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공 2023. 4. 26. 22:13

봄밤

천양희


서쪽을 향해 자란다는
측백나무를 생각하다가
북쪽을 향해 봉오리가 솟는다는
목련나무를 생각하다가
안뜰에 심으면 큰 인물이 난다는
회화나무를 생각하다가
새들이 좋아하는
아가위나무를 생각하다가
새가 아니면서 날아다니는
입술박쥐를 생각하다가
새이면서 날지 못하는 거위를 생각하는 봄밤
눈물을 찍어 새를 그린
화가 이징을 생각하다가
한 곡 부를 때마다 모래 한 알 신발에 던져
신이 모래로 가득 차야 노래를 그쳤다는 명창 학산수를 생각하다가
일생 동안 먹을 갈아 구멍낸 벼루가 열 개도 넘었다는
명필 이삼만을 생각하다가
노래를 잘 듣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른
악사 사광을 생각하는 봄밤

나, 그만 무서록(無序綠)을 읽고 말았네

* 무서록(無序綠) : 이태준의 수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