는 茫茫한 바다를 건너면서 生死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앞날을 切感합니다.
그렇게 처참한 心情으로 到着한 流配地, 그러나 流配는 그들에게 더 큰 苦痛을 짊어지게 합니다.
낯선 環境에서 그들은 배고픔과 酷毒한 추위, 그리고 疾病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華麗한 벼슬살이에서 비참한 流配 罪人으로의 갑작스러운 變化, 그들은 自身의 處地를 부정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切望뿐입니다.
학문을 논하던 벗과 따뜻했던 家族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 그들은 절대 孤獨 속에서 살아나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流配는 그들에게 홀로서기를 要求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과 離別하고 혼자가 되었을 때 流配者는 비로소 만나게 됩니다.
그동안 外面했던 것들과의 맞대면, 이제 그들은 새 삶을 살게 됩니다.
茶山 丁若鏞은 1801년 辛酉迫害 風浪 속에 강진으로 流配를 옵니다.
丁若鏞이 강진에 와 처음 머물렀던 읍내의 한 주막, 모두 自身을 外面해 겨우 이곳에 들게 된 그는 좀처럼 失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挫折感에 빠져 한동안 술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1년 가까이 괴로움에 虛送歲月을 보내고 있는 그를 보다 못한 主母는 그에게 忠告합니다.
헛되이 살지 말고 제자라도 키우길 권했던 것입니다.
老人의 忠告에 비로소 丁若鏞은 自身을 추스르고 일어나게 됩니다.
황상이라는 住民身分의 학동을 시작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流配者들, 그들에게 書堂 訓長은 가장 一般的인 生界維持 方法이었습니다.
秋史 金正喜의 流配地 濟州, 그의 流配地 濟州 대정은 가장 重罪人이 올 정도로 살아나기에 酷毒한 곳이었습니다.
이 慘酷하고 외로운 流配地에서 그는 지방 유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괴로움을 견뎌갔습니다.
많은 時間을 제자 敎育에 沒頭했던 그는 가르침을 통해 처음으로 낮은 身分의 사람들과 만납니다.
敎育이란 身分과 階級을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해설>
“원래 양반들은 양반 제자를 거느리는 게 당연한데 추사, 18세기 이후에 달라진 여러 가지 特徵的인 하나가 秋史 같은 사람이 중인계급이라든가 賤民階級들을 가까이 하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상당히 注目되는 變化인데 그런 덕택에 秋史先生이 濟州에 와서 濟州道의 못사는 친구들을 자기 제자로 두게 되고, 가르치게 되고, 배출하게 되면서...”
朝鮮時代에 地方은 文化나 敎育에서 소외되었습니다.
특히 외딴섬은 더 심해서 그에 대한 갈증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뭍에서 온 流配者들은 섬에서 敎育과 文化의 傳達者 役割을 했습니다.
신유박해로 同生 丁若鏞과 함께 流配길에 올랐던 손암 丁若銓, 그는 처음 이 우의도에 머물렀다가 대흑산도로 옮깁니다.
대흑산도 住民들 子女 敎育을 付託했기 때문입니다.
丁若銓은 이곳 사천 書堂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갑니다.
中央에서 벼슬하던 출중한 선비가 流配 올 경우 住民들로서는 歡迎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해설>
“손암 丁若銓 같은 경우 흑산도에 流配를 가는데 흑산도 사람들은 요즘말로 하면 본의 아니게 강남 8학군에서 가장 잘 나가는 課外敎師가 시간당 백만원 하는 課外敎師가 그 地域에 온 겁니다.”
宋時烈의 流配地였던 포항 장기, 그가 다녀간 뒤 이곳은 學問的 雰圍氣가 고조됩니다.
궁벽한 시골에서 宋時烈 같은 當代 最高 學者의 學問을 접하기란 드문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尤庵 선생님이 여기에 오신 것은 본인에게는 不幸이었지만 우리 장기인들로 봐서는 상당한 幸運이었다. 그런 高級文化를 접할 수 있었고, 中央의 情報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장기인들에게는 매우 多幸스러웠고 장기 人脈을 형성하고 장기 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그런 雰圍氣를 조성하는데 일익을 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朝鮮時代에 濟州사람들이 尊敬했던 이들의 위패가 모셔진 오현단, 충암 김정, 동계 정온, 尤庵 宋時烈, 다섯 명 중 세 명이 流配人 입니다.
