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공 2023. 10. 9. 16:10

허균 약전​

이홍섭


어려서부터 연민이 많아 스승도, 친구도, 연인도 모두모두 가난한 자들이었으니 그게 병이라면 병이었다. 벼슬살이하다 천성을 이기지 못할 때는, 조롱에 갇힌 새처럼 남쪽 가지를 그리워하였으니* 그게 병이라면 병이었다. 마음 둘 곳 없어 시대를 거스르며 운수납자들과 어울리고, 벽에다 유마거사의 초상을 걸기도 하였으니 그게 병이라면 병이었다. 시를 쓰되 시로써 무엇을 구하지 않고, 다만 지극히 간절하고자 하였으니 그게 병이라면 병이었다.

바라건대, 여기 심히 병든 자가 묻혔으니, 지나가는 자들 중 병들지 않은 자가 있으면 곡(哭)도 하지 마라. 

[원주(原注)] * 허균의 시 「억감호(憶鑑湖)」에 나오는 구절.

※ 운수납자(雲水衲子) : 구름처럼 물처럼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이 떠도는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다.
※ 유마 거사(維摩居士) : 석가(釋迦)의 속제자(俗弟子)로 인도(印度)의 비야리성(毗耶離城)에 살았던 유마힐 거사(維摩詰居士)를 가리킨다. 석가가 일찍이 그곳에서 설법할 적에 유마힐은 병을 핑계로 법회(法會)에 나가지 않고 텅 빈 방의 한 와상에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석가가 문수보살(文殊菩薩) 등을 보내어 문병하게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