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陽府院君 柳自新&蓬原府夫人 東萊鄭氏(鄭楊貞)(20世)

文陽府院君 柳自新과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본명 정양정(鄭楊貞) 朝鮮時代의 女流 詩人

감사공 2023. 2. 20. 11:53

文陽府院君 柳自新&蓬原府夫人 東萊鄭氏 墓

神道碑

神道碑 頭(2023-1617=416년전 篆書 원형)

神道碑 龜 作品(2023-1617=416년전) 

2005~2015에는 비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노출

 

月汀 尹根壽
月汀 尹根壽
月汀 尹根壽의 류자신 挽詩

해설

 

둘도 없이 존귀한 국구로서 / 國舅尊無兩

특별한 은혜 백관 중에 뛰어났지요 / 殊恩絶百僚

빛나는 영화는 한 세대를 비추었고 / 光華映一世

총애하는 대우는 조정에서 으뜸이었지 / 寵遇極今朝

기로회에서 만났던 일 생각해 보니 / 憶作耆年會

유달리도 성은을 많이 받으셨지 / 偏承雨露饒

생사의 이별에 가슴 놀라고 / 驚心生死別

상여 줄 잡으니 넋이 스러질 듯하다오 / 執紼只魂銷

月汀 尹根壽의 류희담 挽詩

해설

 

지위와 명망은 둘도 없이 높은데 / 地望尊無兩

겸허하여 항상 남에게 낮추었네 / 謙虛每下人

동향에서 일찍이 수령을 지내었고 / 桐鄕曾佩綬

맥국에서 다시금 백성을 잘 다스렸지 / 貊國更便民

젊은 나이에 밝은 시대를 하직하였으니 / 綠鬢辭昭代

명정(銘旌)은 한강 나루를 건너는구려 / 丹旌渡漢津

영예로운 명성이 중도에 꺾인 게 가슴 아프니 / 榮名慟中折

만시를 읊으매 마음만 상한다오 / 簫挽秪傷神

 

衛聖功臣敎書의 내용 나의 이야기(行跡) 2014-01-26 20:37:26 衛聖功臣敎書 古貴 軸 951.052-W755 光海君 命 찬, 1613년(광해군 5). 1축, 필사본, 43.5 291.3cm. 柳自新을 衛聖功臣 1등에 錄勳하는 敎書. 衛聖功臣이란 임진왜란때 伊川 全州로 光海君을 호종하였던 관원에게 내린 功臣號이다. 1등은 柳自新,尹斗壽, 李恒福 등 10명으로 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衛聖功臣이라 하였고, 2등은 竭忠盡誠同德贊謨 衛聖功臣이라 하여 柳自新의 三男인 柳希奮외 16명을, 3등은 竭忠盡誠衛聖功臣이라 하여 柳自新의 二男 柳希聃, 柳自新의 一女 趙國弼외 52명을 각각 책록하였다. 이들 중에는 이미 扈聖功臣에 책록된 자도 다수 있었다. 柳自新은 字가 止彦이고, 判書公 柳潛의 長子이다. 임진왜란 후 15대 光海君(三女=王妃)이 즉위하자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文陽府院君에 진봉되었고 三男 柳希奮은 후에 兵曹判書, 文昌府院君이고, 二男 柳希聃은 判決事, 文原君이다.
衛聖功臣 一等
황신 宣武功臣敎書 족자

 

柳夢寅 衛聖功臣敎書

 

 

文陽府院君 柳自新

 

秋山夕陽을 띄고 江心에 잠겨있는데

一竿竹 둘러메고 小艇에 앉았으니

天公閑暇히 여겨 달을 조차 보내더라

 

위의 現代 國內는 물론 西歐 유럽에 까지 널리 알려져 있는 朝鮮 中期 15代 王(光海君)丈人國舅 文陽府院君 柳自新의 그 유명한 이다.

 

國舅 文陽府院君 柳公 自新(初名=長新)

 

1541(中宗 36122)1612(光海君 427)

 

11世 派祖 中門使 柳公 仁修(파조 중문사 류공 인수)9代孫으로 중랑장 류공 중의(中郞將 柳公 仲宜)6代孫이요 1565年 文化柳氏 龍譜(용보)嘉靖譜(가정보) 刊行 당시 淸洪道 觀察使이며, 刑曹, 工曹判書1567(明宗 22)에 제298, 1574(宣祖 7)에 제310, 두 번에 걸쳐 漢城府 判尹을 지낸 柳潛(1509~1576)貞敬夫人 河東鄭氏(정경부인 하동정씨) 사이 長子는 지언(止彦)이다.

 

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순후하더니 장성함에 몸가짐이 엄하고 사물을 접함에 온화하였다. 朝鮮 中期文臣 정존재 이담(靜存齋 李湛)의 문하에서 수업, 당시 사우(士友)들의 推重(추중)한바 되었다.

 

은 지금의 종로구 송현동에 거주하였으며. 명종(明宗) 19甲子(1564)에 진사(進士)及第(급제)하였고. 이듬해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상()父親께서 태릉(泰陵) 수직(守直)을 받고 몸이 편찮았는데 의 하교(下敎)에 이르시기를 수릉관(守陵官)이 질병이 있다 하니 그 아들을 릉참봉(陵參奉)을 삼아 그 父親(부친)을 간호하도록 하라하시었다. 이로써 태릉참봉(泰陵參奉)이 되어 明宗 22丁卯(1569)에 왕후(王后)을 마친 뒤 돈녕부직장(敦寧府直長)에 임명되었다.

선조(宣祖) 2己巳(1569)에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 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을 거쳐 평강현령(平康縣令)으로 나갔다가 宣祖 4辛未(1571)에 해임되어 사과(司果)가 되었다. 이듬해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승진하고 이어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宣祖 8乙亥(1575)에 김포현령(金浦縣令)으로 나갔었다.