이는 濟州道에서 流配人들의 영향력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제자를 기르며 學問的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朝鮮時代 濟州 최고 敎育機關은 귤림서원에 세원 진 것도 流配者들의 영향이 컸습니다.
“桐溪 鄭蘊(동계 정온)이라든가 이런 분들이 流配 오면서 그나마 끊어졌으리라 믿었던 남양학파가 오히려 濟州道에 와서 더욱 더 융성하는 이런 계기를 보게 됐는데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인데 流配人의 영향이 아니고서 도저히 얘기할 수 없죠.”
강진읍 내에서 8년을 보낸 후 茶山 草堂으로 거처를 옮긴 丁若鏞, 그의 사상이 꽃피었던 茶山 초당에서 제자들도 깊은 학문의 世界로 나아갑니다.
낮은 계층부터 양반 자제들까지 몰려들었던 茶山 草堂은 뜨거운 學問討論의 장이었습니다.
茶山의 제자 중에는 中央까지 進出해 학문의 위상까지 떨친 이들도 나옵니다.
그리고 이들은 스승이 떠난 뒤에도 茶山 學堂을 형성해 地域에서 茶山의 學風을 이어나갑니다.
다산이 뿌린 學問의 씨앗이 깊이 뿌리를 내렸던 것입니다.
“최소한 20명 이상의 그런 학자들이 排出됐는데 정말 자기 앎을 後繼 世代에게 전수시켜주기 위해 온갖 努力을 다하고 그들이 다 큰 學者가 많이 나왔잖아요. 아직도 신분이 낮은 階層에 특히 황상(常賤)이라는 낮은 身分으로 그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流配는 호남 사림이 형성되는데 큰 役割을 하기도 했습니다.
己卯士禍의 화를 입고 화순 동복으로 流配를 왔던 최산두, 기묘사학사로 꼽히던 그의 적거지에는 이 일대의 文人들이 몰려듭니다.
최산두는 그들에게 학문을 전수했고, 쟁쟁한 제자들을 排出해 냅니다.
호남 대표학자였던 하서 金麟厚, 당대 뛰어난 文章家가 된 미암 유희춘이 그들입니다.
적벽과 물염정은 최산두를 중심으로 學問交流의 空間이 되어갑니다.
그의 시대 改革的인 學風은 호남만의 독특한 士林文化를 만드는데 크게 寄與했던 것입니다.
최산두와 함께 화순으로 流配되었던 정암 조광조, 그는 流配 35일 만에 賜死되지만 그 影響力은 더 커져갔습니다.
조광조가 죽자 그의 제자 양산보는 출사를 포기하고 落鄕해 소쇄원을 짓습니다.
본인들의 학문교류에 장이 된 소쇄원,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호남 士林文化가 무르익게 됩니다.
“중앙에서 소수의 강력한 권한을 누리던 사람들이 지방에 왔을 때, 中央政治의 일부가 지방에 이전되는 그런 效果도 있고, 知識이나 경험, 이러한 것들이 시골에도 전해지는 이런 유형으로서 조선의 A급 文化가 지방까지 전해지는 그러한 역할을 했다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文臣이자 醫師였던 池錫永, 그는 1877년 신지도에 流配를 옵니다.
그는 流配 3년 동안 地域主義 疾病을 돌보며 醫學書 신학신설을 著述합니다.
그의 種痘法도 이곳 流配地에서 臨床實驗을 통해 完成된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醫師 못지않은 醫學知識을 겸비했었던 조선의 문신 사대부들, 그들이 流配地에서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役割이 바로 病을 治療하는 醫員이었습니다.
流配時節 丁若鏞은 藥을 못 구해 병을 키우는 百姓들을 보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그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처방을 소개한 촌병혹치라는 의서까지 저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