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希亮(21世) 監司公

명공 류희량의 생애

감사공 2023. 6. 6. 14:23

 사천장팔경(斜川庄八景)

구곡은 대개 개인들의 취향에 따라 설정되는 반면 팔경은 그 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설정되기도 한다. 가령 지난 호에 다뤘던 여주팔경과 같은 읍치팔경이 그것이다.

그러나 팔경이라고 해서 모두 그처럼 넓은 지역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사대부들의 개인 소장인 별서(別墅)에 대한 팔경이 흔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팔경은 집 주인 스스로 짓는 경우도 있지만 주변 지인들에게 부탁해 자신이 머물고 있는 별서의 아름다움을 노래해 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한 별서팔경 중 경기도 양평 옥천면 일대에 설정됐던 사천장팔경(斜川庄八景)이 있다. 사천장은 조선중기 대제학에 올랐던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오봉 이호민(1553~1634), 현기 이경엄(1579~1652) 부자의 별서이다.

 

그 장소는 현재의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일대이며 그들이 그곳에 별서를 지은 것은 광해군 4년인 1612년 2월에 일어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때문이었다.

 

이때 김직재는 이호민의 형, 이사민의 사위였으니 이호민에게는 조카사위였으며, 더구나 무옥을 일으킨 당사자인 황해도 봉산군수였던 신율(申慄)은 그 자신의 사위였다. 이로 인하여 이호민은 무옥의 피해자이자 가담자가 되는 일을 겪으며 관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로부터 연안 이씨의 선영인 마유산 근처에 별서를 경영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는 대략 1617년을 전후한 때였다. 당시 문장가들인 상촌 신흠(1556~1628), 택당 이식, 계곡 장유(1587~1638)와 같은 사람들도 대개 벼슬에서 물러나 신흠은 김포에 감지당(坎止當)을 이식은 양평에 택풍당 마지막으로 장유는 안산에 해장정사( 海莊精舍)와 같은 별서를 지었으니 나름 유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호민의 아들인 이경엄은 선영 근처에 사천장을 지었던 것이다.

 

이윤호 작 ‘우후오월(雨後五月)’. <작가 소장>

그러고는 곧 이어 팔경을 노래하지 않고 화원을 초대했다. 앞에 말한 이식의 경우 동계팔경을 설정하여 노래 한 후에 화원인 이신흠(1570~1631)으로 하여금 <동계팔경도>를 그리게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경엄은 그 반대였다. 그 또한 이신흠을 불렀지만 그는 아직 사천장에 대한 팔경시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팔경도를 그리게 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림이 완성되자 그는 글씨로 소문난 제교 유희량(1575~1628)에게 전서체로 사천장팔경도를 써 주기를 부탁했다.

 

 1617년, 이경엄은 이렇게 만들어진 팔경도를 들고 내로라하는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팔경시를 구했다. 이는 짬을 낼 수 없어서 사천팔경을 직접 와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팔경시를 쓰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을 없앨 수 있었다.

 

이경엄은 미리 팔경시를 부탁할 사람들을 지정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자신의 별서를 노래하면 그만큼 자기 소유의 별서가 문화적 위상이 높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부친인 이호민과 관계가 있는 당대의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펼쳐 놓고 시를 구한 것이다.

 

 이는 대단히 현명한 것으로 사천장과 가까운 여강에 살던 소암 임숙영(1576~1623)은 그 그림을 보고 <제사천장팔경도(題斜川庄八景圖)>라는 화제시를 지었는가 하면 만퇴헌 김중청(1567~1629)은 <사천장팔영(斜川莊八詠)>을 지었다. 물론 그들은 사천장에 다녀 간 것이 아니라 이경엄이 지니고 온 그림을 보고 지은 것이다.

 

그것은 집안 아저씨인 월사 이정귀(1564~1635)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정귀는 앞에 말한 상촌 신흠·계곡 장유·택당 이식과 함께 ‘월상계택’으로 불리던 당대의 문장가이다. 그 또한 그림을 봤다. 그러나 그는 이경엄이 팔경도를 그리려 팔경을 비정하기 전에 미리 사천장 일대의 골짜기를 두루 다니며 팔경을 봤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천장팔경도시서(斜川莊八景圖詩序)>를 지었다.

 

 

김동철 작 ‘청정산수(양수리)

 이정귀가 그림을 보고 말하는 팔경은 용수의 맑은 산 기운(龍峀晴嵐)·운봉의 흰 달(雲峯皓月)·사나사(舍那寺)에서의 신선 방문(舍寺尋眞)·침교의 권농(砧橋勸耕)·문암의 계곡(門巖洞天)·건지의 송백(乾支松柏)·군성의 새벽 고각(郡城曉角)·제탄의 저녁 돛단배(蹄灘暮帆)이다.