이듬해 겨울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여묘(廬墓)하고 宣祖 12己卯(1579)에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제수 받고, 얼마 후 김제 군수(金堤 郡守)로 나갔다가 모친의 나이 70이 되어 사임하고 돌아왔고, 다시 한성판관(漢城判官)에 제수되었다. 이어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을 거쳐 양근군수(陽根郡守)로 나갔다가 宣祖 14辛巳(1581) 겨울에 체임되어 이듬해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에 제수되었다. 宣祖 16癸未(1583)에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에 옮겼더니 宣祖 18乙酉(1585)에 장악원첨정 겸 내승(掌樂院僉正 兼 內乘)에 전직되었다.

 

3(1576年生=64女中 8)12되던 宣祖 20丁亥(1587) 3, 한살 年上王子 光海君(1575年 生)君夫人으로 간택(揀擇)되었는데 이분이 後日 광해군(光海君)의 비 류씨(妃 柳氏)이다.

 

이해 여름 모친상을 당하고 집례(執禮)를 한결 전상(煎喪) 때와 같이 행하고 宣祖 22己丑(1589)에 한성판관(漢城判官)에 제수되고, 겨울에 안악현감(安岳縣監)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역적 정여립(逆賊 鄭汝立)의 잔당(殘黨)을 소탕한 공으로 승진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제수되었다.

 

宣祖 25壬辰(1592) 4월 왜적들이 쳐들어와 도성(都城)을 핍박하게 되자 왕은 광해군(光海君)을 왕세자(王世子)로 삼는 한편 부인(夫人)17에 세자빈(世子嬪)으로 삼고 으로 하여금 동궁(東宮)을 호위토록 하였다. 이로부터 광해군(光海君)을 호종(扈從)하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政)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를 거쳐 이듬해 가을 성천도호부사(成川都護府使)로 나갔다가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파직 되었다. 宣祖 28乙未(1595)에 호군(護軍)을 거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하고 宣祖 31戊戌(1598)나라의 감군포정사(減軍布政使) 양조령(梁祖齡)의 부하를 구타한 사건으로 파면되었다가 얼마 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승진,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세자빈 류씨(世子嬪 柳氏)의 원손(元孫) 탄생에 이어 개성유수(開成留守)에 승진되고, 宣祖 34辛丑(1601)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에 승진되었다.

戊申(1608) 2월에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류씨(柳氏)가 세자빈(世子嬪)으로 16세월이 흐른 뒤 늦게 33되던 해에 왕비(王妃)로 책봉됨에 따라 에게는 국구(國舅)의 예로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輔國崇祿大夫 領敦寧府使)에 승진됨과 아울러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로써 朝鮮王朝 600年史文化柳氏로써는 유일하게 中殿(國母)을 배출하게 되였다.

이로부터 께서 가문의 성만(成滿)함을 두려워하고 겸손과 공경을 더욱 돈독히 하며,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할 뿐 아니라 세간사(世間事)에 관여하지 않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현사(賢士)의 진퇴에 뜻을 두지 않았다. 光海 2庚戌(1610) 가을에 의 나이 70세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풍악(風樂)과 어주(御酒)를 하사 받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이듬해 겨울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光海 4壬子 27일에 돌아기시니 향년 72세로 안산 잉화면 광곡 목실리 선영 하인좌(安山 仍火面 廣谷 木實里 先塋下 寅坐)에 예장(禮葬)되고, 이듬해 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은 천성이 염정하여 오직 도서(圖書)를 즐기고 경사(經史)에 유심하여 늙도록 책을 놓지 않았다. 만일 고인(古人)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보면 반드시 여러 자질(子姪)들로 하여금 기록하여 본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집에서나 관직에 있어서나 법도(法度)를 쫓아 행하고, 의복과 음식에 사치와 화려함을 경계하여 비록 지극히 귀한 처지였지만 선비 본연의 뜻을 잃지 않았다.

 

모친께서 홀로 계신지 10여년 동안 기쁜 얼굴과 부드러운 태도로 성의를 다하여 좌우의 봉양에 힘쓰고, 또한 서모(庶母)가 계시어 나이가 젊었으나 자녀를 두지 못하신지라 공께서 섬기기를 친모와 같이 하니 서모(庶母)가 공의 효행에 감동하여 80의 고령(高齡)을 누리시고 편안히 돌아가시었다. 아우 한분이 계셨는데 우애가 매우 독실하여 잠자리를 함께하고, 혹 관직으로 서로 떠나게 되면 섭섭하여 마지않았다. 그리고 친구를 대접함에 빈천(貧賤)하다고 버림이 없었고, 종족을 접대함에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았다. 또한 재주가 있으나 출세하지 못한 이는 추천하고, 가난하여 병으로 누워있거나 혼상(婚喪)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는데 힘을 다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숭배하고 존경하여 마치 자기 부형(父兄)같이 여기었다.

 

死後(1612) 5후인 1617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 산 32, 33번지 묘역에 文陽府院君 神道碑가 보기 드문 예술성으로 웅장하게 建立되었고 다시 3年 後 文陽府院君의 배위 되시는 좌의정 임당 정유길(左議政 林塘 鄭惟吉) 동래정씨(東萊鄭氏)의 따님으로 蓬原府夫人1620112680세로 타계하시니 공의 묘소에 합부(合祔)하였고 다시 2후인 1622年 文陽府院君 神道碑 後面蓬原府夫人墓碣文을 각인하였다.

 

神道碑는 대제학 서경 류근(大提學 西坰 柳根)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고, 병조참의 동복오정(兵曹參議 同腹吳靖)이 비문을 썼으며, 우의정 선원 김상용(右議政 仙源 金尙容)이 전()을 썼다.

