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希八立(21~22世)

“六希八立 인물별 진적

감사공 2023. 2. 21. 15:33

 

奉呈

月沙 相公 行軒

雨雪霏霏冬已成問

公何事啓脩程回

天昔荷

先朝獎請

翟今承

簡命行槎泛鴨江三渡遠月

分燕塞一輪明遙知奉

詔歸來日五色

絲綸慰

聖情

萬曆 丙辰 至月 日

侍敎生 柳忠立再

 

 

한국(韓國) 조선(朝鮮)

가로:56cm / 세로:30cm

 

유충립의 시 <근묵(槿墨)>34책으로 이루어진 첩장본(帖裝本)으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이 우리나라 선현들의 묵적 가운데 서간류의 소품을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작가는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조선초기의 정도전(鄭道傳), 강회백(姜淮伯), 대한 제국기의 이도영(李道榮)에 이르기까지 약 1136명에 달한다. 연대는 대략 600여 년에 걸쳐 있다. 작가의 신분별로 보면 임금에서 사대부에 이르며, 직업별로 보면 관료, 학자, 승려 등이 총 망라되어 있다. 또한 서체별로 보면 행서가 595, 초서가 468점으로 행초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서는 57, 전예는 16점으로 전예해행초의 구색을 모두 갖추었다. 문장의 내용면은 서간이 720, 시고가 353, 제발 및 기타 잡문이 62점으로 내용면에서도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근묵에는 600년 간에 걸친 우리 선현들의 생활사를 볼수 있기에 옛 사람의 사생활의 실태는 이러한 서간첩(書簡帖)이 아니고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중요한 사회사의 자료가 된다. 서법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운필하여 바쁜 가운데 비필난초(飛筆亂草)로 휘두른 것으로 그 필치는 유려하고 창달하여 보는 사람들의 심목을 흔결(欣決)케 하는 감동을 지니고 있다. 아무런 제약과 의도적인 작태가 없는 서간의 서품은 그것이 글씨의 본바탕이며 작가의 개성을 그대로 살린 작품으로 근묵은 600년의 살아 있는 서예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서간형식의 변천과 서압(署押)의 양상을 연구할 수 있어, 역사, 민속, 사회사, 서법연구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유충립(柳忠立) 1582(선조15)-1620 문화(文化)사람으로 자는 가이(可移) 호는 쌍백(雙栢)이다.

 

柳忠立 詩

 

奉呈月沙相公行軒 길 떠나는 월사 상공께 올리다

 

雨雪霏霏冬已成 진눈개비 쏟아지는 한겨울 추운 날에

問公何事啓脩程 공께서 무슨 일로 먼 길을 떠나시나

回天昔荷先朝獎 천자의 마음 돌려 선조 장려 입었고

請翟今承簡命行 왕후 관복 아뢰려 간명 받고 길 떠나네

槎泛鴨江三渡遠 압록강 세 차례나 건너는 먼 사신길

月分燕塞一輪明 연경(燕境)에 달이 떠서 환하게 비추겠지

遙知奉詔歸來日 조칙을 받들고서 돌아오는 그날에는

五色絲綸慰聖情 오색의 조서(詔書)로서 성상 마음 위로 하리

 

만력(萬曆) 병진(丙辰 1616[광해군8]) 동짓달(至月)

시교생(侍敎生) 유충립(柳忠立 [1582(선조5)~1622]) 재배(再拜)

 

월사(月沙) : 이정귀(1564~1635)의 호

천자의 …… 입었고 : 1599(선조 32) 4,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 사건을 일으키자, 월사가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명나라로 들어가 그것이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히고 돌아왔고, 이 해 8월 호조 참판이 되고 특지로 예문관 제학을 겸한 것을 가리킨다.