 

 이는 지봉 이수광(1563~1628)이 노래한 사천장팔영(斜川莊八詠)과 조금 다르다. 이수광은 문암동천·건지송백의 순으로 잡았으며, 운봉의 흰 달을 빼고 대신 용수청람(龍岫晴嵐), 용문산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넣어서 팔영을 완성했다. 이처럼 서로 조금씩 다를 수 있는 팔영은 선정은 물론 이정귀는 앞에 말한 시에서 팔경도에 대한 내용을 소상히 밝혀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나의 조카 이자릉(李子陵)이 늘 사천(斜川)의 경치가 좋다고 내게 자랑하였으나 나는 이른바 사천이란 곳을 본 적이 없으며 팔경이라는 것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자릉이 소매 속에 하나의 시권(詩卷)을 가지고 와서 내게 시를 적어 달라고 했다. … 내가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 전장 (莊)이란 것은 본 적이 없지만 이른바 팔경이란 것은 내가 이미 다 구경한 것이었다.

 

을사년(1605, 선조38) 봄, 내가 경기 관찰사로서 영릉(英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여강(驪江)을 건너 벽사(甓寺)를 유람하고 지평(砥平)을 경유해 용문사에 투숙한 다음 내외령(內外嶺)을 넘어 사나암(舍那庵) 등의 절에 올라갔으며 다시 양근(楊根)을 거쳐 대탄(大灘)에 배를 띄우고 강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왔다. 이리하여 무릇 산중에 머무는 사흘 동안 거의 모든 곳을 샅샅이 유람하였는데 천암만학(千巖萬壑)의 온갖 경치들을 일일이 구경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조카가 비정한 팔경을 자신이 진작 구경한 곳이라고 하며 도연명(陶淵明)이 사천(斜川)을 돌아보고 지은 <사천십운시(斜川十韻詩)>에 빗대어 스스로도 십운시를 지어 주었다. 그러나 이경엄은 사천장의 경영을 시작 할 무렵 도연명의 사천에 대한 시를 알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사천팔경도>가 들어 있는 시첩인 《사천시첩》 첫머리에 보이는 이경엄의 글이 그것을 말해 준다.

 

 만력 무오년(1618년) 가을에 내가 사천에 있었는데 우연히 《도연명집》을 보다가 이 시 <사천에서 노닐다(遊斜川)>가 있음을 발견하고는 고금에 일치함을 기뻐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 떠 스스로 귀거래해 은거하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부친 이호민 또한 본디 마을이 사나였음을 말하고 후에 도연명의 사천을 따라서 사천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들의 선영이 있는 곳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사나사(舍那寺)가 지척이다. 그리하여 불교적 이름으로 지어진 사나마을을 그들이 고쳐 사천을 취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천팔경도>는 현재 삼성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 전시에는 나오지 못했다.

 

- 이지누 (‘경기 팔경과 구곡: 산·강·사람’전 자문위원)

출처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http://www.kihoilbo.co.kr)

경기감사제교류공(희량)약사

京畿監司霽嶠柳公(希亮)略事

 