 

아들 희갱()은 진사(進士), 희담(希聃)은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희분(希奮)은 병조판서 문창부원군(兵曹判書 文昌府院君)이요, 희발(希發)은 호당(湖堂)에 들고 이조참의(吏曹參議), 희량(希亮)은 호당(湖堂)에 들고 京畿觀察使(경기관찰사), 예조참판(禮曹參判)이요, 희안(希安)은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이며, 사위는 한성부좌윤 한양 조국필(漢城府左尹 漢陽趙國弼), 병조정랑 부평 이덕일(兵曹正郞 富平李德一), 조선(朝鮮) 15대 임금 광해군 이 혼(光海君 李 ), 은율현감 광산 김시보(殷栗縣監 光山金寺輔)이다.

 

死後1613(光海君 5) 衛聖功臣敎書(위성공신교서) 1등에 올라있으며 그의 3男 希奮(文昌府院君=兵曹判書)과 손아래 妻男이며 左議政을 지낸 鄭昌衍 {東萊鄭氏 左議政 林塘 鄭惟吉(文陽府院君 柳自新丈人)}은 각각 2등에, 2男 希聃(文原君=判決事)과 첫째 사위인 漢昌君 左尹, 刑曹參判을 지낸 趙國弼(漢陽 趙氏)3등에 올라있다.

 

한편 朝鮮中期 丙子胡亂 등으로 혼란기에 종묘사직을 위하여 殉節人으로 크게 貢獻하였던 相臣右議政 仙源 金尙容, 仁祖朝左議政을 지낸 淸陰 金尙憲 兄弟敦寧府都正 金克孝(安東金氏)文陽府院君 柳自新의 손아래 同壻였기 때문에 中殿 柳氏를 비롯하여 64와 이들은 姨從지간이 된다.

 

1623年 仁祖反正으로 관작과 봉호가 추탈되었으며, 두 아들 (3希奮=兵曹判書, 4 希發=副提學)과 첫째 사위인 漢昌君이 처형되고, 64女中 1623年 仁祖反正이전 에 자연 타계한 1男 進士公 希鏗, 2男 文原君 希聃, 3李德一 외의 子孫들과, 11이상 曾孫子들까지 유배지로 보내졌다.

 

1623年 仁祖反正 직후 거제도에 유배 되어있었던 5男 希亮(京畿觀察使,禮曹參判)마져 51628年 長姪孝立(都承旨)의 역모사건으로 그의 獨子 斗立(進士)과 함께 12孫子 廣善(梅墩)만 남겨 놓고 유배지에서 처형되었으며, 당시 孫 孝立,正立,鼎立,命立,仲立,厚立,顯立,英立,福立등과 曾孫 宗善,養善,益善,性善,基善등 직계 후손들이 참형을 받거나 유배되어 위리안치 되고 光海王妃를 포함 4와 사위들은 물론 외손들 마져 12미만 後孫들은 숨어 지내야만 하는 滅門之禍을 겪었다.

 

東萊鄭氏 林塘 鄭惟吉(左議政)15女中 2당시 13세 동갑나기인 (蓬原府夫人 中宗 36154118日 生 ~ 光海 1216201125日 卒)와 가례를 치렀고 1561年 長子 希鏗, 15632子 希聃, 15643子 希奮, 15694子 希發, 15755子 希亮, 15763(光海君), 15816子 希安, 1, 2의 정확한 生年度는 미상이지만 1564~1569사이에 1(趙國弼), 2(李德一)가 태어났고 1576~1581사이에 4(金時輔)가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하여 64의 태어난 차례는 希鏗, 希聃, 希奮, (趙國弼), (李德一), 希發, 希亮, (光海君), (金時輔), 希安이 분명하다.

 

長子 希鏗(進士)老仙 157919生員, 進士試 兩科에 합격하고 孝立, 忠立 두 아들을 두고 158323의 나이에 短命으로 하였다.

2男 希聃(文原君=判決事)159028生員試에 합격하고 외아들 鼎立을 두었으며 1613에는 1妹弟左尹 漢昌君 趙國弼(定運原從功臣錄券)과 함께 扈聖功臣錄에 동반 3등에 올랐다.

 

3男 希奮(文昌府院君=兵曹判書)亨佰 호는 華南 1590年 生員, 進士試 兩科에 합격하고 1597年 文科에 합격 하였고, 광해군3(1611) 89일 한성판윤을 역임하였으며, 1613에는 外三寸左議政 鄭昌衍과 함께 扈聖功臣錄 2등에 올랐다.

 

4男 希發(副提學)靭初 1590年 進士試에 합격하고 1609年 文科에 합격 하였고, 161557吏曹參判 職希亮(京畿觀察使, 禮曹參判) 兄弟賜暇讀書 호당에 同伴으로 간택되었다.

 

5男 希亮(京畿觀察使, 禮曹參判)龍卿, 호는 霽嶠, 峯陰 1603年 生員試에 합격하고 1608年 文科에 합격 하였으며 외아들 斗立을 두었으며 바로 윗 4男 希發(副提學)賜暇讀書 호당에 동반으로 간택되었으나 왕에게 이를 재고하여 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6男 希安(僉正公), 1(趙國弼)左尹, 刑曹參判 漢昌君1613年 扈聖功臣敎書 3등에 오르고, 定運原從功臣錄券에 올라있으며 2(李德一)郡守 3(光海君)中殿 4(金時輔)縣監이었다.

 

文陽府院君希鏗, 希聃, 希奮, 希發, 希亮, 5孝立. 忠立, 鼎立, 正立, 命立, 益立, 福立, (), 斗立 9生員, 進士試에 급제하였고, 希奮, 希發, 希亮, 3孝立. 忠立, 鼎立, 正立, 命立, 益立, 中立, 斗立 8文科 급제을 하여 당시 이른바 “68이란 당시의 고유명사가 불리어 졌다 한다.

