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공
2023. 8. 27. 07:24
식칼
김신용
식칼은 유순하다
배추를 썰고 무를 다듬는다
양파 껍질을 벗기고 두부를 자른다
그리고 도마 곁에 누워 지친 몸을 쉰다
다시 부엌에 불이 켜지면, 저녁 밥상을 위한
아낙의 분주함과 찌개 끓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치고 꿈을 꾸듯 선 날[刃] 눈을 감는다
그렇게 식칼은 닳아가고 무디어져가는 것이다
다음날, 장독 뚜껑이나 부뚜막에 아무렇게나 쓱쓱 문질러도
식칼은 밤새 감았던 눈을 뜨고 또 하루를 준비한다
또 그렇게 이빨 빠지고 닳아가는 것이다
한 가정의 안식을 위한 이 수공업 앞에서
식칼이라는 이름마저 살벌하다
부엌칼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어쩌다 고기 비늘을 벗기고 육질을 토막내지만
식칼은 스스로 입가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그냥 꿈을 꾸는 것이다
발그레히 저녁 식탁에 피어오르는 불빛을 위해
그냥 제 몸 다 닳도록 노동을 하는 것이다
김치를 담을 배추, 무만 있으면
석쇠에 눕힐 한 마리 꽁치만 파닥이고 있으면
쓰고 난 뒤, 잊어버린 듯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