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2 문화류씨 대종회 임원 및 이사회












































文化柳氏 登山(걷기)모임은 永遠하리라
中門祗候使 朗惠 柳志世
文化柳氏 登山모임은 서울市, 京畿道, 仁川市에 居住하시는 諸派 宗長들의 뜻을 모아 50여명이 入會하여 11年前인 2013年10月10日 構成되었으며 첫 山行으로 道峰山을 올랐었으며 特別한 通知 없는 한 모임 約束은 每月 첫째 木曜日 11時 果川 서울大公園驛 待合室로 하였습니다.
우리 모임은 規約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이 特徵입니다.
日程이 맞으면 어느 누구든 위 場所에 參與하시면 되고, 나오시다 아니 나와도 되고 어느 누구와 한께 參席하여도 되며, 입회 종장의 조경사가 있을 경우 會員간 特別한 관계일 경우 當事者에게만 通知하시고 會員 全體에는 알림을 삼가하기로 하였고, 되도록 政治성이나 宗敎성의 대화는 서로 삼가합니다.
서울 둘레길을 完走하신 柳景化(010-6314-6610) 宗長이 每月 첫째 木曜日 11時라는 알림을 10여일 前에 會員들에게 폰으로 文字를 보내는 通知를 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간 우리 모임에는 最高齡者로는 1922,1928,1932/1934,1935,1936,1937,
1938,1939,1940,1941.1942,1943,1944,1945,1946,1947,1948(大部分 參與 宗長님들은 해당 職業 전선에서 정년을 마치신 분들입니다.)
分派別 會員名單은 다음과 같습니다. 名單 뒤의“/”표시 앞의 분들은 作故하신 분들입니다.
夏亭公派(志燕,濟榮,浩燮,志勝)
中門祗候(濟元/炳珏,濟殷,吉河,承河,志洪,慶烈,志泰,光鉉,益桓,志又,志世,)
檢漢城公派(映烈,柱鉉,萬永/光永,在燮,在寬)
左相公派(雲相)
府尹公派(在萬,昌秀,鶴善,龍善,在慶,鎬善)
忠景公派典祀(甲善,學善/鶴善,大善,益鉉,柱善,在熙,志善,濟星,濟宅)
忠景公派判尹(在寬/瑢鎭,南永,東烈,澤烈,亨烈,承烈,柳延,正坤,厚桓,在旭)
忠景公派少尹(在豊,淸烈,景化,宣一,炯善,根夏,東鉉,南植,成烈,相鉉)
善山柳氏(滿玉)~사진 촬영(특히 동영상 편집 FACE BOOK 올림)
그 외 大田 志元,在復 宗長도 參與하셨었습니다.
위의 모든 宗長들이 빠짐없이 나오시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日程이 겹치거나 現在도 職場이나 宗事에 勤務하시는 분, 年老하셔 病院豫約, 治療中이라 擧動이 不便한 분들도 계시고, 새로 나오시는 분들도 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모임이 構成한 以來 130回 以上 모임이 持續되고 있으며, 아래와 같이 옛 先祖 墓所를 찾아 참배하는 행사를 겸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柳公權 先祖의 書體(楷書體)를 볼 수 있는 龍仁 瑞鳳寺址 玄悟國師塔碑(보물 제9호), 府尹公派 宣武功臣 柳思瑗 墓所 參拜, 種石 柳光烈 墓所 參拜, 忠景公 柳亮 墓所 參拜, 文陽府院君 柳自新 墓所 參拜, 光海主과 妃 文城郡夫人柳氏 墓所 參拜, 成陵(光海主 生母 恭嬪金氏) 參拜, 典祀令公 柳佐 墓所 參拜, 判尹公 柳京生 墓所 參拜, 忠淸道 小尹公 柳漢生 墓所 및 後代 先祖 墓所 參拜, 松菴公 柳灌 先祖 墓所 參拜, 死六臣의 한분인 柳誠源(서울시 동작구 노량진 死六臣 公園內 義節詞에서 每年 4月 둘째 日曜日 11時에 追慕 春享祭) 등 두루 찾아 參拜하기도 하였고, 端宗祭가 있는 寧越 莊陵 參拜,柳得恭 墓所 參拜 등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2008(戊子譜) 總目에 22個의 先祖 基圖가 있는 것을 우리 모두가 보아왔듯이 以前에 刊行되었던 어떠한 世譜나 族譜, 派譜에도 빠짐없이 登載되어 있으나
대부분 宗親들은 그림책 보듯 아래에 說示하여 놓은 것과 같이 基圖들을 一瞥할 경우가 적지 않았나 생각하여 봅니다.
위에 言及한 基圖 頂上이 大部分 海面에서 200M 以上이며 급기야는 500M 以上 되는 墓所도 있을 것으로 斟酌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요즘처럼 入口까지 아스콘이나 콘크리트로 잘 鋪裝되었던 것도 아니 고 人跡이 별로 없어 나무와 雜草들이 茂盛한 숲을 해쳐가면서 當時의 先祖들 은 요즘처럼 高級 登山靴는 姑捨하고 고무신 같은 履(신*이) 없이 짚신 같은 것을 신고 오르내리셨으리라 斟酌할 수 있습니다.