 

府院君이 되신 후 邸宅 한쪽에 연못을 만들고 亭子를 지어 懸板江亭이라 쓰셔 걸고 를 지으실 때 韻字가지*. 빛날*. *. 많을*. 자랑*.로 하고 晩年感君恩詞 7(七闋)을 지어 對酒하실때에는 侍者로 하여금 詠詩케 하셨다 하나 전하여 지지 않아 알 길이 없으나 다행히 그중 앞에 소개한 시조 한수가 전하여 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瓊樓帖이라 하는 蓬原府夫人 東萊鄭氏 할머니의 詩帖으로 韻字는 티글*. *. *. 三字인데 詩帖은 아직 발굴되지 못하고 있으나 다행히 文陽府院君 下世三年 後 七十五歲 되시던 1615(光海王 乙卯)蓬原府夫人을 위하여 瑞蔥台에서 잔치를 베푼 자리에서 世子 祗가 올린 시에 次韻 하시고, 通明殿에서 壽宴을 베푼자리에서 王妃를 받고 차례로 次韻하신 즉흥 3가 전하여 지고 있다.

<20085월에 鄭之賢公私見聞錄에서 柳志世拔萃 編輯 = 우리 역사상 학문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 능했던 여성으로는 고구려의 여옥, 신라의 설요, 광해군의 장모 봉원부부인 정씨, 난설헌 허씨, 영향당 한씨, 품일당 전씨, 정일당 강씨, 윤지당 임씨등이며 그중 신사임당---생략, 신구문화사 발행 한국의 인간상 중에서>

 

후손이 시흥군 소하읍 광명리(始興郡 所下邑 光明里). 수암면 산현리(秀岩面 山峴里). 군자면 군자리(君子面 君子里). 김포군 월곶면 포내리(金浦郡 月串面 浦內里). 계양면 독실리(桂陽面 纛室里).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平昌郡 珍富面 水項里). 대화면 하안미리(大和面 下安味里). 평택군 팽성읍 남산리(平澤郡 彭城邑 南山里). 용인군 원삼면 미평리(龍仁郡 遠三面 彌坪里), 연기군 전의면 고등리(燕岐郡 全義面 高登里)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蓬原府夫人東萊鄭氏墓碣

柳根 撰

吳靖 書

蓬原府夫人東萊鄭氏領敦寧府事文陽府院君柳公之配也領敦寧 國舅例授職非有策勳不得封君而 國舅封府院君正一品外命婦封貞敬夫人而國舅夫人封府夫人國制待國舅若是其隆盛文陽公與府夫人俱嘉靖辛丑生夫人年十四歸文陽文陽享年七十有二卒于萬曆壬子春二月癸丑之春追公衛聖元勳 贈竭忠盡誠同德賛謨佐運之號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公卒之九年庚申冬府夫人年八十而終以根旣銘文陽公諸石諸孤於憂服之中又求根一語將刻之碑陰根今雖老且病義不敢辭夫人曾祖考文翼公諱光弼議政府領議政扶植己卯諸賢于斯道有大功配享 中宗廟庭 國朝以來數相業以文翼爲稱首祖考諱福謙江華府使 贈領議政以子貴也考曰惟吉二十四魁戊戌 謁聖試能文章繼祖父爲左議政妣曰元氏貞敬夫人原州人禮曹叅判繼蔡之女也夫人幼有至性歲壬子議政遭內艱癸丑▨▨▨▨▨▨▨▨▨▨▨舍時議政胤子蓬萊相公生纔經歲夫人年十三色憂甞衣不解帶十夜不離間議政素鍾愛益奇之嘉其氣質淑頴悟過人敎以古訓閨範內則之外凡經史之可誦者靡不習自甲寅于歸之上事舅姑下恤婢僕篤於婦儀一門內外翕然爲賢婦五十九年如鼓瑟琴逮至文陽下世之後雖以衰麻在身之年執喪供祭一出於誠服闋之後不以家事爲念惟奉先祀賙門族是務無間於所天在世之時坤殿以七十偏親終能勝喪爲莫大之幸涓吉迎入于通明殿設宴以慰翌日上設酌親執盞以壽錫賫便蕃又明日東宮亦設宴三殿各自製詩以紀盛事每歲 宮中有大小慶禮未甞不奉邀俱歡情禮備至此實古今所罕聞者十數年來諸子諸孫出入臺省金玉輝暎夫人以榮爲懼常謂諸子曰爾曹致位列卿皆由先世積德發於今日門戶之盛可憂非可喜也爾等盍各畏愼牧以卑遜諸子公退必齊會膝下夫人就寢然後方退私室日以爲常子希發久在東銓夫人甞謂曰爾自叅議陞叅判爾兄長西銓一家二人並居兩銓爾宜先解以謝人言凡其識見透徹皆類此生長文獻世家習於耳目者無非義方諸子幼少時勿許出就外傳親自敎導易致成就上有寡兄年今八十九夫人事之如母如得 天厨珍膳必先分送然後始許進庚申冬患微恙 上遣御醫多方救藥終不救訃聞上震悼輟視朝自歛殯至襄奉皆官庇用一特禮禮官率禮吊祭 三殿各遺中使護喪致吊致祭一如前喪鳴呼生榮死哀非此之謂也歟若其子若孫職名具錄前碑今不重載仍竊惟念公之孫忠立中庚戌文科別試聞喜之席公持座上賓賀杯謂根曰子希奮中丁酉別試希亮中戊申別試子希發長孫孝立中己酉增廣今忠立又釋褐三子二孫是即五子登科云厥後孫鼎立中戊午增廣庶孫厚立中同年別試武科孫命立己未秋榜魁進士夫人在世時也是果非積善餘慶乎鳴呼盛哉 天啓二年十月 日刻

 

蓬原府夫人 墓碣(陰記)해설

 

봉원부부인 동래정씨는 영돈녕부사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공의 배위(配位)이다. 영돈녕부사는 국구(國舅)에게 의례 주는 직위로, 책훈이 없으면 봉군(封君)되지 못하지만 국구로서 부원군 정일품에 봉해졌다. 외명부로는 정경부인에 봉해졌으나 국구부인이 되었으므로 부부인에 봉해졌다. 나라의 제도로써 국구를 이와 같이 융성하게 대우하였다.

