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柳氏 古今 작품 등
老圃 柳洵 서체
감사공
2023. 4. 25. 12:22
老圃 柳洵
류순(柳洵)ㆍ1441(세종23)~1517(중종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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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柳洵) 정승은 문화류씨로 자는 희명(希名), 호는 노포(老圃)이다. 조선조 개국원종공신(開國願從功臣) 좌상공만수(左相公曼洙)의 현손이요, 의정공(議政公) 사공(思恭)의 아들로 포천 자작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집에 책이 없어 남의 것을 빌려 공부를 하였다. 1459년(세조5)에 성균관(成均館)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1426년(세조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또 1466년(세조1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한번 급제하기도 어려운 대과급제를 두 번씩이나 하였던 것이다. 주부, 응교, 전한, 우부승지(右副承旨)등을 거쳐 1478년(성종9) 정3품인 부제학이 되었다. 1482년(성종13) 통정대부에 승차하여 당대의 대학자 서거정(徐居正). 노사신(盧思愼)등과 같이 왕명을 받아 연주시격(聯珠詩格-원나라 때 중국 사람이 지은 한시작법)을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책이 20권이나 된다. 1438년(성종14) 종3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차되고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1484년(성종15) 공조참판에 전임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오늘날의 검찰총장)에 발탁되었다. 1486년(성종17) 동지중추부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천추사(千秋使-황태자 탄생을 축하하는 사절)가 되어 중국에 다녀와서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1491년(성종22)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494년(성종25) 성종이 승하하자 산릉도감(山陵都監)이 되어 역사를 무사히 마치고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승임.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형조판서(刑曹判書-법무부장관)가 되었다가 이조판서(吏曹判書-행정자치부장관)로 전임되었다. 1497년(연산군3) 우위도총부 도총관(군사의 총 책임자)에 임명되었고 1498년(연산군4)에 무오사화(戊午士禍-유자광, 이극돈 등의 무리가 신진사류인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일손(金馹孫)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함하여 일으킨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재 등용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재경부장관)가 되었다. 1503년(연산군9) 우의정에 승임되고,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1504년(연산군10) 영의정에 올랐다. 1506년(연산군12) 박원종(朴元宗), 류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 등이 주동이 되어 연산군을 폐출하고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왕으로 옹립(擁立)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다. 이때 영의정 류순과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은 모두 포천사람이었는데 반정에 가담하여 유정승은 정국공신(靖國功臣)과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류정승은 반정 후 연산군 때 상신(相臣)에 있었다하여 사직 상소를 올려 물러날 것을 간청하였으나 불윤(不允-임금이 허락하지 않는 것)하므로 재삼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류정승은 원만한 성격에 문장에 능하고 모든 일에 독단하는 일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잘하여 별로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 정평이었다. 따라서 연산군 같은 폭군을 모시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일이 별로 없었다. 1510년(중종5) 4월에 체직되어 유순 정승은 치사(致仕)하고 궤장(왕이 국가유공원로 대신들에게 내리는 안석과 지팡이, 신하로서 최고의 영광)을 받았다. 이때 공의 나이 73세였다. 1516년(중종11)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린 후에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1517년(중종12) 76세로 별세하였다. 류정승은 관후한 성격에 다재다능하며 시부(詩賦)에도 뛰어났다. 의약(醫藥)에도 밝았으며 자학(字學-글자의 유래. 음, 뜻을 연구하는 것)에 정통하였다. 류상공은 조부시절부터 왕방산(王方山) 아래 자작일촌(自作一村)하면서 대대로 살아오면서 자작리라는 마을 이름을 남겼다. 류씨문중에서 정승 세분을 비롯해 명신, 학자, 효자, 충신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효우정려를 받은 유인선, 한말의 대학자 유기일(柳基一)도 그 문중이며 한음 이덕형 선생도 그의 외가인 자작리 류씨문중에서 태어났다. 말년에 류순 정승은 수원산아래 마전리에 살면서 그곳에 연못을 파고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는 괴화(槐花)마을과 가산 방축3리를 군자정(君子亭) 마을이라고 하는데 그 유래는 사복시정을 지낸 유정승의 아저씨라는 사람이 정자를 지어놓고 정자이름을 지어 달라 청해 그 정자를 군자정이라 명명하고 군자정기를 써서 남겼다. 그래서 그곳 마을을 지금도 군자정이라 부르고 있다. 류순정승에게는 문희공(文僖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