그도 젊은 분들이 아니고 大略 50~60歲 以上 되시는 분들이었을 것입니다.
몇 달 동안 어려운 勞動力을 功(지금의 등산)들여 걸어올라 관측하여 基圖를 완성하셨을 것입니다. 家內에서 生員,進士試에 及第하고 文科에 及第하여 高官(相臣, 觀察使 등)이 오르게 되면 그들 一部는 馬行으로 오른다 하여도 墓所까지는 걸어 올라야만 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계신바와 같이 십수년 前부터 他國인 日本에 居住하고 계신 文化柳氏 大宗會 名譽會長 류기환 宗長께서도 큰 뜻이 있어 수년간 北韓 黨 간부나 北韓 學者들과의 數回에 걸쳐 始祖 大丞公 墓所를 踏査 參拜하시며 그들과 協議를 하여 좋은 結果로 인하여 始祖 大丞公 墓域 全體를 聖域化한 것입니다.
옛 우리 先祖들께서는 地方官으로 發令이 나게 되면 가는 途中이라도 先祖의 墓所에 들려 參拜하고 宜當 그 地方內의 先祖의 墓所에 들려 參拜하고 업무에 임하였다는 記錄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 事實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逆謀의 緣坐制로 인하여 官職에는 나갈 수는 없지만 八道를 遊 覽하며 좋은 詩와 글를 數千首를 읊었던 居士들도 있었습니다.
그 한 例를 들면 仁祖反正으로 滅門之禍 되었던 霽嶠 柳希亮(京畿觀察使,禮曹參判~巨濟島로 流配되었다가 五年 後 이른바 柳孝立(長姪)의 逆謀事件으로 緣坐되어 絞首刑을 받음)의 孫子 柳廣善(梅墩居士)先祖는 回甲되던 一六七五(乙卯)年을 맞아 九月山 始祖 大丞公 墓所를 찾아 祭文을 올렸던 事實(梅墩遺稿 6券 93쪽 原本은 現在 미국 하버드대학 옐친도서관에 소장)이 있습니다.
添言한다면 이분은 조랑말에 짚신 10여 켤래에 長刀를 지니고 西쪽으로는 儒州 葛山村, 金剛山의 正陽寺,天逸臺,眞歇臺,歇惺樓,四仙亭을 거쳐 南으로 내려오면서 洛山寺,昭陽亭,鳳儀樓 關東八景,醴泉을 거쳐 大谷寺,安東땅으로 내려와 西厓相公에 이르고 釜山 梵魚寺,慶州 障川寺, 永川 阻閽,竹嶺 馬上口占,仙遊寺 宿泊,弘法寺,長樂寺,百祥樓,淸川江,松都,金川,曺溪,臥龍祀 등등을 돌아다니다가 宿泊하기에 民家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嚴冬雪寒에 樓나 亭에서 詩를 읊으면서 平生을 遊覽하며 지냈다는 것이 作品 속에 담겨져 있다. 심지어는 馬上에서까지 詩를 읊었다는 記錄도 들어있다.
위와 같은 옛 선조의 日常이 지금의 登山과 다름없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作故(28년생)하시었지만 어느 여름날 楊洲 땅에 고래산을 넘어 忠景公 墓所를 찾아 參拜하려고 얼마나 함께 參與한 宗長님들이 땀을 흘렸던가?
하지만 頂上을 넘어 目的地에 다다르니 모든 것이 즐거웠고 登山服 차림에 參拜를 하였던 事實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저희들이 恒常 尊敬하는 能菴 在豊(1934年生) 지금은 忠靑道 논산에 居住하시지만 가끔 올라오셔 걷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佛經에 대하여 解說하여 주시고 하시었다. 요즘에는 오히려 아래 사람들에게 먼저 안부를 물어 오시기도 하십니다.
이글을 쓰고 있는 本人도 사람이기에 哲學者들의 말처럼 나이를 들어가면 늙어지며 삶을 유지하여 가면서 同時에 죽어가고 있다는 말과 같이 이렇게 오면서 八十三歲가 되어 우리 모임도 차츰 世代交替가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書頭에 밝힌바와 같이 文化柳氏라면 派를 超越하여 남은 기간 한 달에 한번이라도 서로 만나서 이란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평균 15,000步 걷고 飮食店으로 가서 막걸리,소주,맥주 등을 崇祖睦宗과 健康을 위하여 乾杯하면서 每月 하루를 宗親들과 지낸다는 것은 우리 모임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그 동안 參席費(食代)를 일금 만원씩 걷어 食代를 計算 하였으나 그동안 조금씩 모아놓은 金額이 많지는 않지만 300여만원이 있었기에 지난 2년여 동안 지금까지 그나마 만원도 걷지 않고 있습니다.
연락처 ~ 柳景化(010-6314-6610) / 류지세(010-9243-6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