문양공과 부부인은 다같이 가정 신축년에 출생하였다. 부인은 14세에 문양공에게 출가하였다. 문양공은 향년 72세로 만력 임자년 봄 음력 2월에 사망하였다. 계축년 봄에 위성원훈에 추록되고 갈충진성 동덕찬모좌운의 호칭이 내려졌으며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이 사망한 지 9년이 되는 경신년 겨울에 부부인이 향년 80세로 사망하였다. 내가 이미 전에 문양공의 비문을 지어 석각하였는데 공의 아들들이 복상 중에 또 내게 비문을 받아서 비음(碑陰)을 새기려고 하니, 지금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부인의 증조고(曾祖考)는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로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다. 기묘사화 때 여러 유교 명현들을 도운 공적이 있어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국조 이래 여러 차례 재상을 지냈으며, 문익(文翼)이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조고(祖考)는 복겸(福謙)으로 강화부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아들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친은 유길(惟吉)24세인 무술년에 알성시에 장원하였는데 문장에 뛰어나 조부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모친은 정경부인 원씨(元氏)로 원주인(原州人) 예조참판 계채(繼蔡)의 따님이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매우 착하였다. 임자년에 의정공이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계축년에 돌아왔을 당시 의정공의 맏아들인 봉래상공이 출생한 지 일 년 이 되었고 부인은 당시 13세였 는데, 근심하는 낯빛으로 의대를 풀지 않고 열흘 밤을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의정공은 본래 부인을 종애했었는데 이에 더욱 기특하고 여기고 그 기질이 정숙하여 남보다 뛰어난 것을 가상해 하였다. 의정공이 고훈과 규범과 내칙을 가르친 것 이외에도 읽을 수 있는 경사는 스스로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인년에 시집와 위로는 시부모를 모셨고 아래로는 종복들을 돌보아 부도(婦道)에 충실하였으니 문중의 안팎에서 모두가 하나같이 현부(賢婦)로 여겼다. 59년을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으며 문양공이 하세한 후 비록 본인이 상중에 있었지만 한결같이 정성으로 상제 노릇을 하고 제사를 받들었으며 상을 마친 후에는 가사를 생각지 않고 오직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문족을 위로하고 돌보는 일에 힘써 부군이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하였다.

곤전은 부인이 나이 70세로 남편의 상을 무사히 마친 것을 아주 큰 다행으로 여겨 길일을 택하여 통명전에 맞아들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다음날엔 왕이 주연을 베풀어 친히 잔을 들고 장수를 기원하고 편번(便蕃)을 하사하였다. 또 다음날 동궁도 연회를 베풀었으며 삼전이 각기 시를 지어 성대한 일을 기리었다. 해마다 궁중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으면 맞이하여 모시고 함께 기쁨을 나눴는데 정성과 예를 극진히 하였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십 수 년 동안 여러 자손들이 대성(臺省)에 출입하며 높은 벼슬로 빛났는데 부인은 이러한 영화를 걱정하며 ????너희들의 지위가 경의 반열에 이른 것은 모두 선조께서 쌓은 덕이 오늘날 나타난 것이다. 집안이 번성하는 일은 우려할 일이지 기뻐할 일이 아니니, 너희들은 각별히 삼가고 조심하며 몸을 낮추어 겸손한 자세로 처신하라????하였다. 여러 자제들은 퇴궐하여 그 슬하에 함께 모였다가 부인이 잠자리에 든 뒤에야 제 방

으로 물러 나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들 희발(希發)이 오랜 동안 동전(東銓)에 있었는데 부인은 일러 말하기를 ????너는 참의에서 참판에 올랐고 너의 형은 서전의 판서이니 한 집안에 두 사람이 함께 양전에 벼슬하게 되었다. 네가 먼저 사직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식견이 이와 같이 투철하였다. 이는 문헌 세가에서 자라나면서 보고 들으면서 익힌 것으로 모든 일이 의롭고 반듯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밖에 나가 사부에게 나아가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친히 가르치고 이끌어 쉽게 성취할 수 있었다.

위로 형이 있는데 지금 나이가 89세로 부인은 마치 어머니처럼 모시어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먼저 나누어 보낸 뒤에 자신에게 올리게 했다. 경신년 겨울에 가벼운 병환을 얻었는데 왕이 어의를 보내 다방면으로 치료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하였다. 부음을 듣고 왕은 매우 슬퍼하며 정사를 철폐하고 몸소 지극히 염빈하였다. 장례 절차를 모두 관의 도움으로 특별한 예로 치렀다. 예관들이 예를 갖추어 조문하고 제사 지냈으며 삼전은 각각 중사를 보내어 호상하고 치조, 치제하였으니 한결같이 문양공의 상() 때와 같이 하였다. 아아! 살아서 영광이고 죽어서 애통하다는 말이 이를 일러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 자손의 직명은 문양공의 비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 중복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가만 생각해 보건대 공의 손자 충립(忠立)은 경술년 문과별시에 합격하였는데 문희연에서 공은 상빈의 자리에 앉아 축하주를 주며 나 근()에게 ????아들 희분(希奮)은 정유년 별시에 합격하였고 희량(希亮)은 무신년에 별시에 합격하였으며, 희발의 장손인 효립(孝立)은 기유년 증광시에 합격하였다. 지금 충립이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아들 셋과 손자 둘, 곧 다섯 자손이 등과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후에 손자 정립(鼎立)이 무오년 증광시에 합격하였고 서손 후립(厚立)은 같은 해 별시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손자 명립(命立)은 기미년 가을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니, 부인이 살아계실 때의 일이다. 이것이 과연 선()을 쌓은 집안에 넘치는 경사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번창하도다.