왕비 …… 떠나네 : ()은 왕후가 입던 붉은 비단에 꿩을 수놓은 옷이다. 간명(簡命)은 선발하는 명을 말한다. 월사가 1616(광해군8) 병진년 9, 공성왕후관복주청사(恭聖王后冠服奏請使)가 되어 길을 떠나게 된 것을 가리킨다. 공성왕후는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인데, 광해군이 즉위한 후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하였다.

조서(詔書) : 사륜(絲綸)예기(禮記)치의편(緇衣篇), “왕의 말씀 실처럼 가늘지만, 그것이 나오고 나면 동아줄 같다.[王言如絲 其出如綸]”라 한 데서 온 말로, 후대로 오면서 제왕의 조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月沙(李廷龜)先生集卷之十五

廢逐錄 下

 

挽柳府尹 忠立

 

先府高名屈短期天將積慶二郞遺爭瞻聳壑昂霄氣未睹垂紳搢笏時宦只十年輿望宿哭今三世我生遲曾求雙柏堂中詠忍把玆詩作挽詞

 

柳之父希鏗是余友早有名短折柳之大父文陽公歿十餘年柳又亡故五六句及之雙柏堂柳新構也

 

 

문화재자료 제1호 (춘천시) &nbsp; 춘천시 관리자 소유자 국유 시대 고려시대 소재지 강원 춘천시 소양로2가 162-2 지정일 1963.01.21 종교신앙 불교 탑 분류 춘천칠층석탑(春川七層石塔) 면적 유적건조물 명칭 보물 제77호 종 목 &nbsp; 춘천 시가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탑이다. 조선 광해~인조 때 이곳의 현감이었던 유정립이 1623년 인조반정으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이 탑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lsquo;충원사(忠圓寺)&rsquo;라는 글이 새겨진 그릇을 발견하였는데, 그 후부터 충원사 내에 속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국전쟁 때 심한 손상을 입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기단의 일부가 지하에 파묻혀 있었는데, 지난 2000년에 시행된 전면적인 보수공사로 기단부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석탑은 아랫부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놓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윗층 기단도 탑몸돌에 비하여 제법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널판돌을 놓아 1층 탑몸돌을 괴고 있다. 7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은 위로 올라가면서 그 크기가 적당히 줄고 있는데, 기단이 넓은 것에 비해 몸돌이 작아 주목되지만 7층이나 되는 높이가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하여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sim;3층까지가 6단이고 4층 이상은 5단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하다. &nbsp;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 중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여서 아쉬움을 주고 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다. 이 칠층석탑은 화강암(花崗岩)으로 건조(建造)한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이다. &nbsp; 이 탑의 특징은 기단(基壇)이 넓어서 안정감이 있으며 넓은 갑석(甲石) 중앙에 방형(方形)의 연화판석(蓮華板石)의 괴임대를 놓아 탑신부(塔身部)를 받게 한 점이다. &nbsp; &nbsp;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부근에 많은 사찰(寺刹)이 있었다 하며 조선(朝鮮) 인조(仁祖)(1623&sim;1649, 재위) 때 충원현감(忠原縣監) 유정립(柳鼎立) 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파직(罷職)당하고 낙향(落鄕)하여 석등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지층에서 발견한 불기(佛器)에 충원사명(忠圓寺銘)이 있었다 한다. 이 탑도 충원사에 속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유정립(柳鼎立)

 

[시험관련 사항]

/년도 : 광해군(光海君) 10

과거시험연도 : 1618 무오

시험명 : 증광시(增廣試)

등위 : 을과1(乙科1)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유정립(柳鼎立)

: 실보(實甫)

본관(本貫) : 문화(文化)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

소과 : 1606(병오) 생원시

전력(前歷) : 익위(翊衛)

관직(官職) : 사서(司書)

 

[가족사항]

() : 유희분(柳希奮)

() : 유희담(柳希聃)

조부(祖父) : 유자신(柳自新)

증조부(曾祖父) : 유잠(柳潛)

외조부(外祖父) : 윤현(尹晛)

처부(妻父) : 김신원(金信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