  공의 휘는 희량(希亮)이요, 자는 용경(龍卿)이요, 호는 제교(霽嶠), 또는 봉음(峯陰)이니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자신(自新)의 오자(五子)로 선조(宣祖) 1575 을해(乙亥) 4월3일생이다.   1603 계묘(癸卯)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1605 을사(乙巳) 7월에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과 함께 정인홍(鄭仁弘)의 비행(非行)을 상소로서 배척하고, 이듬해 정월 상소로써 오현(五賢)의 승무(陞廡)를 청하였으니 이는 곧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李) 황(滉) 등을 문묘(文廟)에 종사할 일이었다.   광해군(光海君) 원년 1608 무신(戊申)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설서(說書) 정언(正言) 전한(典翰) 전랑(銓郞)(이조정랑(吏曹正郞)) 교리(校理) 수찬(修撰) 지평(持平) 사인(舍人) 직제학(直提學) 집의(執義) 사복사정(司僕寺正)을 거쳐 1616 병진(丙辰)에 형 희발(希發)과 함께 호당(湖堂)에 선입되었다. 그 후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참의(刑曹叅議) 좌(左)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고 곧바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재직중 상소로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얼마 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가 임기를 마치고 예조참판(禮曹叅判)에 전직되었다. (704)   1623 계해(癸亥) 3월 반정으로 인하여 파직,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더니 수년 후 조카 효립(孝立)의 역모에 연좌되어 마침내 거제(巨濟) 처소에서 교형을 당하니 때는 인조(仁祖) 1628 무진(戊辰) 정월23일로 향년 54세였다.   공은 청렴검약(淸廉儉約)으로 지조를 지키어 사물에 구애하지 않았고, 사람을 접함에 극히 종용(從容)(안온(安穩))하였다. 비록 관직과 신분이 높았으나 집은 매우 가난하였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써 명성이 있었다.   일찌기 청음(淸陰) 김공상헌(金公尙憲) 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장차 망할 것이요, 사람의 집에 좋은 것이 하나만 있어도 사람의 욕심이 되어 끝내는 자신을 망치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의 욕심내 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고 또한 난세에 척리(戚里)(왕(王))의 외척가 되는 데야!" 하였다. 유배의 길을 떠나기에 이르러 또 청음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의 자제들이 귀하게 생장하여 이제 궁벽한 시골에 유배되니 필시 그 고초를 이기지 못하고 잘못된 마음이 생길 것인바, 우리 집안에 살아 남을 자 없을 것이요."하였다.   1628 무진(戊辰)에 그 아들 두립(斗立)이 종형(從兄) 효립(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복주되고, 공 또한 죽게 되었는데 여러 동료들이 공의 평소에 근신했던 인품을 생각하여 살리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각기 서신을 써서 결별을 고하였다. 공이 김오랑(金吾郞)(의금부도사(義禁莩事))에게 일러 말하기를 "아이들이 멀리 있어 역모를 꾀했는 지는 내 실로 모르겠으나 국법이 있으니 어찌 면하겠는가? 내 일찌기 자호(自號)를 제교(霽嶠)라 하였더니 이제 이곳 거제에서 죽게 되니 전생에 정한 운명은 도망하지 못하는가 보오." 하고, 각기 답서를 써서 부친 후 조용히 형장에 나가 생을 마치었다.   택당(澤堂) 이공(李公) 식(植)은 이르기를 "마땅히 그는 청렴한 척리(戚里)라 이를 것이다." 라고 말하고, 미수(眉叟) 허(許) 목(穆)은 그의 기언(記言)에 이르기를 "이 사람은 본래 어질고 착함으로 일컬었으며, 그 부자간에 일찌기 폐비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었다." 하였고, 정욱선(鄭勖先)은 이르기를 "밤중에 이 상소문을 읽고 또한 기분이 상쾌함을 깨달았다." 고 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국조방목(國朝榜目) 조야집요(朝野輯要)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해동호보(海東號譜)를 살펴 기록하였다. (705)

 

京畿監司霽嶠柳公希亮略事

 

公諱希亮字龍卿號霽嶠峯陰文陽府院君自新五子宣祖乙亥四月三日生癸卯中生員試乙巳七月與諸館儒疏斥鄭仁弘之非行翌年正月疏請五賢陞廡是金寒暄堂宏弼鄭一蠹汝昌趙靜菴光祖李 (703) 晦齋彦迪李退溪滉等文廟從祀事也光海君元年戊申擢文科歷檢閱說書正言典翰銓郎校理修撰持平舍人直提學執義司僕寺正丙辰與兄希發選入湖堂自後歷同副承旨刑曹叅議左右副承旨旋以弘文館副提學疏請辭職而不允未幾出爲京畿道觀察使瓜滿轉禮曹叅判癸亥三月因反正見罷謫巨濟島數年後因坐姪孝立之逆謀遂絞刑於巨濟處所時仁祖戊辰正月二十三日享年五十四公淸儉守操不拘事物接人極爲從容雖至宦達家甚淸寒特有善書名嘗語淸陰金公尙憲曰吾門將盡劉乎人家有一長物爲人所欲亦足爲殺身況人所欲者非一二而況亂世戚里乎及竄臨行又言於淸陰曰吾門子弟生長綺紈今謫窮荒必不堪其苦乃生邪念吾門必無噍類矣戊辰其子斗立坐從兄孝立之獄而伏誅公亦當死諸僚以公平日素謹愼欲貸之不得各以手書吿訣公謂金吾郎曰兒輩在遠謀逆吾實不知而國法自在何免焉吾嘗自號霽嶠今死巨濟前定不可逃也各修答以付從容就死澤堂李公植曰宜其謂淸戚里許眉叟穆記言曰斯人素稱良善其父子有斥廢妃疏鄭勖先曰中夜誦此疏亦覺氣爽此按朝鮮王朝實錄若國朝榜目朝野輯要燃藜室記述海東號譜而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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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