천계 210월 일 세움.

 

朝鮮時代女流 詩人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

 

본명 정양정(鄭楊貞)

 

어진 어머니로는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 부인을 비롯해 정몽주의 어머니,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 같은 많은 분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버이에 효도한 여성을 든다면 신라의 지은을 비롯해 선산의 송씨, 문화의 류씨, 홍원의 현씨 등 고을마다 적지 않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 능했던 여성으로는 고구려의 여옥, 신라의 설요, 光海君의 장모 봉원부부인 동래정씨(蓬原府夫人東萊鄭氏) 本名은 정양정(鄭楊貞), 난설헌 허씨, 영향당 한씨, 품일당 전씨, 정일당 강씨, 윤지당 임씨 등 수백을 헤아릴 수 있다. 글씨 잘 쓰는 부인으로는 이제현의 손녀 이씨강희안의 딸 강씨, 장홍효의 딸 장씨 같은 이들이, 그림 잘 그리던 화가로는 육오당 정경흠의 누이 정씨강희맹의 10대 손자며느리 되는 월성 김씨 같은 이들이. 그러나 그 모든 여성들은 한두 가지에만 능해 이름을 떨쳤을 뿐이다. 오직 한 사람 그야말로 교육가이자 인격자이면서 효녀, 현부인, 학문가, 시인, 서예가, 화가 등을 한 몸에 지닌 종합적인 모범 부인이 바로 사임당 신씨인 것이다.

 

 

정양정(鄭楊貞 1541~1620)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손자이자 정복겸(鄭福謙)의 아들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1515~1588)과 원주 원씨의 딸로 중종 36(1541)에 태어나 명종 9(1554)14살의 나이에 동갑나기인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류자신(柳自新,1541~1612)과 결혼하여 6(류희갱, 류희담, 류희분, 류희발, 류희량, 류희안)4녀를 낳았다.

1608, 세자빈으로 있던 셋째 딸이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자, 왕비의 어머니로서 외명부(外命婦) 1품인 부부인(府夫人)에 봉작되어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이라는 작호를 얻었다. 이후 광해군 12(1620)80세로 훙서하였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왕이 폐위되자 왕비였던 딸도 폐비되어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으로 강봉되자 삭탈관직되었다.

 

<가족관계 편집>

: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1515 ~ 1588)

: 원주 원씨(原州 元氏)

남편 : 문양부원군 류자신

장남 : 류희갱, 차남 : 류희담, 3: 류희분, 4: 류희발, 5: 류희량. 6: 류희안

장녀 : 조국필, 차녀 : 이덕일, 3: 문성군부인 류씨, 4: 김시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詩才가 뛰어나서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많은 작품을 썼다.

 

봉원부부인 동래정씨(蓬原府夫人 東萊鄭氏)本名 정양정(鄭楊貞 1541~1620)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서빙고강사(西氷庫江舍)에 살면서 낙엽 지는 가운데 토란과 밤, 게를 거두는 가을의 풍성한 정경과 달빛을 대하여 잠 못 이루는 서늘한 가을밤의 맑은 풍경으로 여유를 찾아본다.

이 시는 강가 별장에 나와 가을 풍경을 노래한 오언율시로 미()운이다. 명문귀족의 딸로 태어나 광해군의 장모가 되었으니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므로 강가 별장에서 느낀 그늘 없는 정서를 드러냈다. 수련은 전원에 나온 심정이다. 규방에만 있다가 전원에 나오고 싶어 갈매기와 약속에 따라 강가에 나왔다고 하고, 그때가 가을이어서 강 언덕에 낙엽이 날리더라고 했다. 함련은 대구로 된 풍성한 가을 정경이다. 별장 가까운 동산에는 농부들이 토란과 밤을 풍성하게 거두고 있고, 강변에는 어부들이 살진 게와 생선을 그물로 잡아 올리고 있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대갓집 부인이라 가을날의 풍성함만 보이고 백성의 고달픈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경련은 주변 경치의 감상인데 역시 대구다. 전원에 나와 푸른 산을 바라보다가 술을 마련하여 달을 감상하는 여유롭고 한가한 정취를 표현하였다. 미련은 가을밤의 흥취다. 서늘하고 맑은 밤기운에 잠이 들지 않아서 밤이슬을 옷에 적시며 서성이고 있다. 사대부 부녀의 유족하고 고아한 흥취를 짜임새 있게 표현했다고 하겠다.

 

출왕서빙고강사(出往西氷庫江舍)

來訪沙鷗約 江皐木葉飛 園收芋栗富 網擧蟹鮮肥

내방사구약 강고목엽비 원수우율부 망거해선비

 

갈매기와 약속하고 찾아와 보니/강 언덕엔 나뭇잎 날리네

동산에서는 토란과 밤을 가득 거두고/그물을 건지니 살찐 게가 신선하네

 

褰箔看山翠 開樽對月輝 夜凉淸不寐 松露滴羅衣

건박간산취 개준대월휘 야량청불매 송로적라의

 

발을 걷고 푸른 산 바라보며/술동이 열고 달빛을 대하니

밤은 서늘하고 맑아 잠 못 이루는데/소나무 이슬이 비단옷 적시네

갈매기와 약속에 따라 강가에 나왔는데 강 언덕에는 낙엽이 날리네.

동산에는 토란과 밤을 풍성히 거두고 그물 들면 게와 생선이 살지네.

발을 걷어 푸른 산을 바라보고 술통을 열어 밝은 달을 마주하였네.

밤이 맑고 차가워 잠이 오지 않아 솔잎 이슬에 비단옷을 적시네.

 

蓬原府夫人 東萊鄭氏(75)를 위한 三尊通明殿 잔치

 

위 작품 외 효종의 사위 東平尉 정재륜(鄭載崙)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 서총대(瑞葱臺)와 통명전(通明殿)에서 삼존(三尊=.王妃.世子)贈詩次韻하였던 시 4가 전해지고 있다.

 

폐비(廢妃 광해의 비) ()씨의 어머니는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 ()씨인데 좌의정 유길(惟吉)의 딸이다. 광해군 을묘년에 정씨를 위하여 서총대(瑞蔥臺)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폐동궁(廢東宮 광해군의 아들)이 시()를 지어 주기를,

 

차운(次韻) 한시에서,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 또는 그 방법.

 

遐齡八袠慶綿綿 / 팔순(八旬)높은 수()에 경사가 연이으니

玉樹芝蘭滿眼前 / 옥수지란(玉樹芝蘭)이 눈앞에 가득하다

宸眷深嘉垂百歲 / 사위인 임금께서는 백 년 가까이 산 것을 가상히 여기고

孝思常願奉千年 / 외손인 나의 효성된 마음은, 천년토록 모시기를 축원 하오

樽開紅醞天香襲 / 병뚜껑을 열자 붉은 술의 향기가 하늘에 떠오르고

珍賜瑤臺雨露偏 / 요대(瑤臺)에 잔치 내리시니, 은혜가 망극하네

上苑新秋晴日永 / 궁중의 첫 가을은 맑은 날씨가 길었는데

渚連沙鳥五雲邊 / 못 속에 연꽃과 모래에 나는 새는 오색 구름 가이로다

하였다.

 

鄭氏次韻하기를,

 

繼繼承承寶曆綿 / 대대로 계승하여 보력(寶歷 나라의 연대수를 말함)을 이 었으니

文慈武孝兩無前 / 문왕의 자애(慈愛)와 무왕(武王)의 효성이 모두가 전에 없는 일일세

光騰門戶逢千載 / 문호(門戶)에 빛남이 천년 만에 한 번 때를 만났고

德配乾坤祝萬年 / 천지 같은 높은 성덕(聖德) 만년(萬年) ()를 축원 하 오

未死重遊蓬島上 / 죽기 전에 봉도(蓬島 신선이 사는 곳)위에 다시 놀아

餘生深荷聖恩偏 / 남은 평생에 임금 은혜 깊이 입었네

陽春一曲誰能和 / 양춘의 한 곡조를 뉘 능히 화답 할고

少海奎章暎日邊 / 소해(少海 동궁)의 문장이 해[]가에 빛나도다

하였다.

 

陽春=() 나라의 노래에양춘백설곡(陽春白雪曲)이라는 좋은 곡조가 있었 다

 

폐비(廢妃) 류씨가 또 정씨를 위하여 통명전(通明殿)에서 수연(壽宴)을 베풀고, 광 해군이 시를 주었는데,

 

種德名門壽福全 / 덕을 쌓은 빛난 가문 수복(壽福)도 많은지고

宜家令範更無前 / 가정을 복되게 하는 어진 행실은 전고(前古)에도 없었네

森森簪笏華軒溢 / 빛난 집엔 수많은 잠홀(簪笏)들이 넘쳐 있고

濟濟芝蘭錦幌連 / 번창한 자손들은 비단 장막에 연이어 있네

慶建少陽鞏國祚 / 동궁을 세웠으니 나라 복조(福祚) 튼튼하고

光昭壼理迪民賢 / 중궁(中宮)은 덕을 밝혀 백성들을 교화하도다

坤宮奉酌通明殿 / 통명전에 잔치 열어 중궁이 잔 드리니

盛事人間萬口傳 / 인간의 거룩한 일을 만 사람이 전하도다

하였고,

 

鄭氏次韻하기를,

 

未死殘骸幸瓦全 / 죽지 않고 남은 미망인 목숨 다행히 온전하여

御風重近紫宸前 / 바람에 몸을 날려 대궐에 다시 오니

日邊佳氣衣邊襲 / 태양가의 상서로운 기운이 옷자락에 덮쳐오고

天上恩光席上連 / 하늘 위의 은혜 빛은 자리 위에 연이어 있도다

霞醞宣來欣醉飽 / 궁주(宮酒)를 내리시니 흔연히 취하였고

少陽昇座賀仁賢 / 동궁이 자리에 나오시니 어진 덕을 축하 하오

賡歌寶什翔鸞字 / 화답하신 높은 글과 손수 쓰신 그 글자를

歸與兒孫萬世傳 / 돌아가서 자손만세토록 전하리라

하였다.

 

柳氏짓기를,

 

叨侍宮闈卄九年 / 궁중에서 임금 모시옵기 스물아홉 해가 되나

翟褕徽典愧前賢 / 왕비의 덕으로는 옛 사람에게 부끄럽소

欣逢宣廟中興日 / 다행히 선묘(선조)의 중흥한 날을 만났고

更見吾王至德全 / 다시 우리 임금의 높고 온전한 덕을 보았도다

世亂幾參龍御運 / 난세에 몇 번이나 용()의 행차 따랐더니

時平長享鳳帷邊 / 태평시대에 길이 길이 봉황 장막[鳯帷]에 모시네

慈顔鶴髮通明殿 / 학 같은 흰 머리 자친의 그 얼굴, 통명전에 나오시니

稱壽還驚寵渥偏 / 수배(壽盃)를 올리매 넓은 성은(聖恩) 놀라워라

 

鄭氏次韻하기를,

 

俗累塵緣惱暮年 / 귀찮은 세속 일로 노경이 괴롭더니

一心聊慰壼儀賢 / 일심으로 궁중의 어짐 위로되어

承恩再躡三淸界 / 은혜를 받자와 두 번이나 삼청(三淸 선경(仙境))세계에 올랐고

贊化重歡二聖全 / 천지의 조화를 이룩하는 이성(二聖 임금과 왕비)의 복되 심이 더욱 기쁘도다

錫宴渙開金殿裏 / 금전(金殿) 속에서 잔치를 베풀었고 /

需雲繚繞老身邊 / 풍성한 음식은 늙은 몸을 둘러 있도다 /

關雎樛木非專美 / 관저와 규목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

更祝乾坤德不偏 / 다시 건곤(乾坤)의 덕이 기울지 않기를 송축 하오

하였다.

