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공 2023. 7. 23. 10:41

흘리다

이재무

1.
나이 드니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물을 흘리고 커피를, 술을, 밥알을
눈물과 땀과 피를
안경과 지갑과 여권과 가방을
술 취한 날은 옷을 흘릴 때도 있다

이렇게도 나는 가련한 놈
자꾸자꾸 무얼 흘리며 산다
기억을, 내 안의 너를
정신줄을 놓치고
생을 찔끔, 찔금 흘리며 망각의 텅 빈 푸대자루가 되어간다

2.
어릴 적엔 침과 콧물을 자주 흘리고 
청년 때는 연애와 시대를 핑계로 눈물을 흘리고
나이 드니 정신을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흘리는 일은 나를 빼앗기는 일 그러나 텃밭에 물 주러 가는 아낙이
무심결에 흘린 물 때문에
가뭄 타던 잡초들이 기쁘게 살아나듯
흘리는 일은 때로 거룩하기도 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