 

關雎樛木=시경에 있는 후비(后妃)의 덕을 찬미한 시편(詩篇)의 이름이다.

 

폐세자(廢世子)鄭氏에게 준 가 두 수인데 그 한 수에,

 

通明殿裏敞雲屛 / 통명전 대궐속에 구름 병풍 높게 치고

金燭輝煌暎紫庭 / 금촛대 밝은 촛불 뜰에 비쳤도다

千載難逢今日會 / 오늘같은 모임은 천 년에도 만나기 어려우리니

奉歡稱壽供深情 / 받들어 축수하고 깊은 정을 바칩니다

하였고,

또 한수에,

縹緲祥雲迷紫闕 / 나부끼는 상운(祥雲)이 대궐에 가득하고

蔥籠佳氣繞楓宸 / 맑은 기운 서리어서 궁중을 둘렀도다

奉歡蘭殿情何盡 / 난전(蘭殿)에서 즐거움을 받드니 정은 다함이 없고

薦壽華筵感轉新 / 꽃다운 자리에 수배(壽盃)를 올리니 감회가 더욱 깊도다

하였다. (大東詩選 卷12)

 

蓬原府夫人金長生 구원

 

조선 중기 문신·서예가.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光山). 대사 계휘(繼輝)의 아들. 1578(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올랐으며, 창릉참봉(昌陵參奉정산현감(定山縣監)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戶 曹正郎)으로 공을 세웠으며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1602(선조 35) 청백 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이후 익산(益山)군수·회양(淮陽철원(鐵原)부사를 지냈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에 연루되어 심문받았으나 누명을 벗은 뒤에 관직을 사퇴, 연산(連山)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장령(掌令)에 보직되었고 사업(司業상의원정(尙衣院正집의(執義) 등을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그후 다시 사퇴, 낙향하였으나 1625년 특명에 의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행호군(行護軍)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군량미 조달에 힘쓰며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1628년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으나 사퇴하고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송익필(宋翼弼)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예학(禮學)과 성리학(性理學)을 배웠고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예학의 태두로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등의 유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서인(西人) 중심의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루었다. 1688(숙종 14)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連山)의 돈암서원(遯巖書院) 10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서체는 왕법(王法)을 기초로 조맹부·문징명(文徵明)법을 가미하였으며 저서로 경서변의(經書辨疑)의례문해(疑禮問解)》《서소잡록(書疏雜錄)등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

 

 

5월에 서제(庶弟)들이 국옥(鞫獄)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므로 서울로 들어가 왕명을 기다렸는데, 마침내 해직되어서 계상(溪上)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 ()를 모살(謀殺)하고자 사형수(死刑囚)인 박응서(朴應犀)를 꾀어 상변(上變)하게 하였다. 이에 옥사가 크게 일어났는데, 선생의 서제인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 역시 얽혀 들어갔다.

이는 대개 선생 및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을 연루시키고자 해서였다. -선생의 서매(庶妹)가 바로 김상용의 첩이었다.- 김경손 등이 모두 고문을 받다가 죽었는데도 오히려 육시(戮屍)하였으며, 역률(逆律)로 논하여 온 집안이 연좌(連坐)되게 되었으므로 친지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어떤 자가 화를 늦추기를 도모하려고 하자, 선생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다. 어찌 그 사이에 인력을 용납하겠는가.” 하였다. 그때 마침 유사(有司)가 법에 있어서 연좌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으며, 또 대신의 의논으로 인하여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그 뒤로는 시골집에 숨어 살면서 문을 닫아걸고 외인(外人)을 사절하면서 오직 경서(經書)만을 곁에 쌓아 두고 읽으면서 유유자적하였다.김경손 등이 고발당하였을 때 광해군이 박응서에게 묻기를, 김장생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하자, 박응서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현자(賢者)이기 때문에 저희들이 모의를 하면서는 오히려 그가 듣고서 알게 될까 걱정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정협(鄭浹)이 거짓으로 자복하면서 광해군의 물음에 답할 적에도 그와 같이 대답하였다. 國舅柳自新의 아내 정씨(鄭氏)가 들어가서 문안할 때 光海君이 묻기를, “내가 김장생을 잡아다가 추문하고자 한다.” 하니, 정씨(鄭氏)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당대의 대유(大儒)로서 많은 선비들이 떠받들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잡아다가 추문한다면 크게 인심을 잃을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광해군의 뜻이 드디어 풀어졌다고 한다. 선생은 동생들과 자매들에 대한 우애가 나이 들수록 더욱더 도타웠는데, 김경손 등이 비명(非命)에 죽게 되어서는 참혹하고 애통스러운 정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깊어졌다. 이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투나 얼굴빛 및 잠자고 깨어 있는 사이에 그런 기색이 저절로 드러났으므로 곁에 있던 사람들이 감동하였다.

<沙溪遺稿에서>

폐모 논의 시작 정인홍 문하의 정온까지 영창대군 살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 고 정인홍의 문하에서 이탈할 정도로 사림의 반발을 삼.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이이첨 등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우두머리이며 당시의 영의정인 유영경을 사사하는 등 소북파를 모조리 몰아내었다.

대북파에서는 계속하여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을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조령에서 은상인을 죽인 이른바 박응서의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서양갑·심우영 등은 모두 조정 고관의 서얼들로서 출세의 길이 막힌 데 불평을 품고 온갖 악행을 자행하다가 그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대북파는 이들을 문초할 때 김제남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허위자백하게 하여 김제남을 죽였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하였는데, 후에 강화부사 정항으로 하여금 그를 소사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계축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화옥이라고 한다. <沙溪